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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오유신(吳有信)
1944년 항일전쟁 7년째를 맞이하여, 각 정치세력 새롭게 판을 짜고 있을 때, 중국은 명나라멸망 300주년기념일을 맞이한다. 당시 중국의 내외정치환경은 이제 막 만청외족통치를 무너뜨린지 얼마 되지 않았고, 새로운 외적이 다시 문앞까지 쳐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국면이 명나라말기와 상당히 비슷했다. 숭정제(崇政帝)와 유사한 장개석(蔣介石), 그리고 이자성(李自成)과 비슷한 모택동(毛澤東), 그리고 오삼계(吳三桂)와 비슷한 왕정위(汪精衛), 그리고 만청(滿淸)과 비슷한 일본인까지.
선전을 잘 하던 공산당이 영도하는 좌파문인들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다. 그리하여, 교관화(喬冠華), 전백찬(翦伯贊)은 곽말약(郭沫若)을 찾아가서 상의를 한 다음 곽말약이 시사를 풍자하는 기념글을 쓰기로 결정한다.
한달 후, <갑신삼백년제(甲申三百年祭)>라는 장문의 글이 중경의 신화일보(新華日報)에 실린다. 이 글의 시사에 대한 효과와 정치적 영향은 비견할 만한 것이 많지 않다. 다만 학술적 가치는 의문스럽다. 아마도 곽막략의 사론글 중에서는 수준이 별로 높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곽말약은 주로 두 가지 사건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명나라의 멸망이고, 다른 하나는 대순(大順)의 멸망이다. 명나라의 멸망에 대하여 곽말약은 두 가지 원인을 들었다. 천재와 인재이다. 이건 그다지 새로운 이론도 아니다. 그러나 곽말약의 주장에 따르면, 명나라의 멸망은 인위적인 요소외에 숭정의 운이 너무 좋지 않았다는 것도 중요원인이라고 했다.
대순이 흥기한 것에 대하여 곽말약은 주로 "이공자(李公子)"라는 "기현(杞縣)의 거인(擧人) 이신(李信, 이암으로 개명하기 전의 이름임)"이 가담했기 때문에, "농민혁명운동에 제 궤도를 찾아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순의 멸망은 바로 이자성이 이암(李岩)의 권고를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억울하게 죽여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곽말약이 이런 주장을 펼친 것에는 그 자신의 기호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고, 시정을 꼬집을 필요가 있었던 점도 있지만, 어느 정도 근거도 있다.
사실은 도대체 어떠했을까? 이건 먼저 이암의 신세내력부터 얘기해야 한다.
이암이라는 사람은 <명사>의 기록으로 보면 아주 극적인 삶을 살았다. 진실한 역사인물같지가 않고, 오히려 <모란정>, <서상기>에 나오는 재자가인같은 소설주인공같은 인물이다. 그의 그런 희극성으로 인하여 곽말약은 그를 역사극무대에 끌어내고 싶어했었다. <명사. 유구전>에는 이암의 신세내력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신(李信)이라고 불리는 기현의 거인이 있는데, 엄당(閹黨, 위충현의 당)사건의 병부상서 이정백(李精白)의 아들이다. 일찌기 자신의 집안의 양식을 풀어서 굶주린 이재민을 구휼한 바 있어 농민들이 그를 찬양하며, '이공자가 우리 목숨을 살렸다'고 한 바 있다. 그때 마침 잡기예인인 홍낭자(紅娘子)가 모반을 일으키는데, 이신을 납치해 가서 강제로 그와 결혼한다. 이신은 겨우 도망쳐 돌아왔는데, 관청에서는 그가 도적과 내통한 것으로 보고 그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홍낭자가 와서 감옥을 부수고 그를 구해낸다. 이재민들도 호응하여, 이신을 구해서 도망친다."
이어서 그와 우금성(牛金星), 송헌책(宋獻策)이 함께 이자성의 농민군에 가담하는 상황을 소개한다:
"노씨현(盧氏縣)의 거인 우금성은 죄를 지어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자성에 투신하여 그의 주요 모사가 된다. 몰래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사람들에게 고발당하여 관청에 붙잡혀 사형으로 처벌받을 터였다. 나중에 감형되어 사형은 면한다. 그리하여 이암과 함께 이자성에 투신한다. 이자성은 크게 기뻐하며, 이신의 이름을 이암으로 개명시킨다.우금성은 점괘에 능통한 송헌책을 추천했다. 송헌책은 키가 세자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자성을 보자 참기(讖記)를 하나 올리는데, "십팔자, 주신기(十八子, 主神器)"라고 적혀 있었다. 이자성은 더욱 기뻐하였다. 이암은 이자성에게 말하기를 "천하를 얻는 것은 인심을 얻는 것이 기본입니다. 함부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마시고, 인심을 얻으십시오". 이자성은 그의 말을 듣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최대한 줄인다. 그리고 약탈한 재물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누어준다. 도움을 받은 백성들은 이암인지 이자성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묶어서 "이공자가 우리를 구했다"고 말한다. 이암은 다시 노래를 만들어 아동들에게 부르게 했는데, "영틈왕(迎闖王), 불납량(不納糧)"이다(틈왕은 이자성을 가리키고, 이자성을 맞이하면 양식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자성을 따르는 무리가 점점 더 많아졌다."
그외에 일부 야사에 따르면 이암에게는 이모(李牟)라는 형제가 있었는데, 같이 이자성의 군영에서 일했다고 한다. 명사에 따르면, "칠년봄, 이자성은 형의 아들인 이과(李過)와 이모(李牟), 유빈(兪彬), 백광은(白廣恩), 이쌍희(李雙喜), 고군은(顧君恩), 고걸(高傑)등과 스스로 군대를 이룬다." 이를 보면, 이모는 이자성의 농민군에 일찌감치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명사>의 이런 기록은 당연히 믿을 만한 공식문건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전의 또도는 이야기, 민간소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중 비교적 일찌감치 세상에 나오고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것은 호로도인(葫蘆道人)과 서오나도인(西吳懶道人)이 쓴 시사소설 <초틈소설(剿闖小設)>이다.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은 이자성이 북경에 진입하고, 오삼계가 청군을 끌어들여 이자성을 격파한 이야기이다. 그중 이암의 사적이 아주 많이 기록되어 있고,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를 보면 이암은 확실히 민간에서 큰 영향력과 명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뒷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하여 약간 더하고 빼서 점차 이암이라는 희극화된 인물을 만들어 냈고, 엄숙한 역사서를 기술하는 사람들마저도 따라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중에는 <원원곡(圓圓曲)>을 쓴 대시인 오매촌(吳梅村)도 있다. 그가 지은 <수구기략(綏寇紀略)>에는 처음으로 홍낭자와의 사랑이야기가 실리게 된다.
중국은 비록 세계에서 역사경험을 가장 중시하는 민족이고, 세계에서 가장 상세한 역사기록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주로 제왕장상과 사대부의 역사이다. 일반백성이 반란을 일으킨 이야기는 아무도 따라다니면서 그 내용을 써놓지 않는다. 들리는 소문을 모아서 쓰게 되고, 결국은 사실로부터 갈수록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기현거인"과 "병부상서 이정백의 아들"이라는 단서를 가지고 이암의 신세내력을 고증해 보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리하여, 이암의 신세내력문제는 역사상 유명한 '거짓역사적발' 사례가 된다. 일부 저명한 역사학자들 예를 들어 고성(顧誠)같은 사람은 아예 이암이 진실한 역사인물이라는 것까지 부인한다. 그는 그저 소설가가 창작해낸 문학적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은 도대체 어떠할까?
호적(胡適)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역사는 마음대로 단장할 수 있는 어린 여자이다. 어떤 사람은 호적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풍우란(馮友蘭)이 한 말이라고 반박한다. 나중에 또 어떤 사람은 풍우란도 그렇게 얘기한 적은 없으며, 그저 풍우란은 호적이 그렇게 말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기실 호적이 그런 말을 했는지 아닌지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견해에 동의하느냐 여부이다. 즉 역사의 서술은 지금까지 서술자의 입장과 방법을 벗어나지 못했고, 진상은 그저 신앙 속에서나 존재한다. 그래서, 이 문제에 있어서는 호로도인이 확실히 아무런 사실적 근거없이 이암의 이미지를 창작해낸 것이라면, 그는 도대체 왜 그렇게 하였을까? 곽말약이 이공자 이암의 이미지를 인정했다면 그는 또 왜 그렇게 하였을까? 고성은 이맘이 진실로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것을 부정하였는데, 그는 또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확실히 마지막 문제는 대답하기가 쉽다. 고성이 채용한 것은 법률상의 무죄추정원칙이다. 합리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이암이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는한 이암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방법은 '오컴의 면도날원리'에 부합한다. 그리고 아주 과학적으로 보이고, 이성과 지혜가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대담가설, 소심구증(大膽假設, 小心求證)"(가설은 대담하게 세우되 증명은 꼼꼼하게 한다)이후에 우리는 "대담가설, 소심추론(大膽假設, 小心推論)"도 가능할 것이다. 만일 이암은 확실히 문학적으로 창작된 인물이라면, 난세에 많은 백성들의 빈부균등에 대한 갈망을 대표하고, 보통선비계층의 인정(仁政)과 안정, 그리고 조화사회에 대한 바램을 대표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순군에 포로로 잡힌 명나라의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조사금(趙士錦) 진사(進士)는 말끝마다 도적이라고 부르는 반란군 지도자에 대하여 무슨 이미지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1644년에 쓴 <갑신기사(甲申紀事)>에는 이암(李巖)이 언급되어 있다. 내용이 많지도 않고, 어투도 중립적이었다. 그렇다면 이암이 농민군내에서의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내용도 적고, 어투도 중립적이어서 오히려 더욱 귀한 것이고, 이암은 실존인물이 아니라는 설에 대한 유력한 반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암이 만일 정말 실존하지 않았따면, 엄숙한 사가가 어찌 경솔하게 그의 전기고사를 당당하게 정사에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실제로 현재 이 이슈는 사후제갈량인 셈이다. 일찌기 2002년에 하남성 백애현 당촌 이씨가족이 족보를 중수할 때, 강희54년에 편찬된 옛날 족보초록에서 이암의 종적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암의 신세내력에 대한 수수께끼는 이미 그때 진상이 드러났다. 현재 이것을 다시 꺼내는 것은 흥미를 느끼는 부분이 이암의 신세내력 자체가 아니라, 왜 신분을 위조한 이암이 나타났고, 어떻게 위조했느냐인 것이다. 그것이 진실한 이암과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그리고, 이암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 정말 대순의 생사존망이 걸릴 정도였는지, 아니면 그저 사람들이 대순왕조의 멸망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인지이다.
먼저 간단히 이씨족보에 있는 이암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강희55년의 이씨족보기록에 따르면, 이씨가족의 조상은 원래 산서성 홍동현에 거주했다. 명나라초기 중원일대가 전란으로 인구가 희소하고, 토지가 황무지화되어, 주원장은 신속히 생산을 회복하기 위하여, 산서의 인구조밀지역에서 하남으로 이주시킨다. 관청은 산서성 홍동현과 하남성 박애현에 각각 전문기구를 두어 이주절차를 진행했다. 박애현 당촌의 이씨가족의 선조와 온현 진가구의 선조는 같은 해에 산서에서 하남으로 이주했다. 도중에 서로를 알게 되고 결의형제를 맺는다. 박애현 천재사는 공식 이주장소였다. 이씨와 진씨가족은 하남에 도착한 후 각각 박애현과 온현에 거주하게 되고,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사이좋게 지낸다. 명초에서 청초까지 삼백여년간 이런 관계는 지속된다.
이씨족보에는 <가보일지십이세(家譜一至十二世)>에 이씨가족구성원의 이력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이암과 이모에 대한 부분은 이러하다.
"이신(李信), 자는 암(岩), 이름은 위(威)이다. 배우자는 진씨(陳氏), 공씨(孔氏)이다. 항렬은 네번째이고, 아들 원빈(元斌)은 어려서 요절한다. 공생(貢生)이고, 만력34년에 태어났으며, 숭정17년에 죽었다. 부친에 의지하여 공부를 했고 나중에 형 중(仲), 진가구의 고종사촌동생 진주정(陳奏廷)과 천재사, 삼성문, 태극궁에서 스승을 모시고 결의형제를 맺는다. 문무에 뜻을 두고 쌍걸로 이름을 날린다. 태극양생공, 십삼세권검전예를 만들어 여러 성에 전파한다. 진주정이 과거시험에서 불공정한 일을 당한 것으로 시험관을 구타하여 죽인 사건으로 도망치게 된다. 개봉 기성의 이모집으로 가서 권법을 전수한다. 그후 숙부 춘옥의 양행(糧行)에서 회계를 책임진다...양행이 파산하고, 다시 천재사로 들어가 권법을 수련한다. 숭정13년, 당제(堂弟) 이모(李牟)가 권유하여 틈적(이자성)의 영장이 된다. 숭정17년 도적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다. 처는 불가에 귀의하고, 형 중의 넷째아들 원선(元善)이 그의 제사를 잇는다."
이암을 이자성의 농민군에 끌여들인 이모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모, 자는 목(沐), 배우자는 양씨(楊氏), 아들 회공(懷功), 상생(庠生)을 두었다. 항열은 둘째이다. 문무를 모두 익혔고, 숭정7년 부친 자기(自奇)를 따라 섬서, 산서에서 권법을 전수한다. 틈적의 군영에 들어가 장수가 된다. 숭정17년 틈적에게 살해당한다. 처는 불교에 귀의하고, 아들 회공은 이모의 당형 이중의 절강준부무당에서 권법을 배워 권법스승이 되고, 복건으로 가서 권법을 전수하며 살아간다."
이암과 함께 이자성의 농민군에 들어간 둘째형 이중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중, 자는 봉(峰), 호는 중원(仲元), 가명은 대량(大亮), 배우자는 양씨(楊氏), 항열을 둘째이며, 아들 다섯을 낳는다. 장남이 원흠(元欽), 차남이 원신(元臣), 삼남이 점오(占鰲), 사남이 원선(元善), 오남이 원명(元明)이다. 공생(貢生)이며, 만력26년에 태어나, 강희28년에 죽는다. 천계연간 하내학부에서 공부했고, 문무를 모두 익힌다. 동생 이신과 진가구의 고종사촌 진주정과 함께 천재사에서 스승을 모시고 권법을 배우면서, 진주정이 과거시험을 치는 것을 돕는다. 시험관의 불공정에 시험관을 때려서 죽이는 일에 참여하여 공생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기현의 이모집으로 도망쳐 권법을 전수했고, 나중에 당제 이모의 권유로 틈장의 군영에 들어가 장수가 된다. 나중에 이신이 억울하게 피살당하자 그는 부대를 떠나, 절강의 동생 준이 집으로 가서 권법을 전수하며 지낸다.
족보의 서문을 보면, 족보는 이중의 아들이자 이암의 양자인 이원선이 강희55년(1715년)에 편찬했다. 이중은 이암의 둘째형이다. 일찌기 이암, 이모와 함께 대순군에 들어가 있었다. 이암, 이모가 죽은 후, 셋째동쟁 이준에게 가서 권법을 가르치다가 강희28년에 사망했다. 이를 보면 이암, 이모의 이자성군영에서의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이중일 것이고, 이원선은 바로 이중의 아들이니, 이원선이 편찬한 이암, 이모의 평생내력은 아주 믿을만하다고 할 것이다.
곽말약은 숭정제가 운이 좋지 않다고 했는데, 확실히 그러하다. 숭정제가 등극하자마자 섬서의 농민이 반란을 일으키고, 농민반란은 그가 죽은 후에 비로소 그들은 연명항청하게 된다. 그전에 전국각지의 가뭄과 메뚜기떼로 인한 재해가 끊이지 않았으며, 갈수록 심해졌다. 더욱 치명적인 점은 변방에도 우환이 커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주족이 수시로 쳐들어오고, 안팎으로 대응하느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농민군은 원래 재난을 당한 백성들로 구성되었다. 그저 약탈하여 먹고 살기 위함이었다. 관청과 싸우는 것은 살기위해서였지, 무슨 혁명이상이나 혁명주장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런 유구(流寇)는 소탕할래야 소탕할 수도 없다. 그래서 처음에 관청에서는 안무(安撫)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다독이는데 드는 돈이 아까웠고, 결국 이들을 구휼하는 은량은 배수거신이었다. 그리하여 이쪽을 초안하고 나면 저쪽에서 다시 깃발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면 할 수 없이 다시 소탕에 나서야 했다. 농민군의 입장을 보면, 장기적인 계획같은 것은 없다. 그들은 그저 메뚜기떼처럼 이러저리 흘러다니면서 싸운다. 어떤 때는 초안에 응했다가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수시로 투항했다가 다시 반란에 가담한다. 이렇게 관청과 십여년을 지낸다. 섬서에서 시작하여 산서, 하남, 다시 호남, 강서, 파촉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점거한 지역은 갈수록 늘어났다. 그러나 지켜내는 것은 없었다. 유일한 수확이라면, 10여년의 전투를 통해, 중요한 농민군의 지도자들은 군사적으로 단련되었을 뿐아니라, 점점 대명왕조의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뜻을 세우게 된다. 만일 이전에는 그들이 연작(燕雀)에 불과했다면, 이제 그들은 홍곡(鴻鵠)이 된 것이다.
이 점은 다음의 사실로도 알 수가 있다. 숭정10년, 장헌충이 곡성에서 웅문찬(熊文燦)에게 투항한다. 그러나 부대를 해산하지도 않고, 몰래 병력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12년 여름, 장헌충은 다시 반명의 기치를 내건다. 이자성은 섬서총독 정숭검(鄭崇儉)의 포위망에서 도망친 후 장헌충에 의탁한다. 그때 하마터면 장헌충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다. 장헌충은 왜 같은 농민형제이자 옛날의 맹우인 그를 죽이려 했을까? 원인은 오직 하나이다. 이자성이 향후 자신이 천하를 차지하는데 적수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년후 이자성은 나여재(羅汝才)를 죽이고, 이암(李岩)을 죽이고 하마터면 곤경에 빠저 자신에게 의탁해온 장헌충도 죽일뻔한다. 이 모든 것은 같은 이치이다.
곽말약은 <갑신삼백년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남은 십년, 십일년, 십이년의 황재(蝗災), 한재(旱災)를 겪은 후, 다시 한번 황재가 닥친다." 그리하여 사람이 사람을 먹고, 풀과 나무까지 모두 먹어버리며, 토비가 사방에서 일어난다." "이는 이자성의 세력에서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작풍에서도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십삼년이후의 이자성은 십삼년이전과 달라졌다, 다른 유구들들은 크게 이상하게 여긴다. " "세력의 변화로 다수의 기민들이 참가하고, 작풍의 변화는 각종 사적에서 모두 한 사람 '기현거인이신'의 참가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실 작풍의 변화는 반드시 이암이 등장해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뜻이 이미 이전처럼 유구의 두령이 아니라, 일대개국군주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자성은 누구를 만나더라도 바뀌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암의 인심을 거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이자성이 받아들일 리가 없는 것이다.
명사는 이런 내용도 기록하고 있다. 이자성이 장헌충에게서 벗어나 도망친 후, 양사창(楊嗣昌)의 관군에게 산속에 포위당한다. 그리하여 자살하려 한다. 다행히 양자 쌍희(雙喜)가 말려서 그만둔다. 이때 부하장수들중 다수가 투항하고자 한다.거기에는 간장(干將) 유종민(劉宗敏)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자성과 유종민은 함께 산에 있는 묘(廟)를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모두 내가 천자가 될 것이라고 하는데, 오늘 점을 쳐보겠다. 만일 불길하다고 나오면 네가 나의 수급을 베어 투항하라.
유종민도 그러겠다고 말했다. 이자성이 연속 3번 점을 치는데 모두 대길로 나왔다. 그리하여 유종민은 돌아가 두 명의 처를 죽이고, 말한다. 저는 죽을 때까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군중의 장사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처를 죽이고 그를 따랐다. <명사>를 보면, 이때가 이자성의 운명 및 작풍이 바뀐 전환점이다. 이때 이후 그는 물만난 고기같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리고 이 변화는 마치 점괘가 자신과 부하들에게 자신이 천자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준 것같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암의 이자성에 대한 영향력은 '삼척해아(三尺孩兒)" 송헌책만도 못했다. 왜냐하면 송헌책은 만나자마자 이자성에게 "십팔자, 주신기"라는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자성은 더욱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결심을 굳힐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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