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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날 서울클라이밍클럽 회원들과 함께 선인봉 박쥐길 첫피치 종료지점에서(왼쪽에서 두번째). |
“구곡폭은 같이 등반할 사람이 없어 빙 돌아 빙폭 위로 올라선 다음 줄을 내려놓곤 자기확보하면서 오르곤 했어요. 그렇게 빙벽등반에 몰입하면서 지내다 비슷한 상황이던 노덕호 선배를 만나 더욱 열심히 했죠. 그리곤 빙벽등반 입문 이태째인 88년 2월 둘이서 토왕빙폭과 소승폭에 도전했답니다.”
안강영씨는 “당시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그래도 무난히 올랐다”며, “요즘은 클라이머들이 실내인공암장에서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장비도 워낙 좋아지다 보니 빙벽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친구들도 둘이서 2시간이면 끝낸다”고 말한다.
그는 바위에 미쳐 전국암장순례에 나선 적도 있다. 88년부터 91년까지 4년간 전국 어디에건 새 암장이나 새 루트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리면 주말에 야간열차나 고속버스를 타고 달려갔다. 그리곤 일요일 내내 바위를 타곤 그 날 저녁 야간에 출발, 새벽녘 집에 도착해 아침밥 먹고 출근해도 피곤한 줄 몰랐다.
자유등반 붐이 절정에 이른 90년 자유등반협회 탄생을 주도한 그는 클라이머에 비해 인수봉에 루트가 너무 적다는 판단에 소속 회원들과 남면 루트 개척에 나선다. ‘꾸러기들의 합창’, ‘짬뽕’,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 당시 개척된 9개 루트 가운데 ‘아직도 생각중’(5.11a)은 그의 작품이다.
“예전엔 저 언더크랙 안에 박쥐가 살았어요. 오늘도 한 놈쯤 튀어나오지 않을까 모르겠네요. 조심해야 해요. 놀라서 떨어질 수 있으니까.”
오전 11시경 선인봉 전면 등반기점에 도착한 안강영씨는 마침 등반중인 바위사랑 회원들과 인사를 나눈 뒤 뒤이어 올라온 회원들에게 오늘 등반할 루트에 대해 설명해주곤 앞장서 올랐다. 7년만에 오르는 박쥐길인데도 그는 40대 중반의 나이답지 않게 유연한 몸놀림을 보여주었다.
91년 한국등산학교가 주도한 인수봉과 선인봉 암벽등급 조사에도 참가했던 안강영씨는 산에서 큰 슬픔을 두 번이나 겪었다. 특히 92년 9월6일 일어난 차선영씨(여·당시 29세)의 낙석 사고는 인생을 포기할 생각을 했을 만큼 충격적인 사고였다. 그 해 열린 전국 규모 스포츠클라이밍대회를 네 차례나 연거푸 석권하는 등 여성 클라이머로서 출중한 기량을 보여주던 차씨는 인수봉 남면 해우길 아래서 쉬고 있던 중 아미동길 상단에서 떨어진 낙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안강영씨와 그녀는 이듬해 봄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당시 부근의 루트에서 등반하다 약혼녀의 사고를 목격한 그는 미칠 것 같았다.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그는 얼마 뒤 당시 근무하던 서울시 하수종말처리장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스포츠클라이밍 발전하려면 선수 조기육성해야
“한 5년간 거의 매주 함께 산행해온 사이였어요. 선영씨는 가능성이 있었어요. 그래서 91년부터 등반대회에 나가는 것을 접어버리고 대신 선영씨 트레이닝을 위해 발 벗고 나섰죠. 사고 나던 해 봄엔 스포츠클라이밍에 더 열중하라고 회사를 그만두라 권했고요. 사표를 냈더니 직장 상사께서 그러지 말고 두어 달 쉬었다 나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병원에서 ‘정신적인 안정을 요한다’는 진단서를 받아 직장에 제출했죠. 그리곤 한 달간 방황하다 설악산에 들어가 한 달 지내면서 어느 정도 마음을 가라앉혔답니다.”
색소폰 바위 칸테루트. |
“급히 추락지점으로 갔더니 이미 숨을 거둔 직후였어요. 같은 하수처리사업소에 근무하다 사고 두 달 전 강북구청으로 전근 간 여자 후배였어요. 인생이 이렇게 허망할 수가 있나 싶더군요.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죠. 그래서 또 한 달간 병가를 내게 되었어요.”
그는 제1피치 등반을 끝내고 회원들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사이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곤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그 사고 후 선인봉에 잘 오게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고 때문에 산을 원망하거나 그만 다닐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산이 그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차선영씨와의 약속도 지켰다. 사고 이듬해 가을 동대문구 용두동에 개장한 실내인공암장인 서울클라이밍센터였다.
“14년 전 4,000만원 가까이 들어갔으니까 당시로선 꽤 큰 돈을 들인 셈이었죠. 그 때까지만 해도 서울시내에 실내인공암장은 노량진과 수유동 두 군데밖에 없었어요. 지역을 고려해 용두동에 세운 거예요. 당시 클라이머들의 아지트 역할을 톡톡히 했어요. 구미전자공고와 충주 중앙중 가금분교 학생들은 방학 때면 아예 한 달씩 묵고 지냈으니까요.”
안씨는 당시 최고의 클라이머인 이근택씨가 그 한 해 전부터 해오던 스포츠클라이밍 강습회를 실내암장에서 열도록 했으나, 이듬해 이씨가 개인사정으로 강습을 열 수 없게 되자 몇 해 공백기간을 갖다가 직접 나섰다. 98년부터 2000년까지 그가 실장으로서 운영해온 서울암벽교실을 거친 사람은 500명이 넘는다. 안강영씨는 “9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서울클라이밍센터의 역할에 대해서는 지금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며, “당시 퇴근하면 만사 젖혀놓고 암장을 달려가야 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서울암벽교실에 힘을 많이 쏟았다”고 말한다.
“3주간 인왕산 슬랩, 도봉산, 인수봉에서 실시한 초보자 대상 순수 암벽교실이었어요. 참가자 대부분 연령제한에 걸려 기존의 등산학교에 들어갈 수 없는 장년층이었어요. 나이 드신 분들이 조금이라도 더 배워보겠다고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모습을 보면 대강대강 할 수가 없었어요. 그 분들 중에 여러 해 동안 스포츠클라이밍에 심취해 지낸 분들도 여럿이었고요. 그게 보람이라면 보람이었죠.”
스포츠클라이밍이 자리 잡기 전인 90년대에 보수 산악인들과 흔히 ‘판때기’라 불리던 스포츠클라이머들 간의 깊은 골을 메우기 위해 애를 쓰기도 했던 그는 93년 서울시산악연맹 등반경기위원을 거쳐 95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11년간이나 대한산악연맹 스포츠클라이밍위원회(전 등반경기위원회) 총무를 맡았다. 그는 “번거로운 일이 수없이 많으면서도 칭찬보다 타박을 받을 적이 많았지만 그래도 스포츠클라이밍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 올해 초까지 해왔다”고 한다.
“관두고 나니까 더 열심히 못한 게 아쉬워요. 특히 좋은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요.”
스포츠클라이밍 지도자 1급 자격증 소지자인 안강영씨는 북한 산악인들을 가르친 적도 있다. 97년 당시 대한산악연맹은 민간교류차원에서 중국 베이징에서 보름간 북한 산악인 등반교육을 베풀었다.
“손정준씨와 함께 아시아산악연맹 스포츠클라이밍 코치 자격으로 기계체조 선수 출신 4명을 가르쳤어요. 직장에서 출국 허가를 받느라 안기부 요원의 힘을 구해야했고, 교육 이틀 뒤에는 우리를 이상하게 본 중국 대사관에 호출당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힘이 좋은 데다 몸이 유연해 잘 하더군요. 13일간 지내면서 사이도 좋았고요. 대산련에서는 잘 되면 북한에 인공암벽도 세우고, 국제대회도 유치할 계획이었어요. 아쉽게도 교육 직후 북한과 관계가 경색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죠.”
90년대 초부터 등반경기대회라면 암빙벽 가리지 않고 전국 어느 대회건 운영자로 참가해 온 그는 지난 8월 초 제1회 청도군수배 전국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때 감독관을 맡았고, 8월 마지막 주에는 부산에서 열리는 우정암벽대회에 참가한다.
“이제 제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 한들 5.14급 클라이머가 되겠어요? 대회에 나가 우승할 것도 아니고요. 그보다는 어린 클라이머들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 뿌듯하답니다. 아무튼 지방에서 대회를 여는 데 도움이 되어 달라하면 기꺼이 달려갑니다. 이번 우정대회에서는 강등되었어요. 감독관이 아닌 심판장이니까요. 아무튼 대회를 치르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일어나요. 요즘은 그런 일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선수들이 심판에 대한 불신으로 생기는 일이 가장 많았죠. 대개 선수들간에 지나친 경쟁심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지만요.”
감독관은 대한산악연맹 중앙연맹에서 파견, 대회가 공정하게 진행되는가 살펴보는 위치라면, 심판관은 해당 시도연맹이나 주최측에서 임명하는 자리다. 그는 94년 러시아 대회에서부터 2006년 중국 칭하이 대회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나 선수단을 이끌고 월드컵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직장에서 연가까지 내가면서 뭐 하러 이런 일을 하나 싶을 적도 있어요. 대개 귀국 후 잡무에 시달리기 때문이죠. 그러면서도 연맹에서 맡아달라 하면 또 해요. 책임감 때문이죠. 허탈할 적도 많아요. 세계 정상들과 수준 차이가 너무 커요. 국내 대회를 휩쓸고 있는 김자인은 얼마 전 열린 칭하이 월드컵에서 10위밖에 하지 못했어요. 남자 선수 중 최고인 손상원은 딱 한 번 7위에 오른 다음에는 10위권 안에 들지도 못하고요.”
안강영씨는 “스포츠클라이밍 선진국은 수준 높은 선수도 많고 선수층이 두터운 데 반해 우리는 선수층이 얇은 데다 수준에 따라 수직형을 이루고 있다”며, “일단 체격 조건에서 선진국 선수들에 비해 뒤지기는 하지만 사회생활체육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조기육성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해결책을 내놓는다.
“여자부가 특히 심해요. 초등부는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대학부로 올라갈수록 선수가 점점 줄어들어요. 세계의 흐름에 비해 우리는 발전 속도가 너무 늦어요. 중국만도 못하니까요. 경기등반은 스포츠 대회인데 주최측인 시도연맹에서 행사로 여기는 것도 문제고요. 육상이 달리는 선수가 가장 중요하듯이 스포츠클라이밍도 선수를 위한 대회를 열어야 해요.”
등반경기 발전에 힘쓰는 게 최상의 봉사
안강영씨는 고산등반뿐 아니라 해외원정 경험이 거의 없다. 장시간 직장을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나선 88년 에베레스트-로체 원정에 참가를 권유받기도 했지만 직장을 그만두면서 해외원정을 나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히말라야에 대한 꿈이 없을 리 있겠어요. 저 역시 산꾼인데-. 제게는 어려운 일이었어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공무원이 1주일 이상 휴가를 낸다는 게 어려웠잖아요. 오죽하면 외국 대회에 인솔자로 나갈 때도 연가를 내겠어요. 공적인 일인데 말이에요. 지난해 아내와 처음으로 히말라야를 가봤어요. 안나푸르나 트레킹이었죠. 지금 함께 산에 다니는 회원들과 흰 산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어요.”
선인봉 박쥐길 제2피치 언더크랙. |
등반을 시작하자마자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박쥐길 제2피치 등반을 마치고 하강, 오후 2시가 넘어 늦은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하산하려던 계획을 바꾸더니 회원들에게 “그래도 선인봉을 대표하는 표범길 첫 피치 맛은 봐야지”라며 씩 웃는다.
“스포츠클라이밍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산악활동이자 봉사이기 때문이에요. 산에 다니는 것처럼 열정을 바칠 수 있고요.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대회 핑계로 나태하게 지내는 게 아닌가 싶어졌어요. 그래서 요즘은 동행이 있든 없든 따지지 않고 대회가 없는 주말에는 산에 가요. 예전보다 더 열심히 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식사를 마친 뒤 기자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안강영씨는 회원들에게 한 마디 한다.
“뭣들 하세요. 등반 준비하지 않고. 그렇게 해서 표범 잡겠어요?
첫댓글 에휴~강영이형 이마에 주름살이 자글자글...세월은 어찌할 수 없네요...ㅋㄷㅋㄷ(>v<)
대마왕님 캐익 맛사지 매년 하셔야죠....ㅋㅋㅋ
ㅋㅋ 2피치 사진은 다리가 넘 짧아보여요...ㅋㅋ 그래도 행님!! 파이팅입니다요~~~..:D
몰랐는데...진짜 쏫다리네~ㅎㅎㅎ
안강영씨, 화이팅~~~~~~~~~~~~~!!!
제목보고 넘 놀랬네..ㅋㅋ
인터넷에서 보긴 했는데..멋있어요...^^
깡냉이형 배짼줄알았네...ㅋㅋㅋ
배 째라고 나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