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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 리델 하트의 <전략론> 90~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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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사리우스를 신뢰하지 못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벨리사리우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소규모의 증원군만 그에게 보내준다. 결국 그런 유스티아니아누스 황제의 태도 때문에 벨리 사리우스는 이탈리아 탈환은 시도도 하지 못하고 요새들 사이로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몇 년을 허비하며 <치고 달리기>식 전역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충분한 병력을 기대하는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안 벨리사리우스는 548년 황제의 허락을 얻어 임무 수행을 포기하고 콘스탄티노플로 복귀해버렸다.
그로부터 4년 후, 이탈리아 포기 결정을 후회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새로운 원정을 결정했다. 벨리사리우스가 동로마에 대항하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그가 지휘권을 갖는 것이 못마땅했으므로 결국 벨리사리우스 대신 나르세스에게 지휘권을 부여했다. 나르세스는 오랫동안 전쟁에 대해 철저히 공부해왔고 벨리사리우스가 첫번째 이탈리아 전역에서 지대한 공을 세울 때에도 자신의 실제 역량을 입증했었다.
나르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이용했다. 첫번째로 그는 황제의 제안을 수락하는 대신 전투력이 우수하고 무장이 잘된 부대를 제공받았다. 그는 이 부대를 이끌고 아드리아해안을 돌아 북으로 이동했다. 이때 고트군은 수많은 강 하구를 지나 험난한 해안 도로를 따라 이동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바다를 통해 공격해 올 것이라고 판단하여, 결과적으로 나르세스의 침공을 도와준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르세스는 많은 수의 보트를 육상 이동부대와 병진, 이를 부교로 이용함으로써 적의 예상보다 빨리 전진하여 별 저항 없이 라베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르세스는 지체 없이 공격 루트를 가로막고 있던 요새들을 우회하여 남진했는데 이는 토틸라의 부대가 완전히 집결되기 전에 전투를 유도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토티랄는 아페니노 산맥의 주요 통로를 확보하고 있었으나 나르세스는 우회 도로를 따라 이동하여 타기나에에서 토틸라를 공격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전의 전역에서 언제나 적보다 적은 수의 병력으로 전투를 수행했어야 했으나 나르세스는 이미 고트군에 비해 우세한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공세를 통해 최대한 이점을 끌어낸 나르세스는 토틸라에 대해서는 전술적 방어를 구사했다. 고트군의 본능적인 <공격성>을 염두에 두고, 그들의 선제 공격을 유도하며 함정에 빠뜨릴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는 8백여 년 후, 크라시 전투에서 프랑스군 기병에 맞서 싸웠던 영국군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전술로, 기병 공격에 취약한 비잔틴 보병을 고트군이 얕보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는먼저 기병들을 말에서 내리게 한 다음 중앙에 대규모로 배치하여 이들이 휴대하고 있던 창을 보병 전투에 이용하는 한편, 적에게는 마치 창보병인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 대형의 양익에는 보병 궁수를 초승달 모양으로 충분히 전진 배치하여 중앙부에 대한 공격이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응사할 수 있도록 했고 이들 후방에는 대부분의 기병을 근거리에 배치했다. 좌익 전방에서 충분히 이격된 능선에는 고트군이 깊숙이 공격해왔을 경우 이들의 후방에 기습을 가할 수 있도록 정예 기병 부대를 배치했다.
이렇듯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함정은 그대로 성공했다. 고트 기병은 적 대형 중앙에 위치한 보병이 허약할 것으로 예상하고, 이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들은 진격하는 동안 측방에서 실시된 집중 사격에 의해 큰 손실을 입었고 말에서 내린 창기병의 견고한 방어 앞에 고착되었으며, 이들의 측방에서 접근한 궁수 부대에 의해 손실은 더욱 증대되었다. 한편 고트군 보병은 나르세스가 측방의 능선에 배치해놓은 기병 궁수 부대에게 후방을 공격당하는 것이 두려워 지원 공격을 주저하고 있었다. 무모한 공격을 지속하던 고트군 기병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이 때 나르세스는 이제까지 예비로 보유하고 있던 기병으로 결정적인 역습을 가했다. 여기서 고트군이 입은 손실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나르세스가 이후 이탈리아를 재정복해가는 동안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고트 정복이 적시에 완료됩으로써 나르세스는 고트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새로 습격한 프랑크에 비교적 자유롭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이번 공격에서 프랑크는 이전 공격 떄보다 깊숙이 밀고 내려와 캄파니아까지 이르렀다. 그 동안 나르세스는 고트 침공에서 얻은 경험으로 장거리 행군과 이질로 인해 적의 전투력이 감소할 때까지 전투를 회파함으로써 프랑크의 <자승자박>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프랑크는 553년 카실리눔에서 공격을 개시할 당시, 여진히 8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때 나르세스는 자신의 전형적인 전술에 딱 들어맞는 함정을 고안했다. 보병으로 이루어진 적군은 무게와 충격력으 이용, 종대를 이루어 공격했고 이들의 무기는 주로 단거리용으로 창과 던지는 도끼 그리고 검이었다.
카실리눔에서 나르세스는 중앙에 창보병과 보병 궁수를 배치했다. 프랑크의 공격으로 이들이 뒤로 물러나자 나르세스는 측익에 우치하고 있던 기병으로 프랑크군의 측방을 공격했다. 이 공격이 프랑크군을 정지시켰고 그들은 측방 공격에 대응하기 위하여 즉각 말머리를 바깥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프랑크군의 대형이 충격력으로 분쇄하기에는 너무나 견고하다는 것을 알았던 나르세스는 이들에게 접근하는 대신, 기병으로 하여금 적의 투부 사정거리 밖에서 활을 사용하도록 했다. 집중 사격을 받으면 피해를 감소시키기 위해 밀집 대형을 소산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프랑크군이 대형을 이탈, 후방으로 흩어지자 나르세스는 적의 중심을 공격할 기회를 포착했다. 이렇듯 시의 적절한 공격으로 적은 몰살당하시피 하였다.
첫댓글 나르세스도 범상치 않은 장수였군요
나르세스가 곶아였던걸로 아는데 사실인가요?
환관이었던 것이 맞습니다.
ㅎㅎ 그건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