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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Tour-461회, 일의 기쁨과 슬픔
2016년 5월 11일 수요일인 오늘은 우리들 독서클럽 ‘Book Tour’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461회째인 오늘 모임에는 내가 발제자로 나섰다.
오늘의 발표를 위해 내가 선택한 책은 스위스 출신의 소설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 짓고 정영목이 옮긴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출판사 은행나무가 2012년 2월 29일에 펴냈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도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 고등학교 후배이면서 내가 존경하는 김성호 전 법무부장관이 혼신을 다해서 이끌어가고 있는 재단법인 행복세상을 열성적으로 돕는 후원자이기도 한 우체국금융개발원 김홍일원장의 선물이라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그 제목에서 오는 느낌이 어쩌면 내 삶의 모습과 엇비슷하겠거니 하는 동질감이었다.
나는 책을 읽음에 있어 그 저자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누군가 많이 읽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그런 소문에도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 편이다.
오로지 책에 담겨 있는 저자의 혼에 초점을 맞춘다.
그 혼이 내 가슴에 감동을 담아줄 수 있는 것이면, 누가 쓴 책이든 또 어떤 장르의 책이든, 다 좋다 하고 사고 읽는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책을 잘 읽지 않던 젊은 시절에는, 책을 사거나 읽거나 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유명세를 참작했었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책을 읽고, 또 책에 대한 안목이 생기면서 뒤늦게 알게 된 것이, 유명세 있는 저자라고 해서 그가 쓴 책의 내용이 훌륭하고, 또 나를 감동시키는 것만은 아니더라는 것이었다.
낯선 저자이고 외관상 볼품없이 보이는 책이라고 하더라도, 알짜배기 책은 얼마든지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내 지금은, 책의 제목에서 오는 순간적 느낌이 좋거나, 잠깐 책속으로 들어가서 찾아낸 짧은 문장 하나에서 감동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그 책을 사고 읽는 필요충분조건이 다 갖추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이 책도 마찬가지로 그랬다.
앞서 밝힌 두 가지의 이유 때문에 책을 읽어야겠다고 작정하고, 그리고 책을 펴서 읽으면서 그 책의 저자가 누군지를 챙겨봤다.
처음에는 ‘알랭 드 보통’이라는 저자의 이름만 가지고는 그가 누구인지 선뜻 알지를 못했다.
그러나 낯선 이름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좀 더 깊게 생각을 이어간 결과, 최근에 우리들 독서클럽인 ‘Book Tour’ 모임에서 누군가가 그 저자의 책으로 발제를 한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됐고, 그래서 좀 더 확인해본 결과, 2016년 새해 들어 그 초입에 있었던 제 438회 모임에서 이근식 회원이 출판사 ‘청미래’ 출판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그의 소설로 발제를 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 저자에 대해 더 파고들지 않았다.
책에 대한 자료는 Daum사이트 검색으로 대신했다.
먼저 책 소개의 글이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일을 하는 것일까?
<불안>, <여행의 기술>,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의 저자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 『일의 기쁨과 슬픔』. 에세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포토 르포르타주로도 기획된 이 책은 사진작가 리처드 베이커의 서정적인 흑백 사진들과 함께 다양한 일의 현장을 찾은 저자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르포 형식으로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화물선 관찰, 물류, 비스킷 공장, 직업 상담, 로켓 과학, 그림, 회계 등 모두 10개의 직업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 각기 다른 일 안에서 일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기쁨과 일이 우리 삶에 갖는 의미를 파헤친다. 집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 자신을 대변하고 규정짓게 되었고, 일상이 되어버려 외면했던 일의 의미를 발견한 저자는 우리에게 일에 대해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생각해보고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전해주고 있다.
언론사들의 추천이 있었다.
다음은 그 요점이다.
콜라주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역동적이고, 논쟁이라고 하기에는 다채롭고,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강렬하고 아름다운 문체 〈LA타임스〉
※콜라주: 근대 미술에서, 화면에 종이·인쇄물·사진 등을 오려 붙이고 일부에 가필하여 구성하는, 초현실주의의 한 수법
르포와 깊은 성찰을 활기차게 섞은 알랭 드 보통의 일에 대한 연구는 일하는 공간을 넘어 더 광범위한 인생의 의미로 확대된다. <퍼블리셔스 예리한 묘사와 흥미로운 디테일, 기민한 코멘트로 가득한 책. 알랭 드 보통은 ‘일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관해 유용한 논의를 유발시킬 만한 생동감 있는 책을 완성했다. 〈가디언〉
르포와 같은 성찰을 활기차게 섞은 알랭 드 보통의 일에 대한 연구는 일하는 공간을 넘어 더 광범위한 인생의 의미로 확대된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저자 알랭 드 보통에 대한 소개의 글이 있었다.
이랬다.
196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태어났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에 능통하다. 알랭 드 보통은 스물세 살에 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여러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의 책들은 현재 20여 개의 언어로 번역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2003년 2월에 드 보통은 프랑스 문화부 장관으로부터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명예인 예술문화훈장을 받았으며, 「슈발리에 드 로드르 데자르 에 레트르」라는 기사 작위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에는 츠베탕 토도로프, 로베르토 칼라소, 티모시 가튼 애쉬, 장 스타로뱅스키 등과 같이 유럽 전역의 뛰어난 문장가에게 수여되는 「샤를르 베이옹 유럽 에세이 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 내용에 바탕을 둔 TV 다큐멘터리 제작에 오랫동안 관여해왔다. 『프루스트는 어떻게 당신의 삶을 바꿨나』는 BBC 영화제작팀에서 랄프 파인즈와 펠리시티 켄들을 주연으로 하여 제작됐다.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영국과 미국에서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동시에 영국에서 「철학: 행복으로의 안내」라는 제목으로 6부작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제작돼 방영됐다. 그의 대표작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놀랍도록 기이한 첫 만남에서부터 점차 시들해지고 서로를 더 이상 운명으로 느끼지 않게 되는 이별까지, 연애에 대한 남녀의 심리와 그 매카니즘이 철학적 사유와 함께 흥미진진하게 기술되어 있는 작품이다. 알랭 드 보통은 미국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는데, 20대의 재기와 30대의 깊이가 뛰어난 조화를 이룬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로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도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새로운 글쓰기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책은 전기 형식으로 문학을 다루고 있지만 결국은 저자 특유의 유머와 상상력으로 버무린 인생학 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역자 정영목에 대한 소개의 글은 이랬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번역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9년 제3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역서로는 『사람과 상징』, 『파인만에게 길을 묻다』, 『불안』,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 『감성과 이성』, 『마르크스』, 『신의 가면 III:서양신화』, 『권력을 경영하는 48법칙』, 『딸 그리고 함께 오르는 산』, 『제스처 라이프』, 『도시의 과학자들』, 『눈먼 자들의 도시』, 『눈뜬 자들의 도시』, 『돌뗏목』, 『흉내』, 『펠리컨 브리프』, 『쥬라기 공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호치민 평전』, 『여행의 기술』, 『행복의 건축』, 『죽음의 중지』, 『로드』, 『서재 결혼시키기』, 『책 도둑』, 『메신저』, 『일의 기쁨과 슬픔』, 『공항에서 일주일을』, 『에브리맨』, 『포트노이의 불평』, 『미국의 목가 1, 2』, 『척하는 삶』, 『영원한 이방인』 등이 있다.
다음은 목차다.
One 화물선 관찰하기 / Two 물류 / Three 비스킷 공장 / Four 직업 상담 / Five 로켓 과학 / Six 그림 / Seven 송전 과학 / Eight 회계 / Nine 창업자 정신 / Ten 항공 산업
49건의 독자 리뷰가 있었다.
다음은 2016년 2월 28일 인터파크도서 마이북피니언 블로그에 실린 필명 ‘여름햇살 85’의 리뷰 그 전문이다.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징글맞은 회사에 정을 붙여 볼까 싶은 마음에 읽게 된 책.
알랭 드 보통 특유의 스타일대로 역시나 관찰 대상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과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잡념을 유쾌하게 풀어내는 스타일의 책이었다. 이번 책에 보통아저씨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관찰하고 느낀 것에 대해 기술하였으며, 다양한 직업(화물선, 물류센터, 비스킷 공장, 직업 상담 등등..) 또는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느낀 점을 적은 글로서, 생각해 본적도 없는 분야에 대한 그의 관찰이 매우 신선했습니다. 특히 비스킷 공장과 송전공학 부분에서요. 과자 하나도 그냥 탄생하는 게 없더라구요. 그리고 화물선에 관련된 챕터에서는 일상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물건들을 생산 및 운반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도 가지게 되었구요.
많이 반성한 것이, 뭔가에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은 사람들(예를 들면 과학자, 의사 같은 직업)에 대해서만 감사하게 살았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당장 티슈를 제조하고 배달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비염에 코를 찔찔대며 지저분한 삶을 살았어야 했을 텐데 말이죠. 이 책을 읽고 평범한 일상생활에 겸허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인상 깊었던 부분은 화가의 이야기. 사실 하나하나 인상 깊지 않았던 챕터가 없었지만. 떡갈나무를 열심히 그리는 화가 테일러의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 책을 읽다 보니, 괜히 저의 직업이 나쁘지 않게 여겨졌습니다. 가끔은 숨 막힐 때가 있기는 하지만, 나름 매력 있고 애정 가는 직업이라고 할까요. 타인들이 잘 모르는 직업이기에 신비감도 있어 보이고. 여튼, 직업에 관한 이 책, 재미있었습니다.
한 건의 리뷰를 더 소개한다.
다음은 2015년 5월 21일 반디앤루니스 블로그에 실린 필명 ‘데이지책’의 리뷰 그 전문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 이 작품은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개정판이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에세이 치곤 너무 별로라서 개인적으론 후회가 되는 책이라고 생각을 하고 싶다. 다른 독자나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내 주관적으로 볼 땐 아니라고 본다. 일은 언제나 인간에게 중요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의미는 확대됐다. 비단 경제적 여유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을 통해 사회에서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고, 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지금, 그렇게 '일'은 더 중요해졌다. 일상에서 철학을 발견하고 사유하는 알랭 드 보통이 그 '일‘에 대해 파고들기로 결심한 후 택한 글의 형식은 '르포르타주'이다. 자신이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그대로 적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또 있을까. 작가 특유의 관찰력으로 완성된 표현들은 독자들을 실제 장소로 안내하는 것은 물론, 미처 생각지 못했던 노동의 섬세함으로 이끈다. 책 내용은 말투는 장엄한데, 보면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10가지 이야기 중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포티에가 자기 직업에 쏟는 관심과 거기에서 발휘하는 기술을 보면서 나는 전날 저녁에 읽던 책에서 주장하던 내용의 증거를 얻은 듯한 느낌이었다.’ (p.105)
(p.s) 이 책의 경우 중간 중간 사이에 사진 혹은 그림이 들어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에선 내 생각으로 볼 때 왜 삽입을 했을까? 말로는 표현 못하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내용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었다.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문제가 된 글이 실렸다는 그 105페이지를 미리 찾아들어가 봤다.
사실과는 사뭇 거리가 멀어보였다.
앞과 뒤의 글을 읽어본 결과, 나로서는 그 문장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앞과 뒤의 대목을 여기 옮겨 적는다.
먼저 앞의 대목이다.
포티에의 노력은 대부분 공장 라인이 항상 가동되도록 유지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지난여름에 실내 온도가 40도까지 홀라갔을 때는 초콜릿을 보호하기 위해 벨기에 공군에서 냉방기를 여러 대 빌려야 했다. 머리카락은 늘 걱정거리여서, 매주 직원들에게 면 모자를 제대로 착용하는 법을 교육했다. 그럼에도 크리스마스 직전에 라인이 세 번이나 멈추는 바람에 큰 대사를 치러야 했다. 어떤 기계 끝에 달린 빳빳한 털―검은 머리카락처럼 보인다.―이 빠지는 바람에 경보가 잘못 울린 것이다. 이 사건을 겪고 나서 포티에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검은색 솔을 인간의 머리카락에서는 그 색깔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박은 주황색 솔로 교체했다.
그리고 뒤의 대목이다.
그 책은 프로테스탄트 사상과 가톨릭 사상이 역사적으로 일을 대조적인 방식으로 바라보았다고 분석했다. 가톨릭 교리에서 고기한 일은 주로 사제들이 신을 섬기는 일로 제한되었으며, 실용적이고 상업적인 노동은 기독교 덕목의 표현과 관계가 없는 매우 저급한 범주로 밀려났다. 반면 16세기에 발전한 프로테스탄트의 세계관은 일상적인 일의 가치를 회복하려고 하여, 겉으로 보기에 하찮은 일도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영혼의 고귀함을 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구도에서라면 공장에서도 수도원에서만큼이나 겸손, 지혜, 존경, 친절을 진지하게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구원은 가톨릭이 특권을 누리던 웅장하고 신성한 순간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생활의 수준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마당을 쓸거나 세탁실 장을 정돈하는 일도 존재의 가장 의미 있는 주제들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었다.
3건의 미디어 서평이 있었다.
다음은 그 중 한 편으로, 2013년 11월 28일자 파이낸셜뉴스에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vs ‘영혼의 미술관’」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교보문고 예술 대중문화 MD 유지영님의 서평 그 전문이다.
먹고살기 위해 꼭 뭔가를 팔아야 한다면 책을 팔고 싶었다. 갓 인쇄된 책들을 매일 직접 만지는 건 몹시 근사한 일이니까 기꺼이 기회비용을 치르는 것이다. 그런데 책이 좋아 시작한 일인데, 책이 흔한 업무환경 탓인지 어째 갈수록 독서에의 열망이 줄어들고 있다. 인생은 아이러니의 연속, 삶의 절반을 책임지는 '일'의 속성이란 이렇게 갈망과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리라.
일을 하면서 늘 질문 하나가 맴돈다. 일은 꼭 해야 하나? 대체 우리는 왜 일을 하는 거지?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 '일의 기쁨과 슬픔'(은행나무 펴냄)은 이 우문에 대한 현답을 건네는 꽤 재미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보통은 열 곳의 직업 현장 관찰기를 철저히 개인적인 시선으로 썼는데, 그런 점이 묘하게 일의 의미에 대해 환기시킨다.
가령 알랭 드 보통이 회계사들의 일반적인 하루를 묘사한 대목을 보자. '사무실에서 하루가 시작되면 풀잎에 막처럼 덮인 이슬이 증발하듯이 노스탤지어가 말라버린다. 이제 인생은 신비하거나, 슬프거나, 괴롭거나, 감동적이거나, 혼란스럽거나, 우울하지 않다. 현실적인 행동을 하기 위한 실제적인 무대다.' 매일 아침 출근해 컴퓨터를 켜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전환모드를 하는 직장인의 마음이 이 두 문장 안에 고스란히 담긴 것만 같다.
책에 소개된 직업들에 대한 보통의 통찰 또한 예리하다. 사무실 상황이 열악한 직업 상담사들에게 '지구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 가운데 하나여야 할 일이 여행사 정도의 지위라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이상하고 안타깝다'고 하는 식이다. 보통은 일을 통한 고충 끝에 우리가 결국 엄청난 걸 얻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일을 하는 동안은 다른 시름을 잊을 수 있고, 식탁을 음식으로 채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도 하나의 답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워커홀릭처럼 일만 하고, 일만 생각하다가는 어느 순간 팡 터져버릴지도 모른다. 일과 함께 인생의 중심을 잡아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역시 알랭 드 보통의 조언에 따르면 그 무언가가 바로 예술이다. 그의 신작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문학동네 펴냄)은 두껍고 무거운 편이지만 그럼에도 요즘 자주 들고 다녔다. 아마 보통의 목표는 한 호흡에 읽히지 않는 날카롭고 밀도 높은 문장들로 저 높고 고결한 곳에 위치했던 예술을 조금씩 지상으로 끄집어내 우리의 손에 쥐어주는 것인 모양이다. 가장 큰 문제는 주류 예술계가 예술을 비싸게 다루는 방식이지 결코 개인의 이해나 감성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고 보통은 일갈한다. 덕분에 읽다 보면 속이 다 시원하다.
'예술이 우리가 잃어버린 성향을 농축된 형태로 내놓아 기울어진 자아의 적당한 균형을 회복시켜 준다'는 보통의 주장 역시 설득력이 있다. 매혹적인 사진들과 설명이 멋지게 어우러진다. 위트 넘치는 사진의 캡션들은 이미지 너머에 있는 생각할거리까지 던져준다. 대영제국 시절 영주의 초상화엔 '속물은 역겨워', 조선왕조 백자 달항아리 사진엔 '우리가 사교 모임에서 내보이면 좋을 만한 태도를 깨닫게 해준다'라는 보통의 글이 달려 있다. 예술적 치유란 게 이렇게 쉽고 재미있는 것이었나 새삼 놀라게 된다. 사실 이런 하드커버 예술서를 읽는다는 것 자체가 문화적 허영을 채워주는 기능도 있으니 일에 지쳐 공허한 밤에 이 책을 조금씩 읽으며 생활의 균형감을 맞춰보는 건 어떨까.
출판사 은행나무의 서평이 있었다.
다음은 그 중 핵심 대목이다.
집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 하지만 일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스트레스와 직결되는 개념이자, 불안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도대체 우리는 왜 일을 하는 것일까?’
사랑, 불안, 여행, 건축, 종교 등 현대인과 관련된 다양한 개념들에 대해 자신만의 논의를 펼치고 있는 알랭 드 보통. 그가 이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나섰다.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는 저자가 다양한 일의 현장을 찾아나서 보고 느낀 것을 르포 형식으로 쓴 에세이다. 그리고 그는 각기 다른 일 안에서 흔히 경제적 개념으로밖에 보지 않는 ‘일’이 줄 수 있는 기쁨과 일이 우리 삶에 갖는 의미를 면밀하게 파헤친다.
화물선과 항구 설비는 실용적으로도 중요하고 우리에게 감정적인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왜 그 작업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것일까? 어떤 분야든 노동하는 세계에 깊은 존경심을 표현하면 이상하게 여기는, 근거 없는 편견 때문이다.
일은 언제나 인간에게 중요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의미는 확대됐다. 비단 경제적 여유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을 통해 사회에서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고, 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지금, 그렇게 ‘일’은 더 중요해졌다.
10개의 직업 현장 속으로 뛰어든 저자는 편견과 가감 없이 노동의 본질에 밀착한다. 그 과정이 담긴 생생한 글과 사진을 접하다 보면 어느새, 얼핏 사소해 보일 수 있는 문제에 고심하고 집착하는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난다.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금기라기보다는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우리의 원근감을 파괴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에 감사한다.
만약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즐겁다면, 우리 인생의 반을 즐겁게 보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단지 물리적인 시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알랭 드 보통은 이렇듯 현대인이 살아가는 데 중요한 ‘일’이 정작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정 혹은 평가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 책을 쓴 이유다.
위성을 쏘기 위해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간 일본 방송국 사람에게서, 나무의 모습이 어떤지 물감으로 표현하는 사람에게서, 출근을 위해 기차에 몸을 싣고 신문을 읽는 사람에게서, 그리고 자리를 잡은 산업이 아닌, 생활과 운명을 바꾸려는 희망으로 창업을 준비하는 사람에게서 알랭 드 보통은 그동안 우리가 외면했던 일의 의미를 발견한다.
단순히 돈을 버는 경제적 수단으로서의 일에서 벗어난 일. 스트레스와 고통, 슬픔뿐만 아니라, 때로는 기쁨과 즐거움, 안도감과 기분 좋은 피로감을 안겨주는 일. 어떠한 형태든 생존을 위해 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일. 그 안에서 우리는 머물고 있다.
일은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 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줄 것이다.
‘뭐 하며 먹고 살지?’ ‘이 일이 나와 맞을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의미가 있을까?’ 당신만이 아니다. “일이 형벌이나 속죄 이상의 어떤 것일 수 있다고” “경제적인 필요가 없어도 일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을 통해 알랭 드 보통은 암시한다. 일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듯,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 다양한 고민에도 매일 아침 출근을 위해 전쟁을 치르는 사람, 어떤 거대한 업적을 내놓지 않아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작은 업무를 악착같이 완수하는 사람 모두 그 의미를 완성하고 있다고.
누군가를 처음 만날 때 묻는다. “어떤 일 하세요?”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부모님이 누구인지 묻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묻는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어느새 현대인에게는 자기 자신을 대변하고 규정짓게 돼버린 일, 일상이 되어버려 외면했던 그 일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성찰의 시간을 선사한다. 그것은 결국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작은 인용의 글이 한 편 있었다.
월트 휘트먼의 ‘직업의 노래’에서 뽑아온 것으로 다음과 같다.
집짓기, 치수 재기, 톱으로 판자 썰기, 대장간 망치질, 유리 불기, 못 만들기, 통 만들기, 양철 지붕 만들기, 지붕널 덮기, 배 만들기, 부두 건설하기, 생선 절이기, 보도에 포석 깔기, 펌프, 말뚝 박는 기계, 기중기, 석탁 가마, 벽돌 가마, 탄광과 저 아래에 있는 그 모든 것, 어둠 속 램프, 메아리, 노리, 그리고 깊은 생각들...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이 고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넘겨짚을 수 있게 해주고 있었다.
다음은 본문의 첫 대목이다.
현대 세계의 큰 도시 하나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상상해보자. 가령 몹시 흐린 10월 말의 어느 월요일에 런던을 가로지른다고 해보자. 런던의 유통 센터, 저수지, 공원, 영안실 위를 날아간다. 런던의 범죄자들과 대한민국에서 온 관광객들도 보일지 모른다. 파크 로열의 샌드위치 만드는 공장, 하운슬로우의 항공사 기내식 공급 시설, 배터시의 DHL 배달 창고, 시티 공항의 걸프스트림 제트기, 스머글러즈 웨이에 자리 잡은 홀리데이 인 익스프레스 호텔의 청소 수레를 보라. 사우스워크 파크 초등학교 식당의 시끌벅적함과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 대포의 소리 없는 포성에 귀를 기울여보자. 운전학원 강사, 계량기 검침원, 머뭇거리며 불륜을 저지르는 사내도 있다. 세인트 메리 병원의 산과 병동 안으로 가보자. 석 달 반 일찍 태어나는 바람에 스위스 옵발덴 주에서 제작된 플라스틱 상자 안에서 온갖 튜브를 꽂은 채 자고 있는 아슈리타를 보라. 버킹엄 궁 서편에 있는 의전실로 가보자. 장애인 운동선수 200명과 함께 점심을 먹고, 이어 커피를 마시면서 굳은 결의를 찬양하는 연설을 하는 여왕에게 감탄하게 될 것이다. 의회에서는 공공건물의 전기 소켓 높이 규제법안을 소개하는 장관을 따라 가보라. 18세기 이탈리아 화가 조반니 파니니의 그림 구입 문제를 놓고 투표를 하는 국립미술관 이사들도 주시하라. 옥스퍼드 스트리트의 셀프리지스 백화점 지하실에서 면접을 치르는 미래의 산타클로스의 얼굴을 훑어보고, 햄스테드의 프로이트 박물관에서 편집증과 모유 수유에 관해 강연하는 헝가리 정신분석학자의 영어 구사 능력에 놀라기도 해보자.
1편 ‘화물선 관찰하기’의 첫 대목을 옮겨 적었는데, 이 책은 전편에서 그렇게 세세한 부분을 관찰하고 있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의도는 바로 그 1편의 끝 대목에 잘 나타나있다.
다음은 그 대목이다.
나는 부두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현대 일터의 지성과 특수성, 아름다움과 두려움을 노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특히 일이 우리에게 사랑과 더불어 삶의 의미의 주요한 원천을 제공할 수 있다는 그 특별한 주장을 주의 깊게 들여다볼 생각이다.
그렇게 주의 깊게 들여다본 것이 바로 ‘화물선 관찰하기’였고, ‘물류’였고, ‘비스킷 공장’이었고, ‘직업 상담’이었고, ‘로켓 과학’이었고, ‘그림’이었고, ‘송전 공학’이었고, ‘회계’였고, ‘창업자 정신’이었고, ‘항공 산업’이었다.
저자는 단조로웠던 그 옛날 선조들의 삶과는 달리, 너무나 다양해진 지금의 유통과정이 우리를 혼란시키고 있음을 이렇게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200년 전 우리 선조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나 소유하고 있는 한정된 수의 물건 하나하나의 정확한 역사와 유래, 나아가서 그 생산에 관여한 사람이나 연장까지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돼지, 목수, 직조공, 베틀, 우리 짜는 아낙네와도 알고 지냈을 것이다. 그 이후로 구매 가능한 물품의 범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과 반비례로 물품의 유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거의 깜깜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현재 우리는 많은 물건을 실제로 손에 넣을 수는 있지만, 그런 물건들의 제조와 유통 과정이 어떠한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소외 과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이, 감사, 죄책감을 경험할 수많은 기회를 박탈당한다.
다음은 끝 편인 10편 ‘항공 산업’의 마지막 대목이다.
발트 해를 가로질러 펄프를 운반하거나, 참치 머리를 자르거나, 구역질 날 정도로 다양한 비스킷을 개발하거나, 상담하러 온 사람에게 전직을 권유하거나, 한 세대의 일본 여학생들을 매혹시킬 위성을 쏘거나, 들판에서 떡갈나무를 그리거나, 전선을 놓거나, 회계 처리를 하거나, 탈취제 자동판매기를 발명하거나, 항공사를 위해 강도가 높아진 코일 튜브를 만드는 동안 죽음이 우리를 기습한들 어떠랴. 죽음의 물결에 대항하여 성냥개비로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을 때 우리를 발견한들 어떠랴. 우리의 모든 기획의 궁극적인 운명을 직접 목격한다면, 우리는 바로 몸이 마비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스를 정복하러 떠나는 크세르크세스의 군대를 지켜보던 사람들, 칸쿤의 황금 신전을 건설하라는 명령을 내리던 마야의 타찬악을 지켜보던 사람들, 인도 우편제도를 시작한 영국 식민지 행정관들을 지켜보던 사람들 가운데,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 노력의 궁극적 운명을 알려줄 용기가 있는 사람이 있었을까? 우리의 일은 적어도 우리가 거기에 정신을 팔게는 해줄 것이다. 완벽에 대한 희망을 투자할 수 있는 완벽한 거품은 제공해주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놓아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 책은 문득 생각이 나면 곧장 실행으로 옮기는 저자의 일상들을 하나로 엮은 것이었다.
참치 잡이 배에 동승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랬다.
다음은 1편 ‘물류’에 나오는 그 대목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이런 성취에 대하여 거의 음모를 꾸민 듯 모두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자, 이 물고기 한 마리에서 출발하여 이 물고기가 이곳까지 올 때보다는 조금 느린 속도로 다시 바다까지 거슬러 가보고 싶은 욕망마저 생긴다. 물론 참치 아닌 다른 상품을 따라가 볼 수도 있다. 강판 롤을 따라 바라리아의 자동차 공장에서부터 호주 사막의 덤불까지 가볼 수도 있고, 실타래를 따라 멕시코의 직기에서부터 나일 강 하류의 관개가 이루어지는 들판까지 가볼 수도 있다. 이 참치의 교훈은 비록 특수한 형태로 드러나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상류로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반적인 교훈이기도 하다.
곳곳에 명언들이 있었고, 깨우침이 있었다.
그 중 몇 대목을 여기 옮겨 적는다.
일이 의미 있게 느껴지는 건 언제일까?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자아내거나 고통을 줄여줄 때가 아닐까? 우리는 스스로 이기적으로 타고났다고 생각하도록 종종 배워왔지만, 일에서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행동하려는 갈망은 지위나 돈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완강하게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합리적인 정신 상태에서도 안전한 출세 길을 버리고 말라위 시골 마을에 먹을 물을 공급하는 일을 도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또 인간 조건을 개선하는 면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고급 비스킷보다도 섬세하게 통제되는 제세동기가 낫다는 것을 알기에, 소비재를 생산하는 일을 그만두고 심장 간호사 일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가 그저 물질만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라 의미에 초점을 맞추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p 84
기원전 4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만족과 보수를 받는 자리는 구조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고 말했으며, 이런 태도는 그 이후 2천 년 이상 지속되었다. 이 그리스 철학자에게 경제적 요구는 사람을 노예나 동물과 같은 수준에 놓는 것이었다. 육체노동은 정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적 기형을 낳는다고 보았다. 시민은 노동하지 않고 소득을 얻어 여가를 즐기는 생활을 할 때만 음악과 철학이 주는 높은 수준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p 116
전시회가 끝난다. 지난 2년을 돌이켜보면, 테일러는 변변치 콧한 배관공의 1년 수입 정도를 벌어들였다. 평소의 우리 모습보다 더 우아하고 지적인 대상을 창조하기 위하여 기꺼이 희생하는 인간 본성의 비실용적 측면을 보는 듯하다. 테일러는 자신의 운에 기가 죽지 않는다. 최근에는 콜체스터 북부의 한 마을을 찾아갔다. 콜린 강의 한 지류를 보러 간 것이다. 다음에는 물을 그려보기 싶기 때문이다. 둑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다양한 분위기와 빛 속에서 강을 그릴 것이다. “물을 본 적 있어요?” 테일러가 묻는다. “제대로 본 적이 있냐는 거죠?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 p 215
나는 또 우리의 전기 네트워크에 대한 무관심도 생각해보았다. 전기에 진짜로 고마움을 느낄 만한 사람들은 오래전, 1950년대에 이미 죽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 잘 확립되어 있는 기술에 감탄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친구가 위세를 덜치는 것은 노인에게 남아 있는 촛불에 대한 기억 때문이며, 전화기 위세를 떨치는 것은 전서구(傳書鳩)에 대한 기억 때문이며, 비행기가 위세를 떨치는 것은 기선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이는 흥미롭게도 과학기술의 역사가 어떤 혁신이 도입된 시점만이 아니라 그것이 잊힌 시점, 너무 익숙해져서, 조약돌이나 구름처럼 평범해져버린 시점을 확인하는 데도 유용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p 236
물론 권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재구성되었을 뿐이다. 사장이 자신의 앞선 위치를 보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평직원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부하 직원들은 그가 그들과 운명을 공유하는 척할 때 보여주는 신실함에 감탄하지만, 그는 속으로는 자신이 보통 사람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줄 때에만 다시 보통 사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p 284
모하비는 이 나라에서 가장 혼잡한 철도 교차점으로 꼽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열차 백 량 정도는 보통 달고 다니는 화물 열차가 낮이나 밤이나 화학약품과 골재, 과일 통조림과 텔레비전, 죽은 소와 옥수수가루를 실어 날랐다. 기차들은 롱비치의 항구로부터 덴버와 시카고의 창고까지 북과 동으로 움직였으며, 워낙 짐이 많았기 때문에 기차마다 기관차가 여덟 대씩 달라붙어도 시속 50킬로미터 이상을 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흐린 밤이면 모하비에서 베이커스필드로 가는 협곡에서 멕시코 도적떼가 이 굼뜬 기차에 올라타 귀중한 화물을 탈취하곤 했다. 매달 그런 도둑 한두 명이 사막 바닥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 주위에는 바위와 크레바스 사이에서 길을 잃은 베트남산 운동화가 가득 든 즈크 부대들이 널려 있었다. p 352
※즈크: 삼실이나 무명실 따위로 두껍게 짠 직물
할 일이 있을 때는 죽음을 생각하기가 어렵다. 금기라기보다는 그냥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긴다. 일은 그 본성상 그 자신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면서 다른 데로는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일은 우리의 원근감을 파괴해버리는데, 우리는 오히려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에 감사한다. 우리가 이런저런 사건들과 난잡하게 뒤섞이도록 해주는 것에, 파리로 엔진 오일을 팔러 가는 동안 우리 자신의 죽음과 우리의 사업의 몰락을 아름다울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게 해주는 것에, 그것을 단순한 지적 명제로 여기게 해주는 것에 감사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근시안적으로 행동한다. 그 안에 존재의 순수한 에너지가 들어 있다. 밤이 올 때쯤이면 죽을 것이라는 커다란 사실을 외면한 채, 서둘러 칠한 붓이 남긴 페인트 한 방울을 피해 창턱을 계속 열심히 가로지르려는 나방에게서 볼 수 있는 강렬하고 맹목적인 의지가 있다. p 367
내가 이 책을 선물 받던 그 순간에, 문득 생각나는 노래가 한 곡 있었다.
가수 SG워너비 김진호가 부른 ‘가족사진’이라는 노래다.
내가 그 노래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이다.
내게 있어서는 검찰수사관 후배이기도 하고 SNS 페이스북 친구이기도 한 김정호 검찰청과장이 지난 2016년 4월 23일 토요일에 가족과 관련된 글 한 편을 게시하면서였다.
다음은 바로 그 글 전문이다.
복숭아꽃이 만발했던 43년 전 오늘, 아버지께서는 마흔 둘의 아내와 어린 4자녀를 두고 세상을 떠나셨다. 1주일 뒤 '신유의 은사'가 있다는... 어느 권사님의 집회에 참석하신다는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하시고... 이제 여든 다섯이 되신 어머니댁에 모여 추도예배를 드리러 간다. 아버지랑 같이 온 가족이 찍은 가족사진 한 장이 없어 김진호란 가수의 '가족사진'의 가사가 우리 가족들의 사연과 같아 들을 때 마다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는 그 글 속 아버지의 살아생전 모습을 짚어봤다.
그 모습에서 짚은 것이 곧 가족의 생계를 힘들게 떠맡아야했던 가장으로서의 일이었다.
내 그때 그 글을 읽으면서 눈시울을 붉혔었다.
나는 그 나이 때쯤에 서른셋 꽃다운 나이의 울 엄마를 잃었다.
그 울 엄마는 살아생전 사진 한 장 남겨두지 않았다.
6.25 전쟁 통에는 피난 다니느라고 바빠서 그랬겠다 싶고, 전쟁 후에는 친정이 있는 문경 점촌에 터 잡아 살면서는 너무나 가난한 집안 살림에 식구들 입에 풀칠시키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그랬겠다 싶다.
그러나 그 엄마가 울 아버지와 집안 맏이 장손이고 종손인 나를 비롯한 7남매와 함께 한 가족사진을 있다.
내 가슴속에 새겨둔 가족사진이다.
바로 그 가족사진 속의 울 엄마가 생각나서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울 엄마 죽어 한 해도 채 지나지 않아서 울 아버지가 맞아들인 새어머니로 인해 내 가슴에 맺힌 멍울들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눈시울을 붉혀야 했고, 일생을 일거리 없이 허우적거린 삶을 살다 가신 너무나 불쌍한 그 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또 평생을 일의 기쁨과 슬픔에 빠져 살아도 그 대접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거기에 내 모습이 투영되어 또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그리고 울 엄마 죽고, 10년 뒤로 그리고 또 15년 뒤로, 그 엄마 뒤따라 저 세상으로 떠난 내 두 남동생까지 생각이 이어졌을 때는, 붉어지는 눈시울로는 감당이 안 되어서 그만 목 놓아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글로, ‘가족사진’이라는 그 노래가 있는 줄을, 내 처음 알았다.
내가 이 책을 선물 받으면서 그 노래를 문득 생각하게 된 것은, 바로 그런 인연의 연결고리가 있어서였다.
SG워너비 김진호도 그런 마음으로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가족사진’이라는 그 노래를 불렀다고 고백했다.
이제 그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들 독서클럽 ‘Book Tour’ 461회째인 오늘 모임의 발제를 끝낸다.
바쁘게 살아온 당신의 젊음에
의미를 더해줄 아이가 생기고
그날에 찍었던 가족사진 속에
설레는 웃음은 빛바래 가지만
어른이 되어서 현실에 던져진
나는 철이 없는 아들딸이 되어서
이곳저곳에서 깨지고 또 일어서다
외로운 어느 날 꺼내본
사진 속 아빠를 닮아있네
내 젊은 어느새 기울어 갈 때쯤
그제야 보이는 당신의 날들이
가족사진 속에 미소 띤 젊은 울 엄마
꽃피던 시절은 나에게 다시 돌아와서
나를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렸던
그을린 그 시간들을 내가 깨끗이 모아서
당신의 웃음 꽃 피우길
피우길
피우길
피우길
피우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