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상당히 참을성이 있었다.
"어? 뭐야? 녹차 없네? 오빠, 녹차 없는데!"
"응? 벌써? 아, 말도 안돼, 내가 저번주에 사다놨는데 그게 벌써 떨어져?"
"아이, 참. 진짜 없대도!"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부엌으로 간 해라가 안방에서 얌전히 티비를 보고있던 나에게 소리쳤다. 녹차가 없다고?
해라의 말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얼른 부엌으로 갔다. 찬장을 열어보니 빈 녹차 곽만 있을 뿐, 그 안의 내용물은 이미 증발해 버린 뒤였다.
아, 말도 안돼. 내가 저번주에 사다놓은걸... 그 많은걸 언제 다 마신거냐고! 약간 노기 띈 눈빛을 하고 해라를 보자 해라는 기가 찬 듯, 나에게 항의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여보세요, 나만 마신거 아니거든? 아빠도, 엄마도 다 녹차 마셨단말이야!"
"야, 암만 그래도 그렇지. 나는 한두잔밖에 못마셨는데 그 많던게 다 떨어지냐? 니가 다이어트 한답시고 마시고, 마시고 해서 그런거 아냐!"
"그럼 어쩌라구! 나 다이어트중이라 저녁에 먹을 수 있는건 이것 뿐인데!"
잘한 것도 없는 주제에 바락바락 대드는 꼴을 보니, 아주 요 입을 바늘로 꿰매고 싶어진다.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부모님이 너무 오냐오냐 하며 키운 것 같아.
어릴적부터 그랬다. 해라는 자기 마음에 안드는 일이면 꼭 생떼를 쓰며 울고불고 난리를 쳐댔다. 그런데도 엄마와 아빠는 해라를 별로 나무라지 않으신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곧장 들어선 아이라고, 장남인 나보다 더 아끼시니까. 어릴적부터 그 방식이 너무 마음에 안들었다.
엄마와 아빠는 아니라지만, 애를 자꾸 오냐오냐 키우면 버릇이 없어진다고. 바로 내 앞의 해라가 그 증거다.
"야, 강해민. 니가 가서 녹차 사와. 나 지금 공부해야되."
"또 이름 부르지? 내가 니 친구야? 오빠라고 제대로 부르면 어디 덧나?"
"아~알겠어, 오빠! 빨리갔다와~ 나 녹차 먹고싶단 말이야~"
해라가 또 생떼를 쓴다. 그래도 나름 동생이라고 미운 짓 해도 귀여워 보인다. 아이고, 이게 다 어릴적부터 받아온 "동생이니까, 오빠니까 봐줘야해." 라는 식의
세뇌교육때문이야. 해라가 약간 큰소리로 어리광을 피우자 나는 알겠어, 알겠어~라고 대꾸하고 얼른 지갑을 들었다. 여기서 조금 더 버티면 해라가 울 것 같다.
지갑을 들고 현관문을 나서자 해라가 얼른 따라오며 말한다.
"오빠, 올 때 과자도 사다줘. 에이스~"
"야, 그거 살찐다. 경고하겠는데 다이어트할거면 제대로 해. 간식이 적이래."
"그래두우~~"
"안돼, 돈없어. 얼른 가서 공부해."
제 딴엔 애교라고 피웠는데 들어주지 않으니 심통이 났는지 해라는 다녀오라는 인사도 안하고 지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정말 여우같은 애다. 어쩌다 저런 애와 남매가 됐을까. 같은 배에서 태어났는데도 왜 쟤랑 난 이렇게 다르냐.
한숨을 푹 내쉬고 손잡이를 잡았다. 현관문을 열자 찬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10월, 가을이 거의 다 질 무렵이었다.
약간 쌀쌀한 날씨라 나는 나가다 말고 다시 들어와 얼른 방에서 외투를 가져왔다. 조금 두꺼운 후드티를 입고있었지만 추위를 잘 타는 나로선, 외투가 없이
나가는게 조금 힘든 날씨다. 밖으로 나오니 근처 나무들에서 낙엽이 떨어진다. 여름엔 그렇게 생기있게 피어있던 꽃들도 죄다 지고있다.
앞집 담에 피어있던 장미, 해라가 좋아했는데 다 져버렸다.
"아, 추워. 빨리 사가지고 가야지."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얼른 발을 굴렸다. 우리 집은 빌라들이 대거 밀집해 있는 곳이라 조금 걸어야 슈퍼가 나온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걷자 조금 몸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집에 없는 게 녹차 뿐이 아니었다. 엄마가 아침에 사다놓으라고
분명히 나한테 돈을 쥐어주고 갔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빼내어 살펴보니 역시 엄마가 아침에 준 돈이 있다. 뭐 사오랬더라.
김이랑 우유랑, 주방용 세제... 아 맞다, 치약이랑 두루마리 휴지도 새로 사다놓으라고 하셨지.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이것저것 살 게 생각난다.
이정도 사려면 큰 마트로 가야하는데. 조금 더 걸어야지 싶었다. 난 다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넓은 보폭으로 걷기 시작했다.
빌라 단지들을 나오면 시내가 나온다. 요새 워낙에 개발이다 뭐다 하니, 새로 생긴 가게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힐끗 보니, 생긴지 얼마 안 된 빵집도 보였다. 저 빵집에선 아직 사먹어본 적 없는데. 내일 아침에 해라 먹으라고 하나 사갈까?
돈이 남으면 사가야겠다 싶어 일단 봐두었다. 조금 더 걷자 동네 슈퍼가 나왔다. 추워서 얼른 사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아까 그 목록들을 그대로 사가려면 좀 더 싼 대형마트로 가는게 훨배 낫다. 포인트 카드도 들고나왔으니 조금 참자란 마음으로 슈퍼를 지나쳤다.
"잠깐만요."
슈퍼를 지나고 드디어 큰 길가로 나오나 싶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날 툭툭 쳤다. 뭐지, 하며 돌아보니 웬 장신의 키 큰 남자가 날 내려다보고있었다.
나도 작은 키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은 무슨 농구선수인가. 키가 왜 이렇게 커. 고개를 들어 봐야 할 정도의 남자였다.
"예?"
"이 가게 가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아요?"
존댓말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명령조 같은 그 물음에,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거니와 제 딴엔 존댓말이라고 해온 질문이라
뭐라고 할 수도 없어, 그가 손에 쥐고있는 명함을 고개숙여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명함엔 붉은 글씨로 헤르타라고 쓰여져있었다.
헤르타? 이 근처에선 본 적 없는 가게이름인데. 나는 고개를 도리질 치며 말했다.
"아뇨, 이 근처에선 못봤어요."
"그래요. 알겠어요, 고마워요."
남자는 간단하게 대답하곤 등을 돌려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고, 존댓말을 썼음에도 남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이라던가
그 분위기때문에 나는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저 사람, 말하는 투를 고치지 않으면 인상 정말 나쁘게 찍히겠다. 아까 보니 생긴 것도 착한 인상은 아니더만.
입은 것도 거무죽죽한 분위기의 검은 코트였다. 괜시리 똥밟은 기분에 나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고는 다시 마트로 향했다.
잠깐 섰던 곳이 큰 길가의 입구쯤 되는 곳이라 마트엔 금방 도착했다. 얼른 들어가 세일하는 두루마리 휴지와 녹차를 집어왔다. 둘을 들고보니 왠지 장바구니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카운터 옆에 있는 장바구니를 들어 그 안에 휴지와 녹차를 넣었다. 자, 이제 뭘 사면 되더라?
위잉-.위잉-.
장봐야 할 목록을 머릿속으로 세고 있었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나는 얼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액정 확인을 했다.
집. 해라의 전화였다.
"왜?"
-오빠? 나, 해라. 저기 오빠, 오늘 손님오기로 했었어?
평소엔 전화를 해도 오빠라 부르는 법이 없는 해라가 어색하게 전화를 받자마자 오빠소리를 한다. 내심 깜짝 놀랐지만(내가 깜짝 놀랄만큼,
그녀는 나를 오빠라고 불러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내 손님이라는 말에 의아해 하며 대답했다.
"손님? 무슨 소리야. 우리집 아는 녀석도 별로 없는데. 나 찾아온거 맞대?"
-어, 잠깐만... 저기요,.... 네, 예... 아, 그러셨구나. 아, 여보세요? 오빠. 오빠 찾아온거 맞다잖아.
누군가 옆에 있는 듯 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손님이 온 게 맞다는건데. 나는 재차 해라에게 물었다.
"강해민, 확실히 나 찾아온 거 맞아? 누군데. 남자야, 여자야?"
-남자. 오빠랑 어릴 때 부터 소꿉친구라는데? 난 잘 모른단말이야. 전화 바꿔줘?
"으응? 어... 그래. 바꿔봐."
뭔가 짜증나는 일이 있었는지 해라는 왠지 노기 띈 음성으로 나에게 대꾸했다. 뭐야, 무슨 일이길래 아무 잘못 없는 사람한테 화를 내려고해?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일단 바꿔보라고는 했지만, 한 켠으로 해라가 화난 것이 이상해 조금 걱정 되기도 했다.
-... 여보세요.
"...어어..., 네, 강해민입니다. 저기... 제 소꿉친구라고...?"
-응.
"그럼 이름 좀... 물어도 될까?
자기의 이름을 먼저 말하지 않아, 나는 조금 뻘쭘한 기분으로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내 소꿉친구면 나랑 동갑이겠지. 근데 다짜고짜 이렇게 찾아오는건 뭐야. 연락이라도 해야할 것 아냐.
아니, 뭣보다. 어린시절 헤어진 소꿉친구들을 아직까지 기억할리 만무하고, 또 희미해진 기억의 줄을 타고 이제와서야 찾아오는 친구들도
드물거 아닌가. 나는 일단 그가 누군지부터 알아야 했다. 만약에라도 소꿉친구를 가장하고 집에 들어온 강도같은거면... 아니, 뭐 소설쓰나.
헛생각은 하지 말자.
-현우. 이현우. 기억 안나?
"이현우...?"
흔한 이름. 그런데 이현우라는 이름을 가진 애가 내 소꿉친구중에 있었던가? 나는 잠시 골똘히 생각 했다.
누구지. 누굴까. 나는 장보는 것도 잊고 그 자리에서 그를 생각해내려 애썼다.
-이런... 기억이 안나나보네.
"어?!엉?! 아니, 잠깐만. 지금 기억해보는 중이야."
골똘히 생각하는데 다짜고짜 들려오는 그 음성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우와, 놀래라. 저렇게 낮은 음으로 그렇게 불쑥 얘기를 꺼내다니.
나는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런 제기랄. 내가 이렇게 새가슴이었나. 나름대로 학교에선 담 세다고 칭찬받고
그랬는데. 내가 대답이 없는게 우스웠는지, 수화기 건너편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애써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 너희 엄마가 날 아시니까.
"뭐?"
-게다가... 하도 어릴적에, 그것도 몇 번 보질 못해서 아마 넌 기억 못할거야.
말을 무지 적게 할 것 같은 그 낮은 음성이 마치 나를 달래듯이 말해왔다. 뭐야, 이 뉘앙스는. 나는 휴대폰을 꾹 잡았다.
왠지 기분이 나빠지는데. 한순간, 이녀석이 마치 내 형이라도 된다는 듯한 말투에 약간 짜증이났다.
"뭐야, 그럼 남이나 다를 바 없잖아. 우리 엄마가 불러서 온거야?"
-아니, 그냥. 네가 보고싶어서 온거야. 근데 네 동생이 와있을 줄은 몰랐어. 내가 있었을 땐 할머니댁에 있다고 들었는데, 언제온거야?
"...뭐,뭐야. 그런것도 알고있었어? 아씨, 이렇게 전화로 얘기하려니까 좀 불편한데."
-그럼 얼른 장보고 와. 동생이랑 있을테니까.
다정스러운 말투에, 이녀석과 나의 사이가 마치 몇년동안이나 친했던 친구 사이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 느낌이라,
나는 얼른 장을 보고 가겠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으음, 괜히 기분이 나빠지는데?
상대방이 호의적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기분 나빠보기는 처음이다. 똥씹은 기분이다.
나는 인왕상마냥 인상을 굳히곤 얼른 장을 봤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조금 수정했지만...ㅠㅠ여하튼, 인사드립니다. 즐거운 추석 되시고 계신가요.
원래 그림을 그리기때문에 소설쪽은 별로 관심도 없고 써보지도 않았지만 꼭 써보고싶은 이야기가 있어
이렇게 끄적이게 됬네요. ㅠ부족하지만 앞으로 잘부탁드립니다!
첫댓글 우왕 ㅋㅋㅋ 재밌어요 !!! 혹시 현후가 아까 길에서 만난 그남자인가요 !!?
말머리.....;; 지정하셔야겠어요ㅠㅠ
말머리.....;; 지정하셔야겠어요ㅠㅠ
재미있습니다 다음편 빨리 올려주세용
재미있네요 ㅋㅋ 업뎃이요
장 보고나서 저녁을 짓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