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 충남 보령의 시골에서 며칠간 머물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향마을은 산고라당 하단에 있다.
내가 2014년 2월 초순에 시골을 떠나서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이유는 있었다.
어깨쭉지 살갗에 두드러기가 생기고 심하게 가려워서 손톱으로 긁적거리기 시작했고, 이게 금세 번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자식이 내 몸을 살피고는 그참 자식이 차를 몰고는 병원으로 갔다. 자정무렵. 보령아산병원에서는 대상포진이 생겼다는 진단을 내리고는 약은 고작 1일분만 처방했다. 추가분의 약이 없다며....
다음날 오전에 아들이 모는 차를 타고는 서울로 급히 올라와야 했다.
모자간 둘이서 살던 아흔여섯 살인 어머니는 치매기가 진행 중인 극노인. 어머니도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나는 치료를 받았다.
극도로 쇠약한 늙은 어머니한테 아내가 매끼니마다 수저로 밥을 조금씩 떠서 드렸다.
서울에서 4개월간 함께 살던 어머니가 6월 중순에 음식물을 삼키지 못하고는 컥컥거렸다.
송파구 119소방차 응급차를 타고는 송파구에 있는 서울아산병원으로 향했다.
극도의 노환이기에 별다른 치료 방법이 없다면서 요양원으로 입원하라는 의사의 지시.
나는 고향집에서 가깝다는 심리적 안정을 취하려고 고향집 인근에 있은 보령아산병원으로 모셨다. .
아들이 혼자인 나.
나는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 입원한 어머니의 곁에서만 맴돌았다. 텃밭농사는 자연스럽게 방치했다. 텃밭 세 자리는 주인없는 땅이 되었을까? 잡목과 잡초가 주인행세하기 시작했다. 내가 정성들여서 가꿔던 텃밭 세 곳... 병원생활이 길어지고...
다음해 2월 말에 어머니는 아흔일곱살이 난지 며칠 뒤에 돌아가셨다.
서낭댕이 앞산에 있는 아버지 무덤 곁에 어머니 시신을 모시고는 나는 처자식이 있는 서울로 그참 올라와 살기 시작했다. 당뇨병환자는 나 혼자서는 시골에서 살기가 조금 그러하기에... 텃밭농사는 잔연스럽게 완전히 포기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텃밭에는 잡목과 잡초가 가득 차기 시작했다.
내가 퇴직한 뒤에 텃밭 세 자리에 심었던 몇백 그루의 과일나무 묘목(매실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석류나무, 모과나무 등).
아쉽게도 감나무 묘목은 전멸하다시피했고, 매실 모과 석류나무도 병에 걸려서 서서히 도태되어서 죽었다. 살아남은 나무는 제멋대로 웃자라서 이제는 하늘을 찌르고 주변을 나뭇가지로 가렸다.
아쉽게도 감나무 묘목은 95%나 죽었다. 담부리밭에 심었는데 그 땅이 황토지질이라서.... 묘목 선정을 잘못했다는 뜻.
묘목이 이제는 웃자라면서 밀집상태가 되었다. 전정시기를 놓친 탓이다. 지나치게 웃자라서 햇볕을 차단했다. 텃밭은 습기가 가득 차서 야생식물이 더욱 번지기 시작했다.
내 바깥마당 끝자락 밑에 연결된 감나무밭이 있다. 60여 년 전에는 종조부의 집터였다.
196년이었던가? 아버지가 대전에서 과일나무 묘목를 대량 구입, 트럭으로 고향 텃밭에 심어서 과수원을 조성했다.
아쉽게도 과수원 운영은 실패했다. 사과나무 묘목의 속을 파먹는 애벌레가 창궐했기에...
일꾼아저씨는 과수원을 가꿀 여력이 없었다.
논농사를 짓기에도 벅찼고, 2일장, 7일장마다 구르마(달구지)를 끌고 읍내 장에 가기를 좋아했던 일꾼아저씨였기에.
2021년 지금도 과수원 운영의 흔적으로 고목이 된 감나무 두 그루가 남아 있다.
이제는 하도 늙어서 굵은 나뭇가지조차도 뚝뚝 부러지고... 바깥마당과 윗밭에서 흘러내리는 빗물로 감나무밭은 늘 습기차고, 풀이 웃자랐다.
내 집으로 들어오는 길섶 옆에 붙은 감나무밭.
그 당시에 심었던 무화과나무는 곁가지 새끼를 쳤고..
아쉽게도 해마다 꽃샘추위로 나무줄기가 얼어서 터져 죽었다.
일전 나는 감나무밭 아래에 있는 아랫집의 마당으로 구경 나갔다.
아랫집 마당 아래에는 천수답이 있다. 논에서 일하는 마을형님을 보았기에 나는 인사차 방문했다.
이웃집 형님(막내아들이었던 그는 70후반), 대천에서 사시는데 큰조카 소유의 논에다가 모를 심었다. 큰조카는 몇 해 전에 죽었고...
내가 사는 집 바로 밑에 있는 이웃집. 조씨네 형님이 짓는 논은 내 텃밭 바로 밑에 있는 다랑이논.
2021년 5월 말의 논에서는 모내기를 모두 끝낸 상태.
모를 심고는 남은 모를 논 한구석에 조금씩 늘여놨다. 성장이 불량한 모를 뽑아내고는 그곳에 보충하려고 여벌로 둔 모에서 나는 한 판을 얻었다.
이웃집 형님(78살의 노인)한테서 얻은 모의 길이는 고작 7 ~ 15cm 남짓했다. 지극히 어린 어린 모였다.
내 집으로 돌아온 뒤 감나무밭에 쌓아둔 퇴비를 걷어내고는 삽으로 흙을 팠다.
감나무밭에는 많은 작물이 마구잡이로 심어져 있기에 무척이나 비좁았다.
번식 중인 나무 묘목들도 있고... 잡초도 우거지고... 머위, 참취, 석잠풀, 곰취 등의 산채나물 종류도 다양하게 있고, 노랑창포, 자주붓꽃 등의 화초도 있고 ...
내 집 울안에서 물을 받아다가 부었다. 흠뻑하도록 부었으니 감나무밭은 늘 습기로 가득 찼다.
볍씨에서 싹이 튼 지 얼마 안 되었을까?
모가 무척이나 어리고, 키가 작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모 3 ~4개씩 뜯어서 호미로 흙속에 심었다. 텃밭에 가득 찬 풀뿌리를 다 캐내지 못하고는 지극히 좁은 면적에 모를 심었다. 호미로 심었으니 호미모이다. 한 평 남짓하게 밀식해서 심었다. 나중에 일부는 다른 곳으로 이식하려고 임식로 밀식했다.
모는 무논(물논)에 심고, 물속에서 자란다.
물이 전혀 없는 텃밭에다가 모를 회미로 심었다고 해도 그게 제대로 자랄런지는 모르겠다.
서울에서 사는 내가 어쩌다가 한번 내려가는 시골이다. 비록 내가 모를 텃밭에 호미로 심었다고 해도 벼한테는 물기가 부족할 터.
지난 5월 중순경에도 나는 시골집에서 며칠간 머물렀다.
서낭댕이 산소 이장일을 사촌동생과 협의하려고 시골에 내려갔기에.
집에 머물면서 함석지붕 아래에 커다란 물통 7개쯤 늘여놨다.
이번에 시골로 내려갔더니만 그새 비가 엄청나게 내렸기에 큰 물통 안에는 빗물이 넘쳤다.
비 내린 지가 오래된 탓일까? 빗물 속에는 모기의 애벌레가 숱하게 헤엄치고 있었다.
빗물이야 흥청망청하게 많이 있다. 물조루 두 개에 물을 가득 퍼담고는 양손으로 옮겨서 곁에 있는 텃밭에 부어가며 흩뿌렸다.
호미모를 심은 두둑에는 빗물을 퍼다가 자주 부어 주어야 할 터..
무논에서 심어야 하는 벼- 모를 밭에다가 심었으니..
이게 제대로 자라서, 벼꽃이 피고, 낟알이 여물런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한번 실험하고 싶다.
내가 손을 모를 심은 기억은 있다.
1972년경 내 젊은날.
이농이 심하던 때였다. 일꾼(머슴아저씨)가 머슴살이를 그만 두고 제 집으로 돌아갔기에....
그당시는 머슴제도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던 때였기에농촌사람이 도시로 도시로 빠져나가던 시절이였다.
나는 어쩔 수없이 무논에 들어갔다. 수십마지기의 논... 그거는 동네사람이 이따금씩 돌봐준다고 해도 주인인 나도 물논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벌써 48 ~49년 전의 옛날이야기이다.
60여 년 전... 벼농사를 지으려면 일꾼들이 20 ~30명이 몰려들었다. 모를 심고, 세 벌 김매고(논 흙을 파고) 피사리(잡초 명칭은 피))를 하고, 산에서 풀을 깎아서 지게로 져날라서 퇴비를 만든 뒤에 퇴비를 논에 뿌리고, 농약 치고, 가을에는 모를 낫으로 베었고, 논둑에 볏단을 일렬로 세워서 가을볕에 물기 많은 이삭을 말리고, 지게로 볏단을 짊어지고 마을로 들어서고, 노적가리로 볏단을 둥글게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높게 여러 동이나... 서리 내리는 추울 초겨울에 바슴하는 날도 숱한 일꾼들이 모여들었다.
당시는 볍씨를 가온해서 키우는 비닐이 없기에 벼씨앗을 늦게 물속에서 키웠기에 모내기는 6월 중하순에 했다. 이런 이유로 가을철 늦게서야 벼를 베었다. 물기 많은 볏짚을 말린 뒤에 찬서리 내릴 쯤에서야 홀태로 바슴을 했다.
예전에는 벼농사를 지으려면 정말로 많은 일꾼이 필요로 했다.
내가 1960년에 객지인 대전으로로 떠난 뒤.. 1970년대 초부터는 머슴(일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산골 다랑이논은 농사 지을 사람이 부족해서 자꾸만 묵었다.
1990년대 초기에 논경지정리를 했다. 2/3쯤..
산골에 있는 다랑이논의 면적 가운데에서 20%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농로 등을 개설해야 했기에).
논, 밭, 산이 줄어든 이유이다.
1990년대 초기에 농공단지가 들어서서 토지가 수용되었고,
1990년대 중반에 서해안고속도로가 개설되면서 나들목으로 땅이 또 수용되었고,
2016년에는 일반산업단지로 토지가 수용되었고...
2021년 봄에는 지방도로 확장공사로 또 토지수용이 되기 시작했고 ...
이런저런 이유가 내가 보유한 논을 자꾸만 줄어들었고, 지금은 고작 세 군데 합쳐서 고작 10마지기 정도로만 남았다.
- 외지의 논들은 경작관리가 불가능했기에 조기에 팔아서 농토를 줄였다.
어머니와 내가 농토를 얼추 없앤 탓일까?
하기사.. 농사 지을 일꾼이 사라져간 시대였기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도 없었다.
나는 객지에서 즈로 살았고, 서울에서는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했다.
정년퇴직 이후에야 고향에 내려갔으나.. 나는 전문농사꾼이 아닌 건달농사꾼, 엉터리농사꾼이었다. 그나마도 함께 살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도로 서울로 올라왔다.
아내는 시골생활 부적응자일까? 아내는 시골에 잠깐이라도 머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발진했다. 나는 멀쩡해도 아내는 유별나게... 그래서 아내는 시골행을 극도로 꺼려하며.. 있는 농토도 아예 다 없애자고 주장한다.
나는 그게 아닌데도....
2021년 6월 초순에 나는 호미로 땅을 긁적거리면서 모를 심었다.
그것도 수십 년 만에...
밭에서도 벼가 자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다. 아쉽게도 밭벼의 종자는 아닐 터.
그래도 실험하고 싶다.
나는 재미로 취미로 농사짓기에건달농사꾼, 엉터리농사꾼이다. 내 텃밭은 온통 잡목과 잡초들도 가득 찼다.
더욱이 식물다양성을 추구하는 나. 아무런 농약도 제초제도 없기에 자연그대로의 농법이다.
모를 1평쯤 호미로 심었다고 말하는 나. 나를 평가해도 웃기는 농사꾼이다.
나중에 보완 예정.
단숨에 썼기에...
첫댓글 밭에 벼를 심는 것을 심심찮게 보았는데
지금도 그런 농사법이 있군요 잘 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제 고향마을은 산골이지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여러 갈래로 분리된 지형이기에 논을 대체로 다랑이논.
1990년대 중반에 다랑이논 일부는 농지경리를 했지요. 그 나머지는 그냥 그대로...
논에 볍씨를 뿌리고, 모를 키우고, 손으로 모를 심고, 호미로 논흙을 3차례나 파고, 피사리 하고...
농사는 온 마을사람들이 함께 했지요. 이른 봄철에는 아낙들이 보리밭에 들어가서 보리싹을 잘근잘근 밟고...
논농사는 근동의 일꾼들이 모두 와서...
이제는 모두가 기계농업이지요.농촌에는 사람이 사라지고... 그냥 허무한... 그냥 돈만 추구하는 세상으로 변했지요.
텃밭에 모를 재미삼아서 조금 심었지요.
비가 이따금 가끔씩 내려서 밭에 심은 모가 제대로 자랐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