멧돼지를 부린 날 / 손인선
고사리밭 한가운데
멧돼지가 내려와 파헤치고 뒹군
커다란 흔적
겁먹은 고사리
파랗게 질려 고개를 푹 숙였겠지
울타리 대나무도 파랗게 질려
사그락사그락 도움을 구했을 테지
그중 용감한
고사리 씨앗 몇과 진드기 몇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고
산으로 가겠지
커다란 멧돼지가
바람처럼 달릴 때
햇볕 잘 드는 양지쪽에
폴짝 뛰어내렸을 테지
죽다 살아났다고
바짝 올라붙은 가슴을
쓸어내렸을 테지
친구들에겐
야생 멧돼지를 부리며 왔다고
허풍 조금 보태서
자랑삼아 말할 테지
『멧돼지를 부린 날』(손인선 시, 장은희 그림), 청개구리, 2025.
감상 – “엄마는/ 맹자 엄마 흉내 내는데/ 나는/ 맹자 흉내 내고 살아야 하나?/ 나답게 살아야 하나?(「나의 고민 - 맹모삼천」 중)
좋게 보면, 고민이 거의 어릴 적 맹자 수준일 것 같고 나쁘게 볼 여지는 없어 보인다. 이처럼 「나의 고민」은 맹랑하면서도 어른의 사표이기도 한 아이 생각을 잘 표현했다. 고사성어를 동시로 풀어 쓴, 조금은 이색적인 동시집 『맹자 흉내는 힘들어요』(손인선 시, 김영대 그림, 학이사, 2018)에 담긴 내용이다. 이런 실력을 인정받은 손인선 작가는 동시집 『멧돼지를 부린 날』로 서덕출문학상을 받게 된다.
「멧돼지를 부린 날」도 동시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 등장하는 집채만 한 멧돼지는 남북한 사람의 단합을 부르는 매개로 나오지만 사냥감이 된 멧돼지에 대한 고려는 없다. 영화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에 나오는 멧돼지 소동도 기억나는 장면이다. 새끼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산악 전차를 향해 폭주하는 멧돼지 모습이 박진감 있게 그려졌다. 두 편의 영화와 동시 「멧돼지를 부린 날」의 공통점을 꼽자면, 만화적이고 동화적인 상상력이 동원되어 장면을 풍성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차이점이라면 앞의 두 영화는 인간의 입장에서 멧돼지의 활극을 즐기는 거라면, 「멧돼지를 부린 날」은 인간에서 빠져나와 자연 일반의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 고사리밭이 파헤쳐지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멧돼지에게 어떤 경고나 위협이 없는 건 멧돼지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당위에 대한 고려가 있었음 직하다.
제목의 ‘부리다’는 단어는 ‘일을 시키다’는 의미보다는 ‘마음대로 조종하다’는 의미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니 멧돼지를 부린다는 것은 멧돼지에 주눅 들지 않고 멧돼지를 자기 뜻대로 움직이게 했다는 의미겠다. 단, 멧돼지를 그렇게 움직인 주역은 사람이 아니라 고사리 씨앗과 진드기다. 멧돼지에 견주기에도 뭐한, 작고 힘없는 존재다. 미미해 보이는 존재가 센 존재를 흔드는 게 상상력의 세계이고 또, 더러 그랬으면 하는 상쾌한 세계이기도 하다.
고사리 씨앗과 진드기는 멧돼지의 몸을 빌려 자신의 터를 떠나는 모험을 선택함으로써 군락을 만들고 개체를 퍼뜨리는 선구자가 될 수도 있고 고생만 엄청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의 형편으로만 좋고 나쁘고를 말하는 것보다 이런 고사리 생, 이런 진드기 생이 있다고 말하는 게 좋겠다. 모험을 선택한 쪽이 그렇지 않은 쪽보다 “허풍 조금 보태서” 자랑할 거리도 훨씬 많을 것이다. 멧돼지를 부릴 일은 없어도 이야기를 부려서 사람 사이 줄줄 새게 하는 것도 큰 자랑이겠다 싶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