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스 사와는 서른일곱 살이다. 그는 카레니 해방군에 소속되어 있다. 그는 전투를 앞두고는 언제든지 맹세하듯 중얼거린다. 『저들을 몽땅 요절내겠다』 저들 이란 물론 네윈 장군이 이끄는 미얀마 정부군을 가리킨다. 1966년에 버마 정부는 사와를 국비 장학생으로 뽑아 독일로 유학 보냈다. 그러나 그는 귀국하자마자 고향의 정글로 돌아와 게릴라가 되었다. 버마 정글의 커튼 뒤에서는 지금 진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폭격기, 헬리콥터, 탱크, 화염에 싸인 촌락, 학살되는 민간인, 밀림 속에서 소모되고 있는 소년병. 인간성에 대한 수많은 범죄들이 되풀이되고 있으나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1주일 관광 비자를 얻어 랭군을 찾는 구경꾼들은 미소와 정적과 파고다에 취할 것이다. 그것은 그러나 가면이다. 그 뒤에는 진짜 얼굴, 군벌·밀수꾼·마약 밀매자들의 제국(帝國)이 있다. 미얀마 정부군에 지원 입대하는 청년들은 먹을 것이 보장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들은 정글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 것도 모른다. 정부의 철저한 보도 관제 때문에. 그들은 정글에서 생전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전쟁과 만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죽어간다. 데이비드 사와는 좌절에 빠질 때가 가끔 있다. 그는 농담처럼 『중공에 손을 내밀어 볼까』라고 말한다. 세계에서 중공만이 이들 게릴라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곧 사와는 『그 말은 농담이었다』고 정색을 한다. 지난 78년 카레니 해방군의 지도자 탄형은 버마 공산당 게릴라 부대로 도망쳐 공산주의자로 徨銖晩値?
카레니 게릴라들은 어느 날 그를 붙들었다. 다음날 게릴라들은 한때 그들의 사령관이었던 그를 처형하였다. 카레니 게릴라들은 아편 밀무역자와 공산주의자들은 잡히는 족족 죽이고 있었다」 이 글은 지난 9월까지 KBS의 프랑스어 국제 방송 아나운서로 일했던 프랑스인 프리랜서 사진가 마크 살루엘 씨가 프랑스의 어느 잡지에 기고한 것이다. 전쟁 전문 사진가인 그는 지난 81년 12월∼82년5월 사이 여섯 달 동안 버마의 카레니 소수민족 게릴라 부대와 행동을 같이 하면서 긴박·처참한 전투 장면을 찍어 세계에 알린 30대 초반의 앳돼 보이는 사진 기자였다.
대대로 우익 집안 출신이라는 그는 기자에게 몇번이나 되풀이 해서 버마 정부의 잔혹과 부패, 그리고 좌익독재적 성향을 욕하고 소수 민족 게릴라들의 반공(反共)주의와 고독하며 영웅적인 독립 투쟁, 그리고 그 투쟁의 당위성을 설명하였다. 아웅산(옹산) 묘소 암살 폭파 사건 소식에 접했을 대 기자는 문득 버마 정글속의 그 지긋지긋한 싸움질을 상상해 보았다.
운명의 나팔소리 울리다
운명의 10월9일 아침 랭군에는 간간이 비가 뿌리고 있었다. 우기(雨期)가 끝나고 건기(乾期)로 막 넘어가려는 계절의 고비, 무더위랄 것도 없는 섭씨 25∼26도의 습기찬 날씨였다. 비는 아침이 지나면서 멎고 파아란 하늘이 보일 정도로 날씨는 청명하게 트이기 시작했다. 비뒤의 창공은 더욱 산뜻하게 느껴졌다. 오전10시(한국시간 낮12시30분) 조금 지나 전두환(全斗煥)대통령 서남아 순방 사절단의 서석준(徐錫俊)부총리 등 공식 수행원 일부가 숙소인 인야레이크 호텔을 출발했다. 중앙일보(中央日報) 송진혁(宋鎭赫)기자 등 수행 기자단의 대부분도 행동했다.
기자단의 다른 일부는 이순자(李順子)여사를 초대, 교민 부인들이 다과회를 열기로 되어 있는 영빈관으로 향했다. 호텔을 떠난 일행은 승용차나 버스편으로 아웅산 국립 묘소로 갔다. 10분 남짓 걸렸다. 일행을 태운 자동차는 묘소 경내 출입구를 지나 묘소 건물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버마의 문공장관이 5분쯤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서부총리와 김동휘(金東輝)상공부장관, 이기백(李基百)합참의장 등이 먼저 차에서 내려 나중에 도착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악수를 나누었다. 아웅산 묘소는 길다란 일(一)자 한옥(韓屋)기와집 모양이었다. 다만 기둥만 빙 둘러서서 지붕을 바치고 사방 벽이 바깥으로 터진 건물이었다. 높이 약5m의 천장은 목재(木材)타일로 되어 있었다. 바닥은 대리석, 그 주위를 따라 목책이 둘러져 있었다. 목책을 따라 원호를 그리듯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다.
아웅산(옹산) 장군의 석관묘(石棺墓) 같은 무덤은 이 건물 가운데 세로로 놓여 있었다. 그 좌우로 조금 작은 4기(基)씩의 국가 영웅들 무덤이 나란히 누워 있었고 뒷벽에는 묻힌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10시21분께 성병춘(成秉春)비서실장 등 청와대 비서관들이 묘소 앞에 도착했다. 성 비서실장은 영빈관에 머무르고 있었다. 서부총리가 맨앞에 서서 높이 약50㎝의 돌계단을 올라가 단상에 섰고 다른 수행원들도 그를 따라 단상에서 두 줄 횡대를 이루었다. 단상의 카피트가 너무나 깨끗하여 『구두를 벗고 다니는 모양이다』는 농담을 누군가가 했다.
취재 기자들은 계단 아래에서 묘소를 둘러보는 등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었고 MBC 카메라맨들과 한국·버마의 신문·통신사 사진 기자들은 수행원들의 표정과 묘소 안팎을 열심히 필름에 담고 있었다. 10시25분께 안경을 쓴 이계철(李啓哲) 주 버마 대사가 태극기를 앞에 단 승용차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묘소 앞에 당도했다. 그 때 수행원들은 이미 도열하고 있었으므로 이 대사는 줄을 선 사람들과 악수를 나눈 뒤 자기 자리에 가 섰다. 멀리서 보면 이 대사가 상급자인 것처럼 오인될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당시 묘소 안에서는 정면의 아웅산 묘소를 향해 첫줄에는 서석준부총리, 이범석(李範錫)외무, 김동휘 상공, 서상철(徐相喆)동자부장관 등 장관급 이상이, 그 뒷줄에는 최재욱(崔在旭) 청와대 공보 비서관 등의 수행원이 서 있었다. 제3열에는 기자들이 대체로 자유로운 자세로 서 있었다. 이 기자 줄 속에 있던 동아일보 최규철(崔圭徹)기자, 경향신문(京鄕新聞) 윤구(尹求)기자는 대통령의 도착 시각이 임박한 것 같아 돌계단을 통해 단하로 내려왔다. 이 대사가 줄 속으로 들어가 자리잡은 것과 거의 같은 시각이었다.
이 때 진혼 나팔소리가 짧게 한두 소절 들리다가 그쳤다. 진혼 나팔은 주빈이 참석한 직후 부는 것인데… 송 기자는 『아마 연습을 하는 모양이구나』고 생각하면서도 의아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옆에 있던 윤, 최 기자에게 『이상하지 않느냐』고 말을 걸었다. 최 기자도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이 버마의 관행이려니』 여기면서 묘소 바깥으로 약5m쯤 걸어 나왔을 때였다.
대폭발, 아수라장, 헬프미!
『탁』하는 굉음과 함께 시커먼 먼지 바람이 얼굴을 때리며 불꽃이 번쩍하는가 했더니 시야가 캄캄해졌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바닥에 엎드렸다. 그는 폭음이「꽝」「펑」하는 소리가 아니라 「탁」하는 둔탁한 것이어서 박격포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송 기자는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코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양쪽 뺨과 두 팔이 화끈했다. 몸이 공중에 뜨는가 싶더니 2∼3m쯤 뒤로 나동그라졌다.
폭발 순간 연합통신(聯合通信)의 최금영(崔琴煐) 사진부장은 참배 도열한 수행원들을 마주보는 위치, 즉 아웅산 장군의 석관 옆에서 카메라 거리 조준을 하고 있었다. 최 부장은 당시 두 대의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 니콘FE와 F3. FE에는 컬러 필름을, F3에는 흑백 필름을 끼워 놓고 있었다. 본격적인 촬영은 대통령 도착 뒤에 할 것이었지만 그는 촬영 각도를 점검할 겸해서 도열한 수행원들을 향해 FE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그는 FE를 바닥에 내려놓고 신문사 공급 사진용으로 쓸 흑백 사진을 찍기 위해 F3을 목에 걸었다. 그 때 뒤편에 있던 동아일보(東亞日報) 이중현(李重鉉)기자가 『키다리 선배님! 안 보입니다』고 소리쳤다. 최 부장은 쪼그리고 앉는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폭음이 울리고 그는 쓰러졌다. 자욱한 흙먼지, 신음과 비명의 아수라장 속에서도 최 부장은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목에 건 카메라를 들어올리려 했다. 그러나 양손 손가락들이 모두 부러져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슴에 파편을 맞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중현기자가 통나무에 깔린 채 신음하는 것을 보고 도와줘야겠다고 발을 떼려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온몸에서 피가 땀처럼 방울져 떨어졌다. 그리곤 곧 의식을 잃었다.
그의 카메라 2대는 누군가가 주워 호텔 프레스룸에 갖다 놓았다. 카메라는 파편을 맞아 벌집처럼 구멍이 나고 카메라 안의 필름통까지 최 부장이 흘린 피로 얼룩져 필름 상태가 나빴다. 연합통신 서울 본사에서는 며칠 뒤 인수한 FE 카메라에서 피묻은 필름을 뽑아 현상을 했다. 필름 양쪽 가장자리 부분을 제외하고는 광선을 받아 사진 제작이 불가능할 지경으로 뽀얗게 바래 있었다. 그러나 어렴풋하게 형체만은 알아볼 수 있는 필름이 하나 있었다. 이 컬러 필름을 흑백으로 인화하여 재복하니 그런 대로 알아볼 수 있는 흑백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사진은 10월15일에 연합통신에 의해 전국 신문에 배포되어 일제히 게재되었다. 폭발 참사 수초 전 앞줄의 각료급 인사들이 금방 닥칠 비극적 운명 앞에서 태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최재욱 청와대 공보 비서관은 둘째 줄 왼쪽 끝에 서 있었다. 『꽝』하는 폭음과 함께 머리에 심한 충격을 받고 쓰러졌다가 일어나 보니 주위는 연기와 먼지로 자욱했고 도열했던 수행원들은 모두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MBC 텔리비전의 보도국 카메라 취재부 임채헌(林彩憲), 이재은(李載銀) 두 기자는 『곧 대통령이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 묘소 바깥으로 대여섯 걸음을 옮겼을 때 등뒤에서 「꽝」하는 폭발음을 들었다. 『돌아다보니 먼지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엉겁결에 몇 걸음 뛰어 갔다가 다시 돌아보니 천장이 완전히 내려 앉았고 수행원들이 그 밑에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파묻힌 피투성이의 수행원들 가운데 반수는 즉사한 것 같았다.』 두 기자는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직업 정신을 잃지 않고 열심히 현장을 촬영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대 참극의 현장이었다. 무너져 내린 천장, 서까래, 카피트와 대리석 위를 적시는 선혈, 비명, 화약 냄새, 먼지, 연기…. 치명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피를 흘리면서 아웅산 묘소의 반대편 출구로 뛰쳐나갔다.
모든 것이 찰나 속에서 빚어졌다. 진혼 나팔 소리조차 듣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폭음도 기억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저 번쩍하는 섬광만 본 사람도 많았다. 송 기자는 두 묘소 경호원이 팔짱을 끼고 일으킬 때 겨우 정신을 차렸다. 구멍 뚫린 지붕, 깨어져 나가 바닥에 흩어진 대리석 장식물들, 시커멓게 타고 있는 서까래더미가 시야에 들어왔다. 웃몸을 무너진 천장 더미 속에 파묻힌 채 엎어져 있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찢어진 런닝 셔츠 차림으로 밖에서 대기중이던 승용차로 달려가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최규철 기자는 정신이 들자 묘소 바깥의 버마인 경호원들에게 『헬프 미!』라고 소리쳤다. 경호원들은 경계 자세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 대신 우리 경호원들이 민첩하게 움직여 죽거나 다친 사람들을 승용차에 싣기 시작했다.
한편 전두환 대통령은 묘소로부터 약4·8㎞ 떨어진 영빈관에서 예정보다 늦게 출발했다. 안내를 맡은 버마 외상이 늦게 도착한 때문이었다. 아웅산 국립묘소는 랭군시 번화가와 주택 지역 사이 구릉 지대에 자리잡고 있고 그 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을 향해 대통령 일행을 태운 차량 행렬이 다가가고 있을 때 폭발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 때 대통령 차량 행렬은 묘소에서 약1·5㎞ 떨어져 있었다. 그 1·5㎞는 바로 생과사의 간격이었고 버마 외상의 안내 지각이 만든 「불행중 다행」이었던 것이다.
묘소에서의 폭발음은 조용한 일요일 오전의 랭군시내를 울렸다. 주(駐)버마 일본(日本) 대사관의 좌구간희(佐久間喜) 참사관은 묘소로부터 북쪽으로 약6백m 지점에 살고 있었다. 『갑자기 꽈당하는 폭음이 들리면서 집채와 유리창이 진동했다. 놀라서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근처 주민들도 일제히 뛰쳐나와 무슨 일이냐고 웅성거렸다. 30분쯤 지나자 폭발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오후가 되어서야 피해자들이 한국 외교 사절임을 알게되었다』(조일신문(朝日新聞) 10월10일자).
육군병원 - 북새통속의 인간애
영빈관에서는 전대통령이 묘소로 출발한 직후인 오전 10시10분쯤 이순자여사가 다과회장으로 들어와 교민 부인들이 마련한 다과 모임이 시작되었다. 이순자여사가 간단하게 인사말을 끝낸 뒤 참석자들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비서관 한 사람이 들어와 『대통령께서 찾으신다』고 했다. 이 여사는 『지금 말인가요』라고 물은 뒤 비서관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주빈이 나간 뒤 한 시간이나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그 자리에 있던 이희익(李喜翼)여사(이계철 대사 부인)가 얼굴을 아는 어느 청와대 비서관에게 물었다. 『사고가 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사고냐』고 다그쳐도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부인네들은 영문을 몰라 궁금해하고 있는데 오전11시30분쯤 누군가가 『큰 사고다』 『아웅산 가는 길에 폭발물이 묻혔다』고 전해 주었다. 이희익 여사를 비롯한 부인들은 각각 집으로 돌아갔다. 이 여사는 『남편은 늘 대통령 곁에 있기 때문에 별일 없을 것이다』고 안심한 상태였다고 한다. 대사 관저로 돌아와 보니 우리 경호원 2명이 지키고 있었다. 『폭발 사고로 많은 사람이 다쳤다』고 경호원은 말했다. 이 여사는 교민 부인들에게 집에 있는 솜과 의약품을 병원으로 가져가자고 전화를 건 뒤 랭군시내 제2 육군 병원으로 달려갔다. 랭군시내 의료 상황을 잘 아는 이 여사였기 때문에 의약품 걱정부터 한 것이었다.
수십 명의 사상자들이 들이닥친 제2 육군 병원은 혼란에 빠졌다. 이 병원은 민간인들도 치료해 주는 곳인데 처음 사상자들이 밀려올 때는 의사도 보이지 않았다. 피투성이의 사상자들은 병원 바닥에 놓여졌고 여기 저기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위생병들이 나와 입원 중이던 버마 인들을 내보내고 부상자들을 병상에 눕히기 시작했다. 30분쯤이 지나서야 당직의사 2명이 나타났으나 의료 기재, 약품까지 달려 응급 처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교민, 수행원, 경제인들이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마이신 등 의약품을 내놓았다. 소독 약품이 모자라 물로 상처를 씻을 지경이었고 가위가 없어 붕대를 면도칼로 자르기도 했다. 버마 인들은 부상자들에게 『아이 엠 쏘리』를 연발하며 이안한 표정을 지었다.
3시간쯤 지나서 랭군시내병원의 의사·간호원들이 소집돼 몰려 오면서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되었다. 부상자 가운데 가장 상태가 중한 이기백 합참의장과 이기욱 재무부 차관이 먼저 수술실로 옮겨졌다. 다른 부상자들은 입원실 현장에서 바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작달막한 버마 여군 간호원들의 흰 가운은 어느새 땀과 피로 뒤범벅이 되고 있었다.
이 북새통 중에도 송진혁 기자는 직업 정신을 잊지 않았다. 얼굴과 양손에 2도 화상을 입고 발목을 다쳤던 송 기자는 병원으로 그를 찾아 달려온 김재혁씨(주식회사 한양(漢陽)의 회장 비서실장)에게 폭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김씨는 중앙일보기자 출신으로 뉴욕특파원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당시 그는 수행경제인단에 들어 있었는데 송 기자의 체험담을 정리, 중앙일보에 송고, 10일치 신문에 어떤 다른 매체보다도 자세한 폭발현장 기사를 실을 수 있게 했다. 그 다음날치 일본 신문들도 송기자의 송고 기사를 번역, 게재하였다.
대사 부인 이희익 여사가 제2 육군 병원에 도착해 보니 사망자들은 심한 화상을 입었거나 너무나 피격 정도가 지독하여 대부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양복 호주머니에 새겨진 이름이나 지갑 속의 명함을 보고 신원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사는 다른 부상자들을 돌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는데 사고 후 4시간쯤이 지나서야 대통령 비서관에게 『대사가 어디 있느냐』고 물을 여유가 생겼다. 선뜻 대답을 못하는 것을 보고 이 여사가 다그치자 『좀 다쳤다』는 것이었다. 부상자들 중에서는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든 이 여사는 시체 안치실로 뛰어갔다.
그러나 신원 확인이 쉽사리 되지가 않았다. 양말과 구두까지 뒤졌으나 찾을 수 없었다. 딸 혜영 양에게도 찾아보라고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오후 4시가 되자 누군가가 『대사가 죽었다』고 알려 주었다. 다시 시체 안치실로 들어가려는데 버마 헌병이 가로막았다. 아무리 사정해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마침 그 때 전두환 대통령이 산유 버마 대통령과 함께 병원에 도착, 부상자들을 위로하게 되었다. 전대통령은 이 여사에게 『음료수라도 들라』면서 마음을 우선 가라앉히도록 권했다. 이 여사는 얼마 뒤 시체 안치실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 시트로 덮인 시체 중 「이계철」이라고 쓰인 이름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여사는 끝내 남편 얼굴을 보지 못하고 말았는데 뒤에 이렇게 울먹였다. 『남편 얼굴을 차마 보여 주기 어려울 만큼 크게 다치셨던가 봐요. 관계자들의 말로 미루어 보면 대사는 병원으로 옮겨 진 후 4시간 정도는 운명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살아계신 모습을 몇 시간이나마 실컷 볼 수 있었다면…』
일요일 오후에 비보(悲報) 오다
아웅산묘소(墓所) 폭발 참사소식이 외무부에 전해진 것은 한국 시간으로 9일 오후 1시10분께였다. 폭발이 일어나고 10분쯤 지난 시각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과 때맞추어 외무부는 본부와의 신속·원활한 통신을 위해 버마 대사관에 외신관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이 외신관이 사건 제1보를 보낸 것이었다. 내용은 『경호상의 문제가 발생했으니 외무부 간부들은 대기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는 사건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무부 사령탑을 맡고 있던 노재원(盧載源)차관은 그날 방한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이탈리아의 거물 정객 안드레오티를 김포(金浦)공항에서 전송한 뒤 시내로 나와 점심을 먹고 있다가 카폰을 통해 버마참사 소식에 접했다. 그는 국·실장의 비상 소집을 지시한 뒤 정부 종합청사 9층 총리실로 올라갔다.
김상협(金相浹)총리가 참사소식을 들은 것은 오후2시 좀 지나서였다. 시내에서 일단 공관으로 돌아온 김총리는 총무처에 비상 국무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1차 비상국무회의는 오후3시20분께 부터 50분까지 총리 집무실에서 열렸다. 오후 3시에 김총리가 집무실에 들어선 데 이어 박종문(朴鍾汶)농수산, 이정오(李正五)과기처 장관, 노(盧)외무, 금진호(琴震鎬)상공부차관, 이희성(李熺性)교통부 장관, 김성배(金聖培)서울시장, 김정례(金正禮)보사부 장관, 조영길(趙英吉)총리 비서실장 등이 잇따라 도착했다. 연락이 잘 닿지 않았던 일부 국무위원들은 회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헐레벌떡 참석, 취재진에게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묻기도 했다.
국무회의가 끝난 뒤 이진희(李振羲)문공부 장관은 10층 중앙청 기자실을 찾아와 사건발생에 관해 간략한 첫 공식 발표를 했다. 이 장관은 발표를 마친 뒤 총리실로 다시 내려가 관계 국무위원들과 한 동안 논의를 한 뒤 오후 4시50분께 사상자 명단을 발표했다. 이 발표는 랭군發 사상자 수와 차이가 났는데 조금 뒤에 한국측 사망자 15명, 부상자 16명으로 바로잡혀졌다.
폭발 현장에 우리 기자들이 있었는데도 사건 기사를 본사로 보내는 데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랭군에서 통신 수단을 확보하기가 매우 곤란했다고 한다. S신문의 K기자가 가장 먼저 본사로 상황을 보고했다고 한다. 이날은 일요일이라 우리 나라 기자들은 거의 쉬고 있었으므로 오후3시께까지 상황을 모르고 있다가 텔리비전에서 오후 4시를 넘어 문공부 장관이 발표하는 것을 보고 상황을 알게 된 기자들도 많았다.
오후 4시 직전 문공부에서 각 언론사에 중대 발표가 있다고 연락을 취함으로써 종합 청사로 기자들이 몰리게 되었다. 이 폭발 사건은 랭군發 AP통신을 통해 제일 먼저 세계로 퍼져 나갔다. 오후 2시40분에 나간 이 1보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한 것이였다. 사망자가 생겼다는 내용은 없었다. 교오또오 통신 서울 지국 구로다 기자는 AP통신을 받은 일본본사로부터 확인 요청을 접수한 직후 텔리비전에서 이문공부 장관이 발표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 일본으로 송고했다. 오후4시 이후에는 세계 매스컴이 거의 서울발 외신을 받아 보도하기 시작했다.
군(軍)은 이날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에 전군(全軍)에 비상령을 내렸다. 외출과 외박을 금지시키고 외출나간 장병들은 귀대토록 했다. 치안 본부는 비상 국무회의가 열리기 15분 전인 오후2시45분 갑호 비상령을 내렸다. 이 비상령에 따라 비번, 휴가중인 경찰관들까지 비상 근무에 총동원되었다. 경찰은 신속하게 대처했다. 9월15일에 내려진 추석 비상근무령이 ASTA, IPU 총회로 이어지면서 해제되지 않고 있었던 데다가 경찰서장들이 집무실에서 24시간 대기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응이 빨랐다. 주요 관공서와 방송국 신문사 등 공공 기관에 제복 경찰이 배치되면서 한가하던 일요일 오후의 서울은 아연 긴장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오후 4시를 넘어서 일본의 매스컴은 서울발 기사로 이 테러 사건을 일제히 머리 기사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랭군에 특파원을 두지 못하고 있는 일본의 신문들은 서울발 기사로 주요 지면을 채우면서 랭군의 자국 대사관과 상사(商社)로 국제 전화를 걸어 그곳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전했다. 공동(共同)통신만이 랭군에 휴가 가 있던 하노이 특파원 이또 리끼시 기자를 이용할 수 있었다. 중공(中共)도 논평 없이 「랭군 참사」를 전했고 KAL기 격추 사건때와는 달리 북괴 평양 방송도 재빨리 이 사건을 보도했다. 소련에 의해 동포2백69명이 살륙되었을 때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북괴가 모든 선전 기관을 동원, 『폭탄 세례를 받았다』는 식의 악담으로 동족의 비극에 환호성을 지른 것, 그 자체가 비극이었다.
일본의 매일신문(每日新聞)은 10일자 사회면에서 『아이고 서울, 또야!』라는 커트제목을 뽑고 비극이 겹친 서울의 표정을 꼼꼼하게 전달했다. KAL 격추 뉴스 때는 워싱턴과 동경(東京)이 주된 뉴스공급원이 되었으나 이번 참사에서는 랭군보다도 서울이 핵심 뉴스 공급처가 되었다. 그것은 랭군에 외신 기자들이 많이 주재하고 있지 않은 데다가 버마 당국의 엄격한 보도 관제와 취재 제한으로 1차적인 소스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보 기관도 미얀마에서만은 정보 수집 네트웍이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히려 동남아의 정보 센터인 방콕이 랭군을 앞지르는 뉴스 공급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의 방송·신문·통신사는 이날 오후 기자들을 비상 소집, 호외를 연달아 내면서 철야 근무 체제로 돌입했다. 우리 언론은 전두환 대통령이 랭군에서, 사과 겸 위문 차 영빈관으로 방문한 산유 버마 대통령에게 『이번 사건은 북괴의 소행이다』고 밝힌 것을 크게 보도하면서 북괴의 범행으로 처음부터 단정하고 나왔다.
강자(强者) 네윈, 용서를 빌다
랭군의 영빈관으로 버마 대통령 우 산유가 허겁지겁 달려와 『뭐라고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고 사과한 것은 10월9일 오전 11시50분(현지 시간)쯤, 폭발 1시간20분 뒤였다. 이 자리에서 전대통령은 부상자들에 대한 신속, 완벽한 치료와 사망자들의 조속한 본국운구, 범인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요구, 다짐을 받았다. 오후3시40분께 전대통령은 산 유 대통령의 안내로 제2 육군 병원을 방문, 시체 안치실에서 분향하고 부상자들을 위로한 뒤 영빈관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전대통령은 한 거물의 이례적인 방문을 받았다. 바로 버마 실권자인, 사회주의계획당의장 네윈이었다.
네윈은 이 자리에서 『저의 사죄의 말씀을 받아 주십시오. 이번 불상사로 대한민국이 입은 피해를 보상하기에는 무슨 말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버마 정부와 국가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고 70대의 노 정치가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여기서 잠깐 네윈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네윈은 오늘의 버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버마의 정치구조는 이렇게 되어 있다. 네윈은 의장으로서 사회주의 계획당을 통솔하고 당은 군을 관할하며 군은 행정부를 통제한다. 소련처럼 15명으로 구성된 당 정치국이 최고의 국가 통치 기관이다. 네윈은 얼마 전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나 변함없이 실권자로 남아 있다. 지난 62년 무혈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22년째 철권 통치를 계속하고 있는데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최근 그는 한밤중에 자택에서 뛰쳐나와 직접 젊은이들의 팝송 파티를 해산시킨 적이 있다. 또 랭군의 어느 골프장에선 중국계 버마인과 시비를 하다가 주먹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난 5월 네윈은 이번 폭발 참사와도 간접적인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숙청을 단행했다. 당내 서열 3위인 당 사무총장 틴우를 해임한 것이었다. 틴우의 직접 사임 이유는 그가 전(前)국가 정보국장이며 자신의 계열인 보위 장군의 부인이 보석 밀수에 관련됐을 때 보위 장군을 감싸고 돌았다는 것이었다. 실제 숙청 이유는 틴우 총장이 네윈의 후계자로 두각을 나타내는 데 위협을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네윈은 끊임없이 제2인자를 제거하면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유지하였다. 틴우 총장은 1950년대 미국 정보기관에서 정보 장교 교육을 받은 뒤 네윈의 부관으로서 그 뒤 27년 동안 네윈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 일해 왔으며 주로 군정보 기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틴우의 두 형은 전장에서 죽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특별히 네윈에게 부탁하여 틴우는 대(對) 게릴라 전선 지휘관을 한번도 맡지 않고 줄곧 정보 기관에만 있었다고 한다.
틴우는 버마 군 정보국을 동남아에서 가장 유능한 정보 기관으로 키웠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 CIA에서 교육받은 전력으로 해서 친미파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이번 아웅산 참사를 버마 정보 기관이 사전에 예방하지 못한 것도 틴우-보니 인맥의 숙청으로 군정보국이 대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란 분석이 유력하다. 어쨌든 미얀마의 강자 네윈이 직접 전 대통령에게 수사에 대한 적극 자세를 천명함으로써 버마 치안 당국이 일부의 우려대로 적당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했다. 전 대통령은 9일 오후4시15분 랭군 공항에 도착, 철저한 수사를 당부하는 출발 성명을 발표한 뒤 KAL특별기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전대통령은 10일새벽3시4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상복을 입은 김상협 총리 등 국무위원들의 영접을 받았다.
이기욱(李基旭)차관마저 운명하고
전 대통령은 귀국 성명을 발표한 뒤 청와대로 직행, 새벽5시10분 비상 국무회의를 열고 부상자와 사망자들의 조속한 귀국처리를 지시했다. 이 지시에 따라 대한항공 DC10 특별기가 랭군으로 비행, 10일 오전4시쯤(현지 시간) 랭군에 도착했다. 장경식(張慶植) 국립 의료원장은 의료단을 이끌고 제2 육군 병원으로 갔다. 우리 부상자들에 대한 치료 상태는 「형편없었다」. 환자들의 상태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버마 관리들은 회의를 한 뒤 우리 의료단이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으나 시간만 끌었다. 장 원장은 회의의 중단을 요구, 급한 대로 부상자들을 살펴보았다. 기본 약품인 알콜과 탈지면이 모자라 너댓번씩 사용한 정도였고 부상자들은 한결같이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우리 의료진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기욱 차관(당시 생존)의 경우, 상태가 너무나 중했다.
의료단은 부상 상태가 심하지 않은 것으로 믿고 곧바로 기내로 옮길 작정이었고 그래서 수술 도구도 기내에 두고 왔었다. 이 차관의 호흡은 약해지며 갑자기 위급한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병원엔 인공호흡기도, 혈액 검사 기재도 없었다. 2시간 동안 수배를 한 끝에 겨우 낡은 인공 호흡기를 하나 가져왔다. 이 차관은 인공 호흡기의 도움으로 병세가 약간 호전되었으나 병원기(機)가 아닌 KAL 특별기로는 후송이 위험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미군측이 C9A 병원기를 내 이 차관과 이기백 대장을 필리핀 클라크 미 공군 기지로 후송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 차관은 10월13일 새벽 클라크 기지 병원에서 부인과 친지 등이 지켜 보는 가운데 운명하고 말았다. 이로써 순직자는 모두 17명으로 늘어난 것이었다. 부상자 11명을 태운 특별기는 10일 밤9시15분에 김포로 돌아왔다. 10월11일 하오5시엔 KAL 특별기가 16위의 순직자 유해를 싣고 랭군에서 김포로 말없이 귀환, 서울대병원에 안치되었다가 부슬비 내리는 13일 합동 국민장으로 국립 묘지에 묻혔다.
첫댓글 아무도 기억안하는 ㅠ.ㅠ
벌써 20년이나 흘렀군요.잊지못할 너무나도 슬픈 우리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