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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창 31:36-42
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37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38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39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40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41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42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창 31:36-42 / 그러자 야곱이 분통을 터뜨리며 라반에게 따졌다 `도대체 내게 무슨 허물이 있다고 마치 사냥꾼이 들짐승을 쫓듯 나를 뒤쫓아 오셨습니까?' 하고 화를 내었다. 37) `그래, 지금 일일이 제 재산을 다 뒤져 보셨지요. 이중에 하나라도 장인 어른 집안에 있던 물건을 찾아내셨나요? 자, 이렇게 장인 어른의 종과 우리 집 종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들 보고 한번 가려 보라고 하시지요. 장인 어른과 저 사이에 과연 누가 잘하고 누가 잘못하였는지 말입니다. 38) 제가 지금까지 20년씩이나 장인 어른과 함께 지내면서 장인 어른의 일을 거들었지요. 제가 돌보는 동안 장인 어른의 양떼나 염소 떼가 낙태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또 제가 장인 어른의 가축 떼 가운데에서 새끼 한 마리라도 잡아먹은 적이 있었습니까? 39) 간혹 들짐승한테 물어 뜯겨 죽은 양 한 마리라도 다 제가 물어 내지 않았어요? 또 낮에 도둑을 맞은 것이든지, 밤에 도둑을 맞은 것이든지 하여튼 모두 제가 물어 내었지, 장인 어른의 잘못으로 돌린 일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40) 제가 장인 어른의 가축 떼를 돌보느라고 낮에 더위를 먹은 적이 한두 번이었습니까? 또 밤에 추위 때문에 애먹은 적이 한두 번이었습니까?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장인 어른의 가축 떼를 보살펴 왔습니다. 41) 제가 장인 어른의 집에서 20년을 지내면서 14년은 장인 어른의 두 딸에게 장가들려고 일하였고, 또 6년 동안은 장인 어른의 가축 떼를 돌보느라고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장인 어른은 제게 주셔야 할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지요. 42) 우리 조상의 하나님 곧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또 아버지 이삭이 한평생 모시고 살던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지 않으셨더라면 장인 어른은 아마 저를 벌써 빈 손으로 쫓아내 버리셨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제가 그 동안 애쓰며 고생하고 일한 것을 다 아시고는 어젯밤에 장인 어른에게 나타나셔서 장인 어른을 꾸짖으신 겁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온갖 고생을 하고도 마치 죄인처럼 추격당하고 검색당하는 현실에 분노합니다.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36-37) 책망은 다툼과 법적인 분쟁에 대한 단어입니다. 야곱의 지난 세월에 대한 울분을 터뜨린 것입니다. 무조건 자신을 추격한 라반의 과격한 행동과 지난 20년간의 괴로움에 대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야곱은 추궁당하던 입장에서 추궁하는 태도로 판세가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도둑질을 했다는 아무런 증거도 찾아내지 못한 것에 대해 판단해 달라고 형제들에게 호소합니다. 여기서 형제는 야곱의 뒤를 추격해 온 친인척과 라반과 동행한 일행을 가리킵니다. 야곱은 양쪽의 많은 일행들을 증인으로 이 일을 판단하자고 항변하였습니다. 야곱은 지난 20년 동안 라반의 집에서 보낸 세월을 고백합니다. 라헬과 레아를 위하여 14년, 라반과 정식 계약 기간 6년, 합해서 지난 20년은 권모술수의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현장에 있던 형제들도 익히 보고 들어온 일들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일단은 충성스럽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이 20년을 외삼촌과 함께하였거니와(38-42) 라반의 집에서 일을 하던 기간동안에 야곱은 불공정한 일들을 감내하며 일해 왔습니다. 목동이 일을 하다가 잃어버린 짐승은 배상하지 않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으나, 야곱은 그것까지도 배상을 해주며 일했습니다. 물론 일을 한 것에 대한 댓가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일하는 동안에 겪어야 할 추위나 배고픔, 각종 위험을 이겨내는 수고도 당연히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야곱을 지켜준 이는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은 그 하나님께서 자신과도 벧엘 언약을 맺으시고(창 28:13-15), 언약대로 자신과 동행하시고 보호하시고 감찰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라반은 품삯을 10번이나 바꾸었지만, 하나님의 보호와 감찰하심이 지난 20년간의 온갖 억울함과 역경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습니다(시 124:1-2). 그리고 야곱을 추격하는 라반에게 꿈으로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그 자신의 해석으로 마무리합니다. 그것은 지난 모든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이었습니다.
적용: 인생 고민의 무게에 눌려 쓰러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불평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셨습니다’라는 고백으로 마무리하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행복한 사람들의 특징은 첫째, 곤란한 상황에서도 “방법이 있을 거야”라는 말을 잘합니다. 둘째는 힘든 시기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여기에도 어떤 긍정적인 의미가 있을 거야, 좋은 점도 있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지금은 힘들지만 이것만 끝나면 괜찮을 거야, 끝나면 여행가자”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모두 관점을 전환시키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만하길 다행이다”라는 말도 자주합니다. 결국 자기의 불편한 정서를 편안한 정서로 바꾸려는 전략적 정서 조절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 설 교 >
빈 손을 가득 채우시는 하나님
창 31장 36~42절 / 박인걸목사
신학자 자크 엘룰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이냐 돈이냐?” 라는 책을 썼습니다. 철학자 에릭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썼고 또 국내의 유명한 종교인은 “무소유”에 대한 책을 써 냈습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한 것은 소유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신앙과 소유의 관계에 대하여 또 인생과 소유의 관계에 대하여 이들은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한 사상은 어느 것에 더 가치를 두느냐 이지 물질이 필요치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 프란시스는 자신의 소유를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프란시스의 이런 행동은 자신의 삶의 방향이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결단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지 보통 사람처럼 살기를 원했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30세에 공생애에 나와서 세례를 받고 오직 복음을 전하며 무소유로 살았습니다. 그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에 없다.”(눅9:58)고 하시면서 “나를 따라 오려거든 모든 소유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삶과 가르침은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종말론적 삶의 태도를 역설하신 것이지 모든 사람이 물질과 직장과 사업장과 가정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고, 직장 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하면서 삶의 목표와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데 있습니다. 무엇 보다도 이런 삶의 목표를 성취 해 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질입니다. 자신의 소유가 있어야 합니다. 중세 유럽에서 젠틀맨이라고 할 때 그 젠틀맨은 자기 땅을 소유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자기 땅이 있을 때 사람들은 젠틀맨이라고 호칭했습니다. 범죄 한 아담에게 하나님은“이마에 땀을 흘리며 노동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소유 적 삶을 명령한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동산에서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관리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으로 쫓겨난 인생들은 자신의 힘으로 땅을 파고 농사를 짓고 집을 지으며 도시를 건설하고 경계선을 긋고 소유 적 존재로 살게 한 것입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을 부자라고 하였고 소유가 없는 사람을 가난한 자로 칭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역시 소유의 중요성은 언급의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국가도 회사도 개인도 소유의 량에 따라 평가받고 대접받는 세상입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외환보유고가 2,000억 달러 로서 간들간들합니다. 지금 외채를 상환할 달러와 맞먹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3월 위기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빚 보다 재산이 많아야 하는데 재산보다 빚이 많으면 국가나 회사나 개인 가정은 위험합니다. 교회도 70%가 빚이면 거의 부도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빚을 지지 않고 넉넉한 재산을 소유하려 애씁니다. 젊었을 때도 돈과 재산이 필요하지만 늙어서는 더더욱 돈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많은 것들이 자신에게서 떠나갑니다. 돈이 떠나가고, 친구가 떠나가고, 일감이 떠나가고, 건강이 떠나가고, 사랑하는 사람도 떠나갑니다. 이런 때를 대비하며 사람들은 연금을 들고, 보험을 들고, 재산을 모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자를 경계하시고, 무소유를 언급하신 것은 삶의 태도를 가르치신 것이지 물질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정한 방법과 비윤리적 방법, 비합법적 방법의 재산 축적을 질타하였고 삶의 우선순위는 영생과 구원에 있으며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놓치는 삶의 어리석음을 깨우친 것이지 재산을 소유하지 말라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야곱은 아버지 집을 떠날 때 빈손으로 나갔습니다. 머나먼 이방 땅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을 찾아가 빈손으로 객지 생활을 출발 했습니다. 밑바닥 인생, 알거지에서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20년 만에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가축들이 떼를 이루었고 열 두 아들을 얻었으며 수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큰 무리를 이끄는 족장이 되어 금의환향하였습니다. 오늘날 개념으로 크게 출세한 것입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는 함께 생각합니다. 결과론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42절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 셨으리 이다 마는”이 말씀은 하나님은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많은 재물에 내 손에 들려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계신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빈손이 아닌 많은 재산을 가득 채워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크리스천의 성공 이면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인간의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1) 야곱의 신앙과 삶
1) 하나님만 의지하여 살았습니다.(창31:5)
“내 아버지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셨느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야곱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벧엘에서 합니다(창28:10-22) 집에서 도망쳐 나온 야곱을 헤브론에서 약 650킬로 떨어진 하란을 향하여 걷고 있었고 루스 광야에서 날이 저물어 돌을 베고 잠을 다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사닥다리가 하늘로 섰고 천사들이 왕래하며 자신을 보호함을 목격합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그의 음성을 들었고 이런 영적 체험 이후 만사에 자심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가는 길과 만나는 사람과 움직이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임마누엘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찾아간 외삼촌은 성품이 고약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찾아온 여동생의 아들을 노예처럼 부려먹었고 온갖 불이익을 다 주었습니다. 한국적으로는 놀부 같은 사람이고 성경에 나오는 나발 같은 사람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머슴을 살았는데 결혼식 날 밤에 외삼촌에게 사기 결혼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7년을 더 일 하고 라헬을 얻었습니다. 라반은 자기 딸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과 품삯을 계약하고도 열 번이나 재계약을 했습니다. 처음 계약대로 하면 야곱이 자신의 재산보다 월등하게 많아질 것 같으니까 열 번을 깎은 것입니다. 야곱은 약자이니까 라반의 하자는 대로 따랐습니다. 요즘 같으면 이런 기업주 밑에서 누가 일하겠습니까? 월급을 올려달라고 노조가 데모하는데 6년 동안 월급을 열 번 깎으면 누가 그 회사 다니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은 라반주식회사에 그냥 있으면서 월급을 깎자면 깎아 주었습니다. 왜 야곱이 불이익을 감수하고 일했을까요? 야곱은 외삼촌 라반이 월급을 깎아도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사람이 불이익을 줘도 하나님이 이익을 주시고 사람이 빼앗아도 하나님이 돌려주시고 어떤 누가 자신을 해쳐도 하나님이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수로 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이며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이며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벧엘의 체험에 근거하여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부른 하나님 오늘날도 야곱과 같이 우리를 살펴주십니다. 경제적 한파에서 실직에서, 질병에서 각가지 좋지 않은 환경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굳게 믿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았습니다(창31:13)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야곱이 20년 동안 외삼촌에서 머슴 사는 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아브라함, 이삭, 못지않은 족장이 되게 하시고 이제는 더 이상 이방 땅에 머물지 말고 고향 땅 헤브론으로 돌아가라고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명령 할 때 훌훌 털고 돌아갑니다.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가 있습니다. 열 두 명의 자녀가 있습니다. 수천마리의 가축이 있습니다. 수많은 종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라반이 야곱을 보내지 않으려 합니다. 끝까지 자신의 종으로 삼고 야곱을 부려먹으려 하였고 야곱의 많은 아들들은 생산력의 수단으로 삼아 더 많은 재물을 얻으려 하였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몰래 도망을 쳤을 때 7일 동안 쫓아와 야곱을 붙잡아가려 하지 않았습니까?(창31:22) 뿐만 아니라 자신의 출생한 곳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험합니다. 부산에서 신의주 까지 거리입니다. 걸어서 가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있습니다. 사막을 건너고 수많은 산과 강을 넘어야 합니다. 광야의 유랑 족들을 만나 죽임 당하고 재산을 빼앗길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곳을 떠납니다. 영적 의미를 붙인다면 라반은 사단 마귀를 칭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자신의 영역과 세상 문화에 붙잡아 놓으려 합니다. 신앙은 이곳에서 탈출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야곱의 출생지에는 부모가 있는 고향입니다.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이며 하나님의 품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고 하나님의 은총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순종은 수고가 따르고 손해가 따르고 어려운 시험의 과정이 있습니다. 순종은 이런 것들을 끊거나 이기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 행위입니다. 순종에는 결단이 필요하고 순종에는 강력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순종함으로 드렸습니다. 한나는 기도하여 얻은 아들 사무엘을 과감하게 하나님의 성전에 바칩니다. 이스라엘은 400년간 살던 애급 땅을 탈출합니다.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쫓으니라.”(눅5:11)순종은 축복의 씨앗이며 기적의 그릇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고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고 몸의 소생이 복을 받게 하며 대적이 한 길로 치러 들어와서 일곱 길로 도망치게 하며 머리되고 꼬리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 있고 아래 있지 않게 하시는 분”(신28:1-14)입니다. 오늘도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3)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살았습니다.(창30:37-43)
야곱은 일하되 무조건 일하지 않고 머리를 쓰며 일했고 기도하면서 일했습니다. 열심히 일만 하면 평생 사원이 되고 머리를 쓰면서 일하며 다른 사람을 다스리며 일하는 사람이 되고 기도하며 일하면 지도자, 즉 리더가 됩니다. 야곱은 외삼촌의 집에서 양을 치는 머슴의 위치에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머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업가였습니다. 외삼촌의 양을 치면서 양들이 새끼를 배는 철이 되면 유심히 관찰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아무리 흰 양이라도 새끼를 밸 때 신풍나무, 버드나무, 살구나무 가지 아래서 교미를 하면 얼룩무니나 아롱진 양들이 태어나는 것은 발견하였습니다. 수년간 이런 원리를 터득하였고 자신의 재산을 확보할 때 실제로 적용한 것입니다. 일 하되 연구하는 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누구도 못 당합니다. 머슴의 사고를 가진 사람은 머슴이 되고 사장의 사고를 가진 사람은 사장이 되고 지도자의 사고를 가진 사람은 지도자가 됩니다.
야곱은 머리만 쓴 것이 아닙니다. 열심이 일했습니다. (창31:40)“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아무나 사업가가 되지 않습니다. 사업가의 마인드와 사업가의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의 꿈을 안고 부자가 되기 위하여 머리를 쓰고 일해야 합니다. 아무나 박사가 되는 것이 아니며 아무나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남다른 노력의 결과입니다. 혹 운이 좋거나 부모가 물려준 재산으로 간혹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도 자신의 노력하지 않으면 지키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 난리들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환경이 우리들을 힘들게 하지만 똑같은 환경도 잘 견디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있고 돈을 오히려 더 버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다른 의지와 열정이 있고 부지런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조상이 물려준 재산을 까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 푼도 물려받지 못했지만 자수성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 줄 사람에게 복을 주고 벌을 줄 사람에게 벌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먹을 것 다 먹고 쓸 것 다 쓰고 실컷 놀고 누가 공짜나 주지 않나 기다리고,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에게는 기회도 오지 않을뿐더러 돕는 사람도 없습니다. 나 자신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고생하는 일에 대하여 누구도 탓하지 않았습니다. 형을 탓하지 않았고 외삼촌을 탓하지 않았고 환경이나 운명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억척같이 일 했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였습니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남보다 땀을 많이 흘렸고 남 보다 잠을 덜 잤고 남 보다 일을 더 많이 했고 남 보다 연구를 더 많이 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이 그를 도와 준 것입니다. 축복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열정적이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도우심
야곱이 에서와 함께 쌍둥이로 태어나 각각 다른 길을 가고 결국 야곱이 세 족장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 잡고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오른 것은 모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이었습니다. 굳이 예정론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각 사람에 대한 길을 예비하여 놓고 계십니다. 에서는 에서의 가는 길을 하나님이 예비하셨고 야곱의 가는 길도 하나님이 예비하셨습니다. 에서는 세일산 일대에 자리를 잡고 그 후손이 한 민족을 이루었고 야곱의 아들들은 애급에 내려가서 한 민족이 되어 400년 후에 모세에 의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되고 그들을 하나님의 선민이 되게 하였으며 유대교가 나오고 기독교가 나오고 성경이 나오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드린 나라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학문, 종교, 등등을 통하여 자유와 번영을 누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류의 행복과 인간을 구원하는 역사를 이루어 가게하고 계십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며 도와주십니다. 사람은 빈손으로 돌려보내도 하나님은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분이 아닙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자식에게 빈손으로 내 보내도 하나님은 절대로 빈손으로 내보내지 않는 분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집을 떠날 때 빈손으로 나갔지만 야곱 인생 20년 동안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나 보실까요?
1) 많은 재물을 얻게 하였습니다.(창31:21)
“그가 모든 소유를 이끌고”라고 하였고 얍복 강을 건너 형에서를 만났을 때 형에게 준 선물만 암 염소 200마리, 수 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이 20마리, 젖 나는 낙타 30마리와 그 새끼(60마리)암소가 40마리, 황소가 10마리, 암 나귀 20마리, 나귀 새끼 10마리였습니다(창32:14-15) 함하여 580마리입니다. 열차에 실어도 몇 칸을 차지해야 할 정도입니다. 형에게 예물로 준 것이 이렇게 많으니 자기 재산을 얼마나 많겠습니까? 어마어마한 부자가 된 것입니다. 사실 시시한 복은 내가 노력하여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큰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무런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어도 부모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말고 하나님과 상대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은 이렇게 재물의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2) 자식을 많이 얻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데로 야곱은 아들 열둘과 딸 하나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 보다 더 많은 자녀를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 상급이로다.”(시127:3-4)라고 하였습니다. 많이 낳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키우는 것도 축복인데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훌륭한 인물이 나왔습니다. 유다는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고 요셉은 애급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유목생활과 농경사회에서 자식이 경쟁력입니다. 자식에 재산입니다. 자식이 울타리입니다. “자식은 전통의 화살과 같아서 원수와 말할 때 수치를 당치 아니한다.”(시127:6)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이 야곱의 속도 썩혔지만 열 두 아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열 두 지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경건한 후손이 많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왔습니다.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3) 족장이 되었습니다. (창31:42)
우리는 흔히“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칭합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명예입니다. 원래 야곱은 성격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소심 하고, 여성적이고, 사색적이고, 이기적이고, 사기꾼 기질이 농후하며 목적을 위하여 비열한 수단을 서슴지 않고, 친 형과 아버지까지도 속이고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못하고 뒤에서 일을 꾸미는 비겁한 사람입니다. 사회학적으로는 열등한 존재이고 윤리적적으로 배반자이며 범죄 심리학적으로 볼 때도 문제가 많은 사람인데 하나님은 야곱을 도와주었고 인도해 주었으며 얍복강 나루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에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고, 훗날 다윗 왕조의 아버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요 구속사의 중요한 인물의 반열에 세워 주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빈털터리 인생을 채워 주시고 빈손으로 시작해도 가득 안겨 주시고 밑바닥 인생으로 출발해도 높은 곳에 올려 주시고 절망의 골짜기에서도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풍랑 이는 바다 같고, 거친 사막 같고, 깊은 계곡 같으며 흥건히 고인 눈물을 밟으며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시궁창에서도 봉선화가 피게 하듯이 우리의 인생 꽃을 피워 주시는 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많이 힘들어도 야곱의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신다고 굳게 믿고 새 힘을 얻어 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의 최선, 믿음의 재료
창 31장 38~42절 / 이동규목사
줄탁지기 ( 啄之機) 줄탁동시( 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닭이 알을 깔 때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기 위해 껍질 안에서 쪼는 것을 '줄( )' 이라 하고, 이 때 어미닭이 밖에서 쪼아 깨뜨려 주는 것을 '탁(啄)' 이라 함. 어미닭이 밖에서 쪼아 깨트려 주는 것이 너무 늦으면 새끼는 알 속에서 질식할 것이고, 너무 일러도 알은 허망하게 쏟아져 버릴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행해지므로 사제지간이 될 연분이 서로 무르익을 때 쓰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고사에서 어미닭을 하나님으로 병아리를 나라고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껍질 안에서 죽을힘을 다해 껍질을 쪼아 댈 때, 주님은 밖에서 그와 동시에 도와주시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최선이 믿음의 재료가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장면들이 성경전편에 흐르고 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장막(帳幕)성전, 즉 텐트로 된 성전을 만들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저희 교회 건물만한 텐트 성전을 만드는데 전 이스라엘을 동원합니다. 청색실, 홍색실, 자색실, 가는베실, 염소털,수양가죽, 해달가죽.. 보석, 금가락지, 놋제품 등 아주 자잘한 것까지 다 가져오게 합니다. (출35:6) 그래서 장막 성전이 지어지고 완성됩니다.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 없는 곳에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 능력의 말씀 한 마디면 손바닥만한 텐트성전하나 못 만들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굳이 이스라엘의 최선을 보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지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에굽 시키시고 광야길을 행할 때도 그렇습니다. 이 출에굽의 과정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은 미리 바다를 갈라주시지 않았습니다. 갈라줄 것이면 미리 알아서 척 갈라 주면 좋잖아요? 줄탁동시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동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부르짖고 나서, 모세가 지팡이를 던져서야 갈라집니다. 마라의 쓴물을 만나서도 그렇습니다. 나뭇가지를 던져서야 단물로 바뀝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는 법궤를 앞세우고 전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들어서고 나서야 갈라집니다. 그냥은 안 갈라졌습니다. 미리도 안 갈라졌습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 할 때 이스라엘은 일주일 동안 여리고성 탑돌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함락되었습니다. 그냥 미리 무너트려 주신 게 아닙니다. 다 그렇습니다.
인간 편에서의 최선을 다한 믿음의 행동이 있고 나서야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이 그냥 무턱대고 기적을 쏟아 부어 주시고, 무조건 역사하시는 게 아닙니다. 믿음의 행위인 인간 편에서의 최선의 행동이 있고서야 하나님은 움직이십니다.
인간의 최선
오늘본문에서 우리는 야곱을 봅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축복을 가로채고 먼 이국땅으로 도피합니다. 그곳에서 야곱이 당한 고초는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만 기대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언약만 믿고 허송세월하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뼈를 깎는 노력을 다 했습니다. 이십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면서 갖은 노동에 갖은 궂은 일에 이용당할 대로 다 이용당하면서도 인간의 최선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이십년에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 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떼의 수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낮에 도적을 맞았든지 밤에 도적을 맞았든지 내가 외삼촌에게 물어 내었으며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 (창31:38-40)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심성의를 다했습니다. 야곱의 갖은 고생, 뼈를 깎는 노동의 과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양이나 염소들이 낙태하지 않게 하려면, 무진 애를 써야 합니다. 보통 신경을 써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짐승에 물리거나 도적맞은 것은 반드시 보충했습니다. 낮의 사막의 더위와 밤의 사막의 추위를 다 이기면서 목동으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잠이 모자란 20년 세월이었다 이 말입니다. 머슴으로서 청지기로서 목동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머슴으로서도 100점자리입니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거한 이 이십년에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 사년,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육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31:41)
이십년을 한결 같이 뼈를 깎는 노동을 힘껏 했지만 외삼촌은 임금을 열 번이나 체불시켰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최선을 다할 뿐 하나님의 때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극도의 인내심, 기다림,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리고 확고한 믿음!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불러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거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시고” (42절)
하나님이 야곱의 뼈를 깎는 고난과 수고를 밝히 살피시고.. 이런 말입니다. 그런 인간의 최선 끝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겁니다. 20년 후입니다. 야곱의 뼈를 깎는 노동과 최선의 땀방울이 있는 그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축복 성취의 역사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믿음이니다.
인간이 맥 놓고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없습니다. 인간이 그의 최선을 다하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드느라 최선을 다했습니다. 땀방울을 흘리고 비난을 받고 미친 소리 들어가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은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 한 마디로 방주를 만들어 줄 수도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자칫 잘 못 생각하면 인간의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손놓고 있는 곳에 하나님이 역사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만 맞는 말입니다. 시작부터 손은 놓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역사도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지점까지 밀고나가 내가 걸어 갈 수 있는 한도 까지 가서 이제는 내가 손을 놓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면 거기서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 끝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은 진실된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 믿음의 행위를 보시고 하나님은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재료는 『인간의 최선』이라는 재료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빈센트는 말했습니다. “ 그대가 올라갈 수 있는데 까지 올라가 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내려오실 것이다” 반(反)이성과 초(超)이성은 그래서 다릅니다. 사람들은 반이성을 믿음이라 합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매일 땀을 흘리면서 여리고 성을 돌지 않으면 성이 안 무너집니다. 땀 흘려 방주를 짓지 않으면 물에 빠져 죽습니다. 청색실 자색실 홍색실을 내어 놓지 않으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은 지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이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도시의 위험을 무릅쓰고 죽을힘을 다해 3차 전도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복음은 세계로 전파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그래요. 완전히 손을 놓고 기도만 한대요. 이거 안 될 일입니다. 열심히 일하지는 않고 기도만 해요. 이래서는 승진이고 성공이고 없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원만 전전해요. 산 아래로 내려와 또 열심히 살아야 할 텐데.. 일종의 도피입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없습니다.l 이건 믿음이 아니고 로또복권, 요행수만 바라는 겁니다. 믿음이 없는 겁니다. 어떤 분은 자신은 최선을 다하지 않고 목사님에게 기도만 부탁해요. 이거 안 될 일입니다. 믿음은 믿는 만큼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걸 뜻합니다.
줄탁지기! 때가 있습니다.
만사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때를 선용하십시오.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기회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기회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야곱이 20년만의 귀향, 필생의 꿈이 성취되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대가 지금 최선을 다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순도를 높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비상할 때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때입니다. 비젼이 성취될 때입니다. 하나님의 때(카이로스)입니다.
이때는 젖 먹던 힘을 다해 믿음의 순도를 높이고 죽을힘을 다해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집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때는 얼마나 중요한지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줄탁지기 하나님이 껍질을 깨기 위해 쪼아줄 때, 나는 안에서 최선을 다해 쪼아야 합니다. 오늘 보니까 요셉은 그런 하나님의 때(카이로스)를 만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일어나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이렇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20년 만의 꿈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필생의 꿈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11)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것 점 있는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13)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 (창 31:11-13)
타석의 타자는 피쳐가 볼을 던지는 그 몇 초 사이에 극도의 집중을 합니다. 세포가 다 일어서도록 집중하잖아요? 골문 앞의 스트라이커는 슛을 쏘는 그 몇 분의 일초 동안에 고도의 집중을 합니다. 양궁 선수를 과녁을 보고 활시위를 놓는 그 몇 분의 일초에 극도의 집중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세계에서도 때가 있습니다.
회개할 때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을 만날 때 집중하십시오.
기도할 시간에 집중하십시오.
사역할 때 집중하십시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열심을 다해 집중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회가 주어 졌을 때 집중하십시오. 도전의 기회가 주어 졌을 때 집중 하십시오. 건강이 주어 졌을 때 집중하십시오. 비젼이 생겼을 때 집중하십시오. 사역의 기회가 주어 졌을 때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이 쪼아 주고 있는 시간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고 있는 천재일우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집중적으로 역사하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영적인 눈으로 그 시간을 보십시오! 이제는 때가 왔습니다. 추수의 때가 왔습니다. 이 가을에 집중합시다. 우리 주님이 역사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9월 1일부터 시작되는 기도의 시간 집중하십시오. 성경공부 시간 집중하십시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시간에 모든 영적 능력을 동원하여 집중적으로 반응하십시오! 집중적으로 실천하고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그대에게, 주님을 만나 언약이 이뤄지고 비젼이 성취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모범사원, 야곱
창 31장 38~42절 / 지용수목사
프랑스에서 한 가난한 사람이 큰 결단을 하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10년이 채 되지 않아 프랑스 50대 부자의 명단에 들었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살다가 전립선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자기 재산 중 상당액을 암 연구 센터에 기부했는데, 그가 죽은 다음에 다음과 같은 유서의 내용이 신문에 공개되었습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지만 부자가 되었고 부자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내가 천국 문턱을 넘기 전에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부자가 되는 비법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 비법은 프랑스 파리 중앙은행 나의 금고에 있는데 그 금고를 열 수 있는 사람은 내 변호사와 대리인 두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답을 맞혀보세요. 누구든지 그 정답을 맞히는 사람에게 엄청난 상금을 주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돈, 기술, 관심, 기회 등등 많을 것입니다. 48,561명이 응모했는데 그들 중에서 정답을 맞힌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불타는 소원, 열정’이랍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어야지. 잘 살아 봐야지.’ 하는 열정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아홉 살 먹은 테일러라는 소녀가 정답을 맞혀서 엄청난 상금을 차지했습니다.
20년 동안 매일 천 몇 백 명의 어려운 이웃에게 밥을 무료로 대접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며칠 전 제가 그 교회에 가서 앞치마를 입고 함께 봉사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밥을 퍼서 나누어 주며 깨달은 것이 많습니다. 20년간 변함없이 날마다 천 몇 백 명에게 무료로 점심을 대접하는 그 교회가 자랑스러웠고, 우리 교회가 사회봉사를 한다고 하지만 참 부족하구나 하고 부끄럽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잘 산다 해도 아직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밥을 많이 담아 주어도 “좀 더 주세요. 좀 더 눌러서 담아 주세요.”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천 몇 백 명의 사람들 중에 노인은 몇 분 없고 거의가 장년과 청년들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밥을 담아 주면서 “맛있게 드세요. 건강하세요.” 라고 축복을 하며 그들의 눈을 보았는데 그 눈에 의욕도, 희망도, 빛도 없었습니다. ‘오늘도 이 한 그릇을 얻어먹고, 내일 또 한 그릇 얻어먹고 살지 뭐.’ 하며 그냥 포기하고 사는 듯 했습니다. 그것이 정말 마음 아팠습니다. 우리나라 일터에 일꾼이 부족해서 외국인 근로자 백만 명이 와서 일하고 있는데, 몸이 건강한 분들이 하루 한 끼를 얻어먹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잠언 23장 7절에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생각이 운명을 결정한다.”
이 기회 많은 땅, 할 일 많은 땅에 살면서도 ‘그냥 살지.’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시편 107:9)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이사야 44:3)
『네 입을 넓게 열라(Open wide your mouth) 내가 채우리라(and I will fill it.)』(시편 81:10)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7)
꿈에서도 제 소원은 우리 교회가 이 세상에서 영혼을 가장 많이 구원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해서 위대한 교회를 만들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큰 일하자.’ 이런 소원의 불이 타는 것입니다.
회사를 경영해도 좋은 회사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위대한 회사가 되게 해야 합니다. 선생님을 해도 위대한 선생님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우리 벧엘 찬양대를 새로 맡은 지휘자에게 말했습니다.
‘이 지역만 보지 말고, 우리나라만 보지 말고 세계 최고 지휘자가 되어서 세계 최고의 찬양대를 만들어 보아라.’
지휘자는 세계적인 교회의 찬양도 들어보고, 세계적인 지휘자의 지휘도 보면서 자꾸 자기를 발전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작은 틀에 빠지면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매일 드리는 기도 제목이 17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첫째가 ‘하나님의 마음을 추수 때의 얼음냉수처럼 시원하게 해 드리는 종이 되게 해주세요.’입니다. 둘째는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한경직 목사님의 뒤를 잇는 우리나라의 등불 되게 하소서.’입니다. 저같이 허물 많고 부족한 사람이 한경직 목사님께서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무릎을 꿇고 손들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민족의 등불, 한경직 목사님을 불러가셨군요. 그러면 이제 누가 한 목사님의 뒤를 잇는 한국교회의 등불이 됩니까? 주여, 저로 하여금 한경직 목사님의 뒤를 잇는 등불 되게 하소서.”
그 기도를 하고 나니 얼마나 부끄러운지 제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그래서 곧바로 “주여, 저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목회자들이 한경직 목사님의 뒤를 잇는 등불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귀한 삶을 따라가려면 너무 멀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거룩하게 살려고 애써보는 것입니다.
꿈은 이루어집니다(Dream comes true).
학생이 공부하면서 ‘우리 학교에서 1등 해야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한국에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라는 비전을 갖고 공부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야곱은 이미 엄청난 재벌의 아들이지만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아 더 크게 되고 싶어서 부르짖는 사람입니다. 큰 부자 아브라함의 손자이고, 큰 부자 이삭의 아들인데도 더 큰 열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서 역시 야곱과 같은 아브라함의 손자이고 이삭의 아들이지만 그런 열망이 없으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꿈이 있고, 열정이 있고, 열망이 있고, 비전이 있고, 소원의 불이 타는 사람을 쓰십니다.
특별히 야곱은 직장생활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반의 집에서 일하는 20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직장인의 모범이 됩니다. 오늘도 모든 회사의 사원들이 야곱처럼 일하면 안 될 회사가 없을 것입니다.
야곱은 어떻게 일했습니까?
먼저는, 자기 일을 사랑하고 중히 여겼습니다. 야곱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면서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열심히 일한 것도 중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한 것은 일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본문 38절에 보면, 야곱이 양과 염소 떼를 돌본 20년 동안 수많은 암양들과 암염소들이 새끼를 배도 낙태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야곱도 그만큼 수고한 것입니다. 양 한 마리, 염소 한 마리, 특별히 새끼를 가진 양과 염소를 쓰다듬으며 관심을 갖고 기른 것입니다.
야곱이 7년을 수일처럼 행복하게 일한 것은 라헬에 대한 사랑 때문인 까닭도 있지만, 라헬을 얻은 다음에도 낮이나 밤이나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한 것은 일을 사랑하고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어제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밤 12시까지 일하고 활동했습니다. 하루 8~9시간 일해도 되지만 21시간을 해도 기쁘고 감사한 것은 제가 하는 일이 중한 것을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머슴살이를 했지만 그 일을 사랑하고 중히 여기니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임스 J. 힐은 미국 서부 철도회사 사장입니다. 그는 하루에 5불(5,000원)을 받고 일하는 철도 현장의 막노동꾼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일을 귀하게 했는지, 감독이 되고 매니저가 되고 사장이 됩니다. 어느 날 그가 현장 순시를 하는데 아주 남루한 옷을 입은 한 근로자가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오, 제임스! 나야, 나. 알지? 20년 전에 함께 일했던 나야. 그때 우리는 하루 5불을 받기 위해 일했지.”
그래서 보니 20년 전의 친구입니다.
“그래, 이 사람아, 반갑네. 요즘 어떻게 지내나?”
“그냥 그래, 지금도 하루 5불의 품삯을 위해 일하고 있네.”
제임스 J. 힐 사장은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아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아, 20년 전에 자네랑 같이 일했던 그때도 나는 5불을 위해서 일한 게 아니야. 내가 철도를 바로 놓아야 우리 미국 시민들이 사고를 당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일했네. 철도를 사랑하고, 그 일을 사랑하고, 미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했네.”
여러분,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내가 회사에서 ○○○ 원을 받으니 그 품삯만큼 일을 해주어야지.’ 하는 사람은 좋은 사원이 될 수 없습니다. 회사를 사랑하고 일을 귀히 여기며 ‘이 자동차 부품 하나를 잘 만들어야 자동차가 고장 나지 않고, 세계에서 품질을 인정받고, 우리나라도 잘 되겠지. 예수님을 믿는 내가 일을 잘해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지.’라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돈을 떠나서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제 제가 책 한 권을 사서 읽어보았는데, 거기에 한국의 직장인 100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가 나와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65%가 회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에 애착이 없다는 것입니다. 직장인 100명 중 65%가 먹고 살기 위해 일하고, 35%만 직장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먹고 살려고 일하는 65%는 결국 직장에서 밀려나고, 일을 사랑하고 직장을 사랑하는 35%는 그 직장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굉장하지 않아도 그 일을 중히 여기고 사랑하면 일의 열매가 큽니다. 마태복음 25장 21절에서 23절에 보면,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일도 맡겨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목회를 할 때 아내 한 사람을 앉혀 놓고 설교를 했습니다. 아내 한 사람에게만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교인들은 목사님을 천사처럼, 베드로처럼 생각하니 교인들에게는 설교하기가 쉬운데, 아내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내는 저를 다 압니다. 예전에 제가 심방을 할 때 보면, 제게 차 대접을 하는 우리 교우들의 손이 떨렸습니다. 그러나 제 아내는 제 앞에서 떠는 일이 절대로 없습니다. 오히려 저를 우습게 봅니다. 그런 사람에게 설교를 하려면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설교를 했는데, 아내 한 사람에게 설교할 때도 최선을 다해 준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큰 일도 맡겨주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남의 집 머슴을 살든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모세는 왕이 될 만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지만, 양치는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일을 중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좋은 꼴이 없나? 좋은 물이 없나?” 하며 찾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른 것입니다.
오늘 하는 일에 감사하고, 그 일과 일터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야곱이 라반의 집에 있을 때 그 집이 일어난 것처럼 우리 때문에 회사가, 나라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정직했습니다.
본문 38절과 39절에 보면,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그 집의 새끼 양 한 마리 잡아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도둑맞은 것, 짐승에게 찢긴 것도 다 변상했습니다.
야곱이 수많은 양들 가운데 대여섯 마리는 팔아먹을 수도 있고, 좋은 새끼 양 한 마리 정도는 집에 가지고 와서 잡아먹을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양들 가운데 50마리 정도는 팔아도 라반이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거짓말도 하고 형과 아버지를 속이기도 했지만,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는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라반의 양 새끼 한 마리 팔아먹지도, 잡아먹지도 않았습니다. 라반을 속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야곱이 그 많은 양들 가운데 몇 마리씩 슬쩍슬쩍 했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저주하셨지, 축복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사야 26장 7절에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종이 한 장에도, 바늘 한 개에도 정직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앞길을 평탄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84편 11절에도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부정직하게 산다 할지라도 나만은 하나님 앞에 정직히 길을 가면 하나님께서 해처럼 빛을 비춰 주시고 방패가 되셔서 적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은혜를 주셔서 기쁨으로 살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씌워 주셔서 가문을 높여 주시고, 좋은 것도 아끼지 않고 주시는 것입니다.
청계천에서 가게를 시작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큰 도매상으로 성공한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 가게는 문을 열기도 전에 사람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물건의 질이 좋은지 묻지도 않고 그냥 사 가고, 가격을 깎지도 않는답니다.
대성한 그 권사님에게 성공의 비결을 물으면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하신답니다.
“우리 상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저는 점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니 저는 겸손해야 되고, 친절해야 되고, 정직해야 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물건과 가격을 신뢰해서 그냥 사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해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직하고 땅을 팔아 헌금을 하는 굉장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위선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셨습니다. 요셉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주인의 아내를 폭행하려는 아주 나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다니엘서 6장 4절에 보면, 다니엘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다니엘을 하나님께서는 총리가 되게 하시고 왕권이 바뀌어도 총리 자리를 계속해서 지키게 하십니다.
로마서 2장 29절에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고린도전서 4장 5절에도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칭찬은 하나님께 받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깨끗하게 살아도 사람은 나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더럽게 사는데도 사람들은 나를 깨끗한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잘못 보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길을 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세워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을 상대했습니다.
야곱이 자기 직장 주인 라반만 생각했다면 얼마나 열을 받았겠습니까? 열 번이나 임금을 변역하고 사기 친 주인입니다. 자기 딸도 팔아버린 나쁜 주인입니다. 그 나쁜 주인을 생각하면 일도 하기 싫고 그 집을 떠나고 싶었지만 야곱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본문 42절에 보면, 야곱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내가 공수로 갈 뻔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외삼촌의 칼에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이렇게 거부가 되고, 하나님 때문에 내가 이렇게 보호를 받습니다.”
이 말은 ‘나는 20년간 하나님을 상대하고 살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상대하고 살면 사람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등은 있는데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에게 예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등과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만 불러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집사님이 되고 그 이상이 되어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가짜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기름이 없는 사람은 마귀 짓도 하고, 어려우면 자살도 하고, 교회 이름을 더럽히기도 해서 ‘교인이 저렇다.’라고 하는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이 있는, 거듭난 성도는 사람도 상대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어떤 칭찬을 받아도 겸손할 수 있고, 아무리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욥기를 읽다가 다시 한 번 ‘욥이 참 대단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집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어느 가정에 한 아들이 병원에 입원해도 마음이 아프고 세상을 떠나면 더 아픕니다. 물론 그 아들은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천당에 갔지만 사랑하는 아들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몇 달이 지나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욥은 아들 일곱과 딸 셋을 한 날에 다 잃었습니다. 하루에 재산이 다 없어졌습니다. 아내가 가출했습니다. 몸에 병이 와서 사람 꼴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살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나쁜 죄를 지어서 그런 일을 당했다면 회개하면 되는데 나쁜 죄를 짓지도 않았습니다. 처녀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선을 행하며 산 의인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욥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거기에 더하여 욥기 22장 5절 이하에 보면 욥의 친구,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와서 이렇게 퍼붓습니다.
“네 죄악이 크고 네 악이 극에 달했다. 네가 이유 없이 형제의 물건을 볼모 잡고, 고아의 팔을 꺾고, 갈한 자에게 물을 주지 않고,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과부를 공수로 보내니 네가 행한 악이 너무 커서 하나님께서 너를 저주하는 것이다. 심판하는 것이다.”
아들딸과 재산을 다 잃고, 건강을 잃고, 아내마저 가출하여 괴로워하고 있는 욥에게 “네 악이 극에 달했다. 네 죄악이 크다.”라며 비난한 것입니다. 그런 비난을 견디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이깁니다. 욥기 23장 10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그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따라 합시다.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자식이 다 죽고, 재산을 다 잃고, 건강도 잃고, 아내가 떠나가 가정은 다 깨어졌는데, 친구까지 비난을 하니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니 “이것은 내 끝이 아니야. 이 훈련 과정이 지나가면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성령의 사람이 아닌 사람은 비난의 말을 들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비난을 들으면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사람의 소리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사야 40장 30절, 31절에 말씀하십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아무리 억울한 말을 들어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길 힘을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식당을 해도 하나님을 상대하고, 내가 회사에서 힘든 일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 일하고, 내가 목회를 해도 하나님 앞에서 하면 담대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직장은 직장 이상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가정 이상입니다. 가정이 힘들다고,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힘들다고 가정을 뛰쳐나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바보입니다. 직장이 힘들다고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바보입니다.
내가 어느 집에 들어갔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그 집에 보내신 것입니다. 시어머니를 구원하라고, 집안 식구들을 구원하라고, 예수의 향기를 나타내라고 나를 그 집에 보내신 것입니다. 내가 어느 회사의 사원이라면 그 회사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라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예수님을 믿는 사원이 얼마나 멋있는가를 보여 주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그 회사에 보내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 20:21)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요한복음 17:18)
따라 합시다.
“내 일터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곳이다.”
우리의 직장은 직장 이상입니다. 돈 때문이 아니라 사명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선교를 하고, 하나님의 향기를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담대하게 여러분을 섬기는 것은 제게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 파송하셨다. 우리 교우를 잘 섬기라고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에 파송하셨다.’라는 확신이 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쁘게 일하는 것입니다.
회사원이나 사업가나 교육자나 공무원이나 목회자나 다 같습니다. 만인이 다 제사장입니다. 목회자만 성직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그 일이 다 거룩한 일,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을 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우리가 잘 되고, 우리 때문에 그 공동체가, 회사가, 나라가 잘되고,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영원히 받게 되실 줄 믿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창 31장 38~42절 / 조상호목사
저는 지난주 화요일에 출국하였다가 시드니순복음교회 창립30주년 행사와 오세아니아총회 연례회의를 참석한 후 어제오후에 돌아왔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해주셔서 모든 일정을 잘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기도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드니 방문 기간 중 느낀 점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제 일생에서 아마도 에어컨 덕을 가장 많이 본 기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 듯한 높은 기온과 열풍으로 인해 가만히 있어도 끈적거리는 기후 등으로 에어컨이 없는 곳에 가면 얼굴이 불그스럽게 달아오르는 불 볕 더위를 경험했습니다. 시드니에 도착한 후 묵었던 숙소가 교회 근처의 저렴한 모텔이었는데, 밤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더웠습니다. 과거 1987년 처음 시드니에 도착해서 7년 동안 살 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이번에 가서보니 옛날의 시드니가 아니었습니다. 일기 예보에 의하면 오늘 시드니 기온은 44도가 될 것이라고 해서 걱정들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지난 1월 초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에도 30도 후반의 기온을 한 차례 기록한 적이 있는 것처럼, 시드니도 갈수록 기온이 오르는 등, 지구의 온난화 형상이 가속화되어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말세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이번에 시드니에 가서 어느 집사님이 입원해 있는 한 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 집사님은 한국에서 일류대학 수의학과를 졸업한 후 수의사로 일하셨고, 여자 집사님은 간호사로 일하시다가 우여곡절 끝에 뉴질랜드에 도착하신 후 모텔에 머무르실 때, 제가 전도하여 오클랜드 순복음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던 분입니다. 그 후 뉴질랜드 시민권을 얻은 후 시드니로 이사를 가셨습니다. 오클랜드에서나 시드니에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드님이 제가 더니든에서 목회할 때 오타고 치대를 공부했고, 지금은 시드니의 한 백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치과병원을 개업했는데, 병원이 잘 되자 효자 아들이 그 집사님 부부에게 시드니 북쪽 좋은 동네에 60만 불 이상 호가하는 집까지 사주어서 이제는 나름대로 살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3개월 전 남자 집사님이 사다리에 올라가 일을 하다가 사다리와 함께 떨어져서 단단한 돌바닥에 머리가 박살나는 바람에 뇌수술을 다섯 번씩이나 받았습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수술을 받고나서는 과거를 기억도 못하고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다가, 제가 심방 갔던 수요일에는 저를 알아보고, 제가 손을 잡아주니까 제 손을 꽉 쥐어 주는 등, 상태가 좋아져서 병원에서 재활병원으로 옮기라는 말을 듣고 왔는데, 침대에 누워있는 그 집사님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또 과거 같은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의 대소사 일을 잘 감당하던 정이 많던 모 형제님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 분은 유도, 합기도, 등의 무예가 거의 20단(?)이 넘고 다른 어떤 한국 사범과 함께 단 둘이 시드니의 Kings Cross라는 환락가를 주름잡고 있는 갱단 10여명과 맞장 떠서 이겼다는 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 분도 재건축을 하기 위해 건물을 허물다가 건물과 함께 사다리가 쓰러지는 바람에 불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또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한국 국가대표를 오랫동안 역임하며 올림픽에도 출전하여 국위를 선양하는 등 많은 인기를 얻었던 모선수의 딸을 만났습니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키가 저보다 더 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엄마가 제게 기도를 받겠다고 데리고 와서 제가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는데, 축복기도가 나오지 않고 자꾸 제 입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기도가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이의 아버지와 엄마가 이혼을 했고, 그 아이는 몇년 전 친구생일 파티에 갔다가 어려움을 당한 후에 망가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꾸만 가출을 하고 나중에는 대지 말아야 할 것까지 손을 대는 등,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시드니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힘이 세고,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가 있어도,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시드니순복음교회는 1979년 1월 첫째 주일에 어린아이들을 포함하여 26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당시 개척 멤버 중에 30년이 지난 지금도 시드니순복음교회를 섬기는 분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신 분들이나 하늘나라에 이미 가신 분들도 있지만, 현재 11명이 아직도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구두수선, 홈 크리닝, 직장생활 등으로 힘든 일을 하면서도 열심을 다해서 교회에서 30년 동안 봉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분들의 헌신과 봉사를 보시고 자녀와 가정을 축복해주셨습니다. 모 장로님의 따님은 대학수능시험에서 NSW 여자 전체 수석을 차지한 후 의사가 되기도 하고, 모 장로님의 아드님 역시 의사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자녀는 유명한 회사의 매니저, 전기기술자, 등 호주의 주류사회에서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로 세워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30년을 쉬지 않고 달려오신 정우성총회장목사님을 뵈면서,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발견했습니다. 제가 올해로 22년째 때로는 가까이에서 때로는 멀리에서 목사님을 뵙고 있습니다만, 이 기간 동안 저는 목사님께서 안식년은커녕 안식월이나 하다못해 가족들과 함께 3~4일 동안의 휴가조차 가지신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 강사로 오신 <은혜와 진리교회> 당회장이신 조용목목사님의 말씀처럼, 30년 동안 ‘목양일념‘으로 달려오셨습니다. 80년대 초부터 매월 3일씩 금식을 하며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하루에 잠을 2~3시간 이상 주무신 일이 없을 정도로 온 몸으로 헌신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섬기시는 시드니순복음교회에서 뿐 아니라, 제자들의 교회 행사에 참석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례로 그렇게 로토루아에 많이 가셨지만, 단 한 번도 목사님께서 온천에 가신 것을 본 적이 없고 저녁 12시까지 암환자나 시험이 들어 교회를 쉬고 있는 로토루아교회 성도댁에 심방을 가시고, 심방을 마치면 곧바로 자동차를 타고 오클랜드로 가셔서 시드니 행 새벽 비행기를 타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요즘 젊은 사역자들은 6~7년만 사역해도 ’안식년을 가져야겠다’, ’힘들어서 쉬겠다‘, ’재충전하는 기회를 가지기 위해 사역을 내려놓는다’라는 말들을 하지만, 목사님께서는 30년 동안 쉬지 않고 헌신하셨습니다. 물론 30년 동안 너무 무리하셔서 지난 금요일 저녁에는 조용목목사님으로부터 ‘운동 좀 하시라, 몸을 잘 추슬러야 하나님의 일도 잘 할 수 있다, 몸을 잘 돌보시라’는 말씀을 듣기도 하시고, 몸이 많이 쇠약해지셔서 예전과 달라지신 것이 분명하지만, 아무튼지 30년 동안 한결같이 ‘목양일념‘으로 헌신해오고 계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목사님을 성도들로부터 존경받는 목사님이 되게 하셨습니다. 때때로 교회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들어도 교회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최선을 다해 당신의 몸을 불사르듯이 헌신하고 계시는 목사님을 사랑하고, 위하여 눈물로 중보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약 2,000명 이상의 성도들이 주일출석을 하고 호주, 뉴질랜드, 피지, 한국 등지에 25개의 지교회를 세울 수 있는 복을 주셨습니다. 저는 목사님을 뵈면서, 하나님은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사실 실력있는 목사님들은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시드니만 해도 유명한 신학교를 졸업하신 박사님들이 많고, 한국의 유명한 교회에서 사역하시다가 시드니로 오신 목사님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목사님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는 목사님들은 드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실력 있는 사람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사용하시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주어진 일에,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입니까?
저는 오늘 이 아침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던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야곱입니다. 사실 성경을 통해서 드러나는 야곱은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는 장남이 아닌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고대근동에서 장남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많은 특권과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데, 야곱은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 에서는 장자라는 명분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성장하고 가문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지만, 야곱은 부모님으로부터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그의 단점은 성격의 문제였습니다. 형 에서는 외향적인 사람으로 남다른 리더쉽을 발휘하며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남자답지 않게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집안에서 가사 일을 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야곱의 약점은 이 뿐 아닙니다. 형 에서의 배고픔을 이용하여 장자의 명분을 빼앗아 버리고,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 대신에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야곱은 단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야곱의 이러한 단점은 우리가 배워서는 안 될 단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우리는 최선을 다하는 야곱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대충 대충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 시대에,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드문 요즘,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야곱의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도망을 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라헬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외삼촌 라반에게 라헬을 아내로 삼기 위해 7년을 일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서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7년을 하루같이 일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7년이 되었지만, 삼촌 라반에게 속아서 마음에 들지도 않는 레아를 아내로 얻었습니다. 끈질긴 야곱은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다시 7년을 더 일했습니다. 그래서 무려 14년 동안 열심히 일한 끝에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얻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가 멈춘 것이 아니라, 그는 계속해서 일을 했습니다. 다같이 38절 보겠습니다.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야곱이 몇 년 동안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했다고 합니까? 20년이나 일했다고 합니다. 14년 동안은 사랑하는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하여 일했습니다. 그리고 외삼촌의 양떼를 위하여 6년 동안 종처럼 머슴처럼 일했습니다. 창세기 31장 6절에서 “그대들도 알거니와 내가 힘을 다하여 그대들의 아버지를 섬겼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삼촌 라반의 집에 있는 동안 힘을 다하여 일했습니다. 야곱은 정말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다같이 4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야곱이 20년 동안 어떠한 자세로 일을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자세로 일했습니까? 낮에는 쨍쨍 내려 쪼이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면서 일할 만큼 날씨와 상관없이, 낮이나 밤이나 시간과 상관없이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면서도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작은 보트 한 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해마다 여름이 되면 가족들과 함께 보트 놀이를 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여름이 지나서 배를 창고에 보관해 두려고 옮기는데, 보트 바닥에 작은 구멍이 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다음해 봄에 수리할 생각으로 페인트 공을 불러다가 페인트 칠만 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었습니다. 그의 두 아이들이 보트를 타겠다고 간절히 부탁하는 바람에, 보트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잊은 채 보트를 타도록 허락을 했습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그는 갑자기 보트 바닥에 구멍이 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급히 자녀들이 보트놀이 하는 곳으로 뛰어 갔습니다. 호숫가에 달려가서 보니 두 아이들이 보트놀이를 끝내고 배에서 내려와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배 밑을 조사하다가 깜작 놀라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보트 바닥에 뚫려있던 구멍이 이미 막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누가 배 밑의 구멍을 막았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작년 여름에 그 페인트 공을 생각해 내습니다. 그는 너무도 고마워서 그 즉시 선물을 사들고 페인트 공에게 인사를 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그 페인트 공은 "저는 작년에 이미 페인트 칠한 대금을 다 받았는데 왜 이런 선물을 주시는 겁니까?" 하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보트의 작은 구멍 뚫린 곳을 당신이 고쳐 주었더군요. 봄이 오면 보트를 쓰기 전에 고쳐둘 생각이었는데 제가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고쳐놓지 않었다면, 우리 두 아이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최선을 다하지 않는 페인트 공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저 보트 주인이 오더를 내린 페인트 칠하는 일만 했을 것입니다. 밑바닥에 구멍이 뚫여있던 말던 신경 쓰지 아니하고 맡겨진 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페인트 공은 페인트 뿐 아니라 뚫린 구멍까지 수리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1절에 보면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삶의 기준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는 깨어서 기도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이 가까워올수록 우리는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본문 42절을 보면, 야곱은 삼촌 라반에게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라고 당당하게 고백할 만큼 그는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야곱은 비록 머슴처럼 일했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야곱을 보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침내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심히 풍부한 거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위에서 종종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시겠지"라고 말하고, 자신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시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일해야 합니다. 옛말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일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형통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저는 이번 시드니 방문길에 22년 전 같은 영어학교,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김모집사님을 만났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 집사님이 호주에서 5대밖에 없다고 하는 Lexus 600L 고급승용차를 타고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그 집사님은 그 동안 참으로 열심히 사셨습니다. 그 분은 원래 요리사이십니다. 22년 전에 학원이 끝나자마자 차이나타운에 가서 밤늦게까지 일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래도 영어학교에 나와서 저와 함께 공부했습니다. 나중에는 영어학교를 다니지 않으니까 비자가 만료되면서 불법체류자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교회에 와서 남선교회 임원으로서 주차안내도 하고, 주보도 나누어 주고, 열심을 다해 전도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정목사님께서 불법체류자들도 영주권신청을 하라고 주보에 광고할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신청했다가 기적적으로 영주권도 받았습니다. 그 후에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Eastwood라는 곳에 OO 중국집을 오픈하여 열심히 일했고, 교회에 와서도 열심히 봉사하셨습니다. 또 지교회를 위해서도 열심히 섬겨주셨습니다. 수년 전 자기 경비를 들여 넬슨순복음교회 창립예배 때나 인버카고 창립감사예배 때 등에 참석하여 기도해주고 헌금해주고, 격려해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식당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수십 명의 종업을 데리고 손 세차장 사업장을 네 개나 가지고 계시고, 어려운 라이센스를 따낸 후 오폐수 처리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과 순종함으로 교회에서 봉사하고 성실하게 맡겨진 사업을 감당하다보니, 하나님께서 그 집사님에게 얼마나 복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몇 년 전에 공항근처 바닷가에 수백만불 짜리 집을 사기도 하고, 이번에는 교회에서 약간 멀고 한국 사람들이 거의 없는 곳에서 살다보니 외롭다고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 근처에 새로운 집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또 그 동안 타고 다니던 최신형 벤츠는 아내에게 주고 본인은 Lexus 600L을 타고 다니며 교회에 오시는 강사님들을 그 승용차에 모시고 다니면서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시드니에 가서 그 집사님의 섬김으로 신혼여행을 하지 못하고 피지에 합류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견진호목사님 부부에게 추억을 마련해주었습니다. 호주에 5대 밖에 없고 엔진이 12기통이나 되는 수십만불 짜리 자동차를 견진호목사님 부부와 함께 타고 시내에 나가 팥빙수를 먹었습니다. 그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따님들이 다 잘 되어 변호사 등의 전문직에 종사하고 있었고, 22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교회에서 변함없이 열심히 봉사하고 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모습을 보시고 그 집사님에게 은혜와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 집사님과 헤어지고 나서 한 가지 불타는 소원이 마음에 생겼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믿음과 성실함으로 최선을 다하며 사는 제2의 K모집사님, 제 3의 김모집사님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소원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은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최선을 다하며 살았더니 하나님께서 풍성한 복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야곱은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정말 열심히 바쁘게 살았습니다. 눈 붙일 겨를도 없었다는 것은 잠을 잘 시간도 없을 만큼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대충 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좋아하시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요셉은 보디발에 집에서 성실하게 일하다가 애굽의 총리대신에 올랐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성실하게 양을 치다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밭을 갈다가 선지자가 되었고, 아모스는 목동으로 일하다가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마태는 세관에 앉아 열심히 세무 일을 하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놀고먹는 사람을 쓰시지 않고, 성실하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야곱은 비록 머슴으로 일했지만 최선을 다했고,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에 마침내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심히 풍부한 거부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앞에 밀어닥친 경제 불황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고, 아무리 사업이 되지 않고, 경쟁업체가 여기저기에 생긴다할지라도 형통케 되는 비결은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되, 우리가 해야 할일은 최선을 다해서 성실히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수고를 보시고 우리에게 야곱처럼 풍성한 복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열매를 딸 수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거두는 사람은 도둑 외에는 없습니다. 전도서 10장 10절에서 “무딘 철 연장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톱을 갈아야 무엇이든 자를 수 있듯 내 자신을 갈고 계발해야 성공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노력하면 범재(凡才)가 천재를 능가할 수 있습니다. 작년 선교대회 때 들은 이야기지만,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 출신 LPGA 골프 선수들이 수십명이나 되지만, 멕시코 출신 오초아라는 한 선수를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물론 한 두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할 수는 있지만, 1년 전체 랭킹에서는 오초아를 이길 수 있는 한국 LPGA 선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 선수들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골프를 하다보니, 결정적인 순간에 긴장하는 바람에 중요한 퍼팅을 종종 놓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초아 선수는 골프를 즐길 줄 아는 선수이기 때문에 어지간한 상황에서도 긴장하지 않기 때문에 평소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학생은 학생으로서 학업에 최선을 다하고, 직장인 직장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가정주부는 가사일에 최선을 다하고, 목사는 목양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하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던 야곱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은 비록 머슴으로 일했지만 최선을 다했고,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에 마침내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심히 풍부한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좋으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서 성실히 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데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