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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타위빳사나
사마타는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과 동요하지 않음이다.
위빳사나란 anicca,anatta,dukkha를 따라가며 보는 힘이고 일체 법에서 동요하지 않음이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에 관한 논리와 개인적 주장들.
1). 두 수행에 필요한 핵심적 개념의 이해
2). 실참수행의 일례들
3). 경전과 주석서에서의 사마타와 위빳사나
1). 두 수행에 필요한 핵심적 개념의 이해
사마타와 위빳사나는 anicca. anatta. dukkha라는 saññā와 함께하는 것이며 열반의 증득을 목적으로 하다. anicca. anatta. dukkha라는 법에 포함된 해탈의 문이다(네띠까빠라나 340p)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닦는 것은 ‘존재의 두 고리’인 몸과 마음을 소멸로 이끄는 길로 간다. 사마타는 빠른도달. 큰 도달. 풍부한 도달을 증득하며, 해탈의 도달과 남김 없는 도달은 위빳사나의 의한 것이다(네띠빠까라나 345p)
⊙ 마노마야 까-야(manomaya kāya), 즉 간답바 까-야(gandhabba kāya)는 미세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몸’이다. 우리의 육체(물질적 몸)는 이차적이며 마노마야 까-야(manomaya kāya), 즉 간답바(gandhabba)가 일차적(우선)임을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 사마타 - 마음citta에서 7 (저류들, 잠재성향들) anusaya,, 10 (결박들, 묶임들)saṃyojana, 견해의 유입과 갈망āsava, 감각적 욕망에 눈멈kāmachanda. 존재들bhavā이 멈추는 것이다.
문제는 인간의 몸은 안이비설신의 즉 기능들로 신경과 뇌brain으로 구성되고, 인간심장을 중심으로 육입처가 있다. 안팎의 육입처 ajjhattikabāhiresu āyatanesu 중에서 ajjhattaṃ salaāyatanā들이 있다. 안쪽 육입처는 ajjhattaṃ salaāyatanā 인간의 심장에 위치하며 존재의 중심이며 인간의 마노마야까야인 이름이 간답바의 활동의 터전이다.
이 정보는 해탈과 열반 그리고 윤회에서 절대적 이해를 돕게 된다.
그림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그림에서 간답바인 정신적인 몸의 신경계의 움직임과 citta의 긴밀성이 높다. 즉 사마타란 citta가 그림 위쪽으로 향하는 심의식이 정신계인 오취온과 나마곳따에 들뜸uddhacca이 멈춰졌다는 의미이다.
사마타는 그래서 마음이 고요히 멈춤cetosamatha이라 하다.
갈애의 잠재성향을 근절하는 수단, 이것은 사마타이다. 갈애의 잠재성향의 조건인 무명을 막는수단, 이것은 위빠사나이다.(네띠빠까라나 178p)
사마타는 āsava로 유입된 대상들을 붙잡는 taṇha를 제거하다. 이 사마타는 사띠의 기능과 삼매의 기능이라는 두 가지 기능에 해당하다.(네띠빠까라나 265p) 사마타는 오력오근에 해당하는 것이며 팔정도에 의하여 증득되는 수행인 것이다.
사마타를 이해하기 위해선 심장에 위치하는 간답바의 활동의 안정됨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사마타의 대상에는 까시나도 포함된다.
10가지 까시나(전체, 확산) 지.수.화.풍.흰.빨.노.청 까시나는 사마타이고 공ākāsa과식viññāṇa의 까시나에 대한 인지saññā는 위빳사나이다.
⊙ 위빠사나vipassanā –
어려운 방식으로 이끄는 길이고 더딘 도의지혜를 얻는 방법은 사마타로 진리의 이익을 구하는 길이다.
위빠사나는 빠르게 얻고 뛰어난 도의 지혜를 얻는 정신적으로 즐겁게 이끄는 길인 진리의 이익을 구하는 길이다. (네띠빠까라나 201p)
1). pañca vimuttiparipācanīyā saññā aniccasaññā, anicce dukkhasaññā, dukkhe anattasaññā, pahānasaññā, virāgasaññā.다섯 가지 해탈을 익게 하는 인식(saññā) - 무상(無常)의 [관찰로 생긴] 인식, 무상에서 괴로움[苦]의 [관찰로 생긴] 인식, 괴로움에서 무아의 [관찰로 생긴] 인식, 버림의 [관찰로 생긴] 인식, 탐욕이 빛바램의 [관찰로 생긴] 인식이 함께하다. 특히 -- aniccasaññā, anicce dukkhasaññā, dukkhe anattasaññā 이 세가지 인지를 지니고 관찰해야 하다
2). pañña/ pajānāti 가 있어야 하다. pajānāti 표현은 오근오력에서 열반을 증득하는 주요한 동사이다. 이는 출세간의 팔정도를 증득함으로 완성된다.
vipassanā 는 vi- passanā이다. 의미로선 출세간적이고 해탁과 열반 증득을위한 안목으로서 대상들을 통찰하다!이다
위빳사나는 anu-passanā가 증득되어야 이 때부터 시작된다. 그 대상이 kaya, vedanā, citta, dhammā가 되며, 이는 사마디의 대상이 되기도 하다.
anupassati - anupassati [anu + passati] 바라보다, 고려하다, 살피다
vipassanā vipassati 의 명사형이다 [vi+passati] 명료하게 보다; 직관을 갖다, 영적 통찰력을 얻다
samanupassati [saṃ+anupassati] 보다, 인지하다, 평가하다
3). 위빳사나의 수행은 어떤 수행인가?
사마타 위빳사나는 37조도품에 속하지 않는데, 그러면 어떤 수행과 연관 되는가?
samatha와 vipassanā는 37조도품 어디에 속합니까? 위빳사나와 사마타의 일반성을 생각하면 정리해 보아야 할 주제인 것이다.
‘의존하지 않는 자에게는 흔들림이 없다.’란 사마타의 힘으로 대상들에 붙잡히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또는 위빳사나의 힘으로 견해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뜻하다.’(네띠빠가라나 256p)
37조도품 모두에 속한다. 어떤 수행주제이든지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필요하다.
사마타samatha는
sama + stha로 sama는 평등하여 고요한 의미이고
stha 는 stha (ṣṭha) standing, living, being in, occupied with, devoted to (—°). 수행주제이기도 하며 사마디의 대상이기도 하다.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이해를 돕는 예시이다.
야구 선수가 공을 잡아 놓고 때려야 잘 때릴까요?
움직이는 공을 쳐야 멀리 갈까요?
골프공이 날라다니면 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이 빠를까요? 축구공이 빠를까요?
야구선수, 골프선수, 축구선수는 인간 심장에 위치한 간답바가 야구배트, 골프채, 축구화 등으로 불리는 마음cittadlrh 오온, 오취온은 공간이고 하늘이고 축구장이다. 야구공, 골프공, 축구공은 ārammaṇa이다.
선수들이 훈련하여 안정된 자세가 upekkhā & upekhā이고 볼을 잡아서 처리하는 능력이 사마디이고 사마타는 공을 보며 치거나, 때리거나 찰 수 있는 찬스를 잡는 능력이다.
위빠사나는 야구공을 치는 순간이고, 골프채로 공을 날리는 순간이며, 발로 공을 차는 순간이다. 즉 공의 흐름과 궤적을 꿰뚫는 능력이 위빳사나 인 것이다.
사마타에서 고찰과 점검이 있는 것, 이것이 위빳사나이다 (네띠빠까라나175p)
쌍 경(A4:170) Yuganaddha-sutta
♦ “puna caparaṃ, āvuso, bhikkhu samathavipassanaṃ yuganaddhaṃ bhāveti. tassa samathavipassanaṃ yuganaddhaṃ bhāvayato maggo sañjāyati.
so taṃ maggaṃ āsevati bhāveti bahulīkaroti. tassa taṃ maggaṃ āsevato bhāvayato bahulīkaroto saṃyojanāni pahīyanti, anusayā byantīhonti.
4. “다시 도반들이여, 비구는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쌍으로 닦습니다. 352)
그가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쌍으로 닦을 때 도를 인식하다.
그는 그 도를 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 짓습니다.
그가 그 도를 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족쇄들이 제거되고
잠재성향들이 끝이 나게 된다.”
4) 사마디에 대한 정보들.
사마디 – samādhi sama+adhi 로 분절함이 samādhi 의미와 뜻을 바르게 하다. samādhi < saṃ ā √dhā (place, support) 이 분절은 ‘조용한 장소’의미인데 사마타와 사마디를 분별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 분절이다. sama+adhi sama는 평등하여 고요한 의미이고 adhi 는 수행 주제 가운데에서 앞서거나, 분명하게 드러난 의미이다. 색계 4가지 사마디 중 어느 위치(adhi)사마디 인가를 드러낸다. 색계 사마디는 4가지 사마디로 나눠지며 이는 색계 4처에 마음citta와 mana가 일치하다! 그 위치가 색계1,2,3,4처 어디인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다. 사마디는 citta = mana = ārammaṇa(ex 사대mahābhūta) 가 지속 유지된다는 의미이다. 조금 덧 붙이자면 보편cetasika인 ekaggatā, cetanā, saññā, vedana, phassa, manāsikara, jivitindriya 가 떠오른 대상을 vitakka( 분리 주장과 조사 등)과 vicāra (vitakka된 대상을 지속으로 분석 관찰하는 행위)에 맞춰지고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것이 사마디의 시작이다.
사마디란 무엇인가?(무애해도492p)
내적으로 길게 사띠함에 의한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이 사마디이다. 외적으로 길게 사띠함에 의한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이 사마디이다. 마음의 집중이 사마디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ekaggatā, cetanā, saññā, vedana, phassa, manāsikara, jivitindriya →→→ vitakka, vicāra 를 이해하다면 사마디와 희열,열의,확신,노력들이 함께 일어나는 1선과 사마디를 알게 된다. 아래 문장은 사마디 이해를 돕게 된다. (A4:170) Yuganaddha-sutta
hoti so, āvuso, samayo yaṃ taṃ cittaṃ ajjhattameva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그런 과정에서 일어난 마음을 안으로 확립하고 안정시키고, 하나에 고정하여 삼매에 들 때
tassa maggo sañjāyati.
그는 도를 인식하다.
so taṃ maggaṃ āsevati bhāveti bahulīkaroti.
그는 그 도를 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짓는다.
tassa taṃ maggaṃ āsevato bhāvayato bahulīkaroto saṃyojanāni pahīyanti, anusayā byantīhonti.
그가 그 도를 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족쇄들이 제거되고 잠재성향들이 끝이 나게 된다.
♦ “yo hi koci, āvuso, bhikkhu vā bhikkhunī vā mama santike arahattappattiṃ byākaroti, sabbo so imehi catūhi maggehi, etesaṃ vā aññatarenā”ti.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든 비구니는 나의 곁에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고 설명하는 자는 모두 이러한 네 가지 특징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속하다.”
citta – ajjhatta āyatanā의 안이비설신의 입처중에서 mano āyatana가 머무는 심장hadaya vatthu에서 활동하며 법과 직접 연계 되기도 하지만 유학들은 번뇌가 있기에 보통은 mana와 연계하여 법들과 연결된다. 다시 표현하자면 citta는 7anusayā, 10samyojana, 4āsava, asobhana cetasika 라는 것들은 낄레사Kilesa 들의 일어나고 사라짐이다. 이 낄레사들은 보통 로바, 도사, 모하로 집약된다.
로바에 속하는
abhijjha [abhi–√jhā–ā]는 압도적으로 생각하다 의미이다.
도사에 속하는 domanassa [dur–√man–as–*ya] √dur - prefix. bad; badly; wrong; ill; difficult; hard moha - masc. illusion; delusion; hallucination [√muh–*a] √muh (be deluded, confused) ⊙ citta 마음은 이러한 낄레사들로 오염되어 있다. citta는 그래서 이러한 낄레사인 오염된 상태이거나, 오염으로부터 정화 visuddhi하는 상태로 언급된다.
⊙ 사마타samatha란 마음이 이러한 낄레사들로부터 피해 있는 것인데 이는 사마디와 함께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 법 – dhamma masc. nature; character [√dhar–ma] √dhar (wear, hold, carry) 품다/낳다’를 의미하다. 그것들은 각자의 행위의 깜마 결과를 낳으며 재탄생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다. . 다른 5가지 유형의 루빠와는 달리, 담마-(dhammā)는 보여질 수 없고(아니닷사나, anidassana), 가장 정교한 도구로도 접촉되고/감지될 수 없으며(압빠띠가, appaṭigha), 오직 정신mano으로만 감지될 수 있다(담마-야따나 빠리야-빤낭, dhammāyatana pariyāpannaṁ).
⊙ 담마(Dhamma)(대문자 ‘D’와 단음 ‘a’를 가진 낱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반면에 ‘담마-(dhammā)(소문자 ‘d’와 장음 ‘a’를 가진 낱말)은 미래에 과보(위빠-까)를 가져올 수 있는 업(깜마)에너지를 나타낸다.
더욱이, 붓다 담마(Buddha Dhamma)는 축적된 담마-(dhammā)를 무효화하고, 따라서, 닙바-나로 이어지게 하다.
붓다(Buddha)라는 낱말은 ‘바와(bhava)’ + ‘웃다(uddha)’에서 유래하다. 여기서, ‘바와(bhava)’는 ‘(31 영역에 있는) 존재’를 의미하고, ‘웃다(uddha)’는 ‘제거’ 또는 ‘무효화함’을 의미하다. 그러므로 붓다(Buddha)는 어떻게 재탄생 과정을 멈추고 미래 괴로움을 끝내는지를 알아낸다.
따라서, ‘붓다 담마(Buddha Dhamma)’는 ‘바와 웃다 담마(bhava uddha dhamma)’이다. 그것은 주로 닙바-나(Nibbāna), 즉 ‘미래 존재/재탄생의 그침’으로 이어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말하다.
‘삽베 담마- 아낫따-(sabbe dhammā anattā)’는 담마-(dhammā)(축적된 깜마 에너지)에만 적용되고 붓다 담마(Buddha Dhamma)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법도 물질이며 여섯씩 여섯[六六] 경 Chachakka Sutta(M148)에서도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를 알아야 하다.'라고 한 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한 말인가?
눈의 감각장소, 귀의 감각장소, 코의 감각장소,혀의 감각장소 몸의 감각장소, 정신/마노[意]의 감각장소가 있다.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를 알아야 하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반연하여 한 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여섯이다.”
♦ “‘cha bāhirāni āyatanāni veditabbānī’ti — iti kho panetaṃ vuttaṃ.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rūpāyatanaṃ, saddāyatanaṃ, gandhāyatanaṃ, rasāyatanaṃ, phoṭṭhabbāyatanaṃ, dhammāyatanaṃ.
5.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를 알아야 하다.'라고 한 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한 말인가? 형색의 감각장소, 소리의 감각장소, 냄새의 감각장소,
맛의 감각장소, 감촉의 감각장소, 법의 감각장소가 있다.
⊙ mana – 안이비설신의 기능indryia이 있고, 처āyatanā가 있다. 처āyatanā들의 몸체가 간답바(인간의 마노마야까야) 인 것이다.
인간의 마노의 기능만이 법을 대상으로 부처님이 되실 수 있다. 그리고 마노마야까야에서 열반을 성취하는 기능이 있다. 기능으로서 법을 선택 결정 탐구 믿음을 지닌 마노는 인간만이 지니고 있다.
소멸 경(A5:166) Nirodha-sutta
aññataraṃ manomayaṃ kāyaṃ upapanno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jjeyyāpi vuṭṭhaheyyāpi — atthetaṃ ṭhānan”ti.
만일 지금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성취하지 못하면 욕계 신들의 동료가 되는 것을 뛰어넘어 어떤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을 얻어 상수멸에 들 수도 있고 출정할 수도 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 mana가 법을 대상으로 감각하다는 사실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에서 매우 중요한 이해의 토대가 될 것이다.
아래 간답바/마노마야까야---마노---법 연계에서 해탈의 법과 정견 및 사성제의 manasikāra는
마음에서 낄레사가 멈춘 사마타 증득이 있어야 가능하다. 즉 어느 정도라도 마음이 고요하게 멈추고 대상(법들 가운데에서)을 분석관찰하는 위빳사나가 가능 한 것이다.
간답바의 활동은 citta로 나타나며 반드시 mana와 dhamma가 연계되어 있다.
⊙ viññāṇa – 맛지마43 여기에서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용이한 특이점 또는 경계선 역할을 하다.
♦ “neyyaṃ panāvuso, dhammaṃ kena pajānātī”ti?
♦ “neyyaṃ kho, āvuso, dhammaṃ paññācakkhunā pajānātī”ti.
11. “도반이시여, 그러면 무엇으로 알아야 하는 법을 꿰뚫어 압니까?”
“도반이여, 통찰지의 눈[慧眼]으로 알아야 하는 법을 꿰뚫어 압니다
“yā cāvuso, paññā yañca viññāṇaṃ — ime dhammā saṃsaṭṭhā, no visaṃsaṭṭhā. na ca labbhā imesaṃ dhammānaṃ vinibbhujitvā vinibbhujitvā nānākaraṇaṃ paññāpetuṃ.
5. “도반이시여, 그러면 통찰지와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습니까,
혹은 분리되어 있습니까?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합니까?” “도반이여, 그런데 통찰지와 알음알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법들을 잘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위 문장은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는 지혜 paññā가 식별viññāṇa과 결합되어 있음에서 결국 viññāṇa의 소멸이 열반임을 의미하다.
그래서 부처님 성도 후 식별을 집 짓는 자!라 하시면서 이제 집은 무너졌다!라 하셨다. viññāṇa는 계획, 희망,바램 등이 들어 있어 이것이 윤회의 씨앗이 되기도 하다.
2). 실참수행의 일례들
이제 사따빳따나 수행 중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오근오력에서의 믿음,노력,사띠,사마디,지혜는 함께 작용하는 場이고 일미이다.
그래서 빤야 즉 해탈의 지혜는 팔정도가 먼저 선행되면서 가능하다.
팔정도의 정견은 ariyacittassa anāsavacittassa 이다.
지금 마음이 윤회에서 벗어난 대상들과 이어지고 잇는지 점검과 확인이 초기단계에선 필요하다.
그리고 감각적 갈망은 없는지, 존재 즉 어떤 힘이나 에너지를 위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없는지, 더욱 강조되는 부분은 사성제나 사식(단식,촉식,의사식,식식)이 있는지, 12연기 각 요소들을 이해하고 있는지, 선법 불선법을 이해하고 알고 있는지 수시로 점검하는 것이 ariyacittassa anāsavacittassa 이다.
이러한 선행이 있으면서 좌선을 예로 들겠습니다.
① 마음의 안정을 위하여 배의 오르내림을 관찰하다. 이러한 몸의 움직임을 호흡과 연관시켜도 되지만 호흡은 여기 단계까지만 용인 된다. 이 호흡은 아나빠나사띠가 절대 아니고 단지 공기의 들어감 나감이다.
특히 수행 전과정에서 주의를 놓지 않아야 할 부분은 욕심내지 않는 것이다. 만약 배의 오르내림을 관찰할 때 한 시간을 하더라도 관찰 간격을 오르내림을 3회씩 잘나서 관찰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이러다 10회 20회 정도로 늘려가는데 상당한 기간이 요구된다.
②. 이렇게 배의 오르내림을 관찰(사마디로 이어지는 단계)하면서 마음이 어느 정도 세상의 것들이 사라지고 오직 오르내림에만 있게 된다. 이것은 마음이 대상에 함께 서있으며 고요해지고 있다는 사마타 부분에 해당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이제 수행주제의 선택과 이를 vitakka, vicara 하게된다. 즉 배의 오르내림이나 호흡이라고 지칭한 이것들이 무엇인지 법의 조사가 있게 된다.
자연스럽고 타당한 결론은 그것은 풍대임을 알게 된다. 즉 오르내림이란 풍대인 것이다.여기서 몸은 사라지고 풍대에 대한 앎과 봄만이 몸이 있다!라는 sññā가 몸을 대신하게 된다.
그러면 풍대의 관찰pajānati은 그 ārammaṇa의 영역이 지수화풍과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제 몸은 사라진다.
이렇게 사대관찰이 이어지는 것을 사마타라하며 사대에 마음의 cetasika의 cittekaggatā가 된다.
cittekaggatā가 사대라는 대상과 함께 할 때, 사대를 대상으로 사마디가 형성되는 것이다.
③. 사마디에서 다시 오온의 saññā와 vedanā만이 대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지금까지 몸이 있다! 혹은 실체가 있다!라는 인지가 사라지고 인지saññā와 느낌vedanā이 대상ārammaṇa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생각이 일어난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모든 것들이 인지와 느낌 뿐이라면, 내가 그것들을 추구하고 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궁리하게 되는데
이것이 초선에서의 대상을 분리하고 심층조사인paṭhame jhāne dhammā vitakko ca vicāro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즉 jhāna는 사마디의 대상이 불선법과 감각적 욕망을 떠난 정견에 기반한 생각이며 떠남과 버림이 함께하는 생각인 것이다.
④. 이렇게 사대를 관찰하는데 얼굴이 간지럽고 참기 어려워 긁고 싶은 의도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오장애의 감각적 욕망과 의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의심을 믿음으로 수승하게 하면, 이를 사마디의 기능과 힘으로 인지와 느낌으로 볼 수 있다. 가렵다는 것은 몸이 있다는 견해에서 파생된 감각적 욕망의 부부분 이다. paññā가 허물어지고 오력오근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오근오력엔 믿음이 있다. 빤야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자리 인 것이다.
⑤. 사띠빳따나의 kāyānupassanā paṭikūlamanasikārapabbaṃ ,kāyānupassanā navasivathikapabbaṃ 몸의 31가지 요소나 시체의 아홉 단계의 변하여 가는 모습은 오온의 인지/상sañña의 계발을 이룰 수 있다. 몸의 여러 장기나 시체의 상해가는 모습에서 인지/상을 통하여 부정관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행주좌와와 여러 행위들 관찰인 kāyānupassanā iriyāpathapabbaṃ, kāyānupassanā sampajānapabbaṃ은 사마디를 놓치지 않도록 지속적 관찰을 하며 마음이 오장애에 빠지지 않도록 하다.
행주좌와 걸을 때 걸음의 요러 요소들을 관찰이 지속되면 이는 사마디의 대상으로서 걸음이 된다.
행위를 관찰할 때 먹는 것을 대상으로 하면 감각적 욕망과 들뜸이 약해지고 사라지게 된다.
이처럼 kāyānupassanā는 인지를 계발시키며 이는 이후 anicca, anatta, dukkha의 인지를 계발하다.
⑥. 정신mano가 vitakka, viācar된 대상을 지속적 관찰anupassanā(pajānati가 아님)하여 사마디를 형성하고 마음은 사마타cetosamatha를 증득한다.
mahābhūta는 보통 yathābhūta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yathā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사성제 속에서…, 진리에 따르면… 의미 등을 지닌다.
즉 사대mahābhūta는 그림에서처럼 색계에 이르며 사대 관찰은 색계 사마디 증득samāpatti함을 의미하다.
rūpa nirodha-samāpatti은 사대mahābhūta 소멸도 포함된다.
⑦. 다시 대상으로 사대를 지속적으로 지켜보면 초기엔 세간적인 기억이 떠 오릅니다.
이 기억들을 벗어나는 방식으로 사대를 지켜보는 것을 유지시키면 이제 사대는 사라지고
여러 인지들이 나타나는 수행법이 있다. 이때 jhana로서 왜 세상은 모두 사라지고 사대만 명징하게 나타나는가? 지금 욕계 세상은 사라졌다, 색계 세상과 4대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이러한 법의 조사는 지수화풍 사대가 몸의 안팎에서 사라지고 사대라는 인상과 기억이 마노mana意로 수렴된 것을 경험하다.
결국 세상이란 mana가 어떤한 법을 떠올리는가?로 귀결됨을 pajānati 하게된다.
또 다른 방식으로 사대에 대한 인상nimitta rūpanimittaṃ와 함께하는 개념이나 이름을 버리면 nimitta만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초기에 이 nimitta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사마타를 이뤄서 마음이 평온하지만, 몇 개월 또는 상당 기간 이후에 이러한 nimitta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모든 ārammaṇa가 anicca. anatta. dukkha의 삼특상이라는 상기와 함께 사라지면서 빛을 반짝인다.
이제 사대를 대상으로 의지하던 마음은 사대가 사라진 그 자리가 기쁨과 환희까지 청소된visuddhi것을 알게 된다. 청소된 사대의 자욱은 평온한 행복으로 남는다
3). 경전과 주석서에서의 사마타와 위빳사나
♦ 4. nandakasuttaṃ (AN 9.4) 난다까 경(A9:4) Nandaka-sutta
♦ “yato ca kho, nandaka, bhikkhu saddho ca hoti sīlavā ca lābhī ca ajjhattaṃ cetosamādhissa lābhī ca adhipaññādhammavipassanāya, evaṃ so tenaṅgena paripūro hotī”ti.
난다까여, 비구가 믿음도 있고 계도 지키고 안으로 마음의 사마타[止]도 얻고
위빳사나의 높은 통찰지[觀]도 얻을 때 그는 이 구성요소를 원만하게 갖춘다.
무애해도
1). 사마타에서 산란하지 않음의 의미를 철저히 알아야 하다.
위빳사나에서 따라가며 보는 법의 의미를 철저히 알아야 하다. 사마타에와 위빳사나에서 한가지 의미로서 철저히 알아야 하다. 짝을 이룸에서 어긋나지 않음의 의미를 철저히 알아야 하다.(66p)
2). 여덟 가지 형성력의 평정이 사마타의 힘에 의해서 생긴다. 1선정에서 오 장애를 고요함에 머무는 지혜가 있다. 2선정에서 vitakka, vicara를 고요함에 머무는 지혜가 있다. 3선정에서 희열을 고요함에 머물게…, 4선정에서 즐거움과 고통을…, 공무변처 공간의 인지를…, 식무변처에서 식별을…,
무소유처에서 식별 없음에…, 비상비비상처에서 아무것도 없음에…, 이렇게 여덟이다.
10가지 형성력의 평정saṅkhāraupekkhā이 위빳사나 힘에 의해 생긴다. (177p)
3). 생겨난 것에 jatena 의해 생겨나지 않은 것不生 알게 함으로 지혜라 하다. 앎ñāṇa에 의한 해탈에 능숙하므로써 앎의 견해에 동요되지 않는다. 사마디에 들어가서 관찰하듯이 그와 같이 관찰하면서 사마디에 들어갈 수 있고, 사마타와 위빳사나가 있을 때 동등함과 짝을 이룸이 있다.(193p)
4). 산란하지 않음의 청정함에서 기인하는, 유입,갈망을 단절하는 데에서의 지혜로서 간단없는 사마디 지혜가 있다. 감각적 욕망으로부터의 떠남의 힘에 의한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으로서의 사마디가 있고, 사마디로부터 지혜가 생긴다. 따라서 사마타가 먼저이고 지혜가 나중이다.
5). 스스로 가라 앉히는 의미에서 여실함의 의미를 지닌다. 세상이란 온蘊, 계界dhātu, 처āyatana, 있음 결핍된 세계, 생성됨이 결핍된 세계, 있음이 성취된 세계, 생성됨이 성취된 세계.. 일체 중생은 자양분에 의존하는 세상이다. 이를 가라 앉힌다.
6). anicca, anatta, dukkkha로 정신이 공부ㅡ지을 때 공성에 의한 해탈, 해탈의 심대함, 체험으로 앎이 있다(605p)
7) 물질, 느낌, 인지, 형성작용, 식별 등을 anicca, anatta, dukkkha로 따라가면서 보는 의미에서 위빳사나이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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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적으로 길게 사띠함에 의한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이 사마디이다.
외적으로 길게 사띠함에 의한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이 사마디이다.
마음의 집중이 사마디이다.//
본문에서
1. 내적으로:
2. 사띠함:
3. 마음의 하나됨:
4. 외적으로:
5. 마음의 집중:
내적으로/외적으로, 사띠함, 마음 하나됨, 집중.
..........에서
다섯 가지 모든 단어들에 대한 의미를 알려 주시면 제일 좋겠지만
마지막 마음의 집중 하나 만이라도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후 5시까지 올리겠습니다.
지금은 정진 중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