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문화관 관람을 끝내고 마지막 실에 고정 위치에 서면 황룡사 목탑 전경이 화면에 나오면서 합성 사진을 만들어 준다. 사진을 찍는 모습을 연출했더니 바로 표현되면서 내용물은 나의 메일로 전송도 가능하게 된다. 그 내용을 주혁이에게 알려 주었더니 주혁이도 아래와 같은 사진이 합성이 되어 카메라로 잡아 두었다. 3이라는 숫자표시는 화상이 남아 있는 시간을 표시한 것이다.
문화관으로 걸어 들어 오는 길, 소나무와 공간, 여백의 아름다움이 묻어 나는 길이라 한참을 서서 빛의 방향을 감지해 가며 살펴 보았다. 직선은 빠름과 강함을 연출한다면 곡선은 여백과 한 묶음이 된다. 초가가 지닌 지붕선이 자연의 품에 쏘옥 안기는 형 세처럼 소나무의 높고 낮음과 서로의 기울기가 연출하는 뚱한 모습만으로도 여유로움을 주기 충분한데 길을 곡선을 틀어 자유로운 여백이 마음 행복을 풍요롭게 부추긴다.
주혁이와 딸을 끝으로 문화관 퇴실이 완료되었다.
산세가 부드럽다. 그래서 그런걸까? 경주는 어디를 가도 마음이 통일되는 기운을 느끼게 된다. 걷던 길을 잠시 멈추고 온 길을 접어 들여다 보니 상당한 거리다.
아늑해 보이지만 발의 기운은 아직도 옹골차다. 경주 최부자의 명성이 드리워진 교동(교촌)으로 가기 위하여 차를 다시 몰았다.
교동에 도착하여 차는 안전한 곳에 주차를 하고
골목으로 접어 들었다. 한복을 빌려 입은 내방객들이 골목마다 약간씩 보인다. 집집마다 무엇인가 한 가지씩 상행위를 하고 있었다. 난전은 아니고 가옥형으로 하고 있는 중이다. 고추장, 된장, 간장으로 장 집을 운영하거나 커피, 떡, 아이스크림, 커페, 한복대여 등등 하고 있는 중이다.
주혁이가 궁사가 되고 싶다하여 활을 빌렸다 10 발에 천원이지만 사람이 없으니 하고 싶은대로 하라는 주인장의 허락이 떨어졌다. 주혁이가 궁사가 되어 활에 살을 걸고 살을 당겨 시위에서 놓치만 늘 불발이다. 파지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이다 다가 가 활을 잡는 방법과 살을 놓는 시위점을 알려 주었더니 제대로 손살같이 살이 시위를 떠난다. 다음은 착점에서 붙지 않는 일이 자꾸 발생한다. 접지력이 약해진 고무사발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과녘을 중심을 피해 쏘면서 해결되었다.
말뚝박기에 올라 타더니 사진을 찍어달라 하여 속사로 한 장을 찍어 주었다.
최부자집 일부가옥은 수리중이었다. 잠시 툇마루에 앉아 쉬며 최부자의 선행에 대하여 되새겨 보았다.
게시해 놓은 설명서를 읽으며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면서도 다시 또 감동의 기쁨을 얻게 되었다.
명부(名富)의 격조(格調)와 품격(品格)을 갖춘 慶州 崔富者 라는 헤드라인을 읽으며 오로지 名家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었다. 그 아래에 적어 놓은 글은 부를 쌓은 사람들의 시금석이었다.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삶의 본 뜻을 실천하고 살아 온 경주 최부자의 고택을 방문한 첫 느낌은 한옥의 거대함이었지만 울타리를 넘어 자란 감나무, 결실의 상징, 즉 풍요의 상징으로 다가 오는 주황색 감, 지금껏 남아 있다면 하늘을 날아 다니는 까치밥이다. 까치에게도 스스럼 없이 내놓는 나눔이 바로 선조들의 지혜였다. 누구나 인정을 지녀야 사람대접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더 가까이 살면서도 비정할 만큼 이웃에게 관심도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최부자댁 가훈인 여섯가지 훈을 읽으면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높은 벼슬을 탐하지 마라! 만석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주변 100리 안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더 이상 대꾸할 말이 없었다. 완벽한 처신이었다. 재화가 인품을 더욱 키우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인데..... 최부자는 무엇이 달라도 달랐다.
야간 투어는 최부자 집 앞에서 시작하여
요석공주는 태종 무열왕과 보희부인의 딸로 김흠운의 아내였으나 옥천 전투에서 사망하자 홀몸이 되었다가 원효대사의 아내가 되어 설총을 낳았다. 최부자 집 터에 요석궁이 있던 곳이라 전해 진다.
월정교는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경덕왕 19년(760년)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배모양의 교각만 전해지고
있었으나 오랜 고증으로 누교를 복원하였다.
발굴조사결과 월정교 길이가 60.57cm이며 교각사이에서 불탄 목재와
기와가 출토되어 교각 위쪽이 누각과 연결된 누교였을 것으로 확인되었다. 동쪽 약 700m 상류에 센 물살을 견딜 수 있도록 배모양의 교각뿐만 아니라 다리의 규모와 축조방법, 석재의 색, 재질까지도 유사한 춘향교가 위치해 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얽힌 유교의 흔적도 월정교 19m 하류에
보존되어 있다. 월정교는 신라의 문화적 수준과 교량의 축조기술, 의장, 교통로 등 신라왕경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통일신라의
문화적 품격을 직접 느낄 수 있는 남천위에 세워진 누각다리 월정교는 주야로 단청누교의 아름다움을 과시하고 있다.
월정교는 형산강 팔경으로 선정되었고 월정교와 춘양교지는 국가지정문화재 제457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계림을 보고 나무를 관찰한 후 최부자의 사연이 깃든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보았다. 일제 강점기 민족의 혼이 담긴 계림을 수탈하려고 하자 최부자가 나섰다. 나의 집 뒷산의 나무를 베어가시오, 그 당시 기사회생한 계림, 그 부자님의 덕분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제4대 탈해왕(脫解王) 9년 3월 밤, 왕이 금성의 서쪽 시림 가운데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살펴보게 했다. 신하가 가보니 금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신하가 돌아와 이 사실을 알리자 왕은 날이 밝는 대로 그 궤짝을 가져오게 해 열어보니 속에 총명하게 생긴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다. 왕은 이를 기뻐하며 아이 이름을 알지라 부르고, 금궤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金氏)라고 했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으로 바꾸고, 나라 이름도 계림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계림 앞을 지나 계림길을 따라 좌측으로 꺽어나가자 저 멀리 첨성대가 보였다.
첨성대의 모양과 구조는 천문대임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상원하방(上元下方)의 우아한 형상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元地方)설을 상징하고, 첨성대를 만든 365개 안팎의 돌은 1년의 일수를 나타낸다.
27단의 몸통은 선덕여왕이 27대 왕인 것과 관계가 있고, 꼭대기 우물 정(井)자 모양의 돌을 합치면 29단과 30단이 되는데 이는 음력 한 달의 날수와 일치한다.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상단 12단과 하단 12단으로 나뉘는데 이는 각각 1년 12달, 합치면 24절기에 대응한다.
고대 문헌기록도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고, ‘서운관지’와 ‘문헌비고’에도 첨성대가 천문대의 역할을 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각양각색으로 변하는 첨성대를 뒤로하고 해자발굴로 가림막을 해 놓은 사이를 걸어 나갔다. 시간이 갈수록 기온은 상당히 떨어져 갔다. 주혁이가 제일 추워한다.
걷는 길 옆로로 신라 유물을 디자인하여 반투명 빛으로 안내등을 세워 놓아 걷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간접조명등 앞으로 함부로 자란 풀잎들이 야간등의 정취를 불러 일으켜 사진으로 담아 두었다.
해자 발굴을 위하여 울타리를 쳐놓고 상당한 범위를 정하여 해자를 발굴 중이었다. 신라의 왕성인 경주 월성(月城)의 경우, 월성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이 남쪽의 자연 해자 역할을 하고 북편과 동편, 서편은 불규칙한 웅덩이를 파서 해자를 만들었다. 통일 이후에는 사면에 돌을 깔아서 호안석축을 마련하고 연못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때부터는 해자의 고유한 기능인 방어 이외에 관상의 기능이 추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해자발굴지를 지나 길을 건너 안압지에 도착하였다.
기온은 더욱 더 떨어진 상태다. 추워하는 주혁이에게 할머니는 머물러를 풀어 머리에 감싸 주었다. 11월 야경 걸음 여행은 아무래도 동절기 덧 옷을 입고 해야하는데... 이 점을 간과한 것이다. 덧 옷의 중요성을 놓친 것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은 왕건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며 신라의 사직을 통채로 넘겨준 곳이 바로 안압지다. 경순왕은 싸워보지도 않고 나라를 넘겨준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더 이상 병사와 백성들에게 피를 흘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신라 왕궁의 후원으로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조성되기 시작하여 674년(문무왕 14)에 완성되었다. 1975~86년의 발굴조사에 의해 유구가 밝혀졌는데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석축호안과 서쪽 호안변에서 5개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부정형의 석축호안은 서쪽 호안선만 직선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호안은 굴곡이 심한 곡면을 이루고 있다. 입수구는 동쪽과 서쪽의 호안이 만나는 곳에 설치되어 있고 출수구는 북쪽 호안에 있으며, 연못 안에는 3개의 섬이 있다.
연못의 바닥에서 신라 왕족과 귀족이 썼던 일상생활 유물인 목선·목상·장신구·주사위 등과 불교미술품인 불상, 광배, '조로 2년'(調露二年:680)이라는 명문이 씌어 있는 보상화문전 등 다수가 발굴되어 번성했던 통일신라시대의 문화를 보다 총체적으로 복원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안압지는 한국조경사에서 통일신라시대 원지의 원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거의 한파 수준으로 다가 오는 기온의 변화를 느끼며 차에 올라 탔다. 주혁이는 언제 추웠느냐 하는 식으로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 온 후 하루종일 걸은 일정을 정리한 후 샤워 후 일찍 잠을 청하였다.
피곤하지 않느냐 물었더니 괜찮다고 답을 한다. 내일 일정을 간략하게 알려준 후 먼저 방으로 들어간다고 알리고 방으로 가 노트북을 꺼내 사진을 정리한 후 소등하고 수면속으로 빠져 들었다. 내일은 석굴암, 감포사지 문무대왕릉 그리고 떠나기 전 황지단 거리 탐방이 있는 날이다. 오늘 충분하게 자 두어야 귀경 운전을 이겨낼 것이다.
마지막 날 아침
면도를 한 후 옷을 갈아 입고 리조트식 아침을 챙기기 위하여 숙소를 빠져나와 주혁이와 지름길을 이용하기로 하고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주혁이가 빠른 목소리로 할아버지 마스크 한다. 아차! 그렇지 발빠르게 엄마에게 달려 가 열쇠를 들고 왔다. 마스크를 찾아 쓰고 다시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이번 여행에서 주혁이는 철저하게 할아버지를 챙겨주었다. 주혁이가 이젠 할아버지의 든든한 후원군이 되어 가고 있었다. 몇년전 주혁이네 집을 방문할 일이 있어 갔다가 주혁이를 데리고 오랜세월 다니던 설렁탕 집을 함께 간적이 있었다. 이 아이가 먹을런지 하면서 주인양반에게 아이가 잘 먹을 수 있도록 준비를 부탁하였는데.... 아주 잘 먹는 것을 보고 안심한 적이 있었다. 이후 주혁이는 엄마를 모시고 가 자기가 저축해 놓은 용돈으로 엄마에게 설렁탕을 쏘았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었다. 그 이유를 묻자 너무 맛있게 먹어 엄마에게 선물해 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점점 속이 깊게 자라는 아이다. 할아버지 영향으로 국물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종종한다.
오늘 나온 음식은 사골 우거지국 단품이다. 바이러스 영향으로 부폐식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요즈음 식당환경이다.
오늘도 주혁이는 사골 우거지 국을 어른처럼 먹었다. 식사 후 리조트 안에 설치된 작은 동물원 토끼 사육장으로 가 어제 저녁을 먹으면서 챙겨 놓은 야채를 들고 가 토끼에게 먹이로 준 후 숙소로 가 모든 짐을 챙겨 나왔다. 우선 황리단으로 가 일을 챙긴 후 석굴암으로 출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