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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주가웅(朱家雄)
중국역사상 많은 왕조에서 환관전횡의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몇몇 유명한 환관(태감)이 출현한다. 예를 들면, 진나라의 조고(趙高), 동한말기의 십상시(十常侍), 당나라의 고력사(高力士), 이보국(李輔國), 구문진(俱文珍), 왕수징(王守澄), 구사량(仇士良), 전영자(田令孜)등이 있고, 송나라의 동관(童貫), 명나라의 정화(鄭和), 왕진(王振), 왕직(汪直), 유근(劉瑾), 풍보(馮保), 위충현(魏忠賢), 왕승은(王承恩)등이 있고, 청나라의 안덕해(安德海), 최옥귀(崔玉貴), 이연영(李蓮英)등이 있다.
그리고, 이상의 태감들은 대부분이 소위 나쁜 놈이다. 그중의 일부 권력을 장악했던 자들은 더할 수 없이 나쁜 놈들이고 철저히 나쁜 놈들이다. 당연히 예외도 있다. 예를 들면 정화는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일 뿐아니라, 절대로 정면인물이며, 심지어 위대한 인물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세계적인 범위에서 가장 유명하고,가장 성취를 얻은 중국의 항해가는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외에 일부 태감들 에를 들어, 고력사, 풍보, 왕승은등은 역사상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일을 했다. 후세의 평가도 괜찮은 편이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침묵하는 좋은 태감(환관)의 대표라 할 수 있다.
태감이라고 하여 반드시 나쁜 사람은 아니다. 반드시 좋은 사람도 아니다. 태감중 많은 사람은 확실히 좋은 사람이라고 구분하는 것이 비교적 공정할 것이다. 어쨌든 통상적인 상황하에서, 나쁜 사람은 사람들 무리가운데 단지 소수를 점할 뿐이니까. 그러나 왜인지 모르지만, 태감집단은 중국역사상의 명성이 항한 아주 나빴다. 아마도 "쥐똥 하나가 한 솥의 죽을 망친다"는 말 그대로일 것이다.
기실, 타의로 거세당하여 환관이 되었건, 스스로 자궁하고 환관이 되었건 모두 불행한 사람들이다. 단지 좋은 태감은 유명해지기 어렵다. 왜냐하면 명예는 기본적으로 모두 그들의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나쁜 일을 많이 하거나 온갖 나쁜 일을 저지른 환관은 이름을 역사책에 남기게 된다. 일단 그 몇볓 특별히 나쁜 태감이 어느 왕조에 나타난다면, 그 왕조의 명성은 좋아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당나라, 명나라가 그러하다. 그러나 인민대중은 당나라의 그 나쁜 태감들에 대한 이해정도는 명나라의 그 나쁜 태감들에 대한 이해정도에 훨씬 못미친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립한 후, 금방 환관전횡으로 국가가 멸망한 역사적 교훈을 주목한다. 그래서 태감, 환관에 대한 감독과 단속이 아주 엄격했다. 그들이 글자를 익히거나 책을 읽지 못하게 하였을 뿐아니라, 그들이 조정의 문무관직을 겸직하지 못하게 하였다. 주원장은 심지어 사람을 시켜 후궁의 출입구에 3척높이의 철패를 세워서 후대의 제왕들에게 경고했다: "내신부득간예정사(內臣不得干預政事, 환관은 정무에 간여할 수 없다), 예자참(預者斬, 간여하면 참형에 처한다)" 그러나, 많은 태감들은 '정난지역'때 공을 세운다. 주체(영락제)는 태감에 대한 단속과 감독을 느슨하게 한다. 그후, 태감은 명나라에서의 지위가 날로 높아진다. 대명왕조의 제6대황제 명영종에 이르러서는, 태감의 국가정치생활에서의 지위에서 질적인 비약과 승급이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현저한 변화는 바로 왕진으로부터 시작된다.
왕진은 원래 정상적인 남자였다. 글을 읽었고,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무슨 생각 혹은 목적에서인지 모르지만, 칼을 들어 스스로 환관이 되어 자금성으로 들어간다. 왕진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명선종이 재위할 때 그를 동궁 황태자를 모시도록 보낸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명선종이 붕어하고 주기진이 황상에 오른다. 왕진은 신황제의 신임가 중용을 받는다. 그리하여 권력이 아주 큰 사례감병필태감이 된다.
명영종 주기진은 명나라의 제6대황제이다. 그 이전은 차례로 명태조 주원장, 건문제 주윤문, 명성조 주체, 명인종 주고치, 명선종 주첨기이다. 주기진은 1427년에 태어나고, 1464년에 붕어한다. 38년의 인생동안 주기진은 2가지 주목할만한 기록을 세웠다. 첫째, 그는 명나라 16명의 황제중 유일하게 포로로 잡힌 적이 있는 황제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민족에 의해 포로로 잡힌 송휘종, 송흠종보다 행운아였다. 그는 살아서 돌아온다. 둘째, 그는 명나라황제 심지어 중국역대황제중 유일하게 구오지존의 황제로서 전쟁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된후 돌아와서 태상황이 되고, 다시 그 이후에는 다시 황제의 보좌에 앉는다.
그외에 명영종의 행위는 칭찬할 만한 점이 있다. 첬째, 명영조는 '토목보의 변'에서 비록 포로로 잡혔지만, 명영조은 기개를 유지했다. 적군의 항서를 쓰라는 요구를 끝까지 거부한다. 둘째, 명영종은 죽기전의 유서에서 명나라황제가 죽은 후 일부 비빈을 순장시키는 불문율을 폐지한다. 송나라때부터, 거란, 여진, 몽골등 순장의 전통을 가지고 있던 변방민족이 중원을 차지하면 다시 순장의 풍습이 되살아났다. 명나라가 처한 역사와 시간적인 위치로 인하여 그저 '선계승, 연후개정"의 방식이 온건했다. 만주족이 관외에 후금국을 건립하고 그후에 중원을 차지하는데, 순장제도는 여전히 전체민족에서 남아있었다(황상에서 민간까지). 강희연간에 이르러 비로소 폐지된다.
명영종을 얘기하자면 특별히 지적하고 반성해야할 점은 재위기간중에 벌인 두 가지 일이다. 하나는 태감 왕진을 총애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신 우겸에 대한 처리이다. 여기서는 왕진에 대한 것만 얘기하기로 하자.
1435년, 명선종이 죽고, 나이 겨우 9살의 주기진이 즉위한다. 이런 연령으로 자연히 군국대사를 처리할 수 없다. 다행히 저명한 "삼양(三楊)"이 있었다. 소위 "삼양"은 명선종시개의 내각에서 가장 재능있고, 가장 명선종이 신뢰하고 중시했던 양영(楊榮), 양사기(楊士奇), 양부(楊溥)의 세 중신을 가리킨다. 주기진이 황제에 오른 전기에는 '삼양'을 우두머리로 하는 현신집단의 보좌를 받는다.
'삼양'이 있고, 태감전횡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태황태후 장씨가 있었다. 스스로 자궁하고 환관이 된 왕진은 비록 명영종이 등극한 후 점차 득세하기 시작하지만, 아직은 발호할 수준은 아니었다.어쩔 수 없이 세월은 흐른다. 태황태후 장씨는 1412년에 사망하고, '삼양'도 나이가 많이 들어서, 혹은 죽고, 혹은 은퇴한다. 이렇게 하여, 왕진이 역사무대에 등장하게 된다. 아쉽게도 그가 맡은 역은 가소롭고, 비극적인 역할이다. 비록 그 이전의 명초에도 풍운을 질타한 태감이 있었다. 예를 들면, 정화같은 태감. 그러나 정화는 전횡하지 않았고, 그저 중용받았을 뿐이다. 그리고 정화는 중국역사상 세계역사상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대명이 자자한 왕진은 탐관오리였을 뿐아니라, 화하강산을 하마터면 다시 '관외'의 징기스칸의 후에들에게 넘겨줄 뻔한다.
태황태후와 '삼양' 때문에 왕진은 초기에 권력욕이 전혀 없는 것처럼 위장하다. 그리고, 한 마음으로 주기진의 신임을 얻는데 주력한다. 정통7년이후, 왕진의 권세는 이미 아무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다. 그는 황제의 그에 대한 고도의 신임을 충분히 이용한다. 대거 재물을 끌어모으고, 자신의 세력을 심는다. 점점 이 태감은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른다. 내각조차도 그에게 영합하고, 그에게 아부할 뿐이었다. 만일 누구든지 그에게 불만을 말하거나, 불경하거나 그에게 예물을 보내지 않는다면, 왕진은 전혀 봐주지 않고 처리해버렸다. 예를 들어, 외성에서 순무를 맡은 우겸은 1446년 북경으로 와서 황제를 배알할 때, 미리 눈치를 주었지만 왕진에게 선물을 보내지 않았다. 왕진은 수하에게 지시하여 그를 무고하여 사형선고를 받게 한다. 비록 관민의 청원과 압력으로 우겸의 사죄를 면해줄 수밖에 없었지만. 다만 왕진은 이런 유사한 사례를 통하여 가신의 권위를 수립한다.
1449년, 몽골 오이라트부의 수령 예센(也先)이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를 침범한다. 왕진은 군사를 모르지만, 공훈을 세워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명나라에서 충분히 준비도 하지 않은 상황인데, 그는 명영종 주기진을 종용하여 송진종처럼 친정을 하도록 부추긴다. 왕진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었던 명영종은 이미 22살이 되었는데도, 이미 왕진의 말을 듣는 것이 '습관'이 되었는지, 이번에도 주기진은 왕진이 뜻에 따르기로 결정한다. 어가친정(御駕親征).
명영종과 왕진은 이틀만에 수십만대군을 끌어모은다. 그리고 조정의 인재들을 데리고 간다. 영국공 장보, 병부상서 광곤, 호부상서 왕좌 및 내각대학사 조내, 장익등 100여명의 문무대신들이 수행한다. 다행히 이때 병부좌시랑을 맡고 있던 우겸은 북경성에 남는다. 어찌 알았으랴. 이 방대한 군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계속 쳐들어온 적군을 추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오이라트부의 매복에 걸려든 것이었다. 여러번, 형세가 이상하다고 여긴 광곤등은 전략을 바꿀 것을 건의하고,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권했지만, 이런 정확한 건의는 모두 황제가 전권을 부여한 왕진에게 모조리 거부된다. 그 결과 지휘잘못으로, 전투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영나라군대는 금방 패배하고,붕괴된 수십만대군 가운데 백명이 넘는 문신무장은 장렬하게 순국한다. 일국지군인 명영종은 산채로 포로가 된다. 혼란 가운데 주기진의 호위장군 번충(樊忠)은 화가 난 나머지 왕진을 추(錘)로 때려 죽여버린다.
명군은 "토목보의 변"에서 손실이 참혹했다. 이 전투는 통상적으로 명나라역사발전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본다. 명나라의 몽골에 대한 우세는 이때부터 사라진다.명군의 관외에 대한 공세는 이때부터 수세로 바뀐다. 토목보의 변이후 북경은 위기에 빠지고 심지어 전체 명왕조가 사상유례없는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맞이한다.이 모든 것은 왕진의 엉터리없는 생각때문이었다. 왕진이라는 태감은 형편없는 모양으로 죽었고, 죽어마땅하다고 할 수 있고, 심지어 자신의 죄과에 대한 응보를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행인 점은 병부시랑 우겸이 관건적인 순간에 국면을 만회시켰다는 것이다. 경태제의 지지하에,그는 규모있는 북경보위전을 조직, 실시하고, 거대한 성공을 거둔다. 대명조의 국운은 그렇게 전승되고 발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