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희 作/ 곤(鯤)/ 69✕20.5cm/ 나무에 혼합재료
삶에 있어
단 한 사람의 스승을 만나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다.
열 명의 친구를 두었다면
그 또한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다.
백 권의 좋은 책을 만났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다.
나는 목이 마르다.
목마름이 그래서 만남을 이어준다.
이 그림은 어느 화가의 그림이다.
아주 오래된 나무 다드미에
아크릴과 혼합재료로 나무의 결을 활용하고
스크래치 기법을 써서
나무 안에까지 색을 숨겨서 그렸다.
나는 두말없이 이 그림을 샀다.
나는 지금 한 마리 물고기다.
그러나 꿈을 꾸는 물고기다.
장자는 내편 소요유에서
이 물고기를 곤(鯤)이라고 불렀다.
이 물고기가 변해 새가 되었는데 그 새의 이름은 붕(鵬)이고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에 달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을 타고 남명으로 옮아가는데
남명은 천지를 말한다.
나는
지금 꿈꾸는 곤이다.
나는 지난 주에 이 화가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전라도 장수에서 남원골을 넘어가는
도장마을 옆 작은 산마을에서 산다.
한 1년 전쯤에 경기도 안성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선천성 희귀병을 앓고 있다.
근육이 굳어가는 병이란다.
지금은 팔의 근육과 얼굴의 안면 근육이 굳어가는 중이란다.
그래서 몸무게도 35kg이 채 안돼 보인다.
그 화가는 캔바스에 그리지 않는다.
떡메판, 절구통 잘라진것, 옛 도마, 옛 다상, 다드미나무 등등에 그린다.
우리 전통의 목재의 결을 선호한다.
그녀는 자연주의 화가다.
자연, 그리고 그녀의 삶, 그리고 그녀의 그림은
모두 같은 모습의 다른 이름이다.
그 화가가 꾸는 꿈이
새가 되어 나르는 화이위조(化而爲鳥)
곤이 변하여 된다는 붕(其名爲鵬)이 아닐까.
그녀는
느리다.
느리지만
그 갤러리에는 안되는 일이 없다.
작은 돌담벼락에도
그림을 그렸다.
우물가도
변소도
스레트 처마도
모두 캔바스가 된다.
어쩌면 그녀는
그녀의 삶을
온통 캔바스로 삼고 있는것 같다.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안다.
천장지구(天長地久),
그 광활을 꿈꾸는 나의 황망함에
과연 그러한 진지함이 있는가.
나는 진정 삶을 그려가고 있는가..
그녀는
도병(道病=깨달음병)에 연연하는 특출내기도 아니다.
세상을 담아내는 자연의 그릇엔
오일과 아크릴이 섞였지만,
그녀의 영혼의 소재에 희석되어
이미 자연주의 그 안에 존재한다.
자연주의적 삶이란
자유롭되, 일없이 노니는 삶을 의미하지 않는다.
육체는 그대나 나나 한계지움이지만,
마음에 짐을 지우지 않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
현명한 사람은 세상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않고,
그저 마음의 여유를 위한
즐김이 있는 삶일 것이다.
서양은 영혼이라는 이름으로,
동양은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곤이라는 존재계의 표면을 떠난
붕의 꿈이
물욕에서 자유롭고 자연과 친화하는 그녀의 삶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붕은 그것에서 그침이 아니다.
이미 곤에게는 붕 너머의 천지를 담고 있겠지....
그 천지는 푸른 빛이다.
푸른 물고기,
곤은 그래서 나의 모습을 닮았다.
그리고 그러한 통로를
온종일 바쁜 시간을 내게 내주고
건강한 자연식탁으로 밥을 내주고
그녀의 작품 세계에서
희망과 환희의 지평을 열어준 우주의 통로에서
멘토의 문패를 달아 주었다.
그녀의 삶은 깊다.
무릇 물이 깊지 않다면, 곤은 깃들 수 없다.
그리고 그 곤은 붕이 되어 창공을 가를 수 없다.
그리고 큰 바람이 없다면
그 역시 큰 날개를 떠받칠 힘이 없다.
구만리 정도는 날아올라
바람이 날개 밑에 그만큼 쌓이게 된 후에
거리낄 것 없는 세속의 대기권을 박차고
붕은 천지로 날아가게 되는 것이다.
꿈꾸는 자연주의 화가...
그녀의 새털같이 가벼운 손으로
그 깊은 스크래치를 내고
그 안에 수많은 암호를 새겨 넣은
그 그림을 사랑한다.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수명이 짧은 것은 수명이 긴 것에 미치지 못하듯이
이제,
연연하지 않는
구만리길을 가야지.
힘은 악일지 몰라.
병들지 않은 건강한 몸이 오히려 독일지 몰라..
문명의 시대를 순 도둑놈의 시대
문명의 시대를 파괴의 시대라고
고은시인은 일갈하고 한 언론에 피력한 적이 있었다.
문명의 시대를 턱도 없는 오만과 탐욕의 시대라고
문명은 광기라고.....
그러나 그 문명은 운명이다.
네안데르탈인이 성대가 짧은 소통의 부재 때문에 몰락하고
호모사피엔스만 살아남은 지구에서
인간에게는 그 절망으로 빚는 문명이 운명이다.
나는 그 운명을 얼마나 외면하려 했든가...
티베트 고원에서,
히말라야와 라다크, 문명 이전의 흔적을 위안 삼으며
나는 우주의 한 모퉁이에서
많이 흐느꼈다.
그리고 그 잊었던 대붕의 날개를
가냘프고 왜소하고
병으로 스스로의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한 화가의 그림 속에서 찾아냈다.
절망의 도시에서
자연주의로의 짧았던 회귀,
그 안에 행복이 있었다.
그곳은 <푸른옷소매 갤러리>이다.
갤러리 이름은
본 윌리엄스의 <푸른옷소매 환상곡>에서 따왔다고 한다.
홈페이지를 검색하면
자연주의 화가 이정희를 만날 수 있다.
시골 창고를 고쳐서 만든
차도 함께 나눌수 있는 작은 카페도 있다.
그동안 세상에 그림을 내보내지 않다가
이제는 공유의 미학을 깨달아
그림을 팔기도 한다.
첫댓글 진정한 '공유의 미학'을 깨달아(?) 사는 사람들... 벽하님도 함께 대붕이 되어 남명의 하늘을 훨훨 날으시길~ 오랜만에 좋은 글 잘봤습니다.
작품 속 물고기 묘한 매력을 주네, 작가님의 건강을 빕니다
벽하님이 다녀오신 그곳을 따라나서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이정희선생님~~그분도 만나뵙고 싶다는...행복한 시간이였음을 느낍니다.
ㅎㅎㅎㅎ 드디어 수면위로 떠오르셨군요...자주 글로서 뵙길 바라며~~~^^*
반갑수....
글게~ 반갑네... 이곳에서 보니 더욱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