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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arable of the barren fig tree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리더가 된다는 것>
어느 여행자가 채석장에서 돌을 캐는 장인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그는 세 사람에게 돌아가며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벽 앞에서 빈둥거리던 첫 번째 남자는 “하라는 대로 할 뿐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도구를 닦고 있던 다른 사람은 “돌을 자르고 있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바쁘게 일하던 세 번째 사람은 고개를 들더니 “대성당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가정이나 직장, 혹은 성당이나 동호회 등에서 리더의 역할을 맡을 때가 있습니다.
만약 위의 채석장 인부 세 사람 중에 리더를 하나 세워야한다면 누구를 리더로 뽑고 싶습니까?
당연히 자신이 하는 일을 큰 그림 안에서 그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리더의 머리에 그런 비전이 들어있지 않다면
각 부분들은 목적지를 알 수 없어서 서로 자기 주장을 하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단체나 그 안에 분열이 있다면
좋은 성과를 낸다는 것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공동체가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왜 공동체에 분열이 일어날까요?
그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교만해져서 서로 남의 탓을 하다가 찢어졌습니다.
또 주님은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의 언어를 흩어놓으셨습니다.
교만하면 갈라지는데, 단체의 각 사람들이 서로 결집하여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단체) ‘장’의 역할입니다.
단체의 장은 그 공동체의 머리로써 각 부분들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오늘 교회가 한 몸이 되는 이유는 바로 머리이신 그리스도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따라서 한 공동체가 서로 갈라진다면 일차적으로는 머리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머리는 한 비전을 제시하여 모두가 길을 잃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왜 세상 창조 이전부터 인류 구원에 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설명해줍니다.
구약의 요셉은 꿈을 꿉니다.
부모와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입니다.
그러나 그런 꿈 이야기를 하도 많이 해서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이집트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계획’ 안에 들어있던 것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이집트로 팔려가서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파라오의 꿈도 풀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겠고, 그렇게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흉년을 넘기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를 갈라놓게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은총 안에서 하나로 모읍니다.
어떤 단체의 보스가 되든지 항상 ‘주님의 뜻’을 자신의 비전으로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꿈은 내가 꾸고 싶다고 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에게처럼 주님께서 꾸게 하시는 것입니다.
한 몸의 각 부분들이 ‘하나의 머리’를 따르기 때문에
흐트러짐 없이 한 몸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면서도 일치를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일치를 위해 책임자가 되어갈수록 더욱더 주님의 뜻을 들을 줄 알아 그것을 공동체에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일치의 중심인 머리는 항상 주님의 뜻을 여쭙고 있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많은 이들이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즉,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를 원하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본인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언젠가 우리나라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를 본 적이 있는데, 행복하다고 말한 사람은 9.8%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그마치 48%가 스스로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세상은 행복한 곳이 된다고 합니다.
개인의 행복이 가족과 사회의 행복으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추석 명절 때에 성지에서의 미사를 마치고서 부모님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명절 기간이라 그런지 길이 너무 막히더군요.
30분이면 충분히 통과할 수 있는 구간을 2시간의 시간을 소비하면서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화가 나기 시작했고 짜증이 밀려옵니다.
바로 그 순간 어떤 차가 제 차 앞으로 끼어들겠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평상시에는 양보해서 끼어들 수 있도록 해드립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너무 오랫동안 차 안에 갇혀 있었기에 기분이 좋지 않았고, 그래서 끼어들지 못하도록 속력을 내서 앞 차와의 간격을 좁혀 버렸습니다.
막상 그렇게 하고 나니 스스로에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사실 제 차 앞으로 끼어들었다고 해서 엄청난 시간을 손해 보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고생했는데, 당신도 고생해봐야지.’라는 마음 때문에 인색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저만 기분 나쁜 상황이 아닙니다.
그 분 역시 막히는 상황에서 불쾌함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제가 양보하지 않으니 그 불쾌감은 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기쁜 마음으로 양보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제 만족은 물론이고 그 분 역시 만족감을 가질 수 있었겠지요.
이렇게 나의 행복은 다른 이들의 행복으로 확대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나의 불행이 다른 이들의 불행으로도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것이라고 하지요.
즉, 죄로 기울어지는 마음을 바꿔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나에게만 해당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앞서 개인의 행복이 공동체의 행복으로 바뀔 수 있는 것처럼, 개인의 회개 역시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지 않으면 너 한 사람만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두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을 바꿔서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 그래서 사랑의 마음으로 다른 이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모두 멸망하지 않게 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마라>
마음을 바꾼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 이다’, ‘마음이 흔들비쭉이다, ’‘사람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이라거나
‘똥누러 갈 적 마음 다르고 올 적 마음 다르다’, ‘마음처럼 간사한 것은 없다’고 합니다.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본마음과는 다르게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야말로 ‘내 마음 나도 몰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모두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이고,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주님께 마음을 돌려 영원히 살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가 5,32)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루가 13,5)
하고 말씀하십니다.
에제키엘서에는
“주 하느님의 말이다.
너희는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에제 18,30)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2베드 3,9)
라고 말씀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야고 4,8)
하고 말씀하십니다.
묵시록은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 (묵시2,5)
고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고쳐 하느님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루가13,6-9)를 보면,
포도원지기는 3년이나 기다렸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내려는 주인에게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하고 사정합니다.
결국 무화과나무가 베어질 운명입니다.
이제 ‘올 한 해’동안에 결말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도 죽음이 유보된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올 한 해’가 소중합니다.
아니 유보된 지금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멸망과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기회를 잘 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어진 축복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변화를 시작해야하겠습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요, 포도원지기는 예수님이시고, 포도밭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포도원지기인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께 아직 참아 달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비유되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수고요 땀입니다.
그의 노력을 헛되이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심판, 회개>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여기서 “......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니다. 그러나 너희도......”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는 “아니다.”를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씀 앞에 ‘그러나’를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의 뜻은,
“그런 사건과 사고는 하느님께서 내리신 천벌이 아니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은 그런 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어떤 사건이나 사고로 죽은 사람들은 남들보다 죄가 더 커서 그런 변을 당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은 인간 세상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2) 그런 사건이나 사고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것은 그런 일들은 종말의 징조가 아니라는 뜻이고, 최후의 심판도 아니라는 뜻이다.
3) 그러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그런 식으로 갑자기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그때에는 회개할 틈도 없이 멸망할 것이다.
1)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사고로 죽은 사람들을 향해서 “천벌을 받았다.” 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또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에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다고 믿고 있지만,
인간의 고통과 불행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해서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이것은 다 하느님의 뜻이니 받아들여라.”라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말은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고통과 불행도 행복으로 바꿔 주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함께 이 불행을 극복하자.” 라고 말해야 합니다.
“천벌이 아니라면, 하느님께서는 왜 그런 사건들과 사고들을 막아주시지 않는가?”
“왜 인간 세상의 고통과 불행을 보고만 계시는가?”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정확한 답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재난이 일어났을 때 흔히 하는 말, “이것은 천재가 아니라 인재다.” 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들이 잘못해서 일어난 일인데도 하느님 탓을 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섭리’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서 말할 때,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를 자주 인용합니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해서 노예로 팔아버렸고, 요셉이 많은 고난을 겪었지만,
긴 세월이 지난 후에 보니 민족 전체를 살리기 위한 하느님의 섭리였다는 것이 요셉 자신의 설명입니다(창세 50,20).
그러나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형제를 미워해서 노예로 팔아넘기는 행동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
그런 짓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범죄라는 것.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살리는 하느님의 선한 계획은 인간의 선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라는 것.
요셉의 형들이 한 짓은 하느님의 계획을 망칠 수도 있었던 ‘악행’이었는데, 하느님께서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
2) 어떤 대재난이 일어났을 때, “이것은 종말의 징조가 아닌가?” 라고 말하면서 호들갑을 떨지 말아야 합니다.
종말은 어떤 한 지역만의 일이 아니고, ‘전 우주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인류 전체가 당하는 일입니다(루카 21,25-26).
따라서 아무리 대규모 재난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한 국가나 한 지역에서만 일어난 일이고 지구 전체의 재난이 아니라면,
종말의 징조라고, 또는 종말의 사건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3)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회개하라고’ 촉구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 “회개했는가?”를 묻는 일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종말과 최후의 심판이 닥치기 전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때가 언제인지 모릅니다.
모르니까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을 갖추는 일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그 자격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심판입니다.
자격이 있다면 종말이 와도 살아남을 것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자격이 없다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 세상의 사건들과 사고들은 미리 잘 대비하기만 하면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대비하는 일은 단 하나, ‘회개’뿐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말을 대비한다면서 지하에 요새를 만들기도 하고, 생필품을 비축해 놓기도 하는데,
실제로 종말이 닥칠 때에는 그런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이 우주 어느 곳에도 종말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피해서 숨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묵시 6,12-17).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의 꽃을 피우기 위한 회상과 거름주기>
인간은 자기가 남에게 준 것이나 손해와 상처를 입은 것은 오래 기억하면서도 배려와 사랑을 받은 것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에 대해서는 더 무감각하지요.
하느님은 다른 나무보다 더 좋은 땅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열매를 맺도록 꾸준히 보살피는 사랑깊은 포도원 주인과 같습니다(13,7 참조).
따지고 보면 나를 창조해주신 그 자체가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지요.
때로는 삶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살아있는 것 자체가 저주라 여겨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어떤 순간에도 숨을 불어넣어주시고 함께 해주시기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덩어리임에도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은총의 선물을 헛되이 흘려보내버리곤 하지요.
영적 무감각은 그렇게 합당한 결실을 맺지 못하게 하고 점점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나를 향하여 ‘잘라 버릴 것’(13,7)이라 하십니다.
이는 당장 절단 내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저하지 말고 사랑으로 되돌아가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드러내라는 ‘사랑의 재촉’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받기만 하고 되돌리거나 나누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받기만 하고 되돌리지 못하는 이기적인 삶의 태도야말로 생명의 흐름을 막아버리므로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죽음의 길로 치달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겠지요.
그런데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라고 청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함에도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지나온 삶의 발자국마다 허물과 죄로 얼룩진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 거듭 용서해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다려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자비심입니다.
주님의 이토록 크신 자비심에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모두 멸망할 것입니다.'(13,5)
회개의 시작은 주님의 크신 사랑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회개란 숨쉬는 순간마다 그리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고 감사드리며, 멈춤 없이 나눔으로써 드러납니다.
이제 영혼의 어둠을 알아차리는 감각을 일깨워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나서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목되는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곧 포도 재배인은 주인에게 ‘올해만 그냥 두어달라고 청하면서’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다’(13,8)고 하지요.
포도나무 둘레를 파고 주는 ‘거름’은
하느님의 말씀이요,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도록 헤아려주고 품어주는 사랑이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어야만 한다는 인식입니다.
포도원 재배인처럼 우리도 말씀의 거름, 사랑의 거름, 바른 인식의 거름을 서로에게 주어야겠습니다.
우리 서로 판단하고 연약함을 비난하거나 "화를 내지 말고
오히려 온갖 인내와 겸손을 다하여 너그럽게 권고하고 부축하여"(성 프란치스코, 2신자편지 44) 품어주는 울타리가 되어주어야겠지요.
오늘도 주님의 넓고 깊고 크신 사랑을 회상하여 실천하고,
누군가가 넘어질 때 서로 나서서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어,
아름다운 회개의 꽃을 피우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 작은형제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의 여정 - 사랑의 성장>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시편 122,1)
오늘 화답송 시편 첫 구절을 산티아고 800km, 2000리 순례길을 걸을 때 얼마나 많이 노래했는지요.
이 시편기도 덕분에 기적처럼 지침이 없이 샘솟는 힘으로 나르듯 걸은 2000리 순례길입니다.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2014년 가을 산티아고 순례의 추억입니다.
늘 새벽 2시에 일어나 헤드랜턴을 하고 강론을 썼고,
이어 고국의 사랑하는 믿음의 벗들에게 카톡사진을 전송했으며,
역시 5시에 헤드랜턴을 하고 박용대 이냐시오 도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간단한 아침 식사 후 6시부터 동터올 때까지 헤드랜턴을 하고 걸었습니다.
하여 시속 4km로 걸었고 12시에서 2시 사이에는 목적지 알베르게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습니다.
그러니 매일 아침 6시부터 6시간 내지 8시간을 걸었고 이때 끊임없이 바친 기도가 위 시편이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그대로 회개의 여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답이다.’ ‘기도가 답이다.’ ‘믿음이 답이다.’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회개가 답이다.’는 확신입니다.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회개가 아니라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회개없이는 믿음도 영적성장도 사랑의 일치도 없습니다.
회개는 죄로부터 떠남과 동시에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 역시 회개입니다.
빌라도에 의해 살해된 예루살렘 사람들에 대해,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사람들의 본능적 반응은 죄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했던 듯 싶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지요?
무죄하다 생각되는 이들의 고통이나 시련, 죽음입니다.
‘왜?’ 묻지만 답은 없습니다.
흔히 이런 일들을 겪거나 대하면 우리는 십중팔구 죄와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단호합니다.
예수님은 거푸 두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하여 복음의 앞단락의 주제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입니다.
그러니 이런저런 불행한 일을 겪거나 대할 때 우선 생각할 바는 회개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우리가 살아있음도 회개하라 연장되는 날들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복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이를 입증합니다.
포도재배인과 주인의 대화가 의미심장합니다.
주인이 하느님이라면 포도 재배 주인은 우리의 변호자 예수님입니다.
“보게,
내가 삼년 째 와서 이 무화과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 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새삼 우리 회개의 열매를 점검하게 됩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내적성장의 열매가 믿음의 열매, 희망의 열매,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인생 가을에 접어들면 저절로 확인하게 되는 회개의 열매, 신망애信望愛)의 삶의 열매들입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우리의 변호자이신 예수님의 말씀 같습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회개의 자리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연기할 수 없는 즉각적인 회개의 실행입니다.
죄의 원인을 캐는 부질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회개를 통해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회개를 통해 새롭게 시작하라 아침마다 거행되는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답은 회개뿐이 없습니다.
회개없이는 믿음도 사랑의 성장도 없습니다.
회개를 통해 주님께로부터 저마다 받은 은총의 직무를 새롭게 발견합니다.
회개에 이어 사랑의 내적성장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와 분리된 개인의 성장은 없습니다.
공동체와 함께하는 개인의 성장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를 준비시키려는 것입니다.
하여 우리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지체들의 성장과 더불어 비로소 성숙한 사람으로의 성장입니다.
혼자 성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와 더불어의 성장입니다.
그러니 공동체와 유리된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는 성숙한 사람은 애당초 불가능한 환상입니다.
하여 예나 이제나 부부들의 피정지도 때 제가 자주 드는 예가 있습니다.
“혼자는 천국에 못들어 갑니다.
부부 점수 합하여 평균 60점 넘어야 둘 다 함께 입장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할 때는 항상 배우자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말하며 부부공동체의 일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시킵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이지 공동체를 떠나면 괴물이나 폐인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에페소서의 마지막 대목이 개인의 성장이 얼마나 깊이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지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사랑의 성장입니다.
그러니 회개를 통한 공동체 안에서의 제자리를 찾아 제직무에 충실함이
공동체는 물론 개인의 성장에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안에서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시켜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의 묵상글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된 신비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우리는 저마다 서로 다른 은총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을 먹고 자라납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이 은총의 형태나 내용들은 서로 다르지만,
이 은총 덕분에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이르게 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성장시키는 힘을 얻습니다.
만일 우리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된 한 지체로서 교회를 성장시키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처럼 하느님께로부터 은총을 잘 관리하지 못한 책임을 추궁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그분은 내가 지은 죄보다 더 큰 자비를 베푸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구원에로 초대해 주셨지만,
여전히 나보다 더 못난 사람들을 찾고, 나보다 더 큰 죄를 짓는 사람들과 비교해 가며,
상대적 자족감이나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나에게 더 회심할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살다 보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게 해 주시는 분 덕에 내가 산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가 받은 은총은 지금 내가 누리는 세상의 지위나 부유함, 교회 안에서의 직무나 봉사의 직책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 안에서, 교회 안에서 누릴 수 없는 풍요로움과 지위를 내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내가 지은 죄와 저지른 잘못을 보속할 기회로 주셨다고 생각하면,
조금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는 이런 하느님 자비를 체험하게 해 주고 보속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은총의 샘입니다.
고해소를 두려워하지 맙시다.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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