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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 월에....
寶海/ 유 희 민
(제1장)
* 몽유도원도의 실체 *
* 몽유도원도의 실체 *
노태우(盧泰愚), 대구 달성(達城) 출생. 1955년 육군사관학교, 1968년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였으며, 1974년 준장으로 진급하여 공수특전여단장과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등을 역임하였다. 1979년 ‘12·12사태’에 가담하여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민주정치세력 진압 등 신군부세력의 정권획득을 위한
일련의 과정에 참여하였다.
1980년 중장으로 진급,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81년 대장으로 예편한 후 외교안보담당 정무제2장관, 1982년 체육부장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 1983년 서울올림픽대회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정의당(민정당) 전국구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정당 대표위원에 임명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1987년 6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6·29선언’을 발표, 정국(政局)을 대화합의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8월 민정당의 제2대 총재, 12월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988년 제6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는 화려한 그의 친인척의 인맥과 그리고 육사 동기생인 전두환 대통령의 영향력 행사,
그리고 소박하게 사는 순박한 사람들의 ‘보통사람’의 기치를 내 걸고 서민 정치를 약속 했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야합의에 의하여 대통령 직선제, 대통령 5년 단임제, 국정감사권 부활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제9차 헌법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10월 27일 개헌안이
국민투표로써 확정됨으로써 제6공화국의 법통을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15년 만에 실시된 대통령 직선제 선거에서 여권의 노태우가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야권의 3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정국은 참담하기 까지 했다.
어쩌면 역사의 흐름은 아직도 민주화를 위해 더 많은 투쟁과 마무리 작업이 필요 했는지 몰랐다.
투표 결과는 2위가 김영삼, 그리고 3위가 김대중으로 나왔고, 김영삼과 김대중의 표를 합하면
노태우 후보의 표를 훨씬 능가하는 표가 나왔다.
물론 단일화로 나왔을 경우 그렇게 많은 표가 나온다고 할 수는 없었겠지만
필승의 국면 이였음에는 틀림없었던 것이다. 보수 언론은 또다시 신정권의 탄생을 축하 해 주었고,
민주화를 열망 하는 신, 구 지식인들은 또 한 번 좌절을 맛보며
또 다른 5년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하게 되었다.
선거의 막바지에 들어가면서 충무팀의 일정은 회사에 보고조차 하지 못하고
자체 운영해야 할 만큼 바쁘게 돌아갔다. 경호를 맡았던 실무자들 이외에
사무실 직원이 직접 경호팀과 함께 하면서 회사에 모든 걸 보고 해야 할 만큼
쌍식이 형님까지 바쁘게 현장을 움직여야 했다. 서울을 출발한 선거유세단은
부산을 기점으로 순차적으로 유세를 거듭 하며 서울로 돌아오기는 길고 바쁜 선거 일정을
여러 차례 수행해야 하곤 했었다.
그런 바쁜 일정도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발표가 진행 되는 한밤에
김영삼씨를 자택에 모셔다 주는 걸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 했다.
김영삼씨가 대통령에 당선 되지 못한 서운함이 모든 충무팀에게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그를 수행 했던 그 업무 자체에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 했고,
성공적인 경호업무와 무사고로 선거를 끝 마쳤다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었다.
대부분의 전라도 태생의 직원들 이였지만 그들은 진정으로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지 못함을
못내 아쉬워했었다. 선거가 끝나던 날 나는 쌍식이 형님과 김 대석 부장을 제외한
경호팀의 모든 현장 직원을 이틀 동안을 쉬게 했다.
“걍 한 일주일 푸-욱 쉬게 해야 쓰는거 아닌가 모르겄다.
뭔 소리냐 하믄 그냥 숙소에 있을게 아니라 이참에 즈그 집에 가서
식구들 얼굴도 좀 보고 오라고 그랬으믄 좋겄어.”
점심시간이 다 돼서 사무실에 김대석 부장과 함께 들어온 쌍식이 형님의 첫마디 이었다.
나는 자리에 일어나서 정중히 그들을 맞이했다.
“이틀 동안만 쉬게 하는 건, 혹시 어떤 지시가 있을지 몰라서 그랬습니다.
봐서 아닌게 아니라 휴가를 보내줘야 할 것 같기도 하네요.”
“나는 괜찮고, 대가리하고 아그들은 좀 쉬게 풀어 줘야 할 것 같다.
선거가 끝나븐께 멕아리가 탁- 풀려븐다.”
“형님도, 그리고 김 부장도 수고가 많았습니다.”
“아야 우상아이, 밥 때도 되고 했응께.... 어디 가서 맛난거나 좀 사주라이.
내가 평생 먹을 김밥을 이참에 다 묵어 븐거 같다.
대라기 니는 뭐가 묵고 잡냐? 싸게 이야기 해 봐라.”
쌍식이 형님은 옆에 말없이 앉아 있는 김 부장에게 물었다.
“아따 성님, 나는 어디 가가꼬, 돼지 수육이나 한사라 했으믄 쓰겄소. 목구녕 때좀 벳기게.”
“니도 그라냐? 말도 안하고 돌아 뎅기는디도 목구녕이 팍팍 한것이 뭔 폐병 걸린놈 멩키로
가래가 낀것 같다. 서울이 공기가 안좋기는 안좋은 모양이여.
어짤때 새복에 나오믄 하늘이 뿌- 현것이 그것이 안개가 아니고 전부 매연 인것 같드만...”
“성님. 나는 이 복잡한 서울에 사는 놈들은 좀 미친놈들 같소.
씨-벌놈들이 뭔 떼돈 번다고 이라고 복잡 한데서 살라고 지랄들 하는가 모르겄소.”
“그랑께이..... 그래도 여그서 살아야 ‘특별시민’이 안 되브냐.
촌에 사는 사람들을 서울사람들은 전부 싸그리 합쳐서 걍 ‘지방것들’ 이래블드라.
촌에서 왔다 그라믄 아랫것들 취급 해븐께.....”
김 부장과 쌍식이 형님의 대화는 경호하는 기간 중에 시달리며 받았던
스트레스를 그들만의 쉬운 표현으로 말했다고 나는 생각 했다.
두 사람이 특별히 서울사람을 미워하거나 또는 서울사람들이 특별히
그들에게 박절하게 하지는 않았는데도 그들은 바쁘게 사는 서울사람들의 일상을 그렇게 표현했다.
그리고 서울사람들이 특별히 생활에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 이였다.
“형님 그러면 개고기 드시겠어요? 영등포에 잘하는 곳을 알고 있는데.”
그 말을 받아서 김 부장이 한마디 했다.
“그것 묵고 힘쓸데도 없는디..... 양기만 바짝 돋가 놔가꼬 우짜까이.....
안그래도 요새 아랫도리가 묵직한디..... 지금 밑에가 요구르트가 이빠이 차가꼬 죽겄소.
내 똘똘이 까정 책임을 질라믄 그리 가십시다.”
“싸가지 없는 새끼 말하는 꼬라지하고는..... 새끼야 그것은 니가 알아서 해결 해야제....
그라고 사장님 한티 그렇게 어려운걸 부탁 하믄 그것이 우물가에서 숭늉 찿기제......
새끼야 과목 선택을 잘해야제......
영어, 수학만 공부한 사람한티 노가다 철골 낑구는 방법을 갈켜 주라 그라믄
그 소리가 뭔소리인지 알겄냐?”
“아따 성님도..... 동네 똥강아지도 6개월에 한번은 할 것이요.
우리가 그래도 만물의 영장인디 그것을 암께나 방치 하믄 쓰겄소? 조상이 욕하요.”
“음마? 저것이 잘 서지도 않는 지 똘똘이 가꼬 뭔 조상 까지 들먹이고 지랄이데?
조상 좋아 하고 자빠졌네.”
“ㅎㅎㅎ 해본 소리요. 허고 잡아서 해본 소리랑께....
성님은 항상 농담을 진담 같이 받아들일라 그라는 성깔이 있습디다이 ㅎㅎㅎ”
옆에서 웃으며 듣고 있던 내가 한마디 했다.
“형님. 직원들 고생 하고 했으니까....
내일 망년회를 겸해서 크게 잔치 한번 열까요?
김 부장님 소원도 들어 주고.... 그리고 봐서 일주일 정도 휴가를 보내죠.”
“음마? 저새끼 똘똘이 목욕 시키는건 급할 것도 없어.
낼모레 목포 내려 가믄 즈그 마누라 냄비부터 닦아야 헐 놈이 뭔 김 부장 소원? 냅 둬브러.”
“그래도 직원들이 있잖아요. 어차피 망년회도 해야 할것 같고...”
쌍식이 형님이 필요 없다고 말을 잘랐지만 김 부장 역시 지지 않았다.
“아따 성님 왜 그래쌌소? 아 냄비믄 다 같은 냄비 인줄 아요?
행남자기에서 나온 범랑세트도 있고, 다 찌그러진 양은냄비도 있고
그란디 나라고 맨날 라면 끼려 먹는 양푼에 밥 말아 먹으라 그 소리요? ....
성님은 밥만 먹고 사요? 간간이 괴기도 먹고, 심심하믄 분식도 한번씩 하고 그래야제... ㅎㅎㅎㅎ”
“작것 지랄허네..... 아따 우상아이.....
저것 땜시 낼 망년회 해야 할랑 갑다.
일단 개고기 한다리 뜯음서 이야기 하자이.”
말싸움에서는 김 부장이 이긴듯 싶었다.
못이기는 척 쌍식이 형님이 양보를 했고, 결국 망년회를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로 돌았다.
나는 비서에게 영등포에 있는 영양탕집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뒷다리 하나와 갈비 한 짝을 예약하게 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역시 운전은 김 부장이 했다.
평소에 그렇듯 김 부장은 여느 영업용 택시 기사처럼 시원스럽게 차를 몰았다.
그는 경호 하던 습관이 몸에 익숙해져 있었던지 나보다 앞서 걸어갔고
그리고 차의 뒷문을 열어 주는 친절과 그리고 쌍식이 형님을 운전석 쪽으로 앉게 했다.
차 안에서도 그들의 말다툼은 계속 되었다. 그것은 김 부장의 말 때문 이였다.
“성님... 낼모레 고향 갈 때 이 차좀 끌고 내려 가믄 안되까라?”
“성가시게 뭐할라고야?”
“걍 폼이제. 가서 가오도 잡고, 폼좀 잡을라고 그라요.
씨벌놈들! 옛날의 김 대석이가 아니란걸 보여 줘블라고 그라요.”
“아 염병 하고 있네. 새끼야 이것이 회사차여 니 맘데로 쓰고 싶다고 쓰는 차가 아니랑께?
그라고 기차 타고 휑- 하니 편하게 가믄 되제 뭐할라고 성가시게 이걸 끌고 가야.
그라고 가서 폼 잡으믄 누가 니를 알아주기나 하냐?”
“그랑께 지금 이야기 허는거 아니요... 성님 끗발로 이야기좀 해 주쇼-.
그라고 어차피 내가 가믄 성님이랑 같이 갈건디... 그라고 내가 밟아블믄....
기차 보다 더 빠를껀디? 맘 묵고 밟아블믄 3시간 30분이믄 끊어블 자신있소......”
“대가리..... 니.... 운전 하다가 차 세워 놓고 내려서 얻어 터져 본적 있냐?”
“알았소 알았어..... 뭐 그란다고 이 나이 쳐 묵은놈을 또 쎄려블라 그라요....
인자 성님도 나를 대접 좀 해 주쇼.”
“새끼야....
대접을 받을 라믄 대접 받게 행동을 해야제.
니가 나이를 똥구멍으로 쳐 묵어 논께....
하는 소리제.”
두 사람이 툭탁 거리는걸 내가 중재를 했다.
“형님. 두 사람이 편하게 다녀오세요. 회사에 차 박아둘 필요는 없습니다.
또 목포 가시면 움직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하니까.... 부장님 말대로 하세요.”
그 말을 받아서 쌍식이 형님이 웃으면서 대답 했다.
“하여간.... 대가리 이 새끼가 싸가지가 없는 새끼여.
나하고 둘이 있을 때는 생전 그런 이야기도 안하드만....
이 새끼가 우상이 니가 있응께 잔머리 쓰고 안 있냐.
새끼가 서울 올라 와가꼬 갈수록 서울사람들 닮아감서 느글느글 해 져브렀다.”
“ㅎㅎㅎ 성님..... 그것이 아니고.... 사실은 이차를 몇 번 몰아 본께....
차가 죽입디다.
그라고 고향에 꼬박꼬박 월급을 보내 주고 그랑께 좆에 털 나고 첨으로 마누라 한티 칭찬도 듣고
그란디..... 차까지 끌고 가믄 마누라가 좀 좋아 하겄소?
얼굴 좀 세워 주쇼.
이참에 이 차에다 마누라 하고 새끼들 태워가꼬 양분식 집에 가가꼬 쌈빡하게
고기 한번 썰어 블라고 그라요.
아직 한번도 올케 고기에 칼질 한번 못해 봤는디.....”
“씨벌넘이 말이나 못하믄......”
“아 그라고 성님도 필요 하믄 내가 태워다 주믄 되고, 아 두루두루 안 좋겄소......”
“개새끼야.... 그렇게 느 마누라 생각 하는놈이,
그래 아까는 어짠다고? 냄비믄 다 같은 냄비냐고?
행남자기 범랑세트는 어디 가블고 갑자기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밥 말아 쳐 묵을라고 그라냐?”
“그것 하고 그것 하고는 다른 문제제....ㅎㅎㅎㅎ
사람이 그래도 밥이 주식인디..... 맛있다고 만날 괴기만 쳐 묵겄소?”
“썩을놈... 갇다 붙이기는.... 사장님이 허락 했응께 가꼬 가자. 됐냐?”
“내가 이래서 성님을 평생 모시고 안사요 ㅎㅎㅎㅎ”
“입 찢어 지겄다. 내가 느그 마누라 이야기만 안했어도 멕아지 끌고 기차로 내려 가겄는디....
새끼가 묘하게 사람 심리를 건드려브네.”
두 사람은 선후배사이 보다는 평생을 같이한 친구처럼 보였다.
쌍식이 형님은 적당히 양보해야 하는 건 양보를 해 주었고,
김 부장 역시 무리 하다 싶은 부탁은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큰일을 치루고 난 이후의 배려도 한몫 한 것 같았다.
그 만큼 이번에 김 부장의 활약도 적지 않았고 쌍식이 형님도 그런걸 인정 해 주는 것 같았다.
영등포 까지는 두 사람의 입담에 시간 가는지 모르고 금방 온 것 같았다.
80년대의 보신탕 문화는 많이 변질 되어 가고 있었다.
80년 5월 광주사태의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기 하고 국민의 관심을 세계로 돌리기 위해
올림픽 유치에 전력을 기울였고 결국 유치에 성공 하였으나 몇몇 서구 국가에서
보신탕을 들먹이기 시작 했다.
올림픽 위원회와 브리지트 바르도 등 일부 외국 인사들은 보신탕을 금지 하지 않으면
88올림픽을 보이콧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반만년 이상 즐겨 먹던 민족음식이 위기에 쳐해 졌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이들의 압력에 못 이겨 전국에 보신탕 판매를 금지시켰고,
대부분의 보신탕집들은 문을 닫거나 업종을 바꿀 수밖에 없었지만,
평생을 장사 해온 상인들과 몰지각한 서구 여론과 전두환 정권의 탄압을 무릅쓰고
끝까지 음식 주권을 지킨 집들이 있었다.
간판을 제대로 달수 없어서 생긴 신종 업체의 이름이 ‘보신탕집’ 대신에
보양탕, 영양탕, 사철탕 따위로 이름을 바꿨고 또 어떤집은 아예 간판을 없애고
‘장사 계속 합니다’ 로 입간판만을 달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보신탕집은 식도락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볐다.
우리는 예약 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종업원이 안내한 작은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아따 성님.... 뭔 한겨울에 이라고 사람이 많으까? 여름도 아닌디....”
“요새 보신탕집 허가도 안 내준다 안 그라데? 나랏님이 못하게 하믄 못 하는것이여.
보신탕집이 많이 없어 졌다 그라드만.... 그랑께 식당이 많이 없어져 가꼬 한쪽으로 몰리는갑다.”
“그라믄 보신탕집이 몇집 없은께 이집이 장사가 잘된다 그말 이요?”
“그란다고 봐야제. 그란디 대가리 니가 걱정할 일은 아닌께 신경 접어브러라.”
“촌에 개 키우는 사람들만 좆 돼야 브렀네이.....”
“그래도 오기로 하는 사람은 다 하드라.....
그라고 막말로 법은 그래도 짭새들이 대 놓고 잡아 가기는 좀 글코 한께..... 대충 봐 주는갑드라.”
그랬다.
전두환 시절에 실제로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보신탕집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저항운동에도 자금이 필요 했고 그런 자금을 만드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시작했던 그룹이 있었다.
당시 재야에서 문화운동을 주도한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사람들이 그들이다.
‘할일은 많고 자금은 없던’ 이들은 어느 날 화곡동의 유명한 보신탕집에 모여
소주 한잔을 걸치게 되었는데, 이야기 끝에 그 집의 하루 매상을 어림해보다가
민주화운동 자금조달을 위해 직접 보신탕집을 열어보자고 합의했다.
당시 민문협의 대표이던 전 YTN 사장 김종철 씨가 그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국적 생각과 전두환 정권이 법으로 금지하기까지 했던
음식문화에 저항함으로 해서 보신탕집 자체를 일종의 저항운동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 사정을 아는 사람들로 인해 당산역 부근에 문을 열었다던
그 보신탕집은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첫댓글 오늘하루 시작은 즐겁고 해피하게 보내시고 건강하세요.... 기분좋은 날 하늘은 맑고 천명합니다.....
시간에 밀려 아껴두었던 글 이제 보게됩니다...거듭 내리는 비님으로 기온이 떨어져 따뜻함이 좋아졌습니다..건강하십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