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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종군기자의 기록
6.25 동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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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종군기자가 캠코더로 전장을 누비며 촬영한 가운데 부분 영상입니다. 70년 가까이나 된 6.25 동란을 다시 들추는 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세대들에게 전란의 참상을 정확히 알려 두 번 다시 한반도에서 이러한 비극이 재연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워싱턴 6.25 동란 참전기념비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6.25 장진호전투를 형상화한 이 기념비는 우리나라를 비롯 일본과 중국 관광객들도 떼지어 찾고 있지만 기념비에 가장 숙연한 자세로 참배하듯 예를 갖추는 사람들은 미국 국민들입니다. 동란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에겐 생판 모르는 나라 대한민국이었습니다. 그런 나라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귀중한 목숨을 수없이 바쳤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사를 잊은 나라에는 내일이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건달 정치세력에 휘둘려 미쳐돌아간지 2년만에 급기야는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하고 있다는 냉엄한 현실조차 깡그리 잊은 것 같습니다. 백주 대낮에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미국놈들 물러가라'고 외쳐대는 저 자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백성들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옮긴이
1950년 9월. 이제 전선은 유엔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마치 노르망디 상륙작전 후 연합군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우선 목표는 38선까지 진격해 예전의 군사분계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10월 1일, 남한의 국군사단이 제일 먼저 38선에 도착했고 그 여세를 몰아 계속 북진했다. 1주일 뒤에는 유엔군도 38선에 도착해 북진명령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때부터 미국 정계의 고민은 시작됐다. 유엔군을 북으로 진격시키는 것이 옳을까, 그렇게 되면 국제경찰의 임무 범위를 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결정은 쉽지 않았다.
한편 이때 미군사령관은 중국이 북한을 돕기 위해 병력을 만주로 이동시킨다는 소문을 듣는다. 중국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못마땅해 했고 그 간섭이 만주지역으로 이어질까 염려하고 있었다. 첩보에 따르면 45만의 중국 공산군이 압록강 너머에서 언제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대기 중이라는 것. 그러나 완전한 승리를 바라는 군과 일반인들은 이런 위험신호를 무시해버린다. 미 국민은 절반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았다. 사실 6.25동란은 미국과는 거의 무관한 전쟁이었다.
1950년대 미국은 평화로웠고 집집마다 자동차가 최소 한 대씩 있을 만큼 풍요로워서 오히려 따분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때 한반도의 전승 소식은 미 국민들에게 자극제가 됐다. 특히나 공산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미 국민들은 미군의 북진을 환호했다. 전쟁터가 북한으로 옮겨지면서 남한 사람들은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결혼식과 장례식도 치루고 시장도 열렸다. 지난 넉 달 동안 전쟁이 남긴 상처를 복구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늘 다짐했던 한반도의 통일을 기대했다. 그 기대는 오랜 세월 외세의 간섭과 침입에 시달렸기 때문에 더욱 간절했다.
한국은 과거 때로는 중국, 때로는 일본, 때로는 러시아의 간섭을 받는 수모를 겪었다. 심지어 이들 나라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도 중국은 1000년 넘게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서인지 두 나라는 불교와 벼농사를 짓는 등 문화적으로 비슷한 점들이 많았다. 그러나 1950년 이 두 나라의 정치 체계는 완전히 달랐고 6.25동란은 이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남한의 국군과 중국의 공산군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충돌을 앞두고 있었다. 북한의 수도 평양으로 가는 길은 그칠 것이 없었고 유엔군은 각 부대별로 누가 먼저 평양에 도착하는지 경쟁했다.
북한은 평양 근처에 저지선을 구축했지만 유엔군의 파죽지세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미 제8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한지 열흘 만에 평양 입구에 도착했다. 뻥 뚫린 길을 바라보며 미군들은 몹시 들떴다. “맥아더 총사령관이 추수감사절을 고향에서 보내게 될 거라고 했고 우린 그 말을 믿었어요. 사기가 하늘을 찔렀죠." -카이젤 이등병. 미 제8군은 북한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평양에서 다시 북서쪽으로 전진했다. 북한의 마지막 주요 거점이었던 청천강을 건널 때는 승리가 바로 눈앞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너편에서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100여구의 미군 시체였다. 궁지에 몰린 북한이 최후의 발악으로 미군 포로들을 죽였던 것이다. 10월 24일 유엔결의안에 따라 맥아더 총사령관이 압록강까지 진격할 것을 명령한다. 완전한 승리가 곧 손에 잡힐 듯했다. 그러나 압록강에서 이들을 맞이한 것은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수십만 명의 중공군이었다. 1950년 10월 25일, 유엔군이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압록강으로 진격하던 유엔군 앞에 갑자기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중공군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중공군은 유엔군의 항공정찰을 피해 몰래 북한 산악지역에 잠입하여 숨어있었다. 이들의 기습공격에 유엔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당시 유엔군의 방어책은 항공 지원뿐이었다. 사방에서 몰려나오는 중공군에 맞서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대부분 전사하고 만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하늘을 찔렀던 유엔군의 사기는 급속도로 땅에 떨어졌다. “생존자들은 중국말을 들었다고 했고 우린 어떻게 된 일인지 몰랐어요. ‘할로윈 데이’였는데 날은 춥고 우린 꽁꽁 얼어있었죠. 앞이 캄캄했어요." -미 제19보병대 하사.
승전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던 극동사령부는 중국이 전면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워싱턴에 압록강의 국경수비대와 작은 마찰이 있었을 뿐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워커 중장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휘하 부대원들을 모두 청천강까지 후퇴시킨 다음 상황을 다시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이 순간 중공군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한쪽으로 들어가 숨어버린 것이다. 11월 내내 중공군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정찰기가 떴다. 그 결과 파악된 중공군의 수는 5만에서 10만 명으로 충분히 대적할 수 있는 규모였다.
그러나 사실은 45만 명이 더 있었다. 중공군은 위장술에 천재들이었다. 이들은 나뭇가지로 위장한 채 낮 동안 꼼짝 않고 숨어있었다. 그러면 아무리 정찰기가 위에서 자세히 관찰해도 중공군의 모습을 찾아내기란 힘들었다. 그렇게 11월도 거의 지나가고 유엔군은 크리스마스엔 고향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공군이 잠잠해지자 11월 24일 맥아더 총사령관은 다시 전진을 명령한다. 서부전선은 미 제8군이 맡았다. 미군은 하나의 대대라도 낙오되는 일이 없길 바라며 압록강으로 전진했다. 동부전선은 제10군단이 맡고 장진호 방향으로 전진했다.
첫날의 성과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조금이지만 모든 부대가 고루 전진했다. 그러나 다음날 전세는 뒤집어졌다. 미 제8군과 10군단 사이에는 허술한 빈틈이 있었는데 중공군이 이 지점을 집중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유엔군의 전선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다시 전쟁을 시작한 사흘 만에 유엔군은 전면 후퇴하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두 동강 난 것은 유엔군의 전선만이 아니었다. 혹독한 겨울과 무자비한 공산군 앞에서 유엔군의 사기도 두 동강이 났다. 1950년 11월말, 유엔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국제경찰로서 승승장구하며 북진하던 중,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부딪쳐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됐다.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이 격전을 치루는 동안 동부전선의 제10군단은 장진호로 북상 중이었다.
장진은 북한의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어 11월말인데도 추위가 살을 에는 듯했다. 수은주가 영하 40도까지 내려갔고 시속 60킬로미터의 강풍은 체감온도를 더욱 떨어트렸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었다. 엔진오일과 총이나 약은 물론 군인들의 손과 발도 얼었다. 땅은 어찌나 단단하게 얼어붙었는지 참호를 팔수조차 없었다.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눈싸움뿐이었다.
추수감사절을 보내기에 결코 이상적인 곳은 아니었지만 장병들은 현실을 받아들였다. “추수감사절 날 칠면조와 기타 음식이 나왔어요. 그런데 얼어버릴까 봐 빨리 먹어버려야 했죠. 소스와 감자가 맨 먼저 얼었어요. 후다닥 먹어치웠죠. 총알은 여전히 머리 위를 날아다녔고요." -의무병 데이비스. 추위와 적의 공격으로 미 제1보병사단의 고생은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군인들은 며칠째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먹는 것도 부실했으며 영하의 추위로 잠도 거의 자지 못했다. 그러나 해병대 정신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11월 27일 대공세에 나선다.
하지만 이미 서부전선의 유엔군이 밀리고 있는 가운데 이들의 운명은 밝지 못했다. 미 제1해병사단의 목표는 장진 서쪽으로 해서 북한 정부가 도피 중인 강계까지 가는 것이었다. 당시 유엔군은 매 지점에 주둔 중이었다. 우선 최전선은 장진호 북쪽의 유담리로 해병대 두 개 연대가, 두 번째 지점은 장진호 서쪽으로 3000명의 미 해병대가 주둔했다. 세 번째 지점인 고토리에는 미 보병대와 영 해병대 4200명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장진호 동쪽에 2500명의 보병이 있었다. 장진호 부근의 유엔군에 대한 보급은 불안정했다. 이미 장진호 이남은 철수 중이었기 때문이다.
장진호의 유엔군은 고립상태나 같았다. 따라서 원활한 보급을 위한 묘책이 필요했고 그래서 주목하게 된 것이 헬리콥터다. 헬리콥터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처음 전쟁에 투입된 이후 6.25동란 때는 눈부신 활약을 한다. 특히 한반도처럼 혹한으로 육상보급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더했다. 11월 27일 유담리의 미 해병대는 북상을 시도하지만 중공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다. 이에 즉시 미 해병대는 공세에서 수세로 작전을 바꾸고 유담리로 후퇴해 중공군의 공격에 대비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11월 28일 중공군 6개 사단 병력이 유담리를 공격한다.
이후 사흘 동안 치열한 전투가 계속된다. 미 해병대는 모든 화력을 동원해 중공군에 맞섰다. 동해의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포탄을 퍼부어댔지만 역부족이었다. 중공군이 미 해병대를 겹겹이 포위한 상태였고 살기 위해서는 이 여러 겹의 포위망을 하나씩 돌파해야 했다. 당시 사단장 스미스 장군의 말은 지금도 유명하다. “지금 우리는 후퇴하는 게 아니다.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한편 장진호 동편의 상황은 이보다 더욱 나빴다. 미 제7보병사단이 해발 1000미터가 넘는 고지에서 포위돼 완전 고립된 상태였다.
어느 쪽으로 나가려고 해도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겁에 질린 미군들이 장진호의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들거나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상당수 행방불명됐다.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방의 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특수임무부대가 조직됐다. 이들은 부상병을 실을 트럭만 챙기고 나머지 무기와 차량을 모두 파괴했다. 12월 1일, 탈출이 시작됐다. 사방에서 적의 탄환이 날아왔고 공군의 항공 근접지원으로 아군이 쏜 메이팜 탄까지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날아왔다. 특수임무부대가 앞선 관계로 포위망 돌파작전에 들어갔다.
포위망을 뚫고 나오던 제7보병사단은 중공군이 들끓는 마을에 도착한다. 이제 다른 곳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 정면으로 돌파해야 했다. 마을에 도착할 당시 2500명이었던 미 보병 가운데 살아남은 것은 1000명뿐이었다. 전우의 시체를 끌고나오기에도 부족한 숫자였다. 장진호전투는 2주간 계속됐고 유엔군은 간신히 안전한 곳으로 철수했다. 장진호전투는 현대 전쟁사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살인적인 추위와 무자비한 적 그리고 물샐 틈 없던 포위망을 뚫고나온 생존자들은 ‘초신표’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아주 적게 살아남았다는 뜻으로 '초신'은 '장진'의 일본식 표기다.
1950년 11월, 맥아더 총사령관은 유엔군이 무너지는 것을 애통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는 6.25동란이 자신의 마지막 전쟁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거의 손안에 들어왔던 승리가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맥아더의 실망감은 무척 컸고 그 화살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돌아갔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중국으로 진격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미국 전투기가 중국 전투기를 쫓아 중국 영토에 들어갈 수 없도록 했으며 전선에 투입하는 인원과 장비도 제한했다. 11월 28일 맥아더 사령관은 국방부에 이에 대한 불만을 보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선전포고도 없이 끼어든 중국과의 전쟁도 치루고 있습니다. 우리 사령부는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현재 상황은 우리의 능력과 통제권을 넘어섰습니다." -맥아더 총사령관. 그렇지 않아도 원만하지 못했던 트루먼과 맥아더의 관계는 유엔군이 열세에 몰리자 더욱 험악해졌다. 두 달 전에 물밀 듯이 북상했던 유엔군이 다시 쫓기듯이 남하해야 했다. 유엔군의 후퇴행렬은 북한 주민들의 합류로 거대하게 늘어났다.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탈북했다. 이들이 탈북을 결심한 데는 비행기를 통해서 뿌려진 전단지의 영향이 컸다.
전단지는 공산주의의 폐해를 알리고 자유세계의 안정된 생활모습을 선전했다. 공산정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북한 주민들에겐 솔깃한 얘기들이었다. 한편 중공군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유엔군의 사기는 밑바닥이었다. 당시 유엔군은 워싱턴의 소극적인 행태에 불만이 높았다. 전력으로 보면 분명히 적보다 우세한데 워싱턴의 제약으로 전력을 마음껏 쓸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전쟁에서 밀리고 있다고 이해했다. 만약 워싱턴의 제약이 없다면 크리스마스를 한국이 아닌 고향에서 맞이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크리스마스 이틀 전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차량사고로 죽는다. 낙동강 사수명령을 내리면서 여기서 더 후퇴하면 장례식을 치러주겠다던 그가 자신의 장례식을 먼저 치렀다. 후임으로 리지웨이 장군이 부임했다. 리지웨이는 맥아더 총사령관의 전승의지와 워싱턴 정가의 의견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수사단장으로 전투 현장에서 싸운 한편 워싱턴의 국방부에서도 일했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 입장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리지웨이 장군은 유엔군의 침체된 분위기를 보고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한눈에 봐도 아군은 자신감을 잃었어. 눈빛에도 발걸음에도 자신감이 없고 병장부터 위에 장군에 이르기까지 모두 침체되고 활기 넘치는 군대의 모습이나 공격상 같은 건 전혀 찾아볼 수가 없어.” -리지웨이 장군. 반면 중공군의 공세는 꺾일 줄 몰랐다. 새해가 시작될 무렵엔 38선을 넘어 서울을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서울 북쪽에 약간의 방어병력만 남기고 모두 한강 이남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한다. 방어병력을 남긴 건 잠시 적의 공세를 꺾으려는 의도였다. 중공군 7개 군단이 곧바로 서울을 향하여 진격해왔고 유엔군은 또다시 열세에 몰렸다.
1월 3일, 서울은 다시 적의 손에 들어갔고 다음 날인 1월 4일 유엔군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150여 킬로미터 떨어진 금강까지 후퇴했다. 바로 1.4후퇴였다. 넉 달 동안 수많은 사상자만 내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다행히 획기적인 의료체계로 많은 부상자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6.25동란이라고 하면 11년 동안 C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시트콤 시리즈 ‘메시’를 떠올린다. 메시는 이동육군외과병원의 영어 약자로 쉽게 말해 기동성을 갖춘 야전병원이다. 실제 6.25동란 중에 야전병원은 시트콤 메시에 웃기고 신나는 야전병원과는 달랐다.
실제 야전병원에선 바로 옆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의료진들은 살벌한 전투현장에서 일한 진정한 영웅들이었다. 야전병원은 6.25 때 일대 변신을 한다. 이때부터 전투현장 바로 옆에 설치됐고 언제라도 이동할 태세를 갖추게 된다. 역사상 전투현장과 가장 가까운 야전병원이 탄생한 것이다. “부상당한지 2시간 30여 분만에 병원침대에 누워있을 수 있다니 정말 놀랍네요. 전쟁터와 거리가 얼마나 되지요?” “에- 15킬로미터쯤 됩니다. 이 야전병원은 38선 인근이라는데 정말입니까? 수술실은 북한 땅, 수술 준비실은 남한 땅이죠. 준비실이 남한 땅이라고요?”
각 야전병원은 신속한 구조를 위해 헬리콥터가 배치돼 있었고 고급 의료진과 첨단 의료장비도 갖췄다. 이 야전병원의 기본 기능은 일명 미터볼수술이다. 미터볼수술이란 부상자가 후방에 제대로 된 병원으로 이송될 때까지 가능한 모든 외과조치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또 야전병원 시간에 대한 철칙이 있었다. 부상당한지 1시간 이내에 야전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신속한 수송수단이 있어야 했다. 한국은 지형이 험해서 차량과 기차보다는 헬리콥터 수송이 더 적당했다. 헬리콥터와 야전병원의 활약으로 수많은 부상병들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덕분에 6.25 부상병 수송비율은 제2차 세계대전보다 25% 높았다. 또 이런 형태의 야전병원은 베트남전과 걸프전의 전례가 됐다. “이쪽으로 와보니까 부상병을 엑스레이실로 옮기고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다리에 엑스레이 사진을 찍으러 갑니다.” "성함이?" "바비 그린입니다." "의사세요?" "아니오, 보조원이요." "아, 금방 다시 오나요? 어때요?" "아, 예 몇 분이면 끝나요. 여기 야전병원은 모든 30분 안에 수술을 결정해야 하니까요." 어쩌다 전투가 없을 때 야전병원은 시트콤 메시의 야전병원처럼 여유가 있었다. 여자 의료진들도 남자 의료진들과 함께 부상병들을 치료했었다.
1951년 후반 전쟁이 소강상태를 보이자 배구를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을 때우기엔 그저 그만이었다. 그러나 일단 부상병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의료진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40시간 동안 쉬지 않고 수술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가을 동안 하는 수술은 일반병원에서 1년 동안 하는 수술보다 더 많았다. 의료행위의 기준도 조금 달랐다. “우리의 목표는 부상병을 어떻게든 살려서 후방으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부상병의 손가락이나 팔다리도 중요하지만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잘라야 할 때는 잘랐죠. 우리는 다리 한쪽을 구하느라고 뒤에서 기다리는 부상병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 없었습니다." -후크 군의관. 6.25동란 중 야전병원의 활약은 눈부셨다. 유엔군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특별한 힘이 되어주었다. 부상병들은 야전병원에서 임시치료를 받고나면 후방의 병원으로 이송된다. 한편 부상이 경미한 부상병들은 다시 전선으로 나간다. 중공군의 공세가 계속되고 있어 한 명의 장병이라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6.25동란 컬러영상]
http://cafe.daum.net/goodsanzigi/AvVC/3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