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민진사' 지령 2호 ☆
- 전라도 한(恨) 풀이의 흑역사 -
■ 고향이 해남이다. 007의 숀 코네리가 멋있었고, 출세를 해보려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에 들어갔다. 1년 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은 후에 대공수사국 요원이 되었다. 몇 년 후 김재규 부장 때, 5% 감원 바람이 불었다. 각 과에 1명꼴로 대상자가 발표되었는데 우리 과에는 연세대 사학과를 수석 졸업한 수사관이 걸렸다. 문제 직원도 있었겠지만 반발을 안 할 직원들을 찍었다는 설이 파다했다. 남의 일 같지 않아 감원 반대 서명운동을 벌였다. 한 달 활동비를 모아 피해 직원을 돕자는 모금 운동도 함께였는데 그 여파가 심해지자, 모든 것은 없었던 일이 되었고 탄원서를 주도했던 직원들도 무사했다.
당시 수사과장은 격한 이북 사투리를 쓰는 현역 해병대 대령이었다. 어느 날, 파기 문서 파쇄물 소각을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그가 불렀다. "나는 38 따라지 평안도 출신이지만 타군과 달리 해병대만큼은 강기천 사령관 등 전라도 사람들이 주류라서 진급하는 데 덕을 크게 봤소. 그러나 중정은 다르오. 내가 보기에 당신 출세하기는 틀렸소." 그러면서 그는 책상 위에 뭔가를 펼쳐 놓았다. 중앙정보부 조직도였다. 27개 부서장 중 호남 출신은 별 볼 일 없는 통신국장 한 사람뿐이라고 설명했다. 거기에 이제 갓 입사한 풋내기가 서명운동이나 하고 다니니 한심하지만, 전라도 덕을 본 죄로 말해준다는 의미였다.
그는 여타 중앙 행정부처와는 별도로 중정에서의 호남인 차별의 시작을 71년 대선 이후 호남 세력을 등에 업은 김대중 때부터라고 보았다. 호남의 결집으로 고전한 박정희를 옹위하는 영남 세력이 과잉 충성하여 A급 정보가 야당에 누설되면 정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으로 주요 부서에 호남 출신들을 배제하고 그들을 대공수사 같은 3D 쪽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수사국장은 항상 비호남 출신이라고도 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열심히 하면 되지 출신 도가 무슨 걸림돌이 되랴 싶은 순진한 생각에서였다. 사태는 곧 파악되었다. 여느 조직과 마찬가지로 중앙정보부도 고교 동문 모임이 있었는데 당시 60명가량으로 단일 고교 중 가장 숫자가 많았던 광주고는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소위 잘나가는 부서의 고참쯤 되어야 후배들에게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는데, 눈을 씻고 봐도 그럴만한 선배들이 없었다.
오기가 생겼다. 광주고 모임을 주도했다. 그렇지만 모여지지 않았다. 무언가 꺼림직해 하는 눈치들이었다. 선배 한 분이 불러서 만나보니 '조심하라'는 충고였다. 감찰실 기록카드에 '빨간 줄'이 그어진다는 말도 했다. 더욱 오기가 생겼다. 그때 검찰 특수부에서 이름을 날리던 김태정과 박주선, 세무서장 안정남을 오게 해 사기를 불어넣어 달라고 했다. 서기관급 이상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지만, 상당히 활성화는 되었다. 결국 요주의 호남인으로 감찰실 기록부에 빨간 줄이 그어진다.
그런 게 쌓여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리게 되면 한(恨)이 된다. 그래도 보릿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국가 발전의 시대정신에 투철했던 조직의 특성상, 주류들도 그렇게까지 야박하지는 않아 머리 좋고 시키는 대로 일을 열심히 하는 호남 사람들의 밥줄을 끊는 일은 없었다. 먹고살게는 해준 거다.
■ 80년 5월, 이문동 정보학교에서 영어 공부를 할 때였다. 가깝게 지내는 형뻘 되는 입사 동기생이 자기 동생이 서울대 대학신문 편집장인데 518사태 데모 주동자로 도망 다닌다면서 숨겨줄 곳이 마땅찮아 낭패라고 했다. 중정도 도서실 타임지나 뉴스위크지가 잘려 나갈 정도로 보도가 통제되어 진상 파악이 어려웠으나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씨를 말린다는 유언비어가 범람하던 때였다. 내가 중정에 안 있었으면 데모했을 거라고 아내를 설득해 18평짜리 아파트의 방 한 칸을 은거지로 삼게 했다.
'정치공학'이라는 나관중의 책한 권을 달랑 소지품으로 들고 그가 나타난 그날, 수사국 과장이 우리 아파트에 거동 수상자가 숨어들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며 관리소장을 만나 파악해 보라고 했다. 그의 형도 와 있었다. 서슬이 퍼런 계엄 치하에서 잡아도 부족할 시국사범을 숨겨주다니, 걸리면 둘 다 끝장이었다. 대외적으로 신분 노출이 절대 금기인 점을 부각시켜 은밀히 알아보겠다고 설득해서 위기를 면했다.
"기왕 할 거면 나라를 뒤엎을 정도로 크게 해야지 쩨쩨하게 걸려서 도망이나 다니면 안 된다."라고 주인집 갑질을 하니, 자기는 절대로 주동자가 아니라며 걱정 마시란다. 그렇게 한동안 있다가 무사한가 싶었는데 숨겨준 보람도 없이 결국은 그해 10월 용산경찰서에 체포되고 3년 6월의 징역형을 받게 된다. 알고 보니 언더그라운드의 대부였다. 그리고 광주도 안 가보고 우리집에 숨어있었던 그 아이는 518유공자가 되었다. 교수요 문학평론가인 그 아이는 아직도 NL의 족쇄를 못 벗고 있다. 집안이 검사장을 비롯하여 온통 반공 가족인데 유일하게 돌연변이가 하나 있는 셈이다.
그 아이처럼 518당시 대학생들은 계엄이 선포되자마자 산산이 흩어졌다. 이해찬도, 그 어느 종북좌파 골수분자도 탱크와 M16으로 무장한 계엄군에 맞설 대학생들은 없었다. 특히 부모들의 애간장이 새끼들을 집에 가둬놓았다. 광주 현장에서도 계엄군에 붙잡힌 학생들은 극소수였고 서울에서 온 학생은 기록에도 없다. 그렇기에 518은 김대중 내란 음모로 촉발된 광주폭동이라고 대법원은 명백히 확정판결하였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1995년 10월 박계동이 노태우 비자금 사건을 폭로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 516혁명(쿠데타가 아니다) 이후, 박정희의 주도로 사업을 시작하게 된 대부분의 경제주체는 오일쇼크와 중동전을 비롯하여 수많은 관문에 가로막혀 코너에 몰릴 때마다 정부의 지원 없이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고 국가 경제는 주저앉을 지경이었다. 그때마다 박정희 등 위정자들이 똑같이 내놓은 절박한 해결책으로서의 캐치프레이즈는 "유동성에 문제가 없고 부채보다 자산이 많은 기업은 무조건 살린다"는 것이었다. 망했다가 살아나 엄청난 부가가치가 쏟아지자 경제인들은 너도나도 그들을 도와준 모든 공무원에게 성의를 표시하게 된다. 정치인들에게도 뒤탈이 없을 만큼 소위 정치자금을 쥐여준다. 사정기관은 돈의 흐름을 알았지만 눈감아 주었던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국가지도자는 떡고물이 아닌 떡을 받았으니만큼 액수도 컸다. 그쯤 되면 그들은 그 돈을 공금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박정희는 가족에게 한 푼도 남김없이 그 공금을 공복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전두환은 수천억 원을 노태우에게, 노태우도 수천억 원을 김영삼에게 물려주었다. 당시 육사 출신으로 해박한 경제 지식을 신문 지상에 포효하고 있던 지만원을 인재로 점찍고 함께 북경을 방문하고 있던 김대중은 깜짝 놀라, 자기는 20억 원밖에 안 받았다고 기자들에게 실토했다. 김영삼을 좌표 삼은 전략이었다. 100배 이상을 받은 김영삼의 수습책은 김대중을 달래는 일이었다. 그 해법이 호남인과 관계가 있는, 김대중이 내란음모의 수괴가 된 '518사태'를 '518민중항쟁'으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선결 과제로 법적으로 뒷받침이 필요했다.
자칭 모래시계 검사인 홍준표가 검찰에서 하도 까불어 왕따가 되자 영남고 선배 김기섭 기조실장이 그를 법률특보로 데려온다. 형벌 소급, 이중 처벌, 연좌제를 금지하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 제13조이다. 그중 제1항은 "모든 국민은 행위 시의 법률에 의하여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하며,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거듭 처벌받지 아니한다."인데 홍준표는 일사부재리의 법 조항과 함께 '형벌 불소급의 원칙'을 위배한 '518특별법'을 김영삼에게 진상하여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방에 처넣게 했다. 종전의 대법원판결을 휴지 조각으로 만든 홍준표는 김영삼의 키즈가 되어 국회로 진출하는 전리품을 챙겼다.
이때로부터 518관련법은 보상을 빙자한 6차, 7차 등 복잡다단한 누더기 '광주의 恨 풀이법'으로 바뀐다. 가장 무서운 것이 유공자 서훈에 따라 100점 만점에 5%에서 10%의 가산점을 받아, 국가기관은 물론 하루 20명 이상이 근무하는 사기업에도 취업을 할 수 있다는 가산점 제도이다. 신원도 밝혀지지 않는 5,769명의 유공자는 물론 그 가족들이 사회 각계 각층에 스며든 발판으로 족보로는 '국민의힘'당의 전신인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시작하였기 때문에 김기현도 518정신을 헌법전문에 넣자는 망발을 하게 된다. 보수우파 자승자박의 역사다. 우습게도 518유공자를 숨겨준 나와 내 가족도 현행법상으로는 유공자 대상이다.
■ 더 파고들어가 보자. 김영삼은 이인제에게 콧바람을 집어넣어 김대중 당선에 조력했다. 화끈하게 도와준 것이다. 국정원을 장악한 김대중 정부는 1,000명에 가까운 비호남 출신 직원들을 도륙하는 청사진을, 원장으로 내정된 이종찬에게 내밀었다. 만약 처음 물망에 오른 헌법재판관 출신의 조아무게 였다면 정보기관에 문외한인 그로서는 부담을 전혀 느끼지 않고 내민 대로 했을 터였다. 기조실장까지 했던 정규과정 1기 출신의 이종찬은 달랐다. 조직이 와해되리라고 판단한 그는 절반 수준으로 강력하게 주장하여 관철시킨다.
그때까지의 영남 정권이 밥그릇을 빼앗지 않고 찬밥을 주었다면, 처음 정권을 거머쥔 좌파의 호남 정권은 수백 명의 밥그릇을 발로 차버린 격이었다. 이종찬이 그 숫자를 줄이기는 했지만 직접 당한 직원들로부터 던져진 돌멩이를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항상 비주류로 떠돌았던 신세라서 이번에는 마음껏 하늘에 돌을 던져, 나는 새도 잡아보자고 굳게 다짐했던 나에게도 느닷없는 도끼가 날아와 뒤통수를 찍었다. 앞에 있으면 피하기라도 했을 텐데 청와대 출근을 앞둔 들뜬 상태라서 전혀 낌새도 채지 못한 채 그 대학살의 명단에 포함된 것이다. 일면식도 없었던 호남 출신 국내 담당 총책이 그를 천거해 준 호남인의 사주를 받고 내려친 일격이었다. 총무국 대기 명령은 그가 떠난 후에야 풀어진다.
대신 텅 빈 본부 주요 부서에 광주지부 직원들이 떼로 몰려와 둥지를 틀게 된다. 국정원 직원들의 생리라는 게 있다. 똥인지 된장인지 잘 가리기 때문에 될성부른 떡잎이 아니다 싶으면 일찌감치 보따리를 싸 닭대가리라도 하려는 심사로 한적하고 명월이 만공산한 지방으로 내려가는 부류가 있고, 반대로 어떡하든 국가를 두 어깨에 짊어진다며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출세파들이다. 광주지부 점령군이 국정원을 망친 점도 있지만 출세파들의 애국심 또한 '거기 있을 때까지만'이었다. 탄핵정국과 518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이름이다. 국정원 변천사였다.
■ 광주 恨 풀이법의 주범은 보수우파를 표방하여 3당 합당으로 태어난 '민자당' 이고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할 '국민의힘당'은 그 후신이다. 당연히 책임이 무겁다. 대선을 전후로 518 묘지를 찾은 윤석열의 심사는 어떠했겠는가. 지금까지 그의 행보를 보건대 방향 설정과 추진력은 가히 족탈불급이다. 이대로만 나가준다면, 그렇게만 되어준다면 지금 기꺼이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을 터이다. 그렇지만 함께 추진체가 되어줄 동력이 너무 허술해 불안하다. 대통령의 생각과 국민의힘당 생각이 결코 같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박근혜를 탄핵한 파들은 지금도 조·중·동과 한배를 타고 있다고 보인다. 전체 민주당과 기회주의 국민의힘, 그리고 안일한 보수를 꿈꾸는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의 승객들이다. 그래서 강성우파인 607080은 외롭다. '라떼'를 꼰대라고 싫어하는, 그렇다고 하여 좌파도 아닌 철부지 2030들까지 첩첩산중인 우파가 서로를 반목하게 된다면 총선이고 대선이고 필패다.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그 사례다. 절대 뭉치지 못한다. 그런데 해법은 간단하다. 북한특수군이 광주교도소를 습격한 것만 밝혀도 보수는 일단 뭉치게 되고 좌파는 외롭다. 그렇지 못하면 자유대한민국은 망한다. 우리 '민간518진상규명조사위(민진사)'는 그 일의 막바지에 와 있다.
2023년 8월 29일 국치일에 망국의 恨 풀이는 정치인의 전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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