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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와 라헬이 낳은 다른 아들들
창 30:14-24
14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15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16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
17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그가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18 레아가 이르되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였으며
19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여섯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은지라
20 레아가 이르되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의 이름을 스불론이라 하였으며
21 그 후에 그가 딸을 낳고 그의 이름을 디나라 하였더라
22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23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 하고
24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 30:14-24 / [아들을 낳은 라헬] 밀을 거둬들이는 때였다. 르우벤은 일을 거들러 들로 나갔다가 달여 먹으면 임신 못하던 여인도 임신하게 되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자귀나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캐다가 어머니 레아에게 갖다드렸다. 이것을 알고 라헬은 언니 레아에게 `언니, 르우벤이 캐온 자귀나무를 좀 나눠주세요' 하고 청하였다. 15) 그러자 레아는 `얘, 너는 내 남편을 빼앗아 갔으면 됐지 뭐가 또 부족해서 나한테 이 약초까지 달라고 그러니?' 하고 쏘아붙였다. `언니가 그 자귀나무를 나한테 주면 오늘 저녁 야곱하고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게 해주겠어요'하고 라헬이 제안하였다. 16) 저녁때가 되어 들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야곱을 레아가 맞아들였다. 그러면서 `오늘 밤은 저하고 지내시지요. 제 아들이 캐온 자귀나무를 라헬에게 주었어요. 오늘밤은 제가 당신을 라헬한테서 산 셈이지요' 그날 밤 야곱은 레아와 잠자리를 같이하였다. 17) 하나님께서는 레아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래서 레아는 아이를 가져 다섯번째로 야곱의 아들을 낳았다. 18) 레아는 `내가 내 몸종을 남편에게 주었더니 하나님께서 내게 보답해 주셨구나' 하면서 `보답' 또는 `값'이라는 뜻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지어 불렀다. 19) 레아가 또 아이를 가져 여섯번째로 야곱의 아들을 낳았다. 20) 레아는 `하나님께서 내게 이리도 좋은 선물을 주시다니. 내가 아들을 여섯씩이나 낳아 주었으니 이제 내 남편도 나를 받아 주겠지'하고는 그 아이의 이름을 `받아들이다' 또는 `선물'이라는 뜻으로 스불론이라 지어 불렀다. 21) 얼마뒤 레아는 딸을 하나 낳고는 그 이름을 디나라고 지어 불렀다. 22) 하나님께서는 라헬도 돌아보셨다. 라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녀의 태를 열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라헬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23) 아들을 낳은 라헬은 `그다지도 부끄러움을 당하던 내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구나'하면서 24) `또 하나를 주소서'라는 뜻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요셉이라 지어 불렀다.
레아의 아들인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가져다 어머니에게 줍니다. 이것을 알게 된 라헬이 레아에게 합환채를 요구하면서 대신 남편인 야곱과 오늘 밤 동침하라고 말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레아는 잇사갈과 스불론, 디나를 출산하고 라헬은 요셉을 출산하게 됩니다.
레아의 합환채(14-21) 레아와 라헬이 자녀를 출산하기 위해 벌이는 경쟁은 레아의 아들 르우벤에게로 옮겨집니다. 르우벤이 밀 추수하는 일을 돕다가 합환채를 얻어 어머니 레아에게 줍니다. 합환채는 가지과에 속하는 맨드레이크의 작고 노란 열매입니다. 이 열매의 즙은 마취와 환각작용이 있었고 번식력을 강화한다는 미신이 널리 펴져 있었습니다. 르우벤은 어머니 레아의 자녀 출산을 돕기 위해서 합환채를 갖다 준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은 이 합환채를 가지고 레아와 거래를 합니다. 자녀 출산을 원했던 라헬은 합환채를 가지고, 대신 레아에게 야곱과의 잠자리를 양보합니다. 레아가 합환채로 야곱을 샀다며 자신에게 들어올 것을 야곱에게 요구합니다. 야곱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레아와 동침하였고, 이때 낳은 아들의 이름을 값이라는 뜻의 잇사갈이라 지었습니다. 이후 스불론과 딸 디나를 더 낳았습니다. 레아는 아들들의 이름을 지을 때 자기가 처한 삶의 순간에 하나님과 연관 지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였습니다.
라헬의 출산(22-24) 합환채를 사용해서라도 아들을 낳고 싶었던 라헬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라헬을 생각해주시는 하나님이 라헬의 태를 여셔서 잉태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라헬은 아들들을 낳고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라고 고백하며 아들의 이름을 요셉이라 짓습니다.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은 ‘그가 더 할 것이다’입니다. 더해지는 아들들로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씻겠다는 열망이 들어 있는 이름입니다. 라헬도 레아처럼 하나님과 연관된 이름을 짓지만 자신의 욕심이 가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셔서 아들을 낳게 해 주셨건만 감사하고 만족하기보다는 더 많은 욕심을 낸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라헬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 나중에 베냐민을 더해 주셨습니다.
적용: 레아와 라헬이 어리석은 경쟁을 이어가는 중에도 하나님은 이들의 소원을 듣고 계시며 자신의 계획을 계속 이어가십니다.
영국의 윔블던 테니스장은 일 년에 단 2주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2주를 제외한 나머지 기간은 모두 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기간입니다.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테니스장의 관리인은 한 해 동안 꾸준히 잔디를 관리하며 대회가 무사히 마치는 것을 보람으로 여깁니다. 그런 준비가 있었기에 2주간의 성공적인 대회가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옛말에 병사를 키우는 데는 10년이 걸리지만 병사를 사용하는 데는 하루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양병십년 용병일일(養兵十年 用兵一日)'이 있듯이 하루를 쓰기 위한 10년의 준비는 헛된 것이 아닙니다.
< 설 교 >
두 여인의 신앙고백
>성경본문|
창30장 14절 ~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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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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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지용수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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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수수께끼 속에 살다가 갑니다.
어떻게 밤하늘의 별들이 저렇게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며 빛을 찬란하게 뿌리고 있는지, 어떻게 달은 은은한 빛을 발하는지, 어떻게 태양은 기름을 공급 받지 않는데도 이글이글 타며 그 열과 빛과 크기가 변하지 않는지, 어떻게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리고 우박이 내리는지, 어떻게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리고 비 온 뒤에는 무지개가 아름답게 펼쳐지는지 사람들은 모릅니다. 어떻게 땅 속에서 무가, 감자가, 고구마가, 땅콩이 자라는지, 어떻게 풀에 쌀이, 밀이 달리는지, 어떻게 나무가 자라 밤을, 사과를, 배를 맺는지, 어떻게 뻗어난 줄기에 호박이, 수박이, 참외가 열리는지 사람들은 모릅니다. 어떻게 흙에서 빨갛고 노랗고 하얀, 아름다운 꽃이 나오는지, 어떻게 바다와 저수지와 강과 내에 각종 물고기들이 우글거리는지, 물을 먹고 사는 물고기들이 어떻게 그렇게 찬란한 빛을 발하는지, 어떻게 사람의 온 몸 구석구석까지 영양분과 산소가 공급되고 순환되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땅을 밟고 살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많은 다른 별들에는 사람이 없고 오직 이 지구별에만 사람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이사야 45장 18절에 말씀하십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하늘은 A신이, 땅은 B신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늘도 땅도 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이사야 45장 5절에서 7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따라 합시다.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이 없느니라.”
타락한 천사, 귀신은 있을지라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우주를 지으시고 사람을 구원하시고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이분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my Father and your Father, my God and your God.’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내 아버지 곧 너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 큰 박수를 올려드립시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밀을, 쌀을, 보리를 주셔서 먹고 살게 하십니다.
야곱 시대에도 밀과 보리를 먹고 살았습니다. 밀과 보리를 추수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레아의 맏아들 르우벤이 추수하는 곳에 구경 갔다가 합환채를 발견했습니다. 산삼만큼 발견하기 어려운 합환채를 발견한 것입니다.
합환채가 영어로는 Mayapple 혹은 mandrake, 히브리어로는 ‘뚜다이’라고 합니다. 지중해 동쪽 연안에서 자라는 것으로 3,4월에 흰꽃과 자주꽃을 피우는데 그 향기가 얼마나 진하고 매혹적인지 아가서 7장 13절에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열매는 계란 만한데 아주 샛노랗고 뿌리는 인삼처럼 사람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중동 지역에는 합환채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르우벤이 갖고 온 것입니다.
“엄마 이게 뭐야?”
“어머나, 합환채네!”
레아는 산삼을 캔 것처럼 기뻤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그 소식을 듣고 ‘저것을 내가 먹어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언니는 벌써 아들을 넷이나 낳았는데 자기는 아들을 하나도 낳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종 빌하를 통해 두 아들을 얻었더니 언니도 자기 여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니 레아의 아들은 여섯, 라헬의 아들은 둘입니다. ‘내가 저것을 먹고 아들을 낳아야지.’라고 생각한 라헬이 레아에게 갔습니다.
“언니!”
“왜?”
“르우벤이 갖고 온 합환채, 나 줘.”
그 말에 레아가 열을 받아 “야, 너는 남편을 독차지하고 살면서 내 아들의 합환채를 달라고? 뭐 이런 게 다 있어?”라고 했을 것입니다.
“언니, 흥분하지 마. 그 합환채를 내게 주면 오늘밤에 내 남편을 언니 방에 보내 줄게.”
슬픈 여자 레아가 합환채를 주고 그 남편을 사서 그날 밤에 남편과 잠을 자게 되는 것입니다. 레아가 예쁘게 단장을 하고 있다 해질 때 남편이 들에서 오니 “오늘은 내 방으로 가셔야 돼요. 내가 라헬에게 합환채를 주고 당신을 샀어요.”라며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레아의 방에 들어갔습니다.
레아는 그런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자기 남편과 마음대로 자지도 못하고 흥정해서 자야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잠을 자면서도 기도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몇 년 간 닫은 레아의 태를 하나님께서 다시 열어 주셔서 레아가 잉태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몇 년간, 십 년간, 십오 년간 태가 닫힌 부인들의 태를 열어주시는 역사가 있어서 늦둥이를 하나씩 낳으면 좋겠습니다.
레아가 아들을 낳고는 “하나님께서 내게 값을 치러주시는구나. 내가 내 여종 실바를 남편에게 주었더니 그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값을 치러주시는구나.” 하며 그 아들의 이름을 ‘잇사갈’이라 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감사할 줄 알고 찬송할 줄 아는 레아에게 하나님께서 잉태의 복을 주셔서 또 아들을 낳게 하셨습니다. 레아가 너무 기뻐서 “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후한 선물을 주시네. 내가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남편이 나와 함께 거하리라.”라며 ‘스불론’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레아는 아들들을 낳고 이렇게 찬양하며 웃지만 라헬은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합니까? 그러나 메달 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통곡하고 있을 것입니다. 세상이 그런 것입니다.
레아가 아들을 낳고 좋아할 때 라헬은 ‘언니는 아들을 여섯이나 낳았는데, 나는 하나도 낳지 못하고…….’ 하며 통곡하는 것입니다. 레아는 후에 딸 디나를 하나 더 낳습니다. 그런데 라헬은 합환채를 먹어도 배가 불러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서럽게 웁니다.
하나님께서 우는 라헬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태를 열어주시니 라헬이 잉태했습니다. 평생 소원인 아기를 잉태했으니 배가 산더미처럼 불러도 몸이 가볍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정말 기뻐하며 기뻐하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요셉입니다.
당시에는 아들을 많이 낳는 여자가 최고였습니다. 부족국가는 남자가 많아야 강한 부족이 됩니다. 그 당시 여자는 수(數)에 들지도 못했고, 이름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디나의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은 나중에 사고를 쳤기 때문입니다. 다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에스더처럼 아주 유명한 여자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처럼 남편이 아주 유명한 여자의 이름이나 나와 있지, 보통 여자는 이름도 없고 수에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라헬이 아기를 낳지 못하다 아들을 낳으니 “하나님께서 내 부끄러움을 씻어주셨도다. 얼굴을 들고 살게 하셨구나.” 하고는 그 이름을 ‘요셉’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들 하나만 더 주세요. 하나님, 아들 하나만 더 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 하나를 더 주십니다. 창세기 35장에 보면, 그 아들이 베냐민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훈훈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레아와 라헬은 한나같이 고귀한 여자가 아닙니다. 에스더처럼 고고한 여자도 아닙니다. 그저 둘이 싸우고 늘 아이 낳는 경쟁이나 합니다. 그리고 라헬은 “나로 하여금 아기를 낳게 하라. 아니면 죽겠노라.” 하며 남편에게 바락바락 대듭니다. 레아와 라헬에게 배울 것은 아이를 많이 낳는 것,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레아도, 라헬도 입만 열면 “하나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값을 치러 주셨도다.”
“하나님께서 후한 선물을 주셨도다.”
“하나님께서 내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도다.”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활이 거룩하고 귀한 사람만 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부 싸움을 잘 하고 시누이와 치고 받고 싸워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 저 사람이 어떻게 집사가 되었을까?’ 싶어도 그 안에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교회학교에서 짓궂게 장난을 하고 선생님이 가르칠 때 딴 짓하는 아이들을 보면 ‘아유, 저것!’ 하는 마음이 들어도 그 아이의 일기장을 보면 ‘선생님이 가르치실 때 너무 떠들어서 하나님, 죄송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다 신앙이 있습니다.
이번 광림교회 집회 때 새벽, 낮, 밤 시간마다 자리가 꽉꽉 차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저 몰래 제 처가 식구들이 그 집회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처가 욕을 했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어디서든 말조심해야 합니다. 거기에 참석한 한 분과 제가 20년 전에 싸운 적이 있습니다. 제게 형뻘 되는 그분이 그때 어느 교회의 안수집사님이었는데 교회에 대해 자꾸 불평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형님, 만일 형님이 우리 양곡교회 집사라면 저는 바로 집사 직분을 떼버릴 겁니다.”라고 했더니, 그분이 “그런 소리 말아. 나도 하나님의 불을 받은 사람이야.”라고 해서 성령의 불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불평할 수 있느냐며 그분과 밤늦도록 언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그분이 장로님이 되어 있었고 얼굴에 은혜가 가득했습니다.
우리는 “아이, 그 사람 말이야, 예수 믿는 사람 맞아?”라고 해도, 그 사람도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계속 자랍니다. 말썽을 피우던 사람도 권사님이 되고 장로님이 됩니다. 믿음이 죽죽 자랍니다.
골로새서 2장 19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지금도 여러분이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단비로, 말씀의 만나로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치료하셔서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가 업신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미완성 작품입니다.
제가 우리 양곡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 얼마나 부족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꾸 가꾸셔서 이렇게 되어 있고, 앞으로도 더 가꾸셔서 10년, 20년 뒤에는 더 잘 가꾸어져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 “아, 저 사람이 말이야.”라는 말을 듣는 사람도 나중에 존경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함부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페스탈로치가 아이에게 절한 것은 그 아이가 대통령이 될지, 장관이 될지, 목사님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정신병원에 대통령이 방문을 했습니다. 모든 환자들이 대환영의 박수를 치며 “대통령 만세! 대통령 만세!”라고 했습니다. 대통령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쓸쓸하게 창가에 앉아 딴전을 피우며 대통령은 보지도 않았습니다. 대통령이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가만히 있어요? 내가 왔는데 박수도 하지 않고…….”
“저 사람은 오늘 아침에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대통령이 그렇게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오늘 이 세대의 아픔은 존경받는 인물이 적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존경받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장이, 회장이 존경받고, 목사가, 교수가, 선생님이 존경받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의사가, 변호사가 존경받아야 됩니다. 존경받도록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은 결국 그렇게 자랍니다.
미국 어느 교회에 부활절과 성탄절 때만 교회에 나오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부활절에 나온 그에게 “형제여, 교회는 십자가 군대입니다. 이제는 입대하세요.”라고 하니 그가 “목사님, 제가 옛날에 입대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런데 보기가 왜 그리 어려워요?”라고 물으니 그가 “목사님, 저는 특수부대 비밀 첩보원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비밀 첩보원이라 숨어서 다니니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도 믿음이 있으니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결국 십자가 군병이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분량까지 자라게 하십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막 사는 사람도 어느 날 예수님처럼 말하게 되고 예수님 같은 얼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끔 죄 짓고 넘어져도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계속 발전하고 있어.’라고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넘어지고 자빠져도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이고, 목사님. 내 나이가 팔십인데 어떻게 발전해요?’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까? 팔십이 되어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빚고 계십니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완성했을 때 이미 80세에 이르렀고, 미켈란젤로는 80세가 넘어서도 창작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과 제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 다음, 이 두 여인의 신앙 고백을 통해 은혜를 받게 됩니다.
레아가 다섯 째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값을 치러 주시는구나.”하며 ‘잇사갈’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 낳는 것을 좋아하셔서 내가 나를 부인하고 내 여종을 남편에게 주었더니 하나님께서 나로 아들을 낳게 하시는구나.’
이것은 건강한 해석이 아니지만, 레아가 ‘하나님께서 내게 보상해 주시네.’라고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상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서 충성을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구역 일을 하고 교회학교 일을 하고, 청년회를 돌보고, 차량 안내를 하고, 교회 청소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우리를 예뻐하시며 다 계산하셔서 보상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45, 46절에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여러분, 저를 우습게 보지 마세요. 제가 때를 따라 여러분에게 양식을 공급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천국에 가면 제가 얼마나 부자일지 모릅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를 남겼을 때 그 주인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으니 큰 일을 네게 맡기겠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라고 했습니다.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도 똑같이 축복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그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왔을 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 이놈의 것을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고 이놈은 바깥 어두운 데로 던져라. 거기서 이를 갈며 슬피 울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한 사람에게 상 내려 주십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충성한 것은 하나도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30배, 100배로 복 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레아가 여섯 째 아들을 낳고 나서는 “하나님께서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라고 찬양했습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후하게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일한 대로만 주실 뿐 아니라 후하게 주십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린도전서 15:58)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요한계시록 22:12)
일한 대로 갚아 주실 뿐 아니라 후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충성한 부하 장군들에게 나라를 떼 주었습니다.
“너는 이집트를 다스려라. 너는 시리아를 해라. 너는…….”
왕이 한 부하를 제외한 모든 부하들에게 나라를 나누었습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왕의 눈에 벗어난 미시마쿠스라는 부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아무것도 받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왕도 그에게는 조그만 것도 주기 싫어 아무것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왕 앞으로 왔습니다.
“자네도 무엇을 받으려 하나?”
“예, 대왕 폐하!”
“자네가 뭘 원해?”
“소아시아를 제게 주십시오.”
소아시아는 제일 큰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알렉산더 대왕이 “그래, 그럼 소아시아는 자네가 하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소아시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그렇게 한 것은 ‘나는 아주 큰 왕이다. 나는 그렇게 큰 나라도 줄 수 있다.’라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와 비할 수 없이 크신 분이십니다. 온 우주를 다 갖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후하게 주십니다.
다윗도 빵 한 조각 때문에 구걸해야 될 때가 있었고 바울도 굶을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간순간 어려운 역경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함입니다. 냇물의 돌들을 제거하면 냇물은 노래 소리를 잃습니다. 우리 집이, 회사가, 아들딸이 너무 편하면 우리에게 간증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바짝바짝 매달려 기도하지도 않습니다. 신앙이 약해집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어려움이 생기면 “주여! 주여!” 하게 됩니다.
저는 이번 주 동안 살얼음판을 걷는 것같이 살았습니다. 광림교회 성회를 섬기는 일과 총회 섬기는 일을 함께 하려니 너무 힘이 들어 바짝바짝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얼마나 다가가 살았는지 모릅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주여!” 누우면서도 “주여!” 했습니다. 그럴 때 강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후하게, 넉넉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역대상 29장 28절에 보면, 다윗이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게 살다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에 순간순간 막히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전체로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everything I need,)』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필요한 것은 다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의 잔이 넘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잔을 넘치게 해 주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우리 교회가 조그마했는데 이런 큰 교회를 주셨고, 이제는 더 큰 교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후하게, 넉넉하게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우리의 자녀를 높여주십니다.
어제 미국에서 제 딸이 여러분의 기도 덕택에 큰 음악회를 잘 치렀고 내년에도 또 공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답니다. 우리 경이는 고등학생 때까지 음악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교회 찬양대 지휘자 이귀연 선생님에게 조금 배운 것뿐입니다. 1부 예배 찬양대가 없을 때 제 아내가 특송을 하다가 어느 때부터 경이가 이어받아 혼자 특송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경이가 은혜를 받아 찬양을 계속하다 지금은 미국에서 별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후하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 우리는 라헬을 통해 또 중요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라헬이 요셉을 낳고는 “하나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셨도다. 하나 더 주시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예쁘고 매력 있지만 아이를 낳지 못해 수치를 당하며 얼굴을 숙이고 살던 라헬이 아들을 낳고 나니 얼굴을 들고 삽니다.
우리 모두는 라헬입니다. 예쁘고 매력 있어 길을 가면 남자들의 시선을 집중해서 받는 라헬이지만 아기를 낳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지용수에게도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숨겨 놓은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늘 어두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부끄러움을 씻어 주십니다. 얼굴을 숙이고 살던 사람이 얼굴을 들고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 후로 고개를 숙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야, 나를 봐. 너 정말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해(Do you truly love me more than these)?”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Yes, Lord, I love you. you know that I love you.)”
“그래, 내 어린양을 먹이라(Feed my lambs).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 정말 나를 사랑해(Do you truly love me)?”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Yes, Lord, you know that I love you.)”
‘내가 세 번 부인했지만 주님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어요. 내가 환경이 무서워서 부인했지만 주님 사랑하는 것 아시잖아요.’
“그래, 내 양을 치라(Take care of my sheep).”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 번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 정말 나를 사랑해(Do you love me)?”
베드로가 두려워합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내가 세 번 부인했지만 주님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어요. 내가 환경이 무서워서 부인했지만 주님 사랑하는 것 아시잖아요.’
“주님, 모든 것을 아시지요? 제가 부족해도 주님 사랑하는 것을 아시지요?”
“그래, 내 큰 양도 치라(Feed my sheep).”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부끄러움을 다 씻어 주시고 수제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허구헌 날 여자와 놀아나던 방탕한 남자 어거스틴을 하나님께서는 주의 피로, 성령의 불로 그 부끄럽고 음란한 과거를 다 씻어 주시고 성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사람의 과거를 들추어서 발목 잡고 일을 못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시고 빛나게 살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끌려 온 여자가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끌려왔으니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 여자를 돌로 치려 하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여! 모세의 율법에 보면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했는데 당신은 어떡할 겁니까?”
예수님께서 말없이 땅에 글을 쓰십니다.
“어서 말해요! 어서 말해요! 이 여자를 칠까요? 말까요?”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하시며 땅에 글을 쓰십니다. 학자마다 해석이 다르지만, 많은 주석 학자들이 그때 쓴 글이 신비로운 방언이라 보는 사람마다 다 자기 죄로 보였다고 해석합니다.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부끄러워 돌을 놓고 도망가서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남의 말을 하지 마세요. 남에게 돌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남에게 돌 던질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그 여자에게 돌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여자야! 너를 고소했던 자들이 있느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 짓지 말아라.”
간음하다가 현장에 끌려온 여자의 부끄러움을 씻어 주시고 “이제는 거룩하게 살아라.”라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 주님께서는 과거에 돌을 던지지 않으시고 미래를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과거를 씻어 주시고 미래를 열어 주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마귀는 과거에 돌을 던져 우리를 죽이려 합니다.
하루는 마귀가 루터에게 와서 두루마리를 주며 “이놈, 루터야! 이것을 읽어 봐라.”라고 했습니다. 두루마리에 새카맣게 적혀 있는 것이 다 루터가 지은 죄였습니다.
“하나 더 있다. 이것도 네가 지은 죄지?”
루터가 “맞다. 그래, 내가 지은 죄다.”라고 하니, 마귀가 “이렇게 더러운 놈이 종교 개혁을 한다고? 이놈아! 너 자신이나 개혁해라.”라고 했습니다. 그때 루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 마귀야! 그 두루마리에 없는 죄도 더 많이 지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의 피로 그 죄를 다 씻어 주셨다. 그러니 네가 어떻게 할래?”
그리고 잉크병으로 마귀를 치니 마귀는 도망가고 그때 벽에 튄 잉크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과거를 발목 잡는 것은 마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과거를 다 씻어주십니다. 다시 출발하게 하십니다. 부끄러운 과거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다 씻어주십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채찍에 맞고 짐승처럼 천대를 받으며 삽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셔서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다음 할례를 받게 하십니다. 여호수아 5장 9절에 보면 할례가 끝날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애굽에서 수치를 당했던 내 백성의 수치를 내가 다 굴려버렸다. 이제 너희는 종이 아니고 자유자다.”
여호수아가 감사해서 그 땅을 길갈이라 불렀습니다.
길갈이라는 말은 ‘수치를 굴려버렸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수치를 굴려버리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부끄러운 모든 수치를 굴려버리신 줄 믿습니다.
그렇게 부끄러움을, 수치를 굴려버리시고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젊었을 때, 결혼하기 전에 잘못한 것 때문에 남편에게, 아내에게 미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첫사랑의 사람과 실수해서 그만 잠을 잤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양심에 걸려 늘 죄인 같은 마음으로 살면 안 됩니다. 혹시 남편이, 아내가 “당신, 권사(집사)지? 양심적으로 말해. 결혼하기 전에 정말 깨끗했어?”라고 물을 때 정직하게 대답한다고 “사실은 첫사랑이 있었어요.”라고 하면 안 됩니다.
따라 합시다.
“그걸 말이라고 물어요? 나는 백지장처럼 깨끗해요.”
그래야 가정이 깨지지 않습니다.
아가씨들, 잘 들으세요. 남편 될 사람이 “미스 김, 미안해. 사실은 내가 군에 있을 때 실수를 했어. 술 기분에 술집 여자와 잤어. 미안해. 그런데 미스 김은 그런 일 없어?”라고 해도 “나도 사실은 옛날에, 어릴 때…….”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끝납니다.
따라 합시다.
“그때는 얼굴에 철판 깔자.”
“왜 말도 안 되는 말을 하세요?”라고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처녀 때 지은 실수를 다 굴려버리셨습니다. 총각 때 지은 실수를 다 굴려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부끄러움을 길갈이 되게 하셨습니다. 과거에 발목 잡힌 것을 굴려 버리시고 오늘 거룩하게, 오늘 빛나게 해주십니다.
에베소서 5장 8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오늘 우리 모두 과거에서 벗어나 길갈이 되고 새 출발하는 복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가장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슬픈 여자 라헬을 생각하시니 그 태에 복이 임해서 아기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시니 그들이 홍해를 건너고 가나안 땅으로 갑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서 포로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돌아보시니 그들이 자유를 얻어 고국으로 갑니다. 그들이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도다. 열방이 말하되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해 큰 일을 행하셨도다.”라며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시면 우리에게 큰 일이 일어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 몸이 아파도 주님께서 돌아보시면 낫게 됩니다. 경제적으로 파산하게 되어도 주님께서 돌아보시면 다시 일어납니다.
미국의 경제 불황으로 호텔의 87%가 문을 닫았을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콘라드 힐튼 사장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콘라드를 돌아보셔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는 호텔 직원들을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일류 호텔, 일류 시설, 일류 룸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를 더해야 됩니다. 최고의 것 하나를 더해야 우리 호텔이 삽니다.”
모든 직원들이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기다리는데, 콘라드 사장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미소입니다. 얼굴에 가득한 미소로 손님을 대해야 합니다.”
호텔의 87%가 문을 닫았는데도 콘라드 힐튼호텔의 직원들은 항상 활짝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결국 그 불황을 극복하고 세계 여러 나라에 체인을 낸 힐튼호텔이 된 것입니다.
다 망해도 하나님께서 돌아보시면 흥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을 돌아보시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청와대를, 국회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돌아보시기 원합니다. 그럴 때 변하여 기적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남편의 사랑보다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했던 라헬
창 30장 22~24절 / 이정선목사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의 신부를 데려오기 위해 종을 친척들이 사는 고향으로 보냈었습니다. 우리는 이삭의 신부가 될 리브가를 우물가에서 처음 만나게 됩니다. 리브가는 물을 길러 우물가에 나왔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아들 야곱이 신붓감을 얻도록 하기 위해 아예 고향으로 보냅니다. 거기서 야곱은 라헬을 만나는데, 바로 우물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났던 바로 그 우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랬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런데 라헬은 물을 길러 나온 것이 아니라 양을 치다가 양떼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양을 치는 것은 남자들의 몫인데, 아들이 없는 집에서는 할 수 없이 딸이 양을 쳐야겠지요. 그렇지만 라반에게는 아들들이 있었습니다(창 31:1). 그렇다면 그 아들들은 라헬보다 나이가 많이 어렸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라반에게는 레아라는 딸이 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라헬이 양을 친 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레아는 안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안력이 부족하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양을 치는 데 장애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라헬은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활동적인 처녀였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살고 있었는데, 사촌오빠라는 남자가 나타나 라헬의 인생에 끼어들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아버지의 허락을 얻어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 날 밤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랑을 언니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기가 막힌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한 여자로서 그것은 인생을 도둑맞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칠일 후에 사촌오빠와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두 번째 부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라헬의 가슴 속에 새겨진 깊은 상처는 평생 언니인 레아를 원망하며 질투하도록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언니를 대할 때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가 나올 수가 없었겠지요.
게다가 라헬은 욕심도 많았습니다. 나중에 야곱이 가족과 재산을 이끌고 라반에게서 도망나올 때, 라헬은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훔쳐 나옵니다. 드라빔이 뭔가 하면, 가문의 수호신입니다. 그것을 가진 사람이 그 가문의 상속자입니다. 나중에 라반이 야곱을 쫓아와서 드라빔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릅니다. 라헬이 그것을 훔친 줄을 모르는 야곱은 펄쩍 뛰면서 뒤져보라고 반발합니다. 라헬은 그것을 방석 밑에 깔고 앉아서 생리중이라 일어나 영접하지 못한다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남 속이고 등쳐먹는 데 탁월했던 라반은 자기 딸에게 이렇게 당했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로군요. 딸이 누구에게 배웠겠어요?
라헬이 아버지로부터 가문의 수호신을 훔쳤다는 것은 아직도 우상숭배의 관습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세계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다른 많은 신들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라반이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있었지만, 여호와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언급합니다. 라헬은 야곱과 결혼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지만, 아버지의 집에서 섬기던 신들을 여전히 섬기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곱의 가정 내에서 각종 우상에 대한 숭배는 상당한 정도로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척결된 것은 디나의 강간 사건 이후입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고 하셨을 때, 야곱은 자기 집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방 신상을 버리고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명합니다. 그래서 모든 이방 신상과 귀고리 같은 것을 수거해가지고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벧엘을 향해 떠납니다.
그렇게 라헬은 욕심과 질투심이 많은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예쁘지도 않고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언니 레아는 아들을 잘 낳는데, 자기는 아들을 낳지 못하니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주어서 아들을 낳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언니와 경쟁을 하겠다는 것인데, 이 방법은 사라가 자기 여종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한 것과 비슷한 사건이군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전도서의 말씀처럼, 인간의 사고나 행동패턴은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라헬이 시녀를 남편에게 주어 아들을 낳게 하니까, 레아도 자기 시녀 실바를 남편에게 줍니다. 졸지에 야곱만 아내가 넷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복잡한 인간관계도 선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야곱의 자손이 민족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런데 레아와 라헬이 시녀들까지 동원해서 아들 낳기 경쟁을 한 결과 열두 아들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도 말하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고 했습니다.
얼굴 예쁘다고 콧대 높고, 욕심 많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차지해야 속이 시원했던 라헬은, 그러나 가장 큰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라헬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도 아들을 낳게 하라고, 안 그러면 죽어버리겠다고 남편을 몰아붙입니다. 그러자 야곱이 내가 하나님이기에 그것을 내 마음대로 하느냐고 화를 내지요.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 달린 문제였습니다. 레아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하고 위로를 얻으려 했었는데, 라헬은 그 반대로 남편의 사랑은 받지만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 늘 부르짖어야 했습니다. 사실 라헬처럼 똑똑하고 야무진 사람이 부족한 것까지 없을 때 하나님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연약한 부분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유가 될 수 있다면, 부족하고 연약한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라헬을 생각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그 태를 여시니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라헬도 아들을 낳아 야곱의 자손이 번성하는 데 역할을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오랜 세월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동안 라헬의 성품과 믿음을 다듬으실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결혼식 날 밤에 남편을 언니에게 빼앗기는 기가 막힌 일을 당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평생 원망과 미움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일을 당했다 해도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그것을 잊을 줄도 알고 용서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 동안 라헬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들으시고 태를 열어주셨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동안 라헬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해왔다는 뜻입니다. 그 세월은 라헬의 믿음을 성장케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나서 오랜 세월을 기다리셨습니다. 이처럼 기다림은 우리 인격의 성숙과 믿음의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일 수 있습니다. 어차피 아들을 주실 거면 일찍 주셔서 마음고생이나 하지 않도록 하시지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준비되지 않고 합당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하여 사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내하고 사모하는 가운데 인격과 믿음이 합당하게 준비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은 라헬은 또한 가장 사랑받는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낳은 아들 요셉은 열두 아들들 중에서 장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형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장자에게는 두 몫이 주어진다고 했지요? 요셉은 열두 지파 중에서 두 지파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이스라엘이 큰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양육하는 장자의 책임을 감당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오랜 기다림 끝에 라헬에게 크게 보상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라헬은 막내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아들을 낳는 것이 큰 무리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라헬은 인간에게 사랑받기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았지만 만족하고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다듬어지고 하나님이 그에게 은총을 베푸실 때 비로소 기쁨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인간에게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후한 선물
창 30:14-24 / 박은성목사
과연 무엇이 후한 선물인지,어찌해야 우리가 레아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근본적인 열등감이 있으면 후한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라헬은 누가 봐도 사랑만 받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엔 근본적인 시기 질투와 열등감으로 가득합니다. 레아는 여호와를 의뢰하며 점점 힘을 얻는데, 라헬은 시기에 사로잡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자꾸 인간적인 해결책만 궁리합니다. 우리를 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보여줘야 합니다. 죽을 지경인 환경에서 레아의 얼굴이 기쁨으로 넘치니까 라헬이 언니의 모든 것이 가지고 싶은 거예요. ‘언니에게 뭐가 있구나’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를 할 때 후한 선물을 받습니다. 아들을 낳으며 아내로서 임무를 다 하는데도 사랑 받지 못하는 레아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십니다.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겨 주신 겁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는 곳입니다. 배부른 사람은 천국을 사모하지 않습니다. 썩어지고 죽어지고 밀알이 돼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져야 천국에 발을 디딥니다. 하나라도 못 가지면 큰일이라도 난 듯 안달하는 것,이것이 바로 ‘라헬병(病)’입니다.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해도 나의 인생이 후한 선물이며,자녀도 후한 선물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고백을 할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끝까지 생각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후한 선물을 받습니다. 드디어 라헬에게 아들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셨습니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라헬이 비로소 하나님을 인정하니까 하나님도 라헬을 인정해 주십니다. 라헬이 무너지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그런데 말이죠,이젠 좀 깨우쳤나 싶었는데 라헬은 참 안 변합니다. 라헬이 잘난 아들을 낳으니까 또 욕심이 올라옵니다. 라헬은 모성애보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식 이름에 자기 슬픔을 집어넣습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모든 걸 갖춘 사람은 자기가 제일 소중합니다. 겸손의 고백을 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넷째로, 가장 후한 선물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참 내놓기 부끄러운 콩가루 집안인데 이들에게서 난 아들 모두가 약속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모두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조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야말로 가장 후한 선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의심의 틈이 없어야 합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이 없어야 합니다.
적용질문
‘이것만 있으면 다 해결되리라’여기며 내가 구하는 합환채는 무엇입니까? 나는 어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에 많은 선물을 허락하셨는데도 ‘나는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어’ 하면서 내게 없는 부분만 쳐다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너에게는 뭐가 있는 것 같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모든 것을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라헬병 환자는 아닙니까? 내게 주신 가족,환경,삶이 후한 선물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인데 내가 과시하며 자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게는 감사의 고백이 있습니까?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숨기고 싶은 집안의 사연,나의 사연은 무엇입니까? 나의 부끄러움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씻음 받고 있습니까? 죄로 얼룩진 인생이라도 예수를 믿음으로 약속의 자녀가 되는 줄 믿습니까?
들으시고 생각하시는 하나님
창 30:14-24
본문 말씀은 야곱의 아내 레아와 라헬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친 자매이지만 동시에 한 남편을 가진 신분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였으나 지방의 문화로 인하여 동생과 결혼하기 전에 언니인 레아와 결혼을 하였고 그 이어서 라헬과 결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자매가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여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심을 볼 수 있습니다.
레아는 사랑을 받지 못하였지만 자녀들이 많았습니다. 라헬은 사랑은 받았지만 자녀가 없었습니다. 두 여인의 모습은 불행한 것입니다. 사랑받으나 자녀가 없고 자녀는 있으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삶이 두 여인이 가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오늘 두 여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레아의 아픔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경수가 끊겼지만 두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소망이며 기쁨이며 행복인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레아를 들으심으로 가능합니다. 또한 아이가 없는 라헬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요셉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둘의 아픔을 모두 해소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생각하신 열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의 아픔을 들으시고 생각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신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생각하십니다. 생각하시는 것은 판단하시는 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한대로 이루어 주는 자동 판매가와 같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충분히 들으시고 생각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좋은 것을 좋은 때에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디 오신다고 생각하거나 의심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입니다. 레아를 들으시고 라헬을 생각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 그리고 이 민족의 아픔을 들으시고 생각하여 주시기 기도합니다.
창세기 30장 14~24절 말씀 묵상
<남편이나 자녀가 우상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레아의 아들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먹으면 임신을 하게 한다는 풀>얻어 자기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리자, 라헬이 그 합환채를 자기에게 달라고 합니다. 레아는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일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고 하니 라헬이 '합환채 대신에 오늘밤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고 하고 저물 때에 들에서 돌아 온 야곱에게 레아가 영접하며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하고 그 밤에 레아는 야곱과 동침합니다<14-16절>.
아이를 낳지 못하는 라헬이 얼마나 임신에 대한 갈망이 큰지 그 합환채를 먹기 위해서 야곱이 언니 레아와 동침하도록 합니다. 레아와 라헬은 야곱의 두 부인이지만 레아는 아직도 '내 남편을 라헬이 빼앗아 갔다'고 하고 라헬은 여전히 남편에 대해 주도권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임신을 못하는 라헬은 이제 합환채라도 의지하려는 절박한 마음인가 봅니다.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 임신하여 다섯째 아들을 낳으니 '내가 내 시녀를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내게 그 값을 주셨다' 하고 그 이름을 '잇사갈'<값>이라고 하고 레아가 다시 임신하여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내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 하고 그 이름을 '스블론'<거함>이라고 하고 그 후에 딸을 낳고 그 이름을 디나라고 하였습니다<17-21절>. 합환채를 양보하며 남편과 동침하는 레아의 소원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은 두 아들을 더 허락하십니다. 자기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기의 여종을 남편에게 준 것에 대한 값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로하신 것을 기억하지만 이제 또 아들을 낳으니 남편이 자기와 함께 살리라고 하는 것을 보니 레아는 여전히 남편를 라헬에게서 차지하려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셔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하나님이 내 부끄러움을 씻으셨다'고 하고 그 이름을 '요셉'<더함>이라 하며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합니다<22-24절>. 합환채까지 얻어 왔으나 그것을 먹어도 임신을 하지 못하고 합환채를 먹지 않은 레아가 두 아들과 딸을 낳는 것을 지켜 보아야 하는 라헬의 삶은 어땠을까요? 하나님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요셉이라는 휼륭한 아들을 주시지만 라헬은 아들을 낳자 마자 또 다른 아들을 주시기를 원하니 라헬의 욕심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오늘 레아는 딸을 얻었지만 딸은 아무 이름의 의미도 없이 그저 이름만 있습니다. 처음으로 낳은 딸에 대한 기쁨도 없습니다. 이슬람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그 종교 안에서 살고 있는 여성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사이 레아와 라헬을 보며 그녀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일부다처제 안에서 여성이라는 인격을 존중 받지 못하고 남자의 종으로 살고 자기를 가리고 사는 그녀들이기에 여성을 사랑하시고 자유케하시고 존중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녀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여자들에게 남편이, 자녀들이 자기의 우상이라면 결코 만족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얼마든지 하나님과 남편과 자녀들을 함께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우선 순위가 분명하게 하나님이시기를 원합니다. 그녀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자녀를 허락하시는 것은 그녀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소원을 기억하신 하나님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남편과 자녀들 때문에 매여 있기 보다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 안에서 남편과 자녀들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복된 인생을 사는 여자들이기를 원합니다.
승리하시기를 기도하며 사랑하고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