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강목 제 9하, 병신년 명종 6년(송 효종 순희 3, 금 세종 대정 16, 1176);
춘정월 공주(公州) 명학소(鳴鶴所)에 도적이 일어났다.
이때에 국가의 내란으로 호령이 행해지지 않아 도적이 무리로 일어났다. 망이(亡伊)와 망소이(亡所伊) 등이 그 당여(黨與)를 불러 모아 스스로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 일컫고 공주(公州)를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사신을 보내어 선유하였으나 따르지 아니하였다. 다시 대장군 정황재(丁黃載) 등을 보내어 장사(壯士) 3천을 모집하게 하고 이를 거느리고 남적을 치게 하였으나 싸움이 불리하자 승군(僧軍)을 모집하여 군사를 더 보태기를 청하였다.
2월 금(金)나라 사람들이 상음현(霜陰縣)에 침입하였다.
금나라 변민(邊民)이 국가가 불안함을 알고 병선(兵船) 10여 척으로 동해의 상음현(霜陰縣)지금의 안변(安邊) 속현 을 약탈하였다.
3월 초하루(병오)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 동해의 물이 붉었는데 피처럼 짙었다.
하6월 명학소(鳴鶴所)를 승격시켜 충순현(忠順縣)으로 삼았다.
조정에서는 서적(西賊)이 아직 평정되지 않음을 걱정하고 있는데 남적(南賊)이 다시 일어나니, 초안(招安)하여 이를 위로하려고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삼고, 내시(內侍) 김윤실(金允實)을 위(尉)로 삼아서 이를 무마하도록 하였다.
○ 윤인첨(尹鱗瞻)이 서경(西京)을 이기니, 조위총이 죽었다.
~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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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제국의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각지의 반란으로 지속적으로 왕권의 위협을 감당해야 하였습니다. 그 중 농민(천민) 반란의 대표적인 예가 공주 명학소의 난이 됩니다. 국내 학계에서도 여러가지 접근을 통한 연구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윗글에서 서적은 아무래도 평양의 '조위총'의 반란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일단 주목해 볼 만한 내용은 2월 금나라 병사가 바다를 건너 동해의 일부지역을 약탈하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만큼, 금나라와 고려의 관계도 바다를 사이에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들은 분명히 고려중심의 서쪽에 위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망이-망소의 난'의 주요위치인 '공주'가 어디였는가를 살펴본다면, '남적(南賊)'이라는 표현으로 고려중심의 아랫쪽에 위치하였으며, 그들 스스로는 '산행병마사'라고 호칭하여, 그들이 위치하였던 곳은 정확하게 고려중심의 남쪽으로 산세가 험하여 왠만한 군세로 쉽게 '토벌'이 안되는 지리적위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학소(鳴鶴所)의 가장 마지막 글자인 '소(所)'자를 통해서 이들 집단은 농업에 종사하는 부곡 또는 향과 달리, 전문적인 기능이 있는 '기술자'들이었으며, 상대적으로 산세가 험한곳에서 일을 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첫댓글 그래서 공주가 어디라는 말씀이신지요? 이 공주를 알면 전봉준의 공주도 알게 되거든요
이 공주는 고려시대 공주라 조선의 해당지명과 동일한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중앙아시아 고려를 기점으로 그 아래 산맥이 있는 지역으로 '추정'합니다만.... 하다보니,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봉준도 공주에서 봉기를 했나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