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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리처드포스터 기도(전권요약편)(기도론)
기도로의초대
1부 안으로 향하는 기도
단순한 기도
버림받은 자의 기도
성찰의 기도
눈물의 기도
포기의 기도
성숙의 기도
언약의 기도
2부 위를 향한 기도
찬양의 기도
안식의 기도
성례의 기도
쉬지 않는 기도
마음의 기도
묵 상 기도
무언의 기도
3부 밖으로 향하는 기도
일상적인 기도
간구 기도
중보 기도
치유의 기도
고난의 기도
권세있는 기도
철저한 기도
감사의 말 343
기도로의 초대
“참되고 완전한 기도는 사랑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성 어거스틴-
오늘날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의 상처로 벌어져 있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몰두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신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는 것을 슬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는 데 대해 안타까워하시며, 무조건 많고 큰 것만을 요구하는 것을 슬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기를 갈망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여러분을 집으로 돌아오라고 초대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맞아들이기 위해 마음문을 활짝 열어 놓고 기다리신다.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는 먼 나라에서 살아왔다. 그 나라는 시끄러움과 분주함과 사람들의 아우성이 있으며, 좌절과 공포와 위협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본향으로 영접하신다. 우리의 본향에는 평안과 기쁨이 있고 다정함과 솔직함이 있으며, 친밀함과 용납이 있다. 그곳은 새로운 평화가 발견되는 곳이며 우리가 벌거벗을 수도 있고, 상처를 입을 수도 있으며,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도 있다. 그곳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가장 깊이 친밀해질 수 있는 곳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잘 알고 또 하나님께 우리를 가장 잘 알리는 곳이다.
열쇠와 문
압박으로 인해 심신에 상처를 입은 사람도 다른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해를 끼친 경우도 있고 생활고로 인해 상처를 입은 경우도 있다. 과거의 뼈아픈 기억으로 인해 결코 치유받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여러분은 기도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를 회피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이미 하나님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무가치하며 너무 더럽혀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실망하지 말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여러분을 맞아들이기 위해 늘 활짝 열려 있다. 여러분 중에는 기도가 삶의 기쁨인 사람도 있다. 오랫동안 경건한 환경에서 살아왔고 또 그러한 삶이 좋다는 것을 입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도 더 많은 것을 갈망해야 한다. 더 많은 능력과 더 많은 사랑, 그리고 삶 자체가 하나님의 것들로 가득 채워지기를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은 활짝 열려 있다. 여러분의 신앙이 더 높아지고 더 깊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실 것이다.
[사랑을 잘하는 사람이 기도도 잘한다.]
사무엘 코울리지는 “옛 선원의 노래”라는 시에서 “사랑을 잘하는 사람이 기도도 잘한다.”고 하였다. 진정한 기도는 사랑에 빠짐으로써 나온다.
1부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구하는 안으로 향하는 기도
기도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은혜이다
안으로 향하는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먼저 자신의 내면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려는 위로 향하는 기도가 오히려 우리를 짓누르고, 또 밖으로 향하는 사역이 우리를 파멸시키기 때문이다.
1장 단순한 기도
실제로 기도를 막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다.
먼저 내 기도의 동기가 바르게 되어야 그래서 나의 기도의 동기가 순수해질 때까지 절대로 기도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위선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내적인 영혼의 추구가 실제로는 나의 기도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문제의 진실은 우리 모두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다양한 동기를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타적이기도 하고 이기적이기도 하며, 긍휼을 베풀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하며, 사랑스럽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한 복잡 미묘한 동기로 우리는 기도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이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실 만큼 위대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순수한 동기를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거나 충분히 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모든 사실들을 제쳐 두고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있는 모습 그대로 기도하라
단순한 기도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숨김없이 하나님께 내놓는 기도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단순한 기도는 그 초점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의 필요와 욕구와 관심이 우리의 기도를 지배한다. 우리의 기도에는 수많은 교만, 자만, 허영, 가식, 거만 그리고 전반적으로 이기주의가 가득 차 있다. 물론 거기에는 아량, 관대함, 이타심 그리고 보편적인 호의도 있다.
우리는 많은 실수를 저지른다. 그리고 범죄한다. 종종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일어서서 다시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기도한다. 다시 하나님을 따르려고 애쓴다. 그런데 우리는 다시 우리의 교만함과 방종함에 굴복하고 만다. 하지만 염려하지 말라. 다시 자백하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사실 ‘단순한 기도’는 때때로 ‘다시 시작하는 기도’라고 불린다.
그 기도에는 가식이 조금도 없다. 초보적인 기도이다
존 달림플의 지적은 옳은 말이다. “우리는 이런 기도 이상은 드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 부족함과 필요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가장 기본적인 기도를 멸시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특히 ‘현학적인’ 사람들이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보다 ‘성숙한 ’ 기도를 드리겠다는 소망으로 단순한 기도를 건너뛰려고 애쓴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이기적인 요구의 기도를 경멸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단순한 기도는, 그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기도를 뛰어넘는 길은 그것을 피해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을 통과하는 것뿐이다. 단순한 기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십중팔구 그들은 거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도에 대해서 논의해 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진심으로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 상태는 온전히 드러나게 된다. 기도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기 시작할 때가 바로 그때이다. 기도의 진기한 경험이 그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 있는 곳에서 시작하라
단순한 기도를 실제로 어떻게 드릴 것인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바로 우리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면 된다. 가정과 직장에서, 이웃 사람들과 친구들과 더불어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가볍게 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알아 가는 데 있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믿는 것이 바로 기도의 재료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내게 복을 주실 수 없다”고 우리는 신음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 있는 장수는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장소 뿐이라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가장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일상의 경험들을 기도하려면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사건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된다. 때로는 밤잠을 못 잘 만큼 엄청난 시련을 겪을 수도 있다. 그때마다 하나님과 제가 이 아픔을 당해야 합니까?“ 이렇게 좌절과 슬픔과 분노에 대하여 호소하는 것이 단순한 기도의 언어이기도 하다. 길을 잃고 상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동행을 요청할 수 있다. 때로는 이웃 사람이 무심코 내뱉는 한마디가 우리 속에 있는 분노, 시기, 두려움 따위의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한다. 그때 우리는 솔직하고 정직하게 그 일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그 감정 뒤에 숨어 있는 상처를 치료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우리 삶의 자질구레한 것들은 기도의 올바른 내용이 아니라고 하는 속임수를 믿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기도가 숭고하고 이 세상 것이 아닌 활동이라고 가르침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에 관해서만 하나님께 말해야 한다고 배웠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우리는 일상의 체험들이 올바른 기도를 방해하고 주의를 산만하게 한다고 쉽게 단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영성이다. ‘올바른’기도를 하려고 애쓰지 말고 단지 하나님께 이야기하라, 자유롭고 숨김없이 상처를 나누고, 슬픔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라.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올 때 그러하듯이 하나님도 사랑과 긍휼로 우리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다.
단순한 기도에 대한 몇 가지 제언
첫째로, 기도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라는 것이다. 이런 체험은 그 목표가 주님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맡기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둘째로는, 이 기도를 시작할 때 기도가 지금까지 부족했다고 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기도가 아예 없었을지라도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 하나님께 대한 갈망, 그 자체가 기도이다. 기도가 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가 되게 하라. 또한 마음의 완고함으로 인해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기도로 마음이 풀어지기 때문이다. 기도가 부족한 것까지도 하나님께 내어 놓기만 하면 된다.
또 하나의 제언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기도하려고 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영적인 소화불량에 걸릴 정조로 너무 강렬하게 기도하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영적인 탐욕’의 죄이다. 만일 당신이 기도를 습관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면 하루에 열두 시가씩 기도하기를 시작하는 대신 단지 몇 분만이라도 할애해서 모든 정력을 거기에 쏟아 넣어라. 그리고 너무 지나치게 기도해 왔다면 하나님께 단지 이렇게 기도하면 된다. “이제 좀 쉬어야 되겠습니다. 언제나 주님과 함께할 힘이 없음을 용서해 주십시오.”이기도는 정말로 사실이다. 하나님꼐서도 우리가 늘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신다. 게다가 영적으로 매우 성숙한 사람들조차도 자주 웃고 놀고 즐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가 악한 일을 행하고 있을 때조차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분노와 욕망, 교만과 탐욕, 야심 따위와 싸우고 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기도로부터 격리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이야기해야 하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들까지도 말해야 한다.
에밀리 그리핀이 말하기를 “주님은 우리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날 우리를 가장 사랑하십니다”라고 했다.
별로 중요한 사건이 없는 일상적인 기도에 먼저 힘쓰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환상은 우리를 압도할 수 있지만 우리를 진정한 기도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마음의 변화
자아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자칫 이기주의나 자기 도취로 빠질 우려가 있다. 게다가 우리는 늘 우리의 경험을 합리화하고 조작하려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듣고 싶은 것만을 듣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우리 자신에게 너무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바울이 묘사한 것처럼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숭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우리 자신이 당연히 기도의 중심이요, 주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 마음에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혁이 일어난다. 천천히 그리고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게 무게 중심이 옮겨지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 생활의 일부로 생각하다가 우리가 그의 생활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놀랍고 신비하게도 하나님이 우리 기도의 변두리에서 중심으로 바뀐다.
2장 버림받은 자의 기도
우리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간 사람들도 외관상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는 떄를 여러 번 경험한 듯하다. 옛사람들은 그것을 ‘숨어 계신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당신은 기도했는데도 아무런 느낌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적이 없었는가?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숨어 계신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다.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고 예배도 드린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믿음으로 산다. 그러나 여전히 응답이 없다. 아무 응답도 없다. 조지 버트릭의 말을 빌면 그것은 마치 “캄캄한 어둠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주먹으로 천국 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
기도도 하지만 허공을 떠도는 말처럼 느껴진다. 성경을 보기도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음악을 들어도 아무런 감동이 없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도 하지만 그들 역시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며 뒤에서 험담을 하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성경은 이처럼 버림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막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이 실제로 메마르고 황량하며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기 떄문에 그것은 적절한 비유인 것 같다. 시편 기자처럼 우리도,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탄식한다. 이렇게 되면 사실, 하나님이 정말 계신조차 의심하기 시작한다.
큰길
애굽의 영광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해 주시기까지 수년 간 침묵의 세월을 기다렸던 모세를 생각해 보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라고 애처롭게 호소했던 시편 기자를 생각해 보라. 황량한 동굴 속에서 외로이 밤을 지새우며 바람과 지진과 불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던 엘리야를 생각해 보라. 지하 감옥에 갇혀서 ‘진흙 구덩이에 빠지기까지 낮아졌던’ 예레미야를 생각해 보라. 골고다 언덕에서 외로이 밤을 새운 마리아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골고다 언덕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었던 주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라. 우리보다 앞서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경험들을 직접 목격했다. 성요한은 그것을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명명했고, 익명의 영국 작가는 그것을 ‘무지의 구름’과 동일시헀다. 장 삐에르 드 꼬싸드는 그것을 ‘신앙의 어두운 밤’이라고 했으며 조지 폭스는 간단 명료하게 이렇게 말했다. “낮이 되면 나는 밤을 원했으며 밤이 되면 나는 낮을 갈망했다.”
이러한 말들이 격려가 되길 빈다.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부언해서 알려 주고 싶은 것이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수목을 말리는 것과 같은 뜨거운 바람을 맞을 때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지 않는다거나 당신이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께 어떤 끔찍한 죄를 지었다거나 무언가 당신에게 잘못된 일이 일어났다거나 그 밖의 어떠한 일도 뜻하고 있지 않다. 어두움이란 명확한 기도의 체험이다. 그것은 기대할 만한 것이며 심지어 끌어안고 싶은 것이다.
살아 있는 관계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다고 느꼈던 바로 그것이 뜻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이제 알겠는가? 하나님은 숨어 계시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생각 속에 짜 맞추는 잘못을 서서히 제거시키신다.
더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자신을 드러내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야 할 것이다.
침묵하시는 하나님
당신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을 하나님이 게시지 않은 황량한 사막 속으로 던져 넣은 것이 바로 사랑하는 배우자나 자녀의 비극적인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결혼 생활이나 직장 생활에서의 위기나 사업의 실패였는지도 모른다. 아님면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아무런 극적인 사건이 없었지만 다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다가 실족하여 전혀 아무런 교제도 없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상태에 빠졌을 수도 있다.
믿고 조용히 기다려라
하나님꼐 버림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더 권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말없이 그리고 조용히 기다려라. 정신을 차리고 민감하게 깨어 기다려라. 신뢰가 믿음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배워라. 믿음이란 자동차에 기어를 넣는 것과 흡사하다. 믿음은 즉시 가동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해 즉시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너무 나무라지 말라. 영적인 생활을 가동시킬 수 없을 때는 기어를 후진으로 하지 말고 중립으로 하라. 신뢰란 당신이 영적인 생활을 중립에 두는 방법이다. 신뢰는 곧 하나님의 인격을 믿는 것으로서 “나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지, 또 어디에 계신지 알지 못하지만 나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 어딘가에 계신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기다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황무지가 변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의 약속의 땅을 기다리면서 끌레르보의 버나드가 드렸던 기도를 되풀이할 수 있다. “오 하나님, 주이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나의 깊은 불행의 심연이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심연에 호소하나이다.”
3장 성찰의 기도
지나칠 정도로 과도한 내성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성찰의 기도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성찰의 기도란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개의 기본적인 국면을 가지고 있다. 첫쨰는 의식의 성찰인데, 그것을 통해 울는 하나님이 하루 동안 어떻게 임재하셨는지를 알게 된다. 두 번째 국면은 양심의 성찰로서 그 안에서 우리는 정화되어야 하고 치유되어야 할 영역을 발견하게 된다. 이 두개의 국면을 따로따로 고찰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기도를 통한 의식의 성찰로 우리는 우리 시대의 사상과 감정과 행동들을 조망하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어떻게 일하고 계시며 우리는 어떻게 반응했느지를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어젯밤에 이웃집에서 난폭한 일이 있었다고 하자. 그 경우 우리는 그것이 단지 조용한 저녁을 방해하는 무례한 행동에 불과헀는지, 아니면 그 이사의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아마 그것은 주위 사람들의 고통과 외로움에 대해서 유의하라고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의식의 성찰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위 환경에 대해서 더 많이 알려 주시기 우해 사용하시는 수단이 된다.
의식의 성찰
우선 우리가 우리 마음을 홀로 감찰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무죄함을 선언하기 위하여 수도 없이 여러 번 스스로를 의롭다 할 것이다. 우리는 사실 이사야가 말한 대로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식의 성찷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변명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우리의 비겁한 자기 합리화나 책임 회피가 하나님의 임재의 빛을 견디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떄 알게 하신다.
다른 한편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학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내버려진다면, 우리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잘 파악하여 구원받을 자격이 없음을 선포하기 쉽다.우리의 손상된 자아관은 우리 자신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자신을 무자비하게 학대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보호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취급할 수 있는 그 이상 보기를 허락치 않으신다. 너무 지나친 내면 성찰은 도움이 되기는커년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은혜
성찰의 기도는 우리 안에서 자아 인식이라는 값비싼 은혜를 만들어 낸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제사는 우리의 살아온 경험을 드리는 제사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우리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드려아 할 유일한 제사는 앞으로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모습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강함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까지도 드려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재능만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부서지고 깨어진 불완전한 모습까지도 드려야 한다. 우리의 이중성, 욕망, 허무주의, 게으름, 이 모든 것들도 희생의 제단 위에 내려 놓아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진실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면, 우리는 신비한 방법으로 영양을 공급받게 된다. 우리의 그늘진 부분에 관한 진실까지도 우리를 자유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억누르거나 억제하거나 미화시킬 필요가 없다. 완전하고 꾸임없는 자기 지식은 우리를 유지하고 지탱해 주는 양식이다. 인생에 대한 긍정은 우리 자신의 악에 대한 정직한 인식이다. 그것은 또한 악 한가운데서 우리를 지탱해 주고 의로 인도하는 하나님께 대한 긍정이기도 하다.
자아 인식은 믿음을 통해 우리를 자기 긍정과 자기 사랑으로 인도하며 이것들을 소유한 자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게 된다.
내면을 향해 기도하는 것
우리는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지켜 본다. 그리고 이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두운 부분을 두러내시는 것을 보게 된다. 의식의 성찰과 양심의 성찰은 바다의 파도와 다소 유사하다. 서로가 구별되는 것같이 보이지만 절대로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는 않는다. 이문제를 이해하고 나면 이제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 문제는, 성찰의 기도를 도대체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찰의 기도는 내면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바깥이나 위로가 아닌 오직 안으로 향하는 것이다. 안토니 블룸은 “당신의 기도는 내면을 향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는 것도 아니고 멀리 계신 하나님을 향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찰의 기도는 우리 자신을 통해서 자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와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여행이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
그러면 이 내면을 향하는 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리를 돕는 육체와 정신과 영혼의 활동이 있는가? 그렇다. 일일이 열거할 수 있는 것 이상이다. 이제 몇 가지 더 흔한 예를 들어 보자. 의식의 성찰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 중 전통적인 한 가지 방법은 바로 영적 일지를 쓰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참회록으로부터 다크 함마르스쾰트의 표시에 이르기까지 수세기에 걸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적 여로를 기록하는 것이 가치 있음을 알았다. 버지니아스템 오웬즈의 말처럼 “일지는 직기(織機)의 바디(lathe)처럼 우리를 목재의 심재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일지 쓰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의도적인 반성이다. 일지는 누가 무엇을 했느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왜 무엇 때문에 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일기와 다르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하기 위한 발판이다. 일지의 특별한 가치는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개인적인 에벤에셀을 기록해 둘 수 있다는 데 있다. 그 기록을 통해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의 역사를 볼 수 있고, 우리가 지금 씨름하고 있는 문제와 우리가 이룩한 진보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삶을 도덕적인 표준에 입각해 유지하는 수단으로 십계명과 주기도문을 규칙적으로 묵상해 볼 것을 권장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점검하기 위하여 개인적인 수양 기간을 이용한다.
4장 눈물의 기도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로는 ‘펜도스’가 있다. 펜도스는 꺠어진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내적인 경건한 슬픔을 의미한다. 또한 복 있는 거룩한 애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펜도스는 눈물의 기도 그 자체를 의미한다.
마음을 찢는 회개
눈물의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거역하고 거기서 멀리 떠나 있었던 죄로 인해 ‘마음을 찢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와 세상의 죄에 대하여 슬퍼하는 것이다. 그것은 죄에서 자유케 하는 회개의 경험을 갖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죄가 우리를 하나님의 충만함 임재로부터 단절시켜 버린다는 것을 분명하고도 절실하게 깨닫는 것을 말한다.
눈물의 탄원
사실 다윗에게는 울며 슬퍼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어서 그는 눈물로 호소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증거로 삼았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 그리고 사랑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다.바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라 그는 에베소 사람들을 위하여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다.
마음속의 큰 기쁨
가장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바로 눈물이 없는 눈과 차가운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이러한 내적인 마음의 슬픔을 오히려 ‘마음속의 큰 기쁨’이라고 불렀다. 사실 진정한 기쁨은, 회개하며 하나님께 영원히 머리 숙여 경배하는 자들의 마음소게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결과이다. 바실레아 슐렁크는 말하기를 “천국의 첫 번째 특징은 통회와 회개에서 나오는 넘치는 기쁨이다. 통회의 눈물은 아무리 굳은 마음이라도 부드럽게 한다.”고 했다. 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하였다.
아바 안토니의 제자 성 아모나스는 말하기를,“두려움은 눈물을 만들어 내고 눈물은 기쁨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기쁨은 힘을 가져오고 그 힘을 통해 영혼이 범사에 열매를 맺게 된다”고 했다. 또한 교부 하우셔는 “통회의 결과는 축복이다”라고 했다.
날마다 돌이키는 삶
눈물의 기도 기저에 깔려 있는 실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죄악된 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본질적인 부패를 ‘원죄’라고 부른다. 모든 죄의 중심이 되는 그 죄 때문에 믿기를 거부하며 이는 곧 믿음의 결핍을 의미한다. 이 근본적인 결핍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이탈에서 우리가 죄라고 부르는 모든 뒤틀리고 왜곡된 행동들이 나온다. 마틴 루터는 선언하기를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일매일 회개하는 삶이어야 한다고 했다. 날마다 자백하고, 날마다 회개하며, 올바르게 변할 때까지 날마다 돌이켜야 한다.
회개,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
우리가 어떻게 통회하는 마음, 즉 애통하고 상하고 슬퍼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경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꼐 구함으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마음의 회개는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부터 오는 은사이며 순수하고 단순하다. 그것은 구하는 자에게 기꺼이 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함과 끈기를 가지고 통회하는 마음을 간구할 수 있다. 우리는 울며 애통하는 마음을 구할 수 있다.
둘쩨, 죄를 자백함으로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앞에 우리는 변명하지 말고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 죄를 고백해야 한다. 루이스(C.S.Lewis)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것을 주의 깊게 그리고 끊임없이 냄새 맡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바울의 놀라운 고백인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 7:24)라는 외침은 회개의 영을 간구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다.
셋쩨,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며 긍휼이 풍성하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요일 1:9). 탕자의 아버지처럼 그분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때 제일 먼저 달려나와 감히 받을 자격도, 얻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좋은 선물을 아낌없이 주신다.
넷째, 순종해야 한다. 회개의 여지가 있을 때 하나님께 상한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의 많은 죄악을 자유롭게 마음껏 자백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용서라는 말 속에는 순종이라는 요구가 함축되어 있다. 아마 우리의 의식적인 마음의 표면에는 자기 의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즉시 자백해야 한다. 우리가 불친절하게 말한 것도 떠오를 것이다. 그러면 즉시 그 사람에게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 아마 과거의 불의한 행위가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즉시 거기에 상응한 보상을 해야 한다.
눈물이 나지 않을 때
“아무리 찔러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먼저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자신감을 갖고 사랑하라. “나는 감정적인 성격이 아니야”하는 식으로 자신을 단정 짓지 말라. 또한 현대의 남자다운 사람이 흔히 말하듯이 “나는 바위다. 나는 섬이다”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말라. 그런 뿌리깊은 습관을 바꾸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습관이 습관을 극복한다.”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에 격려를 받으라. 새로운 기도의 습관을 들이라. 당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끈기 있고 친절하며 확고한 지속성이다.
다음으로 복음서를 깊이 묵상하라. 그러면 슬픔의 사람이요 애통의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지는 ‘완강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도 눈물의 기도를 아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는 방법을 당신에게 보여 주실 것이다(벧전 2:21). 또한 겉으로 눈물을 흘릴 수 없을 때는 하나님 앞에서 속으로 눈물을 흘려라.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라. 여러분의 영혼을 눈물로 적셔라, 비록 눈에는 눈물이 없을지라도 마음과 영혼은 하나님 앞에서 상한 심령이 될 수 있다.
끝으로, 눈물의 세례를 체험하기 위해 끈기 있게 기다리면서 크리소스톰의 말로 위로를 받으라. “죄의 불꽃이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눈물 앞에서는 맥을 못춘다. 왜냐하면 눈물을 허무의 용광로를 끄며 죄의 상처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다.”
5장 포기의 기도
기도를 배워 감에 따라 우리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갈등을 일으킨다.
이 갈등의 시기가 어렵다고 해서 결코 그것을 무시하거나 회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리의 성장과 영적인 것들을 심화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이다. 분명히 그것이 열등한 단계임에는 틀림없다. 때가 되면 우리는 은혜로 충만하여 우리의 뜻을 주장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를 투쟁의 단계에서 해방의 단계로 옮기는 것이 바로 포기의 기도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포기의 기도를 배울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의 요구하는 바를 포기하고 눈물로 기도하는 성육하신 아들을 보게 된다. 우리가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는 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우선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것보다 낫고, 다음으로는 그 힘을 그런 좋은 목적을 위해 사용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탁월한 길을 보여 주신다. 그것은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길이며, 단념과 포기의 길이다.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생각이 “내 뜻대로 마옵소서”라는 생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박수 갈채를 보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심지어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싸우기까지 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뜻과 상반되기 전까지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뜻과 상반되기 시작하면 선이 그어지고, 논란이 시작되고 자기 기만이 우세해진다. 그러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교훈은 나의 뜻, 나의 방법, 나의 선은 반드시 더 높은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갈등의 필요성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아무런 노력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갈등을 겪었다. 자기 아들 이삭을 포기할 때 아부라함이 그러했고, 이스라엘의 해방자가 해야 할 임무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포기할 때 모세가 그러했으며, 밧세바에게 태어난 아들을 포기할 때 다윗이 그러했고, 앞날에 대한 제어권을 포기할 때 마리아가 그러했으며, 자신을 쇠약하게 하는 육체의 가시로부터 놓임받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의 뜻 때문에 자신의 뜻을 포기했던 바울이 그러했다. 갈등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포기의 기도가 숙명론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기도하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운명에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 캐더린 마샬은 “운명을 감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결핍이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항성의 흙구덩이 속에 가만히 눕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그것은 소망의 문이 닫혀 버리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우리는 미리 정해진 운명론적인 미래가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영역은 폐쇄된 우주가 아닌 열린 우주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표현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우리는 사건의 결과를 결정짓기 위해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 노력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대화이며, 그것은 진정한 갈등이다.
귀중한 뿌리의 절단
나의 삶 속에 있는 가장 귀중한 뿌리까지도 잘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끊임없이 울고 갈등한다. 그리고 이 생각도 해보고 저 생각도 해본다. 이렇게 재어 보고 또 저렇게 재어 본다. 그리고 다시 기도한다. 또다시 울고 또다시 갈등한다. 진정한 포기는 하나님의 방법은 옳고 선하다는 것에 대해 전심으로 그리고 온전하게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소망있는 포기
포기의 기도는 진심으로 손을 떼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소망 있는 포기다. 운명론적인 단념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우리에게 격려가 된다. 보이는 상황이 인생의 양탄자 뒷면에 뒤엉켜 있는 실과 같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고 우리에게 늘 선을 행하신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결국 우리가 승리자라는 확신을 갖게 되는 근거가 바로 거기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더 깊이 들어오라고 초청하시며, 더 높이 올라가라고 권유하신다. 의로운 삶과 변화시키는 힘, 새로운 기쁨과 더 깊은 친교에는 훈련이 있다.
때때로 우리가 포기하는 바로 그것이 다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있다.
값진 보화
포기한 것이 영원할 때도 있다. 그런 때는 하나님의 지혜를 믿어야 하며 그가 주시는 평안을 누리기 위해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사실 안정된 평안은 포기의 길을 걸어 본 사람들이 가장 자주 경험하는 은혜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런 과정을 밟게 하실까? 이를테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무언가를 주시기 전에 먼저 포기하기를 원하시는가? 그것은 종종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좋은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월씬 더 좋은 것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작은 꿈 같은 것을 버리도록 도와주신다. 더욱 완전한 대답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성품을 변화시키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포기를 통해 값진 보화를 얻게 된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얼마나 큰 은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즐거이 선언하기를,“”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했다. 포기가 있는 곳에 십자가의 죽음이 있고 그곳에는 자아에 대한 죽음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소망이 있는 포기도 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꼐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자신은 의지가 죽었다”는 말은 강한 말이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 중의 유명한 사람들은 모두 다 그것을 경험했다.
의지를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인지 아는가? 그것은 토저가 말한 “자기 중심적인 생활의 가느다란 실타래”,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자기’라는 말이 붙은 죄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즉 자기 충족, 자기 동정,자기 도취, 자기 비난, 자기 과장, 자기 징계, 자기 기만, 자기 칭찬, 자기 경시, 자기 방종, 자기 증오 등 이와 유사한 수많은 것들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그것은 늘 우리 중심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는 영원한 짐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순수하게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먼저 채워 주고 기쁘고 자유롭게 다른 사람들을 돌보며, 내게 있는 것을 내주는 자유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처럼 매일같이 자신의 의지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간다.
조개 속의 모래 한 알이 사물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새로운 능력,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기뻐해 줄 수 있는 새로운 기쁨,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소망,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은혜이다.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언제나 부활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은 의지를 파괴시키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는 분이시다. 그래서 시간과 경험이 쌓이게 되면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을 우리도 자유로이 할 수 있도록 하신다. 의지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우리는 인생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되고 가장 훌륭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된다.
기도의 실제
초기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생활을 통해서 가능하다. 첫째로, 자기를 비우는 기도를 배운다. 빌립보서 2장을 가지고 묵상하며 기도하라. 거기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운 것을 ‘케노시스’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은 본체였으나 스스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을 말한다. 당신의 기도를 일상적인 세세한 일들에 적용시키지 위해 하나님의 영이 품어 주시기를 간구하라, 그리고 조용히 기다리고, 주의 깊게 들으며, 즉시 순종하라.
둘째로, 복종의 기도를 배우라. 공관복음서 중의 하나를 택하여 예수님과 함께 동산으로 들어가라. 깨어서 지켜 보라,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영혼을 보라. 당신도 함께 슬픔을 나누어 보라. 다른 선택의 방도를 찾고 잔이 지나가기를 소원하며 그와 함께 갈등해 보라 예수님의 말을 이제 자신의 말로 직접 해보라.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초청해서 그 말을 당신의 삶과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직장 속에서 해석해 주시도록 요청하라. 셋째로, 단념의 기도를 배우라 “아버지 제게 어떤 일을 하시던지 저는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모든 일에 준비되어 있고 모든 일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제게 그리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아버지의 뜻만이 이루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오!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넷째로, 해방의 기도를 배우라, 먼저 당신의 자녀와 배우자와 친구들을 하나님의 품에 올려 드려라. 그 다음에는 당신의 미래와 소망과 꿈을 하나님의 사랑스런 돌보심 속에 맡겨 드려라.
마지막으로, 당신의 원수와 분노와 보복심까지도 하나님께 위탁하라.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길에 내맡기고 그 다음에 포기할 것들는 포기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옳으신 대로 모든 것을 돌봐 주실 것이다.
포기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어도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우리에게는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고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멀다. 포기는 우리를 험한 지형으로 인도한다. 올라가는 길이 가파르고 바위는 험준하다. 그렇듯 험한 산길을 올라가면 위험한 산등성이가 나온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때때로 그것은 마치 절벽에서 떨어져 죽음에 이르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품에 안겨 완전한 만족과 완전한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임을 안다.
6장 성숙의 기도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킨다”고들 한다. 기도는 또한 우리도 변화시킨다. 후자가 더 당위적인 목표이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을 하게 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점점 아들이 형상을 닮아 가게 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성숙의 기도의 유일한 초점은 바로 변화되어 가는 이 과정에 있다. 우리 중의 어느 누구도 먼저 변화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서는 기도 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변화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결국 기도 생활을 포기하거나, 기도 생활 자체를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나름대로의 작은 생활 체계로 바꾸어 궁극적으로는 기도 생활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처음에는 저항감이 생겨 투쟁을 하기도 하지만 때가 되면 하나님의 정직한 선을 배우게 되고 거룩한 순종의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날마다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신다. 이러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기 시작하면 결국 우리는 심령으로부터 변화를 받게 된다.
기도의 한계
‘거룩한 습관’을 형성함에 있어 기도가 차지하는 위치를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변화의 ‘황금 삼각형’
첫 번째 영역은 금식, 예배, 찬양 등의 영적인 생활에 대한 전통적인 훈련이다.
두 번째 영역은 저항, 불순종, 회개, 굴복, 믿음, 순종 등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다. 세 번째 중요한 영역은 우리가 매일같이 접하는 갖가지 좌절과 시련과 유혹에 의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키워 주시는 인내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전반적인 영적 생활과 조화시켜 기도의 역동적인 상호 작용을 보아야 한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보와 성장과 변화와 성숙의 중요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변화시켜 점점 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시기를 원한다.
우리의 뜻과 하나님의 뜻
성숙의 기도에는 능동적인 면과 수동적인 면이다 능동적인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다.
수동적인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꼐서 찾고 계시는 대상이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우리는 토기장이 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따뜻한 진흙덩이이기 때문이다
성 베네딕트의 열두 단계
“겸손은 기도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이다”
겸손이란 우리가 거기에 집중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미덕이 아니다.
겸손한 생활을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늘 목전에 두라 우리 자신의 뜻과 욕망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라. 우리의 모든 악한 생각과 하나님께 대한 모든 악한 행위들을 고백하라.
우리는 때론 침묵할 줄도 알아야 하며, 경박한 말을 피하고, 쉽고 단순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겸손의 단계 중 하나는 ‘우리가 당하는 상처와 아픔을 인내하며 참는 것’이며 또 하나는 ‘범사에 자족하는 것’이다. 분수를 넘어서서 과욕을 부리는 일들에 대해 여러 번 죽는 경험을 함으로써 우리는 점차 겸손이라는 은혜 속에 들어가게 된다.
고독은 우리를 자유케 한다
고독에 의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들에 대한 속박과 우리 자신의 내적 강요에서 자유케 해주시기 때문이다. 고독을 체험하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것을 무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인간의 소리를 적게 들으면 적게 들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에 더욱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하나님의 기대에 더 많이 부응하게 된다. 고독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만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죽는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히, 고독이 새로운 힘과 활력을 가지고 삶의 수많은 경쟁 상황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건전지를 재충전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고독이 우리에게 극심한 생존 경쟁에서 이길 힘이 아니라 그 생존 경쟁 자체를 무시할 수 있는 힘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필요 이상의 재물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실제보다 저 젊어 보이고 싶어하는 욕망, 그리고 분수에 넘치는 지위를 얻고 싶어한는 욕구를 서서히 억제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우리의 거짓되고 분주한 자아가 가면을 벗게 되고 본래 거짓말쟁이였던 자신의 모습들이 드러나게 된다.
유순한 기도
수동적인 성숙의 기도의 세 번째 유형은 에벌린 언더힐의 말대로 ‘유순한 기도’이다. 그것은 ‘완전히 온순하고, 완전히 솔직하며,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포기하는 경험’을 말한다. 유순한 기도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이러한 연약함이요, 무방비로 접근이 용이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며 당신 자신을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에 내맡기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시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은 결코 약한 자들을 밟지 않으시고 아무리 작은 소망이라 할지라도 자르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손이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을 친히 인도하시도록 맡기라. 약하고 무르고 공격받기 쉬운 위치가 되라. 그리고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에게서 배우라.
겨울의 축복
겨울은 나무를 보존하고 또 강화시킨다. 나무의 힘이 바깥 표면에서 소모되기보다는 그 나무의 수액이 나무의 안쪽 깊은 곳까지 점점 더 깊이 들어가게 된다. 겨울에는 더 강인하고 더 탄력성 있는 생활이 굳건하게 확립된다. 겨울은 나무가 생존하고 번창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이것은 곧바로 우리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경건한 활동이라는 표면적인 선을 가지고 우리의 참모습을 숨기곤 하는가? 이처럼 열정적이었던 푸른 잎들이 하나 둘 떨어지고 나면, 겨울같이 차디찬 영성의 힘이 변화를 일으킨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메마르고 흉하게 보인다. 우리의 수많은 결점과 오점과 약점과 불완전함이 뚜렷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외관상의 아름다움이 없었졌기 때문이고, 근본적인 아름다움은 사실 강화되고 있다. 영혼은 계속해서 내면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진정한 선과 변함없이 지속되는 덕행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라기 시작한다. 순수한 사랑이 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7장 언약의 기도
언약의 기도는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갈망하는 마음속 깊은 외침이다. 언약의 기도의 제단 앞에서 우리는 확고부동한 헌신을 맹세하고, 굳은 의지로 결단하고, 거룩한 순종을 약속한다.
약속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헌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거의 본능적으로 움츠러들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도 그 이유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헌신에도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헌신과 훈련과 고정된 습관에 의해서 자유를 얻는다. 그리스의 웅변가였던 데모스테네스는 입에 자갈을 물고 노호하는 바다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훈련을 겪었기 때문에 위해한 웅변가가 될수 있었다. 조지 프리드리히 헨델은 작곡에 정진했기 때문에 ‘메시아’와 같은 대작을 작곡할 수 있었다. 플레너리 오코너는 강도 높은 개인 훈련을 통해 몸을 쇠약학 하는 질병을 이겨내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소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이처럼 자유는 훈련과 헌신의 산물이다. 우리는 또한 헌신을 하게 되면 우리의 생활에서 자발성과 기쁨을 모두 빼앗기지나 않을까 두려워한다.
우리는 의무적으로 기도하기보다 기도하고 싶은 때 하기를 원한다. 헌신을 하게 되면, 기도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것이 되어 버릴까봐 걱정한다. 의무적인 일도 성령의 힘으로 할 때 그것은 커다란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 사실 의무는 드 꼬싸드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대로 ‘지금 이 순간이 성례’이다. 우리가 헌신을 회피하는 데는 또 하나의 다른 이유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약속을 완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이러한 두려움에 대해서 나는 격려의 말을 하고 싶다. 위대한 사도 베드로도 자기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맹세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의 본뜻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계신다. 때때로 당신은 하나님께서 정죄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마음속으로 정죄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당신의 노력을 기뻐하신다. 마음속의 언약과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얼마나 원하는지 그 수준에 따라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소망을 일으키시는데, 결국 우리의 마음속에 그 열망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생명을 주는 언약
언약은 성경에 나오는 용어이다. 언약의 요점은 헌신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통해서 이 세상에 복 주시기 위해 자신을 내어 놓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지 않으셨다면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우리는 어떤 위치에 있을까?
갈보리의 희생은 하나님 편에서의 헌신이다. 그는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다. 헌신은 헌신을 요구한다. 우리의 반응은 어떤가? 그 대가가 마땅히 순종의 삶을 올려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거룩한 순종의 언약
순종의 문제는 하나님은 일이고 우리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고 우리에게 순종할 힘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 한가지도 선한 일을 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소원을 주시는데 만일 그 소원이 미리 마음속에서 끓어오르지 않았다면 당신을 이 글을 읽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면 반드시 순종할 힘까지도 주신다. 더구나 순종은 언뜻 보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영원한 사라의 하나님이 침투하고 강권하며, 초청하고 설득하는 부르심에 대해 순종이라는 유일한 방법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조금만 마음을 열어도 우리에게 달려 오신다. 하나님은 사정없이 우리 뒤를 추적하는 하늘의 사냥개에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꼐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굶주림을 주시는데 그것은 순전하고 참된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가 아니고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 때때로 우리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서 마음속 깊이 감동을 받는다. 무디는 언젠가 뉴욕 거리를 지나가다가 엄청난 하나님 사랑에 실제로 압도되어 혼자 있을 만한 처소를 얻기 위하여 친구집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두 시간 동안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의 물결이 자기를 향해 계속해서 밀어닥침을 경험하였다. 때로 우리는 불꽃같이 환한 환상을 보고 영원히 하나님께 충성하기로 맹약하는 경우도 있다. 블레즈 파스칼은 놀라운 영적 체험의 순간을 단 한마디 ‘불!’이라는 말로 묘사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를 체험하고서는 설 때나 걸을 때나 앉을 때나 누을 때나 언제든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찬양하며 복종하며 경이와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다.
우리는 영혼을 뒤흔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경험을 통하여 영원히 변화된다. 성령의 지시하심을 따라 민감하게 움직이게 된다. 결코 일상적인 선행만 가지고 충분하지 않으며, 어중간한 임시 변통의 수단으로는 마음의 욕구를 채울 수가 없다. 공의로우시고 변치 않는 하나님의 기준, 즉 온전한 순종에 이르기까지 그분께 사로잡혀야 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프라이의 기도를 드려보자. “오 하나님! 주님을 섬기는 일에 홀로, 그리고 더욱더 단순하고 순수하게 복종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만일 우리가 넘어지면 분명 넘어질 테지만 우리는 일어나 다시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순종의 습관을 형성해 가고 있다. 모든 습관은 수많은 실패와 오류와 잘못된 출발로 점철되어 있다.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처음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우리의 가슴에 절대적인 순결을 원하는 불타는 열망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임을 깨닫게 된다. A.W.토저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안에 그런 마음을 넣어 주셨기 때문이다.”
시간의 언약
언약의 기도는 우리에게 구체적인 결단을 촉구한다. 리차드 백스터는 그의 저서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에서 우리에게 “기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 적합한 장소, 그리고 가장 적절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라고 권면한다. 시간의 언약이란 규칙적인 기도 생활에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실현 불가능한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시골 사람들은 생활 주기가 하루 단위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고, 도시 사람들은 생활주기가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시골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해야 할 자질구레한 일들이 많다. 예를 들면 소젖도 짜야 하고 닭모이도 주어야 한다. 따라서 매일의 기도 훈련이 시골에서는 효과가 있다. 반대로 도시에서는 모든 일이 금요일까지 집중되어 있고 주말에는 휠씬 더 자유 재량권이 있다. 그래서 “금요일이어서 하나님께 감사해요”라는 말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주일 단위로 기도 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매일매일 기도 시간을 따로 내지 못하여 죄의식을 갖는 대신에, 예를 들면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시간을 내어 더욱 넓은 기도를 하고 경건서적을 읽는 것이 낫다. 유아를 둔 부모들에게 젖먹이의 요구는 생각보다 휠씬 많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환상적인 혼자만의 시간을 찾아 기도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아이와 함께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그 아이로 인해서 하나님은 당신에게 더 실제적으로 응답하실 것이다. 아이와는 노는 시간이 기도 시간이 되게 먹이는 동안에 기도할 수도 있다. 이것은 특히 젖먹이는 어머니들에게 해당된다. 그리고 기도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라.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더 규칙적인 기도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시간을 갖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한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일에 대해서 단도해야 한다. 예를 들면,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라는 마로 기도하지 않는 삶을 위장해서는 안된다. 존달림플은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적절히 묘사했다. “우리가 특정한 때, 특정한 곳에서 기도하기를 구체적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하기를 배울 수 없다.”
장소의 언약
시간의 언약이 계속성을 부여한다면 장소의 언약은 안정성을 보장한다. 장소의 언약은 우리에게 집중의 은사를 준다.그저 일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면 되고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으면 된다. 장소의 언약에 공동체의 헌신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공동체는 하나의 은사이다. 장소의 언약을 통해서 우리는 늘 공동체를 찾아내고 언제든지 그것의 출현을 기뻐하며 그 발전을 위해 늘 자양분을 공급하게 된다.
마음의 준비를 위한 언약
아무런 제약 없이 가장 깊은 감정까지도 자연스럽게 나타내며 하나님을 만나 보라고 했다. 우리는 달릴 수도 있고 뛸 수도 있으며, 걸을 수도 있고 설 수도 있으며, 무릎을 꿇을 수도 있고 누울 수도 있다. 경외와 존경으로 눈을 감고 머릴 숙일 수도 있고, 찬양과 헌신하는 마음으로 눈을 들어 바라 볼 수도 있다. 손을 들 수도 있고 박수를 칠 수도 있으며 깍지를 낄 수도 있다. 울거나 웃을 수도 있고, 노래하거나 소리지를 수도 있다. 우리는 경이와 찬양으로 조용히 무릎을 꿇을 수도 있다. 우리는 또한 ‘거룩한 기대감’을 키움으로써 마음을 준비할 수 있다. 마음의 눈을 가지고 바깥뜰과 안뜰을 드나든다. 마음의 베일이 벗겨지고 우리는 지성소로 들어간다. 마침내 마음속이 기대감으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된다.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기 위한 마음을 준비시키는 또 하나의 방법은 혀를 훈련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비뚤어진 마음과 가득한 말로 달려 나오는 것보다 아무 말 없이 침묵 속에서 거룩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얼마나 옳은 일인가!. 당신만의 작은 성소를 준비하면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배하게 된다. “이 천상의 대화에 익숙한 사람들만큼 기쁘고 복된 생활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과의 밀회
밀회의 기도란 하나님과 특별한 데이트를 하는 것이다. 그 기도는 우리를 마음의 본향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편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연인으로서 우리가 기대와 기쁨으로 그 앞에 규칙적으로 나아 오기를 기다리시낟. 이 규칙적인 만남의 시간을 지키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기쁘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면 즐겁기 때문이다.
2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구하는 위를 향한 기도
교만과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저항감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역사로 극복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갖기 위해 위를 향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사역할 힘을 얻게 된다.
8장 찬양의 기도
기도는 모든 영혼을 둘러싸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대답이 가장 직접적일 때 그것을 가리켜 찬양이라고 한다. 찬양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존귀히 여기며, 찬송하고 칭송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발적인 열망이다.
찬양은 기도가 호흡하는 공기요, 기도가 헤엄치는 바다라고 할 수 있다. 찬양을 통해 우리는 이기심이 없는 순수한 헌신의 공기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찬양의 기도로 우리는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는 것만을 구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만을 구한다.
찬양의 두가지 측면
찬양의 기도에는 감사와 찬송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감사는 하나님꼐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대해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찬송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송축은 기쁨에 넘친 최고의 찬송이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을 찬소으로 큰 기쁨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눈물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다면 찬송과 감사를 더 자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너무 장엄하시고 너무 높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찬양이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성 어거스틴의 말을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갈망받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은 무감각하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보다 민감하고 부드럽다. 아무리 무의미하고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간과하시는 일이 없다. 냉수 한 컵조차 하나님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기에 충분하다. 자녀에게서 시들어 버린 민들레 꽃다발을 받아들고 감격에 겨워 자랑스러워하는 엄마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자그마한 감사의 표시에도 기뻐하신다. 주님의 못자국 난 손을 붙들고 다만 마음속 깊이 “주님,감사합니다. 주님을 송축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하기만 해도 하나님의 마음은 기쁨으로 넘칠 것이다.
찬양을 방해하는 것들
C.S 루이스는 찬양을 방해하는 것들을 몇 가지로 분석해 놓았다. 그 첫째는 부주의함이다.
두 번째 방해 요인은 다른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해가 지는 것을 보고 찬양하기 보다는 분석을 하고, 좌절이 생기면 그저 보이는 것은 좌절뿐이고 ‘하나님의 섭리는 무시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세 번째 찬양의 방해 요인은 탐욕이다. 더욱더 많은 것을 원하는 우리의 욕심 때문에 우리는 찬양의 능력을 상실한다. 그한 가지 이유는 욕심으로 인해 심사숙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한가지 방해 요인을 더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부심이다. 일상적인 것 가운데 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에 관해 자부심을 갖기가 너무 쉽다.
디딤돌
찬양의 기도는 배워야 한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보라. 그들은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서 훈련받을 필요가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감사, 찬송, 경배, 이러한 것들이 처음부어 우리의 마음속이나 입술에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더욱더 깊고 온전한 찬양을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모든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좌절과 두려움 등 우리가 처해 있는 일상적인 삶의 구석구석에서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슬픈 일이 생겼을 때 우리가 받은 복들을 세어 본다든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속성들을 나열해 보는 일은 참 어렵다. 우리는 찬양을 배울 때 웅장하고 우주적인 것들에 초점을 맞추어 그렇게 엄청난 규모로 배우지 않는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배우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찬양을 배우기 시작하면 금방 지쳐 버리고 패배하고 만다. 우리는 좀더 소박하게 시작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배울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함으로써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비를 지켜 봄으로써 배운다.
불평이 한 번 생길 때마다 열번 감사하고, 한 번 나무라고 싶으면 열 번의 칭찬과 병행하라. 감사를 실천하다 보면, 어느샌가 ‘제발’이라는 말보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즐겨 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활동을 지나치게 확대해서 말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확대하는 것은 안전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대해 아무리 확대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쵀대한의 과장된 것도 실제 하나님의 그것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9장 안식의 기도
안식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폭풍의 눈 속에 두신다. 우리 주변이 온통 혼돈과 혼란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 우리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안정함과 고요함을 느낀다. 엄청난 개인적인 갈등의 현장 한복판에서 우리는 고요하고 평안한 마음을 유지한다. 수많은 좌절이 우리의 마음을 흩어 놓으려 하여도 여전히 우리는 마음을 모아 집중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안식 기도의 열매이다.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
무기력한 태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활동하는 태도를 장려한다. 더 이상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손에 움켜쥐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올려 드리고 내적인 지시에 따라 행동한다.
안식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강렬하면서도 고요함에 이르게 되고, 조용하면서도 민첩함에 이르게 된다. 우리는 종종 기도를 시작할 때, 모든 다른 문제를 근면으로 해결하도록 가르침받은 그대로 기도도 근면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쓸데없는 말을 반복하고 주문을 외우듯이 중언부언하는 것은 이방신들을 깨워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침묵은 단지 소음이 없다는 의미의 침묵이 아니라 무언가 실체가 있는 침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이란 체념이나 게으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물러나 앉아서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하시도록 기대하는 것은 흰두교의 기도 개념이다.
유진 피터슨은 말하기를,“ 기도는 중간태로 일어난다.”고 했다. 문법에서 능동태란 우리가 행동을 취할 때이고, 수동태란 다른 사람이 행동을 받을 때를 말한다. 그러나 중간태에서는 우리가 행동을 취하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즉 우리가 행동의 형성에 참여하여 그 유익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조종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에 의해 조정되지도 아니한다. 우리는 행동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그 결과에도 참여한다. 그러나 그것을 통제하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거룩한 여가는 중간태로 생활하고 중간태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하신 삼위 하나님의 활동
우리가 은혜로 충만한 기도 사역에 완전히 참여하게 될 때, 그 기도 사역은 우리에게 달여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투쟁적이거나 일관성 없는 방법으로 기도한다. 우리는 하늘의 영광의 단편적인 면만을 볼 때가 많다. 사실 우리는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른다. 기껏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탄식소리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우리가 말을 더듬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말을 바로잡아 주시고, 우리가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기도의 물줄기를 정화시켜 주신다. 우리가 유리를 통해서 희미하게 볼 때에 성령께서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할 때까지 조정하시고 초점을 맞루신다. 요지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갖출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하고 이기적인 기도를 재구성하고, 정제하며 재해석한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성령의 이런 사역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
오늘 밤 우리가 기나긴 시간 잠을 잘 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끊임없는 기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 계속해서 상달되고 있는데 그 기도는 다름다닌 영원하신 아들이 드리는 것이다. 지금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며, 지금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드리는 성자 하나님의 사역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한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시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한 기도를 도우시는 영원한 삼위 하나님의 활동이 있다. 성령 하나님은 하늘 보좌 앞에서 우리의 한숨과 탄식을 해석해 주신다. 아들 하나님은 하늘 보좌 에 앉으셔서 우리 기도를 사용하여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대화하는 완전한 독백을 만드신다.
세 가지 전통적인 실천 방법
첫째는 ‘고독’이다. 고독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힘과 행복이 오직 하나님꼐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위하여 얼마 동안 정상적인 행동 양식과 사람들과의 상호 활동도 자진해서 삼가게 된다. 루이 보이예는 “고독은 우리의 피상적인 안전의 껍질을 깨뜨려 열어 주며, 부수어 준다”고 말했다. 우리는 고독의 체험을 통해 살그머니 지성소로 들어가며 그 안에서 고요 속에 걸러지게 된다. 고통스럽게 우리는 모든 사람, 모든 것을 맡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헛된 모습을 버리게 된다. 서서히 우리는 너무나도 중요하게 보이는 모든 사업 계획에 대한 집착을 줄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정신을 더욱더 단수놔시키고 집중하게 되며,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기쁨으로 받게 된다.
두 번째 것은 ‘실렌시오’이다.
말의 침묵이라기보다는 사람들과 환경을 우리 마음대로 쥐고 흔들고 통제하기를 그만두고 침묵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통제하고 모든 것을 조종하려는 우리의 상호 의존적인 운도에 대항하여 굳게 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 떠들썩한 피조물의 활동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한다. 마음이 집중할 때까지 조용히 하고 말을 하지 않으며 움직이지 않는다.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실재 속에 들어갈 때까지 모든 과도한 짐과 없어도 되는 장식들을 벗어 버린다. 중심 되신 하나님께로 인도될 때까지 모든 산만한 것들을 내어 버린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우선 순위를 조정해 주시고 불필요한 허황된 것들을 제거해 주시도록 위임한다. 이처럼 피조물의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나면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께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세 번째 방법은 ‘묵상’이다. 묵상이란 집중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음과 정신과 영의 고요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과연 누구이며 우리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삶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서 개인적인 칩거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묵상의 소재이다.
가볍게 컵을 쥔 모양의 손
정신적인 장애인들을 위한 라르쉬 공동체의 설립자인 장 바니에는 종종 간단한 예화를 들어 라르쉬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는 양손을 가볍게 붙여 컵 모양을 만든 후 이렇게 말했다. ‘내 손에 상처 입은 새 한 마리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내가 만일 두 손을 꽉 누른다면 그 새는 어떻게 될까요?“ 그 대답은 즉시 나왔다. ”그야 그 새가 짓눌려서 죽고 말겠지요“”음, 그렇다면 내가 만일 두 손을 완전히 벌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 안돼요, 그러면 그 새가 달아나려고 나아가다가 떨어져 죽을 거예요, “바니에는 미소를 짓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맞습니다.가장 좋은 곳은 완전히 벌릴 것도 아니고 완전히 닫힌 것도 아닌, 컵 모양의 내 손과 같은 곳입니다. 성장은 바로 그런 곳에서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역시 가볍게 컵을 쥔 모양의 손으로 위를 보호하고 계신다. 우리에게는 충분한 자유가 있어서 마음껏 몸을 뻗을 수도 있고 자랄 수도 있다. 또한 하나님의 충분한 보호로 다치지 않고, 다쳤다 해도 고침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의 기도이다.
10장 성례의 기도
성례의 기도는 성육신의 기도이다. 크신 지헤의 하나님은 그이 생명을 눈에 보이는 실제로서 우리에게 내어 주기로 선택하셨다. 그것은 위대한 신비이다. 하나님은 순전한 영으로서 모든 피조물의 한계를 완전히 초월하신 분이지만, 낮아지셔서 인간의 연약함을 입으시고 신체를 가짐으로 육안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서 아기로 태어나신 것이다. 떡과 포도주에는 성례의 권능이 부여되었다. 우리는 그 모든 경이로움 앞에 머리를 숙인다.
옛날 방식의 새 노래
찬송과 기도를 병햄함으로써 시편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순수하게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음악은 감정과 의지, 상상력과 이성 모두에 호소하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매체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음악과 기도에 활력과 기운과 기쁨을 더해 준다. “노래하는 사람은 두 배로 기도하는 것이다.”
가장 완전한 기도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도의 중심에는 성찬식을 거행하는 의미가 있다. 성찬식에는 기도의 거의 모든 측면이 들어 있다. 시험, 회개, 간구, 용서, 묵상, 감사, 송축 등의 요소가 다 포함된다, 성찬식은 우리가 거기에 온전히 참여한다는 점과 주시는 은혜는 오로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점에서 기도의 핵심적인 요소를 가장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거기에는 모든 감각이 총동원된다. 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본다. 그리고 공식적인 말을 듣는다. “이것이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요컨대 성찬의 기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기도라 할 수 있다.
성찬 기도 중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늘 상기한다. 그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예수님의 몸이 찢기시고 피가 흘러 나왔다. 이것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고, 이것으로 우리가 견고해지며, 이것으로 우리가 힘을 얻는다. 성찬식에는 우리 모두가 동일한 입장으로 참여한다. 똑똑하고 논리 정연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해서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나은 것은 결코 아니다. 성찬식 기도에는 우리의 감정이 문제되지 않는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서 특별히 어떤 경건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피 흘리셨기 때문에 한마디 변명도 없이 내 모습 그대로 성찬에 참여한다. 우리는 두 손을 벌리고 빈손으로 성찬에 참여한다. 그 모든 것은 오직 은혜에 속한 것이다. 확신컨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으신다. 성찬을 받기 위해 선행의 양을 증가시키거나 더 적절한 회개를 하거나 어떤 다른 것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자격이 없다고 망설이지 말라. 성찬은 분명히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나오라, 그리고 먹고 마시라!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말씀의 성례
설교자가 기도로 충만하지 않고 성도가 기도로 충만하여 설교를 듣지 않는다면, 무기력한 교회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되고 만다. E.M.바운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기도 성격이 설교의 성격을 결정한다. 가벼운 기도는 가벼운 설교를 만든다. 기도는 설교를 강하게 할 뿐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게 한다.”
“기도, 오직 많은 기도만이 거룩한 기름 부음이 임하는 설교를 낳는다. 그리고 기도, 오직 많은 기도가 이 거룩한 기름 부음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다. 꼲임없는 기도가 없이는 거룩한 기름 부음이 절대로 설교자에게 임하지 않는다. 기도의 인내가 없이는 그 거룩한 기름 부음은 너무 많이 거둔 만나처럼 벌레가 생긴다”. 죽은 정통성만을 설교하는 설교자들,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신성한 직임을 수행하는 설교자들, 최근의 지적.문화적 유행을 파는 설교자들, 이 모든 이들이 문제이다. 내가 알기로는 많은 설교가 생각이 짧고, 준비가 부족하며 전달이 잘 되지 않고 있다.
몸으로 드리는 기도
우리가 기도할 때 마치 우리가 몸이 없는 영인 것처럼 기도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모세가 양손을 높이 들고 기도한 것이 바로 그것이며,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할 때 그 아이 위에 엎드린 것이 바로 그것이며, 요한이 밧모 섬에서 영광의 그리스도를 뵙고 그 앞에 꿇어 엎드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외에도 열거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성격에 나오는 가장 흔한 기도의 자세는 양손을 펼친 채 완전히 엎드리는 것이다. 두번째로 흔한 자세는 양손을 들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자세는 양손을 들고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자세는 양손을 잡고 두 눈을 감는 것인데 이러한 자세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천년 동안이나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찬송가에 맟추어서 `트리푸디움‘이란 춤을 추었다. 예배하는 자들이 찬양을 하면서 팔짱을 끼고 앞으로 세걸음, 뒤로 한 걸음, 또 앞으로 세 걸음, 뒤로 한 걸음씩 옮기며 춤을 추었다. 그들은 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였다. 그 승리는 우리를 앞으로 전진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뒤로 물러서는 일이 없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춤으로 보여 준 것이다.
거룩한 춤은 개인적인 기도나 예배의 한 부분으로 쓰일 수도 있고, 또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모임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시편 기자처럼 우리는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소고 치고 춤추며 찬양하며, 현악과 통소로 찬양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오장 육부 전체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과 나를 인도하셔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하나님께는 가장 큰 영광이 되는 기도를 그와 같이 여러 가지 몸짓으로 표현하게 하실 것이다.
기도로 충만한 삶은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예배 의식적인 위엄과 영정인 큰 기쁨을 갖고 나아 오면 된다. 그 두 가지는 기도에 대한 완전한 체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11장 쉬지 않는 기도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이 거하시게 되면 그 사람은 기도를 멈출 수 없다. 성령이 그 안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잠을 자든, 꺠어 있든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기도하게 된다. 먹을 때나 마실 때나, 일할 때나 쉴 때나 기도의 향기가 그의 마음속에서 자발적으로 피어 오르게 된다. 마음속에서 생기는 아무리 작은 자극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은밀하게 부르는 말없는 노래와 같다.”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한 가지 좋은 방법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하나님과 영속적인 교재를 나누며 살아가는 이러한 삶을 내가 온전히 누리고 있다고까지는 말하지 못하지만 , 나는 그러한 삶이 가장 훌륭하고, 가장 멋지며, 가장 온전한 삶의 방식임을 알고 있다고 어느 정도 자부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러한 삶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브라더 로렌스는 간단하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보다 더 기쁘고 충만한 삶은 없다.” 래더의 성 요한은 “숨쉴 때마다 예수님을 기억하라”고 권면하였다. 노리치의 줄리애나는 “기도는 영혼을 하나님께 결합시켜 준다”고 솔직히 말했다. 비잔틴의 신실한 작가 칼리스토스는 “쉬지 않는 기도는 쉬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원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또 성 프랜시스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 그 자체가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하였다. 프랑크 라우바흐 는 말하기를 , “오, 이렇게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것, 하나님을 내 생각의 대상으로 삼고 내 대화의 상대로 삼는 것이야말로 내가 일찍이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임재를 부단히 연습하는 동안 다른 모든 것은 중단하게 된다. 우리는 점차 삶의 초점이 맞추어지고 마음이 집중되며, 또한 차츰 관점이 모아지게 된다. 점점 더 우리는 일상 생활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우리 자신조차 놀랄 만큼 수월하고 차분하게 해결하며 살아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일관성 있게 꾸준히 기도하는 것보다 간헐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것은 마치 오랜 만에 한 번씩 칠 때 좋은 테니스 경기를 하기가 더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정하지 못한 기도생활을 하면서 마음과 뜻과 영혼이 모아지는 체험을 할 수 있다고 정말 생각하는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불신의 기도를 하면서 누군가가 모세처럼 친구에게 하듯이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다.”고 과연 믿는가? 아니다. 규칙적으로 관련을 맺을 때 친밀도가 향상된다. 수월성도 역시 발전된다. 왜 수얼해지는가? 그 이유는 의의 습관을 점점 쌓아가기 때문이다. 때가 되면 ‘거룩한 습관들’이 통합되는 역사가 일어나 기도가 쉽고 자연스럽게 자발적이 되며, 기도를 그만두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워질 것이다.
불타는 열정
이 시대에는 쉬지 않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당신도 분명히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흩어진 마음들과 떠들썩한 마음으로 끝없이 연속되는 활동을 하다 보면 숨이 차게 된다. 마음이 긴장되고 조급해지며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아무런 까닭 없이 마음속에서 생각이 나기도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한 가지 일에 오랫동안 집중이 잘 안된다.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 않는 것이 없다. 우리는 사실 정신이 산만해진 사람들이다.
쉬지 않는 기도 혼돈된 가운데서도 평화를 말해 주는 면이 있다.
윌리암 제임스는 “종교는 무딘 습관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은 열정으로 존재한다.” 당신의 몸 속에 있는 모든 세포가 이러한 생활을 갈구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계속적인 임재를 마음속 깊이 동경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기쁨과 하나님의 평화와 하나님의 능력이 점점 더 증가하기를 갈망하지 않는가? 확신컨대 여기 저기서 조금씩 드린 기도는 당신에게 충분하지 않다. 때문에 더 원해야만하며 훨씬 더 기도에 힘써야 한다. 당신은 영원한 기도의 제단에 꺼지지 않는 헌신의 불꽃을 태우기를 원할 것이다.
단숨의 기도
단숨의 기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수 기도’로서 그 내용은 “주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것이다. 단숨의 기도는 창조되기보다는 발견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여기에 당신이 당신 자신의 힘으로 단숨의 기도를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과 조용한 장소를 선택해서 가만히 앉아 하나님의 사라의 임재를 묵상해 보라. 단숨의 기도는 가능한 자주 드려라.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당신의 영혼 속 깊이 심어 주시도록 맡기라, 너무 서두르거나 너무 빨리 기도를 바꾸지 말라. “머리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모기들처럼 계속해서 다툴 때, 이 싸움을 없애려면 마음을 단 한 가지 생각에만 고정시켜야 한다. 이 일을 돕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짧은 기도이다. 그 기도는 마음을 단순하게 그리고 집중하게 한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매일매일의 모든 활동을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며 기쁘게 해나가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찬양과 감사를 속삭이듯이 기도로 올려 드리면 된다.
토마스 켈리 ‘우리의 중심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삶은 서두르지 않는 평화와 능력의 삶이다. 그것은 단순하고 고요하며 놀랍다. 그것은 승리의 삶이며 빛나는 삶이다. 시간이 별도로 들리지 않지만 우리의 시간을 다 차지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의 계획들을 새롭고 능력 있게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과연 이런 삶을 살 수 있는가? 나는 과연 어떤가? “결코 그렇게 살지 못한다.‘고 우리는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기다리라. 우리가 처음 생각하는 것보다 더 쉬울 것이다. 분명히 이런 끊임없는 교제의 삶은 저절로 되거나 아무 노력 없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치있는 일은 언제나 노력이 필요하다. 주님께서 내게 요구하신 일은 에베레스트 산을 오른는 것만큼이나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출 수만 있다면 주님께서 그것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은 바로 내 뜻을 주님의 능력의 역사에 붙들어매서 주님의 바람이 무한히 휩쓸고 지나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쉬지 않는 기도의 단계
그 첫 번째 단계는 외적 훈련의 단계이다. 능숙한 피아니스트의 경우, 지금은 그의 손이 건반 위에서 위아래로 날렵하게 움직이지만 그도 한때는 아주 간단한 연주기법을 가지고도 몹시 괴로워헀을 것이다. 프랑크 라우바프는 그것을 ‘분초와의 경기’라고 하였다. 우리도 그것을 즐거운 경기로 바꿀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오늘 얼마나 많은 순간을 거룩한 교제로 바꿀 수 있을까?
두 번째 단계는 이 일이 잠재 의식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적인 기도는 전혀 뜻밖의 순간에 흘러나온다. 교통이 막혔을 때 소나기가 올 때, 또는 사람이 북적대는 상점가 같은 곳에서 그런 기도가 나온다. 마침내 기도를 꿈꾸기 시작한다.
이 단계가 되면 우리 행동의 변화까지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교통이 혼잡해도 짜증이 덜 나고, 집안이나 회사의 사소한 문제거리들도 더 쉽게 견뎌 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조용히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보다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기도가 마음속에 박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지성과 더불어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감성과 이성이 보다 조화롭게 활동한다. 기도하는 일이 좀도 수월해지고, 점점 더 사랑스러워지며, 점저 더 자연스러워진다. 기도가 부담스럽기보다는 즐겁게 느껴진다.
이제 우리는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우리의 결정은 좀더 사랑에 근거한 합리성에 기초하게 된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들의 아픔과 고토에 대해 더 민감해진다. 방안에 들어서면 누가 슬프고 외로운지, 또 누가 깊고 표현할 수 없는 슬픔 속에 잠겨 있는지 즉시 알아본다.
네 번째 단계는 기도가 전인격 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기도가 숨쉬듯 자연스럽게 되고 피가 전신을 돌아다니는 것처럼 되는 것이다. 기도가 우리 속에서 강렬한 리듬을 만드는 것이다.
두 가지 문제
즉 쉬지 않는 기도가 예수님이 금지하신 중언 부언하는 기도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쉬지 않는 기도는 골방의 기도이며 은밀한 기도이다. 우리가 그런 기도를 드리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다만 아는 것은 우리가 이전보다 행복하고 더 충만하다는 사실뿐이다.
두 번째 문제는 성격상 실천적인 것에 가깝다. 우리의 감정이 영적이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좋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이 분명히 영적이지 못할 때는 어떤가? 가령 자녀들과 반목하거나 부부가 불화할 때는 어떤가?
어리석게 겉으로만 경건한 체하며 끊임없이 교제하는 것처럼 가장하느니보다 차라리 그런 상황에서 나는 하나님께 잠시 동안 나가 계시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여느 때처럼 은혜로우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신다. 때가 되면 우리는 다시 돌아와 다시 시도하게 된다. 문제는 우리가 계속해서 실패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다. 실패하는 것은 기정 사실이다. 문제는 오히려 일정 기간 동안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연습하여 습관으로 만드느냐그렇지 못하느냐이다.
하나님은 영혼의 지성소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내주”를 경험할 수 있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영접해 주신다.
12장 마음의 기도
마음의 기도는 친밀한 기도이다. 그 기도는 어린아이가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기도요, 애정이 깃든 기도이다. 암탉이 병아리를 그 날개 아래 모으듯이, 우리는 마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에게로 모아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따뜻하게 돌봐 주시며 사랑해 주시도록 할 수가 있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싶다”
장 니꼴라 그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고,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는 것은 바로 마음의 소리이며,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도 마음이다.” 우리도 아주 오래 전의 요한 웨슬리처럼 우리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 안에 내주하여 기도하시는 성령
마음의 기도란 과연 무엇인가? 아주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안에 내주하여 기도하시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기도의 세 단계를 말하였다. 입술의 기도, 지성의 기도, 마음의 기도가 그것이다. 이러한 범주화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마음의 기도에 도달하게 되면 성령이 기도의 주도자가 되시는 수주에 이미 들어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음의 기도를 만드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고, 그것을 계속해서 하시는 분도 바로 성령이시다. 마음의 기도에 들어서면 우리는 우리 능력의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해도 말문이 막히고 만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애는 쓰지만 그 표헌이 실재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을 뿐이다. 성령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개입하시는 곳이 ‘바로 여기다,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양자의 영을 받아 그 영을 통해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
조지 저트릭의 말대로 우리는 마음의 기도를 통해 ‘존중하는 친구 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과 가장 깊고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되면 “마치 태양 빛을 완전히 반사할 수 있는 고요한 연못의 물같이”된다
마음 기도의 다양한 표현
마음의 기도를 표현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마음만큼이나 무한하고 다양하다. 그러므로 성령의 이러한 역사를 너무 세심하게 분류하거나 구별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주시는 특별 계시의 느낌과 말씀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종종 ‘레마’라고 부른다. 그것은 그저 ‘말’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레 불과하다.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은 흔히 ‘말씀 속에 있는 특별한 말씀’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말씀 속에 있는 어떤 특별한 구절이 개인의 상황에 새롭게 적용되는 경우를 말한다.
글로쏠라리아, 즉 방언은 마음 기도의 다른 표현이다. 글로쏘라리아를 사용해야 할 이유와 용도는 많이 있다. 그중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성령 안에 놓임을 받기 위함이다. 그것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로 말미암아 기도하시기 때문이다. 영이 영을 감동시킨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적인 능력을 손상시키지 않아야 이성적인 것을 초월한다. 우리는 천상의 언어를 통하여 천상의 것들에 참여한다. 그러나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하는 수 없이 우리의 연악하고 더듬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마음의 기도의 또 다른 표현은 때때로 ‘입신’이라고 지칭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에 붙잡히는 체험으로서 잠시 동안 의식을 잃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무아경에 들어가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은 바닥이나 마루에 조용히 눕기도 한다.
내가 아는 한 이러한 체험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짓된 것이 많다) 언제나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체험의 결과로 영적 교제가 깊어지고 거룩한 사랑이 증가된다고 보고한다. 어떤 사람들은 깊은 내적 치유를 체험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평화가 그들에게 임하는 것 같았다. 분명히 영혼의 기도는 그 시간 계속해서 진행된다.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영이 영과 통하는 기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거룩한 웃음’도 마음의 기도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성령의 기쁨은 높고 거룩한 환희의 웃음이 퍼져 나올 때까지 사람의 마음속에서 그저 샘솟듯 솟아나는 것 같다. 이러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웃는 사람들이 술 취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것은 성령께서 영혼을 새롭게 하시고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것이다. 종종 어떤 사람을 오랫동안 짓눌러 왔던 슬픔과 애통함이 은혜를 받고 즉각적으로 치유되는 경우도 있다. 진정한 웃음, 진정한 기쁨은 늘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것은 우리를 치유하고 온전케 하며 우리의 기쁨을 위해 주어진다. 절대로 두려운 것이 아니다.
사랑의 반응
마음의 기도에 들어가는 첫 번째 방법은 단순한 사랑에 의한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하심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들어와 꾸밈없이 정직하게 하나님께 말하라.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너무나 두렵고 너무나 사랑으로 충만한 나머지 말이 안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브레넌 매닝이 말한 대로 ‘수용된 사랑의 지혜’를 경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랑의 장마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예상치 못했을 때 갑자기 쏟아 붓는 장마비와 같아서 당신을 경이로움과 찬양으로 몰아가고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게 한다. 이런 일이 생기면 우산을 펴서 당신 자신을 가리지 말라. 오히려 아버지 하나님이 내리시는 사랑의 장마비를 흠뻑 맞도록 하라.
13장 묵상의 기도
묵상을 통해 진리가 입에서 머리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조용한 묵상, 즉 반추를 통해 그 사람속에서 믿음으로 충만한 사랑의 반응을 기도로 표현하게 된다.
조깅하는 수도사
당신은 하나님을 조종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받겠다는 자세로 마음 문을 여세요, 하나님을 당신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 말고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세요. 하나님과의 교제는 당신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이기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꼐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마치 창문이 갑자기 활짝 열리는 것과 같았다. 하나님꼐서 친구처럼 말씀하고 싶어하시는 듯했다.
성령께서는 치유의 사랑과 부드러운 손길로 짐이 가지고 있던 과거까지도 상한 감정들을 어루만져 주셨다. 자기 삶의 주권을 포기한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주권을 발견한 것이다.
성경에 근거한 묵상
성경 묵상은 그 말씀을 내면화하고 인격화하는 것이다. 그 시간에는 교만한 마음을 모두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마이아처럼 성경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마음속에서 곰곰이 생각하십시오. 그렇게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수박 겉핥기식의 묵상은 우리의 내면 상태를 반영해준다. 그런 우리의 내면 상태는 변화되어야 한다.
상상력의 강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 보다 간단하고 겸손한 이 방법을 경멸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꼐서도 이러한 방법으로 직접 가르치셨고, 비유 속에서도 계속해서 상상력을 강조하셨다. 수많은 신앙의 대가들도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르 격려한다. 테레사는 이렇게 말한다. “묵상을 할 때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저는 마음소게 그리스도를 그리려고 애쓴답니다. 저는 이런 식의 일들을 많이 하곤 합니다. 제 영혼이 이런 방법을 통해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기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기도를 시작했거든요.” 우리도 그녀의 말에 대부분 공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묵상할 떄 지적이고만 접근하려고 애써왔으며 그런 방법이 너무나 기게적이고 우리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좇아 생각하려 하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며, 하나님의 진리와 길을 따르고자 애쓰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살면 살수록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력을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위해 그만큼 더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상력을 거룩하게 하셔서 사용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꼐서는 그렇게 자신을 비어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으므로, 우리가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심상들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우리에게 가르켜 주신다.
성경을 체험하며 사는 법
묵상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의 뜻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도전하시며 선택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의 음성을 들었으면 그 말씀에 순종해댜 한다. 그것은 동양의 세속적인 명상의 결과와는 너무도 분명하게 구별된다.
풍성한 우물
근 오백년 동안 경건 문학의 독보적인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도 보기 드물게 좋은 책이다. 이 책의 엄청난 인기는 그것이 오십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마음에 큰 평안이 있는 사람은 칭찬이나 비난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육체 노동으로 땀을 흘리는 것보다 우리의 약점을 이겨내는 것이 더 큰일이다.” “모든 좋은 감정을 좇는 데 급히 서두르지 말고 모든 나쁜 감정을 피하는 데 너무 열심 내지 말라.” “옛 뱀이 너희를 유혹하고 시험할지라도 기도로 그를 가두어 놓을 수 있고, 시험을 받는 동안 유익한 일을 그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 신앙의 대가들이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일과 기도, 이 두 가지를 꿰맨 자국이 없는 하나의 옷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파스칼은 그의 [팡세]를 ‘무릎을 끊고’ 기록했다고 선언하였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저술가로서의 자신의 천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문자 그대로 사람이 아버지와 함께 살듯이 진실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왔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하나님꼐 감사한다. 그리고 일하기 시작한다. 저녁이 되면 정해진 시간에 잠시 일을 중단하고 다시 하나님게 감사한다. 그리고 나서 잠자리에 든다. 나는 늘 이렇게 살아간다.” 기도로 충만한 그러한 독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기 위해 하도록 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묵상 기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살아 계신 음성을 체험하고자 하는 소망까지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래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묵상을 하고자 하는 소원과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하지 아니하고 그저 묵상을 시작하는 사람은 이내 포기하게 된다. 묵상하고자 하는 소원과 묵상을 시작할 수 있는 은혜는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한 절대적인 약속이다.
14장 무언의 기도
시리아의 수도사였던 니느웨의 이삭은 “수많은 말을 함으로써 기뻐하는 사람들은 비록 좋은 말을 하더라도 그 속이 텅 비어 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러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무언의 기도는 우리를 말 중독중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훈련이다. 하나님과 교제가 깊어진다는 것은 점점 더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시편 기자는 선언한다. 그리고 성 안토니스의 제자였던 광야의 교부 암모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게, 침묵의 힘이 얼마나 철저하게 치료하는지, 또 얼마나 하나님께 온전한 기쁨이 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명심해야 할 거슨 침묵에 의해 성도가 자라나며,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들 안에 거하며, 침묵 때문에 하나님의 비밀이 성도들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이다. 무언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이렇듯 다시금 살아가는 침묵으로 나아가게 된다.
경계할 일과 주의할 일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약병에 붙어 있는 주의 사항과 꽤 비슷한 경계의 말을 해야겠다. 무언의 기도는 초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숙련의 정도나 전문적인 지식과는 상관없이 찬양의 기도나 묵상 기도나 중보 기도나 다른 수많은 종류의 기도들은 누구든지 다 자유로이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무언의 기도만큼은 다르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소중하지만, 누구나 다 똑같이 하나님의 놀랍고 두렵고 부드럽고 사랑스런, 그리고 그 안에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침묵의 말씀에 귀기울일 준비가 된 것은 아니다. C.S.루이스는 나는 아직도 할 수만 있다면 무언의 기도가 가장 좋은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기도를 나의 일용할 양식으로 삼으려고 하다가 실제 내 능력보다 더 큰 정신적, 영적 힘에 기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무언의 기도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우리가 ‘최상의 상태’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무언의 기도는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성숙한 믿음의 표지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끊임없는 욕구와, 개인적 희생이 크다 해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과, 하나님만이 마음의 소원을 만족시키신다는 살아 있는 확신과, 기도도에 대한 깊은 만족 등이다. 또 개인적인 능력과 단점에 대한 실제적인 평가와, 영적인 성취를 자랑하지 아니하는 자유함과, 생의 요구들을 끈기 있고 지혜롭게 처리해 낼 수 있는 입증된 능력 따위를 들 수 있다.
당신 스스로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 점검하려면 다음 몇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된다. “하나님에 의해 구별되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을 점점 덜 두려워하고 있는가? ”기도의 훈련을 달게 받으며 기도가 내 안에서 발전하고 있느가? 지도의 훈련을 달게 받으며 기도가 내 안에서 발전하고 있는가? 건설적인 비판을 점점 수월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개인적인 모욕에 대해 구애받지 않으며, 내게 잘못한 사람들을 기꺼이 용서해 주기를 배우고 있는가?’ 말없이 하나님을 묵상하다 보면 영적인 세계에 깊이 들어가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애정 어린 정신 집중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무언의 기도에서는 말이 뒷전으로 물러가고 감정이 전면으로 부상한다. 각각의 경우 감정적인 언어를 주목해 보라. 이런 종류의 기도는 분명히 이성적인 경험보다는 감정적인 경험에 해당된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무언의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감정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깊은 체험을 말한다. 그것은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청종이라고 할 수 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 55:3). 무언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감정에 대해서 말할 때 의도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나님과의 내적인 교제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이성이나 상상력과 마찬가지로 완전하게 하나님에 의해 훈련될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변할 수 있다. 무언의 기도는 신앙 생활에 숙련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 사람들은 모든 교리의 풍조나 감정의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에 세상과 육정과 마귀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폭 넓은 체험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고양되는 영적인 열정과 성령께서 주시는 확고 부동한 확신의 차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또한 반복된 시행 착오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음성과 교활한 인간들의 목소리를 구별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들이다.
하나님과의 연합
무언의 기도의 목표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이라고 대답해 왔다. 노리치의 줄리아나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기도하는 온전한 이유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이상과 생각 속에 들어가 그와 연합하는 것이다.” 성 프랜시스의 제자였던 보나벤추어는 우린의 최종 목표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면서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순수한 관계라고 하였다.
두 가지 중요한 준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순수한 마음이다. 무언의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무언의 기도가 당신에게 주는 소망의 메시지는 오늘날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갖가지 문제들과 혼잡한 언어의 정글을 당신이 말없이 헤쳐나갈 필요가 있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 속에 임재하셔서 당신 속에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 속에 내주하셔서 당신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며 당신이 책이나 설교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지각과 빛을 주신다는 데 있다.
불결함은 하나님과의 연합에 치명적이다. 청결한 것과 불결한 것은 결코 연합될 수 없다. 하나님은 그 지혜로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곧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서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태워 없애신다.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유명한 표현에선 “마음의 순수함이란 오직 한 가지만을 소망하는 것이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 한 가지만을 소망하고, 하나님 외의 모든 충성의 대상들을 포기하고, 하늘의 주재자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자, 하나님이 보시는 것만을 보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만을 하자. 한 가지만을 소망하자.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그것이 선한 것이며, 그 한 가지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청결함이다
마음의 평정을 배워라
첫번쩨 단계는 전통적으로 ‘마음의 평정’이라고 불려왔다.
먼저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그리고 신중하게 모든 긴장과 걱정을 내버리는 것이다. 그 다음 방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껴 보라. 아마 당신의 맞은편 의자에 앉아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걱정거리가 생기거나 정신이 산만해지면 그것을 다만 아버지의 품안에 올려 드리고 아버지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맡기라. 이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풀어 버리는 것이다. 억제란 내리누르는 것이며 제지하는 것을 말하는 반면, 마음의 평정이란 내버리는 것이며 푸어 주는 것이다.
고요의 기도
두번째 단계로 아빌라의 테레사는 그것을 ‘고요의 기도’라고 불렀다.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통해 마음속의 온갖 방해 요인들과 정신을 분산시키는 것들과 의지를 박약하게 하는 것들을 모두 내버렸다. 제임스 보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자신에게 가까운 것보다 주님은 내 진정한 자아에 더 가까우시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이 나를 훨씬 더 사랑하신다. 주님이 내게는 ‘아빠’요, 아버지시다. 그분이 존재하시기에 내가 존재한다.”
프랑소아 페넬롱은 이렇게 말한다. 침묵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라. 하나님의 성령이 감화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좋은 은사들을 주실 때에 그것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하라. 당신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주님께 귀기울이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모든 외적이고 세상적인 사랑과 우리 속에 있는 인간적인 생각들을 침묵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영적인 신비 체험
무언의 기도의 마지막 단계는 영적인 신비 체험으로 황휼경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책임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시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열어 놓고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무언의 기도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려의 말을 하고자 한다. 우리가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때가 올 터인데 그래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말없이 기도할 수 있다. 여기에 바로 그 영광이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인생 초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게르하르트 테르슈터겐의 말대로 “지금도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신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3부 필요한 사역을 구하는 밖으로 향하는 기도
내적인 변화와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둘 다 사역을 지향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광로를 통해 불순물을 걸러내는 것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이끌려 안기는 것은 하나님의 용납을 체험하기 위함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주기 위해서이다. 세계는 지금 자기 교만과 자기 과신의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무언가 달라질 수 있다.
일찍이 우리는 영적 파산 상태에서 봉사하려고 애써 보았다. 그런데 실패했다. 이제 우리는 그 사역이 영적인 풍성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끌레르보의 버나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만일 현명하다면 운하가 아닌 저수지로서의 면모를 보여 줄 것이다. 왜냐하면 운하는 물을 받아들이면서 사방으로 물을 다시 보내지만, 저수지는 기다렸다가 가득 찰 때까지 자체적인 손실 없이 흘러 넘치는 물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저수지와 같은 사람은 거의 없고 운하와 같은 사람이 많다. 이제 우리는 저수지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결심하자.
15장 일상적인 기도
오늘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일종의 내적 분리 속에서 살고 있다. 마음 한 구셕 작은 곳에 경건 활동의 공간을 마련해 놓고는 나머지 생활에서는 전혀 영적인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런 생활 방식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그 속에 들어 있는 모순을 보지 못한다. 지금 기독교의 문제는 영성이 5퍼센트 정도밖에 미치지 못하는데 있다.
이 현대적인 문제점은 일상적인 기도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다. 일상적인 기도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생활의 일상적인 체험들을 기도로 바꾸는 것이고,
둘째는 생활의 일상적인 체험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며,
셋째는 생활의 체험을 하면서 내내 기도하는 것이다.
행동으로 하는 기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직업을 기도의 방해 요인으로 간주한다. “일로 인해 마음이 분산되지 않고 시간이 좀 있다면 기도할텐데.” 이것이 보편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기도는 이미 꽉 짜여진 계획에 덧붙여지는 또 하나의 일이 아니다. 일상적인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직업은 방해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큰 자산이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의 비결을 배우는 것이 바로 일을 할 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행동으로 하는 기도이다. 화가, 소설가, 외과의사, 배관공, 비서, 변호사, 주부, 농부, 교사 등 이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일을 하나님께 올려 드림으로 기도한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아라“(고전 10:31)는 것이 사도 바울의 권고이다.
안토니 블룸은 이렇게 말했다. “기도가 의미를 갖는 것은 삶이 동반될 때문이다 삶이 뒤따르지 않고 기도와 삶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 기도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면서 때때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일종의 정중한 서정시가 되고만다.” 우리의 손과 마음으로 하는 일은 곧 행동으로 나타나는 기도이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헌물이다.
“물의 전자” 라는 영화에서 가장 멋진 대사 중 하나는 아마 올림픽 주자인 에릭 리들 (Eric Liddell)이 그의 누이에게 했던 말일 게다. “제니, 나는 달릴떄 하나님의 기쁨을 느꼈어 ” 이것은 우리가 소설을 쓰고 있건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건, 모두 직업 속에 스며들어야 할 실재이다.
우리는 노동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 이유는 창조적인 노동 활동에 종사할 때 창조주와 가장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가운데 행하는 모든 행동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에 합한 기도이며, 그러할 때의 기도는 말로 할수 있는 기도보다 훨씬 더 나은 기도이다.” 일상적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생활 중에 겪는 일상적인 체험을 통해 기도하는 것이다. 신문을 집어 들고 엄청나게 큰 결심을 해야 할 세계의 지도자들을 위해 그들을 잘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신속하게 드릴 수 있다. 학교 복도나 쇼핑 센터에서 친구들을 만나 잡담을 나누다가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 그들을 위하여 신속히 기도할 수 있다. 동네에서 조깅을 하다가도 이웃에 사는 가족들을 축복해 줄 수 있다. 때로는 태양과 비와 모든 좋은 것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정원을 가꾸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인 체험을 통한 일상적인 기도의 재료이다.
거룩함은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가정 환경에 따라 기도할 때 우리는 거룩함이 가정에서 이루어짐을 배우게 된다. 가정 내에서 좀 조용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능하다. 그곳이 기도처로 사용될 때는 나머지 가족들에게 출입 금지 구역으로 알려져 있으면 된다.
어떤 가정들을 `가정 제단,‘ 즉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모임을 경험함으로써 도움과 힘을 얻어 왔다. 십대 이전에는 밤에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특히 필요하다. 잠자리에 들기 전과 잠든 후에 두번 기도해 줄 수 있다. 그날 받았던 정신적 충격의 치유를 위해 기도할 수도 있고, 긴 밤과 그 다음날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도 있다.
십대는 적응이 필요하다. 십대들은 대개 자기 방에 누가 있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의 몸에 손이 닿는 것도 원하지 않으며, 가족간의 기도도 좋아 하지 않는다. 비록 애정이 넘치는 기도의 본질이 종종 변화되어야 한다 해도 당신은 그들을 위해서 늘 마음속으로 기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기도의 내용이 바뀌는 것을 직접 알게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신은 점점 더 자녀를 독립시키는 기도를 하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편에서 감정적인 탯줄을 끊어 버리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종종 이때는 긴장의 시기다. 왜냐하면 십대들을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들은 당신의 믿음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재확인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그것을 거부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우리는 자녀들이 급류를 통과할 때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급류가 끝난 후에도 그 다음에 나타날 것에 대해 자녀를 위해 기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일상적인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16장 간구 기도
전능하신 온 우주의 하나님께서 왜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법을 택하시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그것은 그의 자녀들이 간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즐거워하신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간구하는 것을 통해 뜨거워진다.
간구 기도와 중보 기도
우리가 구하는 것이 우리 자신들을 위한 것일 때 그것을 간구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일 때 그것을 중보라고 한다. 구하는 것은 그 두 가지 경험의 핵심부를 차지한다. 예를 들면, 영적인 통찰력이 적은 사람은 하나님께 끊임없이 도와 달라는 기도를 하지만 진정 영적인 사람들은 간구의 기도를 넘어서서, 필요한 것을 구하거나 요구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찬양한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에 의하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구하는 기도는 더 유치하고 미숙한 형태의 기도인 반면, 찬양과 묵상의 기도는 자기 중심적인 요구가 아니기 때문에 더 성숙하고 고상한 기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잘못된 영성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간구의 기도는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일생 동안 우선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초월할 수 없으며 또 초월하기를 원해서도 안된다.
한스 울스 폰 발타자르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마치 소리 내어 하는 기도는 초보자들에게 더 어울리고 묵상 기도는 수준 높은 사람들에게 더 어울리는 것인 양 생각하고, 혹은 말하는 것을 묵상하는 것보다 더 열등하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이 둘의 관계는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을 결정짓고 전제하기 때문이고, 전자는 후자의 결과를 직접 가져오기 때문이다.“
간구 기도의 두가지 문제
첫 번째 문제는 매우 합리적인 질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이미 다 아시는데 왜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달라고 구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거기에 대한 가장 정직한 답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하는 행위를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간구의 기도와 관련된 두 번째 문제는 여린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생긴다. 그것은 영적인 공손함으로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내 생활의 사소한 문제들로 하나님을 괴롭히지 않겠다. 이 세상에는 사소한 내 요구 사항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얼마든지 있지 않는가?”
우리의 가장 깊은 필요들을 뒤로하고 나누지 않는 것은 잘못된 겸손이다. 우리가 말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상처를 입는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서 우리 생활의 가장 작은 문제들까지 듣고 싶어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나눌 때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포어시드 “언젠가 우리는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위대한 거절이 때때로 우리의 가장 진실된 기도에 대한 진실한 응답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근시안적인 입장에서 우리에게 최선이 아닌 것들을 구할 때가 많다. 떄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거나 다른 사람들의 기도에 대한 거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는 다른 사람들과 나의 기도 모두에 대한 거절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자기 모순에 빠질 때도 더러 있다. “저에게 인내심을 빨리 주시옵소서”하는 식의 기도가 바로 그러한 예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은사를 보류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더 깊은 의도를 이해하시고 우리의 보다 큰 필요에 응답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는 특정한 관심사를 정한 때에 정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다.
죄가 우리의 기도를 방해한다고 말할 때 내가 의도하는 바는 일반적인 내용과 아주 다르다. 내 의도는, 우리의 죄가 그 본질상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며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단절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민감성까지 둔화시킨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은 점점 근시안이 되어 가고 우리의 귀는 점점 어두워져 간다는 뜻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잘못된 간구와 하나님의 마음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야고보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듯이 (약4:3), 우리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게 되고 따라서 우리의 기도가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일단 내가 사랑을 준다면 나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후보자가 된다. 두 손을 펴면 받을 수 있다. 성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께서는 빈손을 발견할 때 주신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들 가운데 복수를 위한 외침만이 들린다면 화해가 있을 수 없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좁아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범죄한 것만을 본다면 우리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범죄했는가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구할 필요성도 알지 못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마음속으로 늘, 이런 저런 사람이 우리의 권리를 얼마나 많이 침해했는가 계산하고 있다면 사태의 본질상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수 없을 것이다.
인간 만사에 보복의 악순환이 있다. 공격당했을 때 그 대가로 보복하는 대신 용서하는 자가 되자 우리가 용서할 때, 바로 그 용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의 용서의 은혜도 강물처럼 흘러 넘치게 한다. 용서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당연히 우리는 용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서 큰 혼동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어떤 것이 용서가 아니냐 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용서는 우리가 더 이상 아파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상처가 깊을 경우에는 아주 오랫동안 아파할 수도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감정적인 고통이 우리가 용서하지 못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잊어버린다는 뜻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적 기능을 손상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제 3개국인 나치의 암흑 시대에 살았던 독일의 목사 헬무트 틸리케(Telmut Thielicke)는 이렇게 말했다. “용서한다는 말과 잊어버린다는 말은 한꺼번에 해서는 안된다.” 용서한다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하기는 하되 용서한 후에 더 이상 그 기억을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용서는 그 잘못이 실제로 대수롭지 않았다고 가상해 주는 것도 아니다. 용서는 상황이 그 잘못을 저지르기 전과 똑같다고 취급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용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은혜로 말미암는 기적으로서, 용서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우리가 분열하는 일은 더 이상 없다. 용서란 실제적인 상대방의 큰 잘못이 우리를 분열시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상처를 가하면서 서로의 사이를 분열시키는 그 잘못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는 우리를 결속시키는 사랑의 힘이 우리를 분리시키는 과실의 힘보다 큰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용서이다. 용서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해방시켜 준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묶여 있지 않게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을 해방시켜 줌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한다. 그리고 그들을 초청하여 우리의 교제권 속으로 다시금 들어오게 한다.
17장 중보 기도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기도하게 된다. 중보 기도야말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간구에서 중보로 기도를 바꾸는 것은 우리의 무게 중심을 우리 자신이 필요에서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관심사로 옮기는 것이다. 중보 기도는 이기심이 없는 기도이며, 심지어 자신을 내어 주는 기도이다. 하나님 나라의 계속적인 사역 가운데 중보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결혼 관계들이 깨어지고, 자녀들은 파멸의 길을 가고 있다. 개개인은 미래도 없고 목적도 없이 말없는 자포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대신해서 기도하기를 배운다면 상황은 바뀔 수 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신성한 의무요, 귀중한 특권이다.
중보 기도의 좋은 모범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중보 기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전쟁사적으로 보면 여호수아가 그날의 승전 장군이었다.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앞장서 있었던 사람이 여호수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투의 이면에는 모세와 라론과 홀히 중보 기도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 감추어져 있다. 각자의 역할은 그 승리의 필수적이었다. 여호수아는 공격을 선도하였고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중보 기도를 드렸다. 이론과 훌은 모세가 지쳤을 때 그를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포어시트는 “우리가 결단의 골짜기에 더 깊이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기도의 산으로 더 높이 올라가야만 하며, 하나님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이 주 관심사인 사람들의 두 손을 떠밭쳐 주어야만 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도날드 블뢰쉬 (Donald Bloesch)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이 대속의 희생과 구원의 중재가 없이는 우리의 기도가 아무런 가치나 효력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가 기도의 삶을 위한 원동력임을 알고 거기에 호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중재나 중보 없이는 우리가 완전히 무기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구세주요 구속자이신 그 아들에 의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심판대를 통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끈질긴 기도가 승리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시작하면 그 결과가 더디고 고르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쉽게 낙담하는 것을 이내 발견하게 된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다. 하나님의 길은 사뿐히 땅 위에 내려서 땅을 적신 후, 땅 속으로 사라지는 눈이나 비와 같다. 그리하여 적절한 때가 되면 새로운 생명을 싹트게 한다. 조작도 없고 통제도 없으며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해방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길이다.(사55:8-11)
우리는 한 두 번 기도하다가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다른 문제로 넘어가거나, 자기 연민에 빠져 샐쭉해지거나, 기도를 완전히 포기하기도 한다. 간구는 열심을 갖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기도하는 일에 대해서 극도로 심각하다고 하는 선포이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존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똑같은 간구를 두 세번만 반복해서는 안된다. 필요할 때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자꾸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는 일에 결코 지쳐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어거스틴이 말하기를 “기도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중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그분의 이름이 새겨지고 하나님이 손수 기록한 초청장을 주시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 수고하는 일에 직접 관여하게 하신다.
18장 치유의 기도
네 가지 단계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치유의 기도에 대한 간단한 접근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들어야 한다. 이것은 분별의 단계이다. 사람들에게 귀기울어지고 또 하나님께서도 귀기울이자.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깊은 마음속의 필요를 망설임 없이 즉석에서 털어 놓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면, 정말로 그들의 말에 귀기울인다면 종종 우리 마음속에서는 “예”라는 소리가 우러나온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그 상황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하느냐고 정중하게 묻게 된다.
둘째, 구해야 한다. 이 단계는 믿음의 단계이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으면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직접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만약에, 그리고, 그러나”와 같은 말들로 우리의 요청을 약화시켜서는 안된다.
셋째, 믿어야 한다. 이것은 확신의 단계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다시 말하면 전인격적으로 믿는다. 때때로 우리는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24).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건, 약하다고 생각하건 그것과 상관없이, 우리의 확신이 어떤 특별한 감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기초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에 기초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특히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넷째, 감사해야 한다. 이것은 감사의 단계이다. 우리가 구한 것이 이루어지면 조그마한 예절만 있어도 감사를 표하게 된다.
19장 고난의 기도
고난의 기도에 관한 것 기도의 형태 중에 전적으로 다른 사람 중심의 형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고난의 기도이다. 고난의 기도는 우리의 필요나 소원관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우리의 변화와 하나님과의 연합과도 거리가 멀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직면하는 많은 어려움과 시련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구속하여 사용하시기를 구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애통을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 속으로 받아들인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대속적인 고난
우리는 고난 중에 기도함으로써 변화된다. 우리의 마음이 모든 사람들을 수용하고 용납하기 위해서 넓어진다. ‘그들’이라는 말이 ‘우리’라는 말로 바뀐다. 그것이 지적이건 문화적이건 영적이건 간에 우리가 우위에 두었던 모든 것들이 가만히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 함께 서 있는 것이다. 대속적인 고난 뒤에 숨어 있는 억누를 수 없는 힘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다. 그것은 우리가 고통을 사랑하기 때문도 아니요, 순교자가 되는 길을 찾으려고 함도 아니다. 이것은 불행을 위한 불행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보다 더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
고난의 기도의 가치는 무한하다.
윌리암 펜(William Pemm)의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다.”는 토마스 켈리(Thomas Kelly)“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향을 좇아 거룩한 순종에 길에 십자가를 심어 놓으셨다”. 그 고난은 무익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그리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휠씬 뛰어난 것으로 여기시고 또 그렇게 사용하신다. 고난의 순간에 우리는 여기저기서 마치 반사된 달빛과 같은 희미한 불빛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가리개가 제거되고 비늘이 떨어져 나가서 고난 속에서도 대낮의 햇빛처럼 빛나는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솔직하게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 말씀을 덧붙이신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고난의 기도의 또 하나의 가치는, 고난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넓어지고 민감해진다는것이다. 헨리 누웬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는 `상처 있는 치료자들‘이다. 모든 것을 좋게 하는 꼭맞는 해답은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고난을 겪는다. 글렌 힌슨이 말한 대로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사포로 닦아 매끄럽게 하면 할수록, 더욱더 많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속에서 우리 시대의 아픔을 인식하게 도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역의 출발점이 된다.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
.고난의 기도에는 소극적인 측면도 있고 적극적인 측면도 있다. 오늘날 절망과 궁핍을 견뎌 낼 만큼 능력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난의 기도야말로 이런 능력을 배양시킨다. 장 니꼴라 그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위해 참고 견디어라. 복종과 인내로 고난을 당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고난을 당하라. 그러면 당신은 매우 탁월한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또 모든 것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들을 알고 계시고 또 모든 것을 보고 계시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들을 바르게 하실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눈물을 마르게 하실 것이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신비하게도 우리의 슬픔을 옮기시고 그 슬픔을 사용하여 세상을 치유하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짐을 양 어깨에 계속해서 짊어질 필요는 없고 오히려 그 짐을 하나님의 품에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짐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워 마음속에 낙심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짐을 질 필요는 없다. 실제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작은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그들이 스스로 그 문제에서 벗어날 때까지만 붙잡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함께 모든 일을 하나님께 위임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 드리는 회개
고난의 기도의 참된 의미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회개하는 은혜를 받을 때 가장 두드러진다. 우리가 원수들을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그들의 좌절과 빈곤, 그리고 그들의 죄책과 지옥의 형벌을 우리 자신이 짊어지고 하나님께 그들을 대신하여 탄원하는 것이며, 그들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대신하여 우리 자신의 문제로 알고 대리적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씨름
터툴리안은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일종의 거룩한 폭력”이라고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복을 받을 때까지 놓아 주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논쟁하는 것은 그의 공의로 우심보다는 그의 긍휼을 얻기 위함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씨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투쟁은 사랑과 병행한다. 왜냐하면 투쟁이야말로 관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노가 아니다. 애처로운 울음도 아니다. 그것은 마틴 루터가 표현한 대로, “영혼이 하나님께 드려질 때 하는 끊임없는 격렬한 행동이다.” 우리는 지금 중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의 열심을 아시기를 원한다. 우리는 높은 곳에서 우리의 소리가 들리기를 원하기 때문에 찬양의 문을 두드린다. 우리는 고뇌한다. 그리고 울부짖고 큰소리로 외친다. 우리는 흐느낌과 눈물로 기도한다. 우리의 기도는 발버둥치는 믿음의 신음이 된다. 찰스 스펄전이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처럼 “기도는 하늘과 싸워 이길 수 있고 전능자를 기도의 소원대로 움직일 수 있다.”
금식은 우리의 투쟁의 한 표현이다. 금식은 격렬한 영적 활동을 위하여 스스로 정상적인 기능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심각함과 강렬함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금식이란 우리가 고난을 기쁘게 견딜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더 큰 유익을 얻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절제하는 것이다. 금식은 하나님께 대해서는 무게를 가지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몸은 비록 쇠약해졌지만 믿음은 강해져서 하나님의 약속을 손에 쥐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씨름은 고통스로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최종 결과는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다.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우리에게 우리도 이기고 하나님도 이긴다는 사실을 이렇게 말했다. “의로운 사람은 기도로 하나님과 싸워 이기며 하나님도 거기에서 이기신다.”“
20장 권세 있는 기도 - 분별력과 신중함의 보조 레일
분별력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이며 신중함은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중심 덕목이라고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서로의 균형을 잡아 주며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분별력은 실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내용을 알 수 있는 신적인 능력이며,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일이 행해져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감정적인 상처로 인해 생긴 복합젹 인격과 악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정신적인 혼란을 분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영적인 세계에 너무나 매료된 나머지 인생의 아주 사소한 것까지 모두 초자연적인 역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또한 현대 사회의 자연주의적인 추정에 속아넘어가서 초월적인 것들의 흔적을 보지 못해서도 안된다.
영적 분별의 은사에 대해서 알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분야에 은사가 있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다. 먼저 그런 은사가 있는 사람들을 찾으라. 루이스는 말하기를 “신중함이란 실제적인 상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과 그 일의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해서 일부러 생각해 내려고 얘쓰는 것이다.”라고 했다. 신중함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부족한 덕목이다. 예수님은 언제 말해야 하고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를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추어 바르게 행동하셨다. 예수님께서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돼지가 더럽기 때문이 아니라, 돼지가 진주를 소화시킬 수 없어서 결국엔 진주가 돼지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사람들이 미처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진리는 사람들에게 주지 않을 만한 지각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진리가 결국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명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민감해야 한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는 명령도 옳고 유익할 때에만 해야 한다.
상식적인 조언
첫째, 이 이야기를 통해 모든 고통이 악마의 공격이라고 추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부분의 경우 고통은 어디까지나 고토에 불과하다. 고통에는 고통 이상의 의미가 없다.
둘째, 이 분야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어떤 특별한 목소리를 훙내낸다든가 어떤 기괴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신다면 우리는 어떤 특별한 효과를 낼 필요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이 세상의 모든 운동을 다 동원한다 해도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정상적으로 말할 수도 있고, 상황에 적절하게 보이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셋째, 우리에겐 의지할 만한 특별한 자원이 있다. 특정 사역을 위해서는 성령의 특별한 기름 부으심을 체험하는 예는 흔히 있는 일이다. 적절한 때에 우리는 성령의 권능이 더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언제나 자신을 에워싸고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을 덮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자신을 인봉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기다려야 한다.
넷째, 악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확고하게 다루되 그 개인에 대해서는 언제나 유순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사람들이 절대로 구경거리가 되어서는 안되며 그들의 상황이 어떤 식으로든 이용되어서도 안된다.
다섯째, 권세 있는 기도는 훈련된 생활 습관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필요로 한다.
여섯째, 이 일을 수행할 때나 다른 사람들과 연합해서 하는 것이 더 좋다. 이 사역은 한 번 하고 떠나 버리는 그런 사역이 아니다.
일곱째,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기를 원하지만 우리의 노력은 영적인 겸손함 속에 묻어 두어야 한다.
하늘에서 땅으로
일반적으로 기도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 그러나 권세 있는 기도는 그것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권세 있는 기도는 특별한 땅의 문제를 해결학기 위해 하늘의 자원을 가져 오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아래로 향하는 기도이다.
월리암로는 , 기도는 강력한 도구하고 하면서 “인간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도구”라고 하였다. 오 할레스비 박사는 똑같은 삿실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기도는 하늘의 권능을 땅으로 가져 오는 통로이다.” 사실상 우리는 하늘에서부터 땅으로 기도한 것이다.
어린양의 전쟁을 수행하라
제임스 네일러 그리스께서 우리의 마음과 양손에 영적 무기를 들려 주셨다. 이는 이 세상의 군왕들처럼 채찍과 감옥과 고문과 고통을 가지고 정복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전재을 수해하기 위함이다. 증오 대신 사랑을 가져오며, 하나님과 더불어 악의에 대항하여 싸우며, 주야로 기도와 눈물로 전쟁하며, 금식과 탄식과 애통으로, 인내와 충성과 진리로, 그리고 거짓 없는 사랑과 오랜 고통과 성령의 모든 열매로 전쟁을 수행하여 결국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는 위함이다.
우리의 권세를 사용하라
그 일은 마음과 몸과 영혼의 질병을 다스림으로써 가능하다. 질병는 하나의 적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공포증 환자나 신경증 환자에게는 마음의 안저을 선포해야 하며, 열벼은 떠나가라고 꾸짖어야 하며, 암세포의 경우에는 피의 공급을 중단시켜야 한다. 또 우리는 사람들의 삶 속에 온전함과 행복이 조용히 밀려오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의 우리의 진보를 방해하는 모든 ‘산’에 대항함으로써 그 일을 할 수 있다. 온갖 종류의 두려움이 다시는 돌아오지 말도록 명렬해야 햔다. 또 온각 종류의 악한 생각과 의심과 왜곡된 사실에 대항하여 견뎌 내야 한다. 분노와 시기와 험담의 영을 묶고 용서와 사랑과 믿음의 영를 풀어 주어야 한다.
또한 귀신을 쫓아냄으로써 가능하다. 악령이 역사는 것을 볼때마다 우리는 단호하게 악령의 역사가 물러가도록 명령해야 한다. 주도권은 그들이 아닌 우리에게 있다. 즉 권능의 사역에서 볼떄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삶에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다스릴 권세가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영적 전쟁은 모든 사회악과 제도적인 불의에 맞서 싸움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의 빈곤을 보장하는 제도적인 구조에 대해서 나팔을 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비인간화시키는 부당한 법에 대해서 항거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까지 값없이 하는 것들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깊은 기도와 가장 위대한 겸손의 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영리함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21장 철저한 기도
“기도를 하려고 두손을 모르는 것은 이 세상의 혼란에 대항하여 일어서는 행동의 시작이다.
철저한 기도란 뿌리와 심장과 중심에까지 내려가는 기도이다. ‘철저한’이란 말은 라틴어의 ‘라딕스’에서 온 말로 뿌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철저한 기도는 우리가 삶의 커다란 문제들의 가장자리에 맴도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감히 상황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 목표는 사람과 제도와 사회의 완전한 변화이다. 알고 보면 , 철저한 기도는 예언자적인 기도이다.
영적 저항
우리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하고 언제나 그들의 입장을 하늘 보좌에 탄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되기를 요구해야 하며 변화가 일어나기를 주장해야 한다. 월터 윙크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적인 기도는 뻔뻔스럽고, 굽힐 줄 모르며, 부끄러워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정중한 독백이라기보다는 야외에서 열리는 바자회에서 끈질기게 값을 깎는 흥정과 더 흡사하다.
우리의 영적 저항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려고 시도하시는 것도 포함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과 일치한다고 믿어 질때, 우리는 그런 기도를 할 수 있다. 도날드 블로쉬는 “때때로 믿음의 기도에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또 마틴 루터는 “기도의 힘은 너무나 커서 하늘과 땅을 모두 이겼다.”고 했다.
우리의 저항의 무기를 보면, 우리가 권력과 효율과 통제에 기초한 세상과 얼마나 무관한가를 분며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진리를 말하며, 원수들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불의와 협력하기를 거부한다. 놀라운 것은, 이무기들은 사탄의 요새를 무너트리며 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만큼 강력한 무기라는 것이다.
사회적 성격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기도와 말로써, 사람들을 우리에 묶어 둘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그들을 지금 현재의 스승이신 예수께로 인도해서 그들이 더 이상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믿음이라도, 복받는 것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사람이나 물건에 달려 있다는 믿음은 그만큼 거짓된 믿음이다.
전세계를 가슴에 품고
그러므로 우리는 개개인을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열방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하며, 교회의 갱신을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 위에, 이 온 땅 위에 임하도록 기도해야 하고 힘써 일해야 한다. 그 다음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상의 죄악들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조국이 어떤 나라든지 간에 우리 나라의 죄악부터 회개하는 것이 더 좋다. 하나님 앞에서 흠 없는 나라가 없으므로 우리는 조국의 대표자가 되어 죄에 대해서 회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하든지 간에, 공동체 내에서 우리가 기도한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도는 종종 개인적인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결코 예배하고 기도하는 친교의 실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기도 생활을 지탱할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지원과 세심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자칫 기도는 무익한 것이라고 포기하든지, 아니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통찰력 있는 생활이 없다면 우리의 기도는 금방 체면치레와 자기 정당화를 위한 독백이 되고 말 것이다.
최고의 법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만이 하나님꼐서 만들어 주신 공동체를 지탱할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소위 본 회퍼가 ‘꿈속의 소원’이라고 불렀던 것을 그 관계 위에 부과하는 셈이 되고 그것은 결국 관계를 파괴하고 만다. 인간 스스로의 사랑은 그 자체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아가페는 하나님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 인간의 사랑은 보답을 기대하고, 보답을 요구하며 시행된다.
반면에 아가페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다, 그래서 본 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사랑이 순수한 영적 사랑을 만나게 되면 개인적인 증오로 변하고 만다. 그것은 진정한 영적 사랑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사랑의 관계가 없이 이웃을 사랑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만다.
우리는 이웃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야 하며, 이웃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을 망각하는 것은 하나님도 곧 망각하는 서이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그렇지 않게 보이려고 애쓴다 해도 우리의 섬김은 언제나 일부러 공손함 체하는 교만함으로 물들고 만다
기도야말로 우리의 사랑이 수직적으로, 그리고 수평적으로 자유롭게 흐르도록 해준다. 기도할 때 우리는 불가항력적으로 우릴 이웃에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웃을 사랑하렬고 할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우리의 전적 무능력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은 불가피하게 우리를 하나님께로 향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생명력을 부여한는 끊임없는 그 사랑의 교재 속에 들어가게 된다.
참되고 온전한 기도는 ‘사랑’ 그것뿐
나는 성 어거스틴의 “참되고 완전한 기도는 사랑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말로 이 책을 시작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내면으로 향하게 해서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모습으로 빚으며 이루어 가는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심을 보았고, 그 다음 우리는 위로 초대를 받아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며, 하나님꼐 귀기울이는 친밀함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밖으로 부름을 받아 병자를 치유하며, 상처받은 자와 고통을 나누고, 세상을 위해 중보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