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리재 채석장에서
새해 들어 근교 산야를 누비는 날들 가운데 함안 대산을 네 차례 찾아간 일월 둘째 목요일이다. 먼저 앞서 남긴 답사기에서 오류가 있어 바로 잡아야겠다. 남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구혜리는 ‘은혜의 언덕’이 아니었다. 글쓴이 생각에 예전 홍수가 잦은 곳으로 여겨 생긴 착오였다. 함안군청 홈페이지 대산면무소에 들어가니 구혜의 ‘구’가 ‘언덕 구(丘)’자가 아닌 ‘아홉 구(九)’자였다.
창원에도 주남저수지 인근 넓은 들판에 지명이 같은 ‘대산면’이 있다. 그곳은 ‘큰 대(大)’자를 쓰는 대산이고, 함안은 ‘대신할 대(代)’자를 쓴다. 창원의 대산에도 낙동강이 범람하면 홍수가 잦은 곳이라 야트막한 산이라도 큰 산처럼 홍수를 피해보고자 하는 염원에서 지명을 그렇게 붙였다. 함안 대산은 그와 달리 홍수가 범람하면 피수대 역할을 할 산을 대신해주십사는 기원을 담았다.
조선 중기 함안 부사를 지낸 정구가 있다. 그는 함안 지세가 남쪽은 높고 북쪽이 낮음을 보고 배반의 땅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당연히 한양에 계신 임금에 대한 염려다. 그는 풍수 지리적으로 반역의 기를 지명을 통해 막으려 관아에서 남쪽의 우뚝한 산을 ‘배이름 여(艅)'와 '배 항(航)'자를 써서 여항산이라 붙였다. 마음속으로나마 남쪽은 배가 넘어갈 만큼 북쪽보다 낮다고 여겼다.
추위가 맹위를 떨쳐도 이른 아침 마산역 동마산병원 앞에서 가끔 산행을 함께 다니는 벗을 만났다. 둘은 함안 대산으로 가는 농어촌버스를 타서 내서 중리에서 칠원을 지나 대산 평림 교차로를 앞둔 대사에서 들판을 둘러갔다. 우리가 산행 기점으로 삼으려는 평림마을로 가질 않아 나중 되돌아올 생각이었다. 들판 저만치 산업단지 공장부지가 조성 중이었고 강변으로 갈마산이 보였다.
십여 년 전 가을날 대산 들녘을 걷다가 그 산 아래 마산동을 지난 적 있다. 마을 어귀 세워 놓은 마산동 지명 유래가 재미있었다. 마을 뒤 야트막한 산이 목마른 말과 흡사하여 갈마산(渴馬山)으로 불리었다. 훗날 마을 사람들이 강변 산세에서 말의 주둥이 모양 앞에 웅덩이를 팠는데 심한 가뭄에 물이 마르지 않아 갈마정으로 불렀으며 마을 이름도 산 이름을 따 마산이라 불렀다.
전설의 유래담이 특이했다. 옛날 옛적 허허벌판에 말의 형태와 같은 산이 강변을 향해 걸어가더란다. 그때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한 아낙이 그 광경을 보고 산이 걸어간다고 큰소리 외치자, 산을 짊어지고 가던 산신령이 방정맞은 아녀자라면서 메고 가던 산을 그곳에 그냥 내버려두고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전한다. 그 후 사람들이 ‘걸메산’이라 불렀으며 이후 ‘갈마산’이 되었다.
차창으로 들판 건너 갈마산을 바라보다 버스가 로봇고등학교가 멀지 않은 고원마을을 돌아갈 때 내렸다. 산행 기점으로 삼을 평림마을 교차로로 향해 걷다가 주유소 근처를 지나니 밤사이 로드킬을 당한 생명체가 안타까웠다. 덩치가 제법 되는 고라니 한 마리가 갓길 덤불에 나뒹굴어져 있었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았을 사체는 간밤 차도를 건너다 달리는 차에 받혀 튕겨 나온 듯했다.
싸리재를 향해 찻길을 따라 걸으니 대형 트럭이 질주해 위험했다. 산골짝에는 거대한 채석장이 나와 우리가 가려는 안산 산등선 가랑잎은 온통 먼지투성이라 의외의 복병이었다.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마 먼지가 폴폴 일어났다. 파릇한 윤이 나는 춘란 잎맥마저 먼지를 덮어 쓰고 있었다. 안산에서 내봉치산을 향해 가다가 묵은 무덤가에서 도시락을 꺼내 소진되어 가던 열량을 벌충했다.
산등선을 내려가니 순흥 안 씨 효자비가 세워진 차도가 나왔다. 처음 계획은 대터등산으로 올라 당산에서 구혜로 나가려고 했는데 그 구간은 다음에 오르기로 남겨두었다. 차량이 잘 다니질 않은 시골길을 걸어 산행 기점으로 삼은 평림교차로로 갔다. 배차 간격이 뜸한 농어촌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와 집 근처 반송시장 족발집에서 돼지국밥으로 맑은 술을 비웠더니 해가 기울었다. 22.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