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국수 한 그릇
지난 연말 거제 연사 와실 생활을 정리하고 뭍으로 온지 보름 남짓 된다. 그곳에서 한밤중 잠을 깨면 가끔 텔레비전을 켰다. 바깥과 담을 쌓고 사는 편인데 뉴스 전문채널에서 날씨 정보와 자연인 재방송은 봤다. 내 정서와 호감이 가지 않은 인물이면 화면을 바로 껐다. 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이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지향하는 삶에서 내공이 대단한 이도 있었다.
자연인 출연자는 그가 사는 주변 생태에서 마련한 재료들로 다양한 밥상을 차렸다. 바위벼랑 붙어 자란 석이버섯을 따 밥을 지을 때 넣었다. 시냇가에 통발을 놓아 잡은 물고기는 으레 매운탕을 끓였다. 어탕에 국수를 넣어 먹기는 예사였고 청국장에도 국수를 넣어 상을 차렸다. 방사시켜 키운 토종닭을 삶아낸 백숙도 자주 나왔지만 국수로 끼니를 간단히 때우는 모습을 종종 봤다.
스님은 수행하는 승방에서도 속세와 마찬가지로 식사 시간이 기다려지는 모양이었다. 어느 서책에서 보길 절간에서는 국수를 ‘승소(僧笑)’라고 한다고 했다. 수행 중인 스님들이 공양간 식사 차림이 국수가 나오는 날은 빙그레 미소 짓는다고 해서다.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한 고승은 동자승이 국수를 삶아 건지다 한 가닥이 수채로 빨려가자 불호령을 내려 건져와 먹으라고 일갈했단다.
한 달 전 공무원 연금공단에서 시행하는 은퇴설계과정 연수를 다녀왔다. 천안 상록호텔에서 3박 4일로 진행했다. 충주 수안보에서도 동일 과정을 운영했는데 가까운 곳을 희망했다. 호텔 요리사가 성인 취향에 맞는 식단으로 차려내 식사를 잘 해결했다. 성장기 학생 위주 학교 급식보다 훨씬 나았다. 아침은 해장국에 나물 뷔페가 나오고 어느 날은 생선구이나 국수도 나와 잘 먹었다.
국수 차림표는 마지막 날 점심이었다. 다들 귀향하기 바쁜 시간이라 간편식으로 먹기 좋았다. 연금공단에서 연수를 진행하는 담당자는 평생 공직에 몸담은 연수생들에게 불편한 점 없도록 신경 써주어 고마웠다. 그는 코로나로 연수 시간 휴식에 따뜻한 차나 간식을 넉넉하게 제공하지 못함을 미안해했다. 방역 규칙 준수로 일회용 종이컵은 사용하지 않고 개인용 머그컵을 나눠주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식당 로비로 나서니 테이블에 연수생들에게 보내는 포장된 기념품이 쌓여 있었다. 내용물은 천안 상록호텔과 가까운 지역에서 생산된 국수 다발이었다. 연금공단에서 연수생들에게 보내는 성의를 잘 접수해 가방에 넣어 귀가했다. 연수를 다녀와 학교에서는 겨울 방학에 들어갔고 나는 연사 와실의 짐을 꾸려 창원으로 복귀했다. 이렇게 교직이 마무리되는 즈음이다.
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일월 둘째 수요일이다. 방학을 맞아 산천을 주유하다 하루 숨고르기에 든 날로 삼았다. 아내는 평소 다니는 절에서 법회가 있어 아침 일찍부터 집을 비워 눈치 볼 일 없어 자유로웠다. 몇 줄 글을 읽고 쓰다가 점심으로 국수를 먹고 싶었다. 철이 철인지라 따뜻한 국물에 국수를 마는 온국수였다. 연금공단 기념품 말고 지난여름에 남겨둔 국수를 먼저 썼다.
국수 면을 삶기 전 멸치 국물을 내면서 양파와 풋고추에 토마토까지 잘라 넣었다. 토마토는 생으로보다 익혀 먹으면 더 좋다는 예기를 들은 적 있다. 애호박이나 부추로 나물 고명을 마련하면 좋기는 하겠으나 재료가 준비되지 않았더랬다. 달걀 전으로 알고명은 얹으면 빛나겠으나 번거로워 하질 않았다. 달걀을 풀어 프라이팬에 전을 부치는 절차가 내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조간장에 참기름과 고춧가루를 넣고 마늘쪽으로 국수장을 만들었다. 맛국물과 장을 마련해 놓고 찜통에 국수를 삶아냈다. 면 가닥이 1인분보다 많아 2인분은 될 정도였다. 삶아진 국수를 체에 걸러 헹구어 물을 뺐다. 대접에다 국수를 담아 열기가 식지 않은 국물을 끼얹어 장을 보태 비벼 먹었다. 음식은 남을 위해 마련함이 의미가 큰데 나를 위한 온국수 한 그릇을 차려봤다. 22.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