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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카와가라샤부인 (上)
● 패도(覇道) 09-1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덴쇼(天正) 7년 (1579년)도 저물어가는 12월 25일. 어제 단바의 카메야마성에서 사카모토성으로 돌아온 미츠히데는 서원에서 피로를 풀고 있었다. 납빛(鉛色)의 비와호 위로 눈이 쉴 새 없이 내리고 있다. 오늘도 미츠히데의 곁에는 사촌인 야헤이지 미츠하루(弥平次光春)와 하츠노스케(初之助)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츠노스케는 야헤이지와 함께 미츠히데의 곁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때는 잡병으로 미츠히데의 말 고삐를 잡던 하츠노스케도 거듭된 무공 덕분에 지금은 번듯한 무사(武士)였다. 올해 7월, 미츠히데가 단바 미네야마성을 공격했을 때도 훌륭하게 무훈을 세웠다. 그때 미츠히데는 호소카와 후지타카, 타다오키와 함께 나지막한 산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었다. 적은 하타노 일족이었다. 미츠히데의 부하 밍부쇼유(民部少輔)가 선봉으로 나섰으나 무기력하게 베여 쓰러졌다.
누군가가 "무슨 짓이냐, 저 꼴이!" 하고 호통쳤다. 그때 재빠르게 뛰어 나간 젊은이가 있었다. 뛰어 나가는가 싶더니 젊은이는 적의 목을 베어 들고 미츠히데에게 왔다. 하츠노스케였다. 미츠히데는 자신도 모르게 지휘 부채로 무릎을 치며 하츠노스케를 칭찬했다. 미츠히데는 감장(感狀, 공적을 치하하는 글)에 "너의 공적은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로다"라고 적어 주었다.
그러나 하츠노스케는 마음이 교만해지는 일도 없이, 말고삐를 잡고 있던 시절과 변함없는 태도였다. 지금도 하츠노스케는 약간 근심 어린 눈빛으로 조용히 대기하고 서 있었다. 야헤이지 미츠하루는 어째서인지 이전보다 생기 있는 표정을 보이고 있다. "이봐, 야헤이지." 미츠히데는 조용히 야헤이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는 이 사카모토성으로 돌아오는 것이 괴로웠다네." "헤아리고 있습니다." 호탕한 성격의 야헤이지도 눈을 내리깔았다. "린은 필시 괴롭겠지." 야헤이지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가 이타미(伊丹)성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하고 아마가사키(尼ヶ崎)로 도망친 것은 9월이었다. 미츠히데는 마지막까지 무라시게가 노부나가와 화친하도록 중재했다.
노부나가 역시 무라시게의 반역 이후 1년 남짓, 노부나가답지 않게 느긋하게 무라시게의 동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무라시게는 다시 노부나가를 섬길 마음이 없었다. 무라시게에게 노부나가와에의 배반을 권했던 중신들이, 이제 와서 노부나가의 말을 믿고 아직 이타미에 남아 있던 무라시게의 처자식 30여 명을 인질로 노부나가에게 바치고 성을 넘겨주었다.
미츠히데의 배려로 아마가사키와 하나쿠마를 넘겨주면 아라키 일족의 목숨은 살려주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중신들은 이제 아마가사키를 넘겨주도록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라시게는 완강히 응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무라시게가 항복하기를 기다리던 노부나가가, 갑자기 미친 듯이 분노했다.
이 12월 12일, 노부나가는 이타미에서 온 인질 30여 명을 교토로 보내게 했다. 16일에는 그들을 벌거벗겨 수레에 묶은 뒤 교토 도심을 돌며 시위를 벌였고, 그 직후 로쿠조가와라에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참수했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울부짖거나 혹은 정신을 잃었으나, 사정없이 살해했다.
게다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흘 전인 13일에는 무라시게의 여인들 122명을 아마가사키에서 가까운 시치마츠에서 십자가형에 처형했다.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는 시치마츠(七松)는 여인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니, 더욱 가혹한 짓이 저질러졌다. 아직 어린 하녀들과 철부지 아이들 388명, 그리고 젊은 무사 124명을 네 채의 집에 밀어 넣고 불태워 죽인 것이다.
모여든 구경꾼들이 어떻게 될지 침을 삼키며 지켜보는 가운데, 노부나가 하급 부하들은 집 주변에 건초를 산더미처럼 쌓았다. "설마 불태워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저렇게 어린아이들도 많이 있는데…." "아니야, 아니야. 주상(노부나가)께서는 무서운 분이시라네." 이가 부딪칠 정도로 벌벌 떨며 지켜보던 군중은 소곤거렸다. 결국 그 건초에 불이 붙었다.
하얀 연기 속에서 붉은 불꽃이 이글거리며 올라온다. 그 불길이 집을 감싸고 타닥타닥 소리를 내기 시작할 무렵, 비명인지 짐승의 울부짖음인지 분간하기 힘든 소리가 네 채의 집에서 터져 나왔다. 이렇게 해서 512명의 목숨은 재가 되었다. 이 잔혹한 형벌은 교토와 오사카는 물론, 순식간에 일본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미츠히데 역시 이 소문을 카메야마성에서 들었다.
그때 미츠히데는 '(그 악귀 같은 놈!)' 하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미츠히데가 중간에 서서 평화를 도모하고 있었던 만큼, 분노는 격렬했다. 지금도 그때의 분노가 미츠히데의 가슴속에 맴돌고 있었다. "린 마님도…." 말을 꺼내려던 하츠노스케는 말을 흐렸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 미츠히데의 고통에 응답할 말이 없었다.
"음, 아라키 도노가 린을 돌려보내 주지 않았더라면, 그 아이도 로쿠조가와라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거나 불태워 죽었겠지." "참으로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야헤이지도 말을 아꼈다. "아니, 목숨을 건진 린의 괴로움, 이것 또한 특별하다네. 못난 소리지만, 나는 린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주군, 가슴속이 얼마나 심란하실지 감히 헤아려 봅니다. … 그건 그렇고, 아라키 도노의 마음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아키로 도망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음." 야헤이지의 말에 미츠히데는 깊이 팔짱을 꼈다. "아라키 도노만 아마가사키를 넘겨주었더라면, 인질이 된 여인과 아이들이 저렇게까지 참혹한 일을 당하지 않고 끝났을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느냐, 하츠노스케."
"참으로 그렇습니다. 아라키 도노를 호걸이라 들었습니다만, 호걸이라는 것도 믿을 것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어설프게 천하무쌍의 장사라고 칭송받던 분이었던 만큼, 지독하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드는 법이지. 주군, 주군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옵니까?" 야헤이지의 질문에 미츠히데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 "글쎄다…"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인간이란 그렇게 간단히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하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아라키 도노는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라네. 이봐, 야헤이지, 하츠노스케. 만약 자네들이 아라키 도노의 입장이었다면 자네들은 어땠겠는가?" "…글쎄요, 그건…." "모르겠지. 어쨌든 아라키 도노는 근본이 단순한 사람일세. 설마 노부나가 도노가 저 정도의 대학살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어쨌든 죄 없는 여인과 아이들을 십자가에 매달거나 불태워 죽이는 잔혹함은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야헤이지는 힐끗 미츠히데를 보았다.
'보통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서 평소의 미츠히데답지 않은 가시를 느꼈기 때문이다. 야헤이지는 영리한 사내다. 그리고 사촌 형 미츠히데의 무장으로서의 지모, 교양, 모든 것에 마음으로 복종하고 있다. 그렇기에 야헤이지는 미츠히데의 마음의 움직임에 민감했다. "정말이지, 우후(우대신, 노부나가) 도노의 참혹함은 이상한 정도를 넘어 미친 것 같습니다."
"야헤이지, 그리 큰 소리로 할 말은 아니다." 미츠히데가 나무랐다. "큰 소리로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만, 천하의 누구라도 섬뜩하여 떨었을 것은 확실합니다. 듣고 보니 아라키 도노도 아키로 도망치는 것 외에는 어쩔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라키 도노도 안타까운 분이지. 나카가와의 부하들이 혼간지에 쌀 따위를 파는 바람에 엉뚱한 와중에 휘말려 들어갔으니."
"하지만 주군, 이 모든 것이 노부나가 도노께서 너무나 냉혹하시어 사죄하기조차 어려웠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노부나가 도노는 부하들에게 너무 엄격하십니다. 아니, 너무나 하찮게 대하십니다." "음." 미츠히데는 야헤이지도 자신과 같은 생각이라고 느꼈다. "백모님 일만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일, 어머님 일은 이제 말하지 말자꾸나, 야헤이지." "어째서입니까? 야헤이지는 그 일만큼은 오다 도노를 원망스럽게 생각합니다."
"말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말한다고 어머님이 살아 돌아오시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가만히 있던 하츠노스케가 "참으로 다정한 분이셨는데…" 하고 깊이 애통해하며 말했다. '(그랬었지. 그만큼 다정한 사람은 없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노부나가를 향한 분노를 미츠히데는 마음 깊은 곳에 누르면서, 지금은 세상을 떠난 장모 토요를 떠올렸다. 장모 토요가 살해된 지 아직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올해 6월, 미츠히데는 노부나가에게 명받았던 탄바丹波 평정에 마음을 쏟고 있었다. 하타노(波多野)일족이 완강하게 반항하고 있었다. 그 일족과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가 서로 통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히카미성(氷上城)의 하타노 무네나가(波多野宗長), 무네사다(宗貞) 부자에 대해서는 히데요시의 동생인 하시바 히데나가(羽柴秀長)에게 도움을 받아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미츠히데가 전적으로 책임을 맡고 있는 야카미성(八上城)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았다. 미츠히데는 내심 초조해하고 있었다. 야카미성주 하타노 히데하루(波多野秀治)는 4년 전 미츠히데의 편에 서서 탄바 평정에 함께 힘써 준 사내였다. 하지만 본래 탄바의 성주였던 하타노 히데하르는 그 다음 해, 즉 덴쇼 5년에 갑작스럽게 미츠히데에게 반역해 왔다.
이 반역을 맞아 미츠히데는 고전했다. 인지상정으로 탄바의 민심도 자칫하면 같은 국적인 하타노에게 기울기 쉬웠다. 거취가 불분명한 자는 적으로 돌려도 싸우기 어렵고, 편으로 만들어도 쓰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미츠히데는 이번에 결단을 내리고 군량공격(고립시켜 굶겨 죽이기)을 택했으나, 군량공격은 세월이 걸리는 법이다.
싸움이 길어지면 당연히 아군의 사기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장마철이라 진중은 더욱 음울해지고 게다가 늘어졌다. 다들 얼굴빛도 나빠졌고 누구나 전쟁에 질려 있었다. 그것은 미츠히데가 가장 싫어하는 군사의 상태였다. 그렇기에 미츠히데는 더욱 초조했던 것이다.
하기사 적인 야카미성 안은 그 이상으로 비참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식량은 진작에 바닥났고, 풀과 나무의 잎도 다 갉아먹어 그야말로 굶어 죽기 직전의 상태였으며, 중신들도 판단력과 결단력을 잃고 그중에는 발광하는 자도 있었다. 미츠히데는 이 기회를 타 하타노 히데하루 등 삼형제를 항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항복 후 노부나가의 처분을 두려워하여 성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무리도 아니라고 미츠히데는 생각했다. 미츠히데로서는 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금까지 저항한 하타노 형제를, 적이지만 장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 항복한다면 든든한 우군이 될 것이고, 탄바의 민심을 달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 틀림없다. 다시 밀사를 파견하자, "인질을 바친다면 노부나가와 화친해도 좋다"라는 답장이 왔다.
여기서 미츠히데는 처음으로 자신의 가족을 인질로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물론 이 단계에서는 상대방을 공격해 멸망시킬 수 있다. 인질을 내주는 것은 큰 양보다. 그러나 미츠히데는 훗날을 위해서라도 그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과연 인질로 누구를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은 큰 문제였다.
언제 목숨을 빼앗길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다. 도저히 아내인 히로코를 인질로 내보낼 엄두는 나지 않았다. 히로코를 아내로서 사랑하고 자랑스럽게도 생각하지만, 천연두 자국을 적의 눈에 노출시키는 것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무라시게의 모반으로 돌아온 린 때문에 히로코는 마음고생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들 쥬고로는 열 살이라 인질로 보내기엔 너무 어렸다. 그렇다고 방금 돌아온 린을 인질로 보낼 수는 없다. 장모 토요는 이제 일흔에 가깝다. 이 역시 인질로 내보내기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로 해야 하나.)' 미츠히데는 망설였다. 한때는 맏아들인 쥬고로로 하려고 했고, 또 아내 히로코로 하려고도 했다.
망설이고 망설이던 중, 미츠히데는 문득 타마코가 아직 열한둘이었을 무렵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누군가를 인질로 내보내야 할 때, 누구를 인질로 삼으실 건가요?" 타마코는 아이다운 솔직함으로 물었다. 순간 덜컥했던 것을 미츠히데는 기억하고 있다. 타마코는 "아버님은 분명 타마코를 인질로 보내시겠지요"라고 말했다.
확실히 지금 만약 타마코가 있다면, 자신은 타마코를 인질로 보냈을 것이라고 미츠히데는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인질 선정에 이 무슨 망설임이 이리 많은가. 내가 정에 너무 약한 것인가. 아니면 결단력이 부족한 것인가. 미츠히데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 망설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결단을 내려 쥬고로를 인질로 보내기로 하고 사카모토성에 쥬고로를 데리러 보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장모 토요의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이 어미를 소중히 생각하신다면 부디 어미를 야카미성으로 보내주십시오. 오다 도노께서도 그대의 여러 해에 걸친 공을 설마 잊으셨을 리 없으니, 그대의 어미를 사지에 빠뜨리는 일 따위는 없을 것입니다. 어미가 그대의 공적에 도움이 된다면 이보다 더한 다행은 없을 것입니다." 라는 편지에, 미츠히데도 '토요가 나이는 들었으나 이 임무를 견뎌낼 수 있을 것이고, 곧 하타노 형제와 노부나가의 화친이 성립될 것이다'라고 확신하여 마침내 장모를 인질로 보내기로 했다.
미츠히데는 토요를 야카미성에 보내고, 하타노 삼형제를 정중히 맞이했다. 초췌해진 그들에게 음식을 주고 옷을 정돈하게 한 뒤, 아즈치의 노부나가에게 동행시켰다. 미츠히데는 노부나가에게 "화친을 청해 왔사오니 부디 잘 처결해 주시기를 바라나이다"라고 아뢰었다. 노부나가는 인정사정없이 말했다.
"미츠히데. 4년 전 저 형제들은 일단 우리 편에 섰던 자들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냐. 곧바로 또 배반하여 그대를 오늘날까지 애먹이지 않았느냐. 그런 변덕스러운 자들을 용서해 준들 무슨 보탬이 되겠느냐." "아닙니다, 이번만큼은 그들도…." "말하지 마라. 두말하는 자 따위 나에게는 필요 없다.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라!"
"주군----" 미츠히데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그렇다면 저 어머님 또한 노부나가가 죽이라고 한단 말인가. 미츠히데는 엎드렸다. 엎드리지 않았다면 눈꼬리가 찢어질 정도로 노부나가의 얼굴을 노려보았을 것이다. 그런 미츠히데를 노부나가는 무시하고 훠이 일어섰다. "주군,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시 한번 청하옵니다. 향후 탄바를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저 세 사람은…."
"시끄럽다. 그런 것은 이 노부나가가 더 잘 생각하고 있다. 미츠히데! 그놈들을 살려두면 화근이 된다. 그대가 나에게 상의도 없이 그대의 어미를 인질로 삼은 것도 나는 불쾌하다. 그대의 어미가 인질이 되었으니 그들을 살려달라고 감히 나에게 명령할 셈이냐!" "주군, 절대로, 절대로 그럴 뜻은 조금도 없사옵니다."
"나는 지시받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똑똑히 기억해 두어라!" "주군! 주군!" 노부나가는 차버릴 듯이 싹 돌아서서 떠났다. 그 이마에 성질머리 힘줄이 푸르게 솟아오른 것을 미츠히데는 보았다. 이제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하타노 히데하루 등은 노부나가의 명령대로 아즈치 지온지마치에서 십자가형을 받아 죽음을 맞이했다. 당연히 야카미성에 보내진 어머님은 살해당했다. 그것도 미츠히데의 군사들이 보이는 망루 위에서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미츠히데 도노!" 그때 어머님이 부르짖었다고 한다. 어처구니없게도 미츠히데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미를 죽인 자'로 손가락질받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어머님을 인질로 보낼 이유가 없었다. 그대로 며칠 더 내버려 두었어도 그들은 굶어 죽었을 것이다. 노부나가를 향한 끓어오르는 듯한 분노를 미츠히데는 하타노 일족에게 돌리듯, 하타노의 잔당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였다.
이러한 쓰라림을 겪으면서 미츠히데는 마침내 탄바를 평정했다. 그 평정을 아즈치성의 노부나가에게 보고한 것은 10월 24일이었다. 이때 미츠히데는 치리멘(비단) 백 단을 탄바의 선물로 가지고 가 노부나가에게 바쳤다. (주군과 신하) 미츠히데는 그 씁쓸함을 노부나가 앞에서 되새기고 있었다.
"수고했다." 노부나가는 미츠히데의 장모 일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기분 좋게 미츠히데를 위로했다. 그러나 큰술잔을 기울이는 노부나가를 바라보는 미츠히데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어쨌든 5년에 걸친 탄바의 전쟁은 끝난 것이다. "미츠히데 도노!"라는 어머님의 마지막 절규가 여운을 남긴 채, 전쟁은 끝난 것이다.
호소카와가라샤부인 (上)
● 패도(覇道) 09-2
지금 자신도 모르게 그 장모의 마지막을 생각하고 있는 미츠히데에게 야헤이지가 말했다. "어쨌든 오다 도노는 무서운 분이십니다. 저희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 분이십니다." "과연 그렇구나."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는 황송한 일입니다만, 군주 된 자에게는 군주 된 자의 도리가 있는 법입니다. 왕도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노부나가 도노에게는 패도는 있어도 왕도는 없습니다. 주군과 오다 도노는 이 점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과연, 왕도와 패도라." 미츠히데는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길을 눈 내리는 뜰로 돌렸다. 왕도, 그것은 언젠가 야헤이지도 말했던 것이라, 그 이후 미츠히데도 마음에 두고 있던 바였다. "패도는 결국 패도일 뿐입니다. 패도는 조만간 망하는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츠히데는 순간 흠칫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말하는 것은 불온하다"라며 가볍게 하츠노스케를 나무랐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패도는 망한다'라는 말이 저항 없이 가슴 가득 퍼져 나갔다.
'(오다 도노는 패도다. 패도는 망한다. 이렇게 이 젊은이는 말하고 있다. 결국 오다 도노는 망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담무쌍한가!)' "하지만 하츠노스케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주군. 민심이 굴복하는 것은 왕도에 대해서이지 패도는 아닐 것입니다. 오다 도노께서도 천하를 평정할 생각이시라면 늦게나마 왕도에 힘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오다 도노께서도 그 길에 힘쓰고 계시지 않느냐."
"라쿠이치 라쿠자(자유 시장 정책)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지금까지는 여러 절과 신사에 많은 돈을 바치지 않으면 상업을 영위할 수 없었지. 그러나 노부나가 공께서는 그것들을 폐지하고 아즈치의 주민들에게 상업의 자유를 인정해 주지 않았는가." "하지만 주군, 그것은 아즈치의 번영을 위한 것이 먼저이고, 백성을 위한 것은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강매, 강매수, 도둑, 싸움, 화재 등의 단속도 엄격히 실시하고 계신다."
"그 화재 하니 생각났습니다. 주군, 아즈치의 궁수들 숙소에서 불이 났을 때 노부나가 도노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불을 낸 것은 처자가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며, 오와리에 처자를 두고 온 자 120여 명에게 아즈치로 아내를 불러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노부나가 도노께서는 두 번 다시 아내들이 오와리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오와리의 사택 120여 채에 모두 불을 질러 태워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참으로 그렇습니다. 오다 도노께서는 히에이산 불태우기, 아사이 도노 화공, 이번 아마가사키 불태워 죽이기에 이르기까지, 불태워 죽이는 것이 장기이신 듯합니다. 태워도 태워지지 않는 것이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하츠노스케는 젊은이답게 솔직했다.
두 사람의 말이 지금의 미츠히데에게는 기분 좋게 귀에 울렸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주군인 노부나가의 허물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미츠히데의 주군은 또한 두 사람의 주군이기도 해야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노부나가를 자신의 주군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야헤이지가 말했다.
"그로부터 열흘 남짓 지난 지금도 사람 태우는 냄새가 그 근처에 자욱하다고 합니다. 바람이 불어도 냄새가 가시지 않는답니다. 그 근처 사람들은 죽은 이들의 원령(怨靈) 때문이라며 심하게 두려워하고 있다고 합니다."
야헤이지든 하츠노스케든 야카미성에서 장모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사정의 진상을 알고 있다. 미츠히데를 생각하는 두 사람이 노부나가를 원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말리면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까 봐 미츠히데는 말을 돌렸다.
"야헤이지." "예, 주군." "자네, 서른셋이었지?" "주군, 이제 나이는 잊었습니다." 야헤이지는 시치미를 뗐다. "하츠노스케는 스물둘인가?" "예." 하츠노스케는 눈을 내리깔았다. "주군께서는 쉰넷이지요." 라며 야헤이지가 말을 이어갔다. "쉰넷, 서른셋, 스물둘. 4, 3, 2라니 이거 참 마치 말맞추기 같군요."
"야헤이지, 린도 자네를 연모하고 있었다네."
"예?" 야헤이지의 목소리가 컸다. "아라키 집안에서 파혼되어 돌아왔을 때의 린을 보고 나는 그것을 알았네. 야헤이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린의 몸속에 일순 불이 켜진 것처럼 나에게는 보였다네." "그것이 진정이옵니까?" "자네에게는 그것이 느껴지지 않았던가?"
"혹시나 하고 생각했던 적은 몇 번인가 있었습니다만, 어릴 때부터 친하게 자랐기 때문에…." 미츠히데는 안석에 기대어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동안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이 통하는 침묵이었다. "이봐, 야헤이지. 타마가 언젠가 말했었다네. 린은 시집가는 것이 죽으러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더군."
"죽으러 간다고요?" "음. 그렇게 말하며 린은 울었다고 하네. 시집가는 것은 무사가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도 린은 말했다더군. 부모의 말에 따라 린은 말없이 시집을 간 것이라네. 자네를 향한 마음도 가슴 깊이 품은 채 말일세." "……." "나에게는 그것이 깨달아지지 않았네. 그것은 역시 자네 말대로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친하게 자랐기 때문이었겠지."
"……." "야헤이지. 이제 와서 자네에게 린을 맞아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이기적인 청이겠지?" "예? 저 같은 놈에게…." 야헤이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달리더니 금세 기쁨의 빛으로 바뀌었다. 그 야헤이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기적이라는 것은 뼈저리게 느끼지만, 어떠한가. 야헤이지, 이번 기회에 린과 백년해로해 주지 않겠나?"
"주군!" 야헤이지는 엎드렸다. 그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역시 감격의 고조를 누르기 힘든 모양이었다. 이윽고 엎드린 야헤이지가 돗자리 위에 주룩 하고 큰 눈물을 떨어뜨리는 것을 미츠히데는 보았다. "고맙네, 야헤이지." 미츠히데의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감개무량하옵니다." 겨우 야헤이지는 얼굴을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나도 좋은 사위를 얻었구나. 린도 필시 기뻐하겠지." "예!" 평소의 야헤이지답지 않게 굳어 있다. "야헤이지. 타마를 시집보낼 때도 나는 괴로웠다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츠노스케가 타마를 마음에 품고 있었네." "하츠노스케가요? 그것은 분수를 모르는 짓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사람으로서 누군가를 사랑함에 신분의 귀천은 없다네. 아니, 인간에게 정말 귀천이 있는 것일까. 전쟁에서 죽어가는 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비천한 자라 할지라도 장렬하게 죽는 자가 있고, 장수라 할지라도 흉하게 죽는 자가 있지. 어쨌든 나는 하츠노스케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네."
"야헤이지, 자네도 하츠노스케를 더욱 아껴주게나. 저 아이는 타마코를 맞아들이기는커녕,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칠지도 모르니 말일세." "알겠습니다."
"참으로 이 덴쇼 7년이라는 해는 다사다난한 해였구나. 어머님 일도 그렇고, 아라키 일도 그렇고 불행한 한 해였지만, 자네 덕분에 우선은 경사스러운 새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상권)
● 유스토 타카야마우콘 (ジュスト 高山右近)10-1
해를 넘겨 덴쇼(天正) 8년(1580년) 정월 9일,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는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 타다오키(忠興) 부자를 비롯해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 등 몇 명을 사카모토성으로 초대해 차회를 열었다. 돌아가는 길에 호소카와 부자는 우콘을 쇼류지성(勝竜寺城)으로 청했다. 우콘을 초대하자고 생각해 낸 것은 후지타카였다.
타카야마 우콘은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 편에 서지 않고 오다 노부나가에게 타카츠키성(高槻城)을 넘겨주었다. 그 일이 노부나가의 마음에 좋게 들었다. 무라시게 일족이 멸망한 지난해 말, 노부나가는 다시 우콘을 타카츠키성의 성주로 삼고 예전의 배에 달하는 영지를 하사하여 4만 석의 녹봉을 받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본래 기독교에 호의를 갖고 있던 노부나가는 기독교 보호를 천하에 선언하고 주인장(朱印狀-공문서)을 발포(発布)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호소카와 후지타카는 우콘을 불러 자리를 마련하기로 한 것이다. 우콘의 무용과 그 품성에 경의를 품고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신앙이 깊은 우콘에게 노부나가의 기독교 원조(援助) 내용이나 본원사(혼간지)파 제압 전망을 묻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더 많은 정보를 모으는 것이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처세에 있어 중요한 기점이었으며, 나아가 그것은 젊은 타다오키에게도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호소카와가 쇼류지성의 객전에 스물여덟 살의 타카야마 우콘을 둘러싸고, 후지타카, 타다오키, 그의 동생인 돈고로 오키모토, 그리고 타마코와 그녀의 시녀 기요하라 카요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후지타카의 아내 자샤쿠노카타는 지난해 태어난 딸 센이 감기에 걸려 고열이 나고 있었기에 이 자리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도코노마에는 후지타카가 그해 설날에 읊은 시조, ---- 봄이라 하면 눈조차 꽃 같은 아침이로다(春といへば雪さへ花のあしたかな) ---- 의 색지가 걸려 있었다. "과연 정월이라, 내리는 눈조차 꽃과 같은 마음이셨군요." 우콘은 시조를 감상한 뒤 "올해 설날은 하루 종일 눈이 계속 내렸지요" 하고 말했다.
후지타카가 응수했다. "그야말로 지상의 모든 것을 정화하려는 듯, 소리 없이 계속 내렸다오." "아버님, 눈이 내려 모든 것이 정화되는 것이라면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다." 돈고로 오키모토가 웃었다. 체구는 형인 타다오키보다 컸지만, 웃으면 역시 열여섯 살의 표정이 된다. "오키모토 도노께서는 정화에 관심이 있으신가?" "아닙니다, 소인의 관심은 오직 이기는 것뿐입니다." 쑥스러운 듯 오키모토는 타마코를 힐끗 보았다.
오키모토의 시선이 자꾸만 타마코에게 가는 것을 아버지 후지타카는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다. 타마코는 화답하듯 조용한 미소를 오키모토에게 보냈다. 타마코는 타마코대로, 조금 전부터 우콘과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는 후지타카와 타다오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남성들 세계의 불가해함을 느끼고 있었다. 불과 1년 여 전, 후지타카 부자는 우콘을 공격하는 공격수였다.
아버지 아케치 미츠히데를 도와 타카츠키성으로 향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우콘과 미츠히데, 후지타카 등은 서로 적이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미츠히데가 우콘을 차회에 초대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후지타카 부자가 마음을 담아 정성껏 환대하고 있다. 후지타카 부자 역시 예전에는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와도 이처럼 정을 나누었으나, 나중에는 전쟁을 치르는 처지가 되었다.
대체 이 남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어떤 생각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타마코는 신기하기만 했다. 타마코에게 있어 아라키 일족은 언니 린(倫)의 시댁이다. 그 아라키 일족을 타카야마 우콘은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이미 카요에게 듣기는 했으나, 우콘에 대한 응어리가 그리 쉽게 사라질 리는 없었다. 게다가 오늘 밤 처음 만나는 자리이다. 타마코는 다시 한번 우콘에게 시선을 던졌다.
체격이 좋고,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듯 곧은 자세는 소문대로 장부다운 멋진 무장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 온화한 표정과 맑디맑은 눈빛, 겸손한 태도는 성스러운 승려처럼 느껴지기까지 해서 타마코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건 그렇고 우콘 도노, 아라키 무라츠구 도노는 아키(安芸-현 広島)에서 어떤 정월을 맞이하셨을지 모르겠구려."
타다오키가 술잔을 놓으며 무라츠구의 신상에 대해 언급했다. 노부나가의 젊은 시절과 꼭 닮은 전투 방식을 가졌다고 일컬어지는 열여덟 살의 타다오키는 무례할 정도로 거리낌이 없었다. 후지타카가 눈살을 찌푸렸다. 서로 건드리고 싶지 않은 화제다. 그러나 우콘은 온화하게,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정월을 맞이하는 기분은 아니실 줄 압니다"라며 긴 눈매를 내리깔았다.
아라키 일족 660여 명이 노부나가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불타 죽은 지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돈고로 오키모토가 한술 더 떠 무례하게 쏘아붙였다. "우후(노부나가) 도노의 천하포무(天下布武) 깃발은 해골(髑髏-どくろ)이니, 우후 도노에게 적대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우콘의 눈빛이 미세하게 흐려졌다. "돈고로, 말을 삼가거라." 후지타카가 나무랐다.
(천하포무의 깃발은 해골…) 타마코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장들은 이 해골 깃발을 두려워하여 싸우고 싶지도 않은 상대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노부나가에게 적대하는 자는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 공포 때문에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어떤 남자의 가슴속에도 '천하포무'라는 해골이 그려진 깃발이 은밀히 나부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득 타마코는 그런 생각이 들어 타다오키, 후지타카, 우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버지 아케치 미츠히데의 조용한 얼굴을 떠올렸다. "저기, 우콘 도노, 이시야마 혼간지는 도대체 어떻게 될 것 같소?" 후지타카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성(石山本願寺城-현 오사카성자리)은 천하를 제패하려는 노부나가에게 암과 같은 존재였다.
11년 전인 겐키(元龜) 원년(1570년)부터 혼간지와는 치열한 전쟁이 되풀이되었고, 양측 모두 수만 명의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간지는 노부나가에게 항복하지 않았다. 예전에 노부나가와 싸웠던 아사쿠라朝倉, 타케다(武田), 아사이(浅井)도 결국은 혼간지와 손을 잡았었다. 아라키 무라시게 역시 그 혼간지 측으로 돌아선 셈이었다.
게다가 노부나가가 오랫동안 애를 먹고 있는 모리 가문 역시 혼간지를 원조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에게 적대하는 무장들은 모두 혼간지를 돕는 것이다. 처음에는 '고작 중놈들이!' 하고 경멸하는 마음을 가졌던 노부나가도, 오늘날까지의 10년 동안 혼간지의 승병과 신도들의 섬뜩할 정도의 저력에 얼마나 위협받았는지 모른다. 따라서 해가 바뀔 때마다 노부나가를 비롯해 그의 수하 무장들은 혼간지와의 전쟁의 결말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글쎄요, 저희 같은 연배가 얕은 자에게 확고한 전망이야 있겠습니까만은…" 우콘은 팔짱을 꼈다. "나는 신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지난 10년간 이시야마 혼간지 신도들의 활약을 보아하니, 무사들보다 신도들의 결속이 참으로 단단하더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째서이겠소, 우콘 도노?" 후지타카는 우콘을 응시했다. "그건 기요하라 마리아 도노께서 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콘은 타마코의 곁에서 조용히 시중들고 있는 카요를 보았다. 그 시선 속에 대단히 친근한 정이 담겨 있는 것을 타마코는 느꼈다. 그것은 남녀 간의 그런 야릇한 감정이 아니었다. 말로 다할 수 없이 친근한 눈빛이면서도 결코 끈적거리지 않는 시선이었다. 이것이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의 친밀함인가 하고 타마코는 생각했다.
"아닙니다, 쥬스토 님. 저 같은 자야 그저 천주님(하느님)을 섬기는 하녀일 뿐이라 도저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 도노의 신앙은 저희의 빛입니다. 마리아 도노에 비하면 저희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서로 양보하는 우콘과 카요의 모습을 보고 있던 오키모토가 말했다. "무슨 말씀을 나누시는 건지 저희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우콘은 씁쓸하게 웃으며, "왜 신도들의 결속이 무사의 결속보다 강한가 하는 호소카와 도노의 질문이셨지요."
"그렇소." "그것은 부처를 믿는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다 도노께서 아무리 강하다 한들 두려워하지 않지요. 하지만 무사는 자칫 자신보다 강한 자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강한 자에게 쏠리기 쉽지요."
"과연, 신도들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시는가." "예. 하지만 이 세상에 두려운 것은 없어도, 저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가지고 있습니다." "저세상에 말요?" "예,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과연… 지옥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켄뇨 쇼닌(*顕如上人1543~ 1592)을 감히 배신하지 못했다는 말씀이오?"
"예, 쇼닌을 배신하고 지옥에 떨어지느니 기꺼이 죽음을 택할 자들뿐일 테지요." "과연, 그렇다면 오다 도노께서 애를 먹으시는 것도 당연한 이치로군." "아라키 도노의 수하들이 혼간지성에 밤마다 배로 쌀을 보낸 것도, 그것이 이익에 눈이 멀어서 한 일인지, 혹은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 일인지 그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아아, 그러하였는가. 쌀을 몰래 적에게 운반하다니, 단지 사리사욕 때문이라 하기엔 목숨을 건 대담한 짓이오. 필시 신도였음에 틀림없겠지. 그나저나 오다 도노에게는 무기를 팔지 않겠다는 신도들도 있다더군. 허허, 신도라는 존재는 다루기 힘든 법이로군." 후지타카는 새삼스레 개탄했다. "하지만 아버님, 올해야말로 오다 도노께서 혼간지를 항복시키지 않겠냐는 소문이 들립니다만."
그때까지 잠자코 후지타카와 우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타다오키가 끼어들었다. "호오, 그것을 너는 누구에게 들었느냐?" "그게, 어제 차회가 끝난 뒤 코레토(아케치 미츠히데) 도노께서 언뜻 말씀하셨습니다." "뭐라? 미츠히데 도노가? 우콘 도노도 들으셨소?" "저는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올해 오다 도노께서도 혼간지와 화의를 맺지 않으실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라? 화의라니." "예. 재작년 칙령으로 오다 도노는 혼간지와 화의를 맺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상권)
● 유스토 타카야마우콘 (ジュスト 高山右近) 10-2
그 시점에서는 그 노부나가조차 모리 씨와의 대결로 내몰려 있던 데다, 아라키의 모반까지 겹쳐 흔들리고 있었다. 신도나 승병의 저력에도 다소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을 느끼고 있던 노부나가에게 화의 칙령이 내린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노부나가는 즉시 혼간지 및 모리 씨와도 화의를 성립시키도록 주선하려 했다.
그런데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의 수하인 나카가와 키요히데(中川清秀)가 노부나가에게 돌아왔다. 이 사건 하나가 노부나가를 안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노부나가는 화의를 철회했다. 불리한 화의를 맺느니 역시 싸워야 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노부나가는 6척의 전함을 건조하고 여기에 총포를 구비했다. 수로를 통해 혼간지를 원조하던 모리군을 치기 위해서였다.
혼간지는 이미 우군이었던 아사쿠라, 아사이를 비롯해 히에이산의 승려들, 마츠나가 단죠, 기타 여러 국의 신도들이 노부나가에 의해 멸망당한 상태였다. 게다가 지금은 아라키 무라시게마저 모리 측으로 도망쳤다. (무라시게는 그 후 삭발하고 도쿤이라 칭하며 다인이 되었고, 노부나가 사후에는 히데요시의 청을 받아 다도로 섬겨 리큐 칠철 중 한 사람으로 꼽히게 된다. 그러나 결국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그 모리 씨조차 이 무렵에는 오다군 앞에서 나날이 패색이 짙어져, 혼간지를 원조하던 옛날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혼간지는 지금 고립무원이나 다름없었다. 재작년과 비교해 노부나가는 훨씬 우위에 서 있었다. 노부나가에게는 유리한 화의를 맺을 절호의 기회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이상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게 될지도 모를 혼간지의 신도나 승려들과 싸우기보다는, 그것이 더 현명한 길이다. 우콘은 이러한 사정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가며 후지타카에게 이야기했다. "그러한 까닭으로, 머지않아 반드시 화의의 칙령이 다시 조정으로부터 내릴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우콘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타다오키가 의아한 듯 말했다.
"하지만 타카야마 도노, 조금 전 그대는 신도들이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소. 권력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 어찌 그리 쉽게 화의를 맺겠소?" "말씀하신 대로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지이신 켄뇨 코사 님께서는 아마 화의를 맺으실 것입니다."
"어째서요?" "모든 승려와 신도들이 다 사라져버리면 불도(佛道) 역시 멸망합니다. 살아남는 자가 없다면 부처의 뜻도 이 나라에서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과연 그렇구려." 후지타카는 안석에 몸을 기대며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콘 도노는 젊지만 앞을 내다보고 계시는구려. 역시 신앙의 길은 다를지언정 우콘 도노도 신자이시니, 과연 우리와는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계신 듯하오."
"송구합니다. 워낙 식견이 좁아서…" 우콘은 눈을 내리깔았다. (이 우콘의 예측대로 그해 3월 노부나가는 혼간지와 화의를 맺었다.) 우콘은 아라키 무라시게와 결별하고 타카츠키성을 노부나가에게 개성(開城)할 때, 영주로서의 삶을 버리려 했었다. 우콘은 결코 단지 노부나가에게 순종한 것이 아니었다. 큰 충성을 다하기 위해 성을 넘겨준 것이었다.
노부나가가 기리스탄(크리스천) 보호 약속만 해준다면, 우콘은 그대로 기독교 전도에 전념하고자 결의했었다. 그러나 결국 노부나가의 청에 어쩔 수 없이 다시 군선(軍扇)을 잡게 된 것이었다. 그 일은 우콘에게 깊은 고통으로 남아 있었다. 우콘이 타카츠키성을 넘겨주기 위해 노부나가를 찾았을 때, 노부나가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듯 기뻐하며 입고 있던 고소데를 그 자리에서 벗어 우콘에게 주었다.
그 미지근한 노부나가의 체온이 배어있는 옷을 우콘은 복잡한 심경으로 받았다. 그때 노부나가는 가장 애착을 가졌던 비장의 명마 '하야카게'를 요시노리의 명검과 함께 내어주고, 영지 또한 배로 늘려주었던 것이다. (그때…) 우콘은 그 미지근한 옷에 배어있는 노부나가의 슬픔을 느꼈던 것이다. 노부나가가 그 자리에서 옷을 벗어주었다는 솔직한 태도에도 우콘은 감동받긴 했다.
분별도 예의범절도 없는 거친 기쁨의 표현이었지만, 그 기쁨에는 진심이 담겨 있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랬기에 더욱 (이것이 노부나가 도노의 기쁨인가) 하고 어떤 허무함을 느꼈던 것이다. 무인으로서 우콘 역시 이기는 기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옷과 명마와 애검, 영지를 하사할 만큼의 기쁨의 내용은, 무인의 길을 버리고 이 세상의 모든 영예를 버리려 했던 우콘에게는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였다.
(이기는 것이 최고의 기쁨인가) 그래도 좋은가 하고 우콘에게 속삭이는 내면의 소리가 있었다. 그 내면의 소리를 듣고 노부나가를 불쌍히 여겼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너무 오만하다며 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콘은 인간에게 훨씬 더 깊고 성스러운 기쁨이 따로 있음을 알고 있었다.
타카츠키성의 성주이면서도 가난한 과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병든 자를 문병하고, 고민이 있는 자의 탄식을 들을 줄 알았던 우콘은, 이기는 것보다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콘은 노부나가의 옷을 받고, 적이 많은 이 주군을 예전처럼 섬기자고 생각했다. 두려움의 대상은 될지언정 사랑받지는 못하는 이 노부나가를 섬기자고 결심한 것이었다.
그렇게 결심했었지만, 역시 그때 그 상태로 무장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신부를 도와 날마다 전도에 힘쓰는 편이 좋았을 것이라고, 지금도 마음 한구석에서 아파하는 우콘이었다. 그 우콘을 호소카와 후지타카는 지켜보며, "아니오, 나이는 젊지만 훌륭하오. 오다 도노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우콘 도노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 하셨던 마음도 무리가 아니구려."
"아버님." 돈고로 오키모토가 말했다. "무엇이냐?" "승려나 신도들도 그렇고, 우콘 도노도 그렇고, 신앙을 가진 자들은 모두 강하군요." "음, 그래서?" "소인도 싸움에 강해지기 위해 기리스탄이 될까 합니다만." 후지타카는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돈고로, 싸움에 강해지기 위해 기리스탄이 되는 자는 없다. 강한 신앙을 가져야 비로소 신이나 부처의 가호가 있는 법이다." 형인 타다오키가 나무라며 소리 내어 웃었다.
타다오키의 말에 카요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노부나가의 우콘에 대한 집착은 컸다. 지난해 노부나가는 아즈치에 우콘의 저택을 짓게 했다. 타카츠키에 성을 가진 우콘의 별장이다. 번화한 땅에 저택을 하사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아즈치에 우콘의 친족을 두게 하는 것으로, 허울 좋은 인질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노부나가는 그만큼 우콘과의 유대를 견고히 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콘이 원하는 대로 아즈치에 기리스탄 교회 건설을 허락했다. 노부나가는 아즈치 마을에 새로 절을 세우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있던 오래된 절은 어쩔 수 없이 묵인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니 기리스탄 교회 건설은 더욱 허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오르간티노 신부는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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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스토 타카야마우콘(ジュスト 高山右近) 10-3
교회 건설에 노부나가는 극히 적극적이어서, 그해 봄에는 부지를 내어주기로 되어 있었다. 교회 측도 3층짜리 신학교를 세울 계획을 가졌다. 물론 이 안에 예배당도 마련되는 것이었다. 그 계획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노부나가를 기쁘게 했다. 천하의 아즈치 거리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큰 건물이 들어선다는 것은 곧 노부나가의 위세를 나타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콘의 소망이 이처럼 손쉽게 노부나가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노부나가의 우콘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신자가 되지 않겠지만, 장남인 노부타다는 기리스탄이 될 것이다"라고 공언까지 했다. 본래 노부나가 자신은 신도 부처도 믿지 않았다.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의 기록에 따르면 (이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와 알현한 횟수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 해도 17회에 달한다고 한다),
"그(노부나가)를 지배하고 있던 오만함과 존대함은 엄청난 것으로, 그는 스스로 예배받기를 원했으며, 그 즉 노부나가 외에는 절을 올릴 만한 가치가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략) 스스로가 단순히 지상의 죽을 운명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마치 신성한 생명을 지니고 불멸의 주인이 된 것처럼 만인으로부터 예배받기를 희망했다"고 적혀 있다.
덧붙여 프로이스의 기록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단순히 막연히 그렇게 바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예배하는 장소로서 소켄지(總見寺)라는 사찰을 세우고, 자신에게 절하는 자에게 내려지는 신통한 영험들을 늘어놓았다. 가로되 풍요로워진다, 가로되 자손과 장수를 내린다, 병은 즉시 완쾌되고 건강과 평안을 얻는다 등등이다.
게다가 노부나가의 생일을 성스러운 날로 삼아 참배하라, 이것을 믿지 않는 자는 현세는 물론이요 미래영겁에 이르기까지 멸망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노부나가가 우콘의 희망대로 아즈치에 3층짜리 예배당 및 신학교 건립을 허가한 것은, 어쩌면 혼간지파 불교도들에 대한 하나의 포석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지난해, 즉 덴쇼(天正) 7년 8월에 노부나가는 교토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큰 일을 한 판 벌인 적이 있다.
그것은 오르간티노 신부와 반맹(半盲)인 로렌소가 노부나가가 묵고 있던 사찰로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노부나가에게 있어 사찰은 숙소로서의 이용 가치 외에는 인정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사찰은 많은 수하들이 묵을 수 있을 만큼 넓기 때문이었다.
노부나가를 찾은 오르간티노 신부 일행은 놀랐다. 대청에는 무사 영주들이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혼란스러워하는 신부들에게, 한 단계 높은 대청에서 노부나가가 그 날카로운 목소리로, "오오, 오셨는가. 자, 자, 이쪽으로" 하며 정중히 자신의 바로 곁으로 안내했다. 신부들이 노부나가의 눈앞에 앉아 인사하는 모습을 무장들은 한 단계 낮은 대청에서 마치 연극이라도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사람들이 듣도록 일부러 큰 소리로, "그 후 별탈은 없으셨소?" "요즘은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셨소?" "고국에서 소식은 없었소?"라며 보기 드물게 정중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노부나가는 밖에 있는 무사나 승려들에게도 대화 내용이 들리도록 문과 창문을 모두 열어두게 했다. 음력 8월이라 아직 잔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뜰에 늘어서 있는 무사나 승려들의 이마에서 땀이 뻘뻘 흘러내렸다. 노부나가는 작은 소리로 신부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문답을 하겠다. 때로는 거칠게 성을 내기도 하겠지만, 이것은 본심이 아니다. 기리스탄 포교를 위해서다. 어떤 태도에도 놀라지 말고 의연하게, 사람들에게 잘 들리도록 답해주길 바란다."
이날 이런 계획이 있는 줄 몰랐던 신부들은 일단 놀랐으나 노부나가의 말을 이해했다. 노부나가는 안석에 기대어 편안한 모습을 보이며 "스승들도 편히 하시오" 하고 친근하게 굴더니, "어떻소, 나는 머지않아 불교 사찰을 한 곳도 남김없이 몰수하여 기리스탄 교회로 일변시켜 버릴 생각인데."
오르간티노는 이를 농담으로 여겨 사양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단호하게 "나는 마음먹은 일은 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 말을 들은 승려 중에는 즉시 재산을 처분하고 도망친 자도 있었다고 한다. "서양에도 영주가 있소?" "천황이 있소?" "정말로 천국이나 지옥이 있소?" 있다고 답하자 노부나가는 갑자기 버럭 화를 내며, "뭐라?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그럼 그것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내게 보여라!" 하고 대호통을 쳤다.
수도사인 로렌소는 그 반맹의 맑은 눈을 허공에 뜬 채 노부나가의 말을 듣고 있더니, 생긋 웃으며 "알겠습니다. 증거를 보여드리지요" 하고 머리를 숙였다. 로렌소란 영세명으로, 그는 히젠(肥前) 출신의 비파법사琵琶法師였으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세례를 받고 외국인 선교사, 신부들의 일본어 교사가 되었으며 통역을 맡고 있었다.
두뇌가 명석하고 대단한 웅변가여서 우콘 부자와도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어떻게 천국과 지옥의 증거를 보일 것인가?" "그럼,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느 곳이로든 안내해 올리겠습니다!" "오오! 안내를 받아보자꾸나." 노부나가가 일어서자, "주군, 그럼 안내해 올릴 터이니 저와 함께 여기서 할복을 하시지요."
"뭐라!? 할복을 하라고?" "예,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에 갈 수 있으니까요." 노부나가는 그 순간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졌다! 졌다. 내가 기리스탄에게 졌다. 우콘, 나 좀 살려다오" 하며 대청에 있는 우콘을 보았다. 로렌소는 그 반맹의 눈을 감고, 인간은 모두 죄업이 깊은 존재라는 것, 하느님은 그 인간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셨다는 것 등을 힘있게 말하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전도 집회였다. 설교가 끝나자마자 노부나가는 "너희 모두 기리스탄이 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권했다. 사람들은 노부나가마저 신자가 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노부나가가 승려들에 대해 벌인 하나의 위협이자 골탕 먹이기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만큼 기독교에 적극적인 호의를 보인 것은 우콘에게 "타카츠키성을 넘겨준다면 더욱 기리스탄 교회를 보호하는 데 힘쓰겠다"고 했던 약속을 노부나가 나름대로 지키려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갑자기 우콘은 노부나가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것처럼 보였다. 여러 영주들은 우콘에 대해 정중해졌다.
그러나 우콘은 묵묵히 배로 늘어난 영지의 정사에 힘쓸 뿐, 결코 마음을 오만하게 먹지 않았다. 그 대연극을 후지타카 역시 타다오키와 함께 본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연극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다만 영주 된 자로서 종교에 대해 무관심해서는 영민을 다스리는 일에도, 적국과 싸우는 일에도 큰 지장이 생기리라는 것만큼은 새삼 깨달았다는 느낌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화제로 삼은 뒤, "우콘 도노의 영민들은 행복하겠구려."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영민이 불행해서는 영주에게 행복이란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타마코는 고개를 들었다. (영민이 불행해서는 영주에게 행복은 없다?) 지금껏 타마코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남편인 타다오키도, 시아버지인 후지타카도, 그리고 아버지인 미츠히데도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타다오키가 물었다.
"우콘 도노, 그렇다면 영민의 행복이란 무엇이겠소?" "그것은 영주의 존재를 잊고 살 수 있는 것이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주의 존재를 잊는다? 그건 또 무슨 뜻이오?" "즉, 권력에 강요당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삶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우콘 도노, 영민이라는 존재는 권력으로 위협하지 않으면 공물도 노동도 영주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오."
"아닙니다, 영주나 영민이나 똑같은 인간입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저는 천주 데우스의 사랑을 통해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존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와 영민이 똑같은 인간이라, 우콘 도노는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 그렇습니다." 타다오키는 욱한 듯, "그럼 우콘 도노, 귀하는 권력으로 영민에게 신앙을 강요한 적은 없소?"
"타다오키 도노, 신앙은 권력으로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데우스께서는 <육신은 멸하여도 영혼은 멸하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라> 하셨습니다. 우리 같은 다이묘(大名-영주)이라 할지라도 영혼까지는 멸할 수 없는 법입니다. 신앙의 강요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타마코에게는 우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대단히 신선하게 느껴졌다. 에비사와 아리미치(海老沢有道) 씨도 그의 저서 『타카야마 우콘』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우콘)는 결코 개종을 권력으로 강요하지 않았다. 영민에게도 영주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겸손과 사랑으로 대했다. 그는 스스로의 언행으로 모범을 보이고, 기리스탄 정신에 기반한 정치를 펼쳐 영민에게 그것을 보여주었다. (중략) 그리고 그에 감화된 사람들은 스스로 설교를 듣고 신자가 되었다. 물론 그는 이교도에게도 설교를 듣도록 권장했다. 그러나 항상 기리스탄이 되고 안 되고는 완전히 자유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렇게 해서 훗날 2만 5천 명의 영민 중 1만 8천 명이 기리스탄이 되었으니, 그 영내의 결속은 단단했을 것이다. 혼간지에 애를 먹었던 노부나가가 우콘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던 것도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우콘을 처음 만난 타마코는 그의 고결한 인품에 깊이 끌렸다. 타다오키 역시 이날 우콘과의 친밀한 대화 속에서 경외심을 품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 후 우콘은 몇 번이고 타다오키를 찾아왔고, 타다오키 역시 타카츠키성으로 우콘을 찾아가게 되었다.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상권)
● 향낭(匂い袋) 11-1
타다오키의 몸이 타마코의 가슴 위에서 떨어졌다. "오타마, 좋은 아이를 낳아라." 타다오키는 타마코의 배에 손을 얹었다. "예." 두 사람의 첫 아이가 4월에는 태어날 예정이었다. "이제 구십일 남짓 남았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타다오키는 중얼거리며 이불 위에 엎드렸다.
머리맡의 등불이 가물거리며 작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찌지직 소리를 내며 꺼졌다. 기름이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타마코는 어둠을 응시하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아들을 낳아라." 이미 몇 번이고 했던 말을 타다오키는 지금도 되풀이했다. "예." "강한 아이를 낳아야 한다. 나보다 강한 아이를 말이다." "예." “강한 아이를 낳는 거다. 나보다도 강한 아이를 말이다.”
“예.” “무엇이냐, 타마. 무슨 말을 해도 예, 예 하고 건성으로 한마디 대답만 하는구나.” 어둠 속에서 타다오키가 타마코 쪽으로 몸을 돌리는 기척이 들렸다. “그러면, 아니오라고 대답할까요?” 타마코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러면 되었다. 그래야 타마답지.” 나른한 듯한 타다오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타다오키는 숨소리를 내며 잠들기 시작했다. 열여덟 살 타다오키의 건강한 숨소리이다. 타마코는 가만히 눈을 뜬 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불 속에서 바르게 뻗은 자신의 허벅지가 따뜻하게 맞닿아 있다. 타마코는 그 자신의 허벅지의 화끈거림을 마다하듯 다리를 살짝 벌렸다.
'(어젯밤도… 나는…)'타마코는 뒤척이며 베개에 뺨을 대었다. 어젯밤, 타다오키의 가슴에 안겨 있으면서 타마코는 문득 타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의 얼굴을 떠올린 것이다. 그 순간, 타마코는 자신의 등 뒤로 손을 돌리고 있는 타다오키의 거칠기까지 한 포옹이 우콘의 포옹처럼 느껴졌다. 타마코는 흠칫하며 몸을 비틀었다. 뜻밖의 감각이 타마코의 몸을 꿰뚫었다.
그리고 오늘 밤 역시, 타다오키는 어느새 우콘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째서 우콘 님이?)' 우콘과는 아직 단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다. 열흘쯤 전이다. 우콘과는 직접 말을 나누었다고 할 만한 대화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우콘은 다른 사내들이 첫대면 때 보이는 타마코의 아름다움에 대한 놀라움조차 보이지 않았다.
처음 만난 타마코에게 서늘한 시선을 보냈을 뿐이고, 돌아갈 무렵에는 타마코보다는 오히려 키요하라 카요(清原佳代)에게 몇 번인가 그 다정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우콘처럼 타마코의 아름다움에 놀라지 않는 남성은 이제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떤 남성이든, 아니 여성조차도 타마코를 보면 찬탄의 눈으로 감탄하며 바라보았고, 개중에는 “호오” 하고 소리를 내는 자마저 있었다.
타마코는 우콘이 했던 “영민이 불행하다면 영주에게 행복이란 없습니다”라는 말에 감동했다. 훌륭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 고결한 인품에 끌렸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지난밤 어둠 속의 몽롱한 환상 속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오늘 밤에도. (어째서일까.) 다마코는 그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이 싫기도 했다.
지금까지 타마코 자신은 타다오키의 아내로서 남에게 손가락질받을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 부엌일도, 베짜기도, 염색도 부지런히 해냈다. 아직 결혼하고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았다고는 하나, 타다오키에 대해 완전히 정결했으며, 이런 음탕한 생각을 하는 일 따위는 당연히 없었다. 그것이 어젯밤 이래 느닷없이, 타마코는 남에게 말 못 할 생각으로 우콘의 환영에 두 번이나 안긴 것이다.
'(하지만…)' 하고 지금 타마코는 생각했다. 자신이 우콘을 떠올리려 한 것이 아니다. 느닷없이 우콘의 환영이 나타난 것이라고 타마코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뒤로 타마코는 타다오키와 우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 태도도, 표정도 우콘 쪽이 타다오키보다 뛰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타다오키가 우콘의 나이가 된다고 해서 갖추어질 만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민이 불행하면 영주에게 행복은 없다” 따위의 말은 타다오키에게는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젊은이다운 거친 면과 섬세한 신경을 겸비한 타다오키를 타마코는 사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때로는 지독히 천진난만하고 순진하기도 했다. 타다오키는 감정의 기복이 풍부했다. 하지만 타마코는 스스로 타다오키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노부나가(信長)의 명령으로 두 사람은 결혼했다.
만약 타다오키와 우콘 두 사람을 늘어놓고 어느 쪽인가를 고르라고 한다면, 자신은 어느 쪽을 고를 것인가. 지금 타마코는 머리 속에 떠오른 두 사람을 늘어놓고 대담한 상상을 해보았다. 아마 타다오키를 고르지는 않았음에 틀림없다. 타마코는 주저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한 순간, 말할 수 없는 느낌에 가슴이 아렸다.
만약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내가 우콘과 결혼했고, 나중에 타다오키를 만났다면 자신은 똑같은 감회를 가질 것인가. 문득 한숨을 쉬었을 때, 타다오키의 숨소리가 싹 멈췄다. 타마코는 흠칫했다. 타다오키는 한숨 자다가 다시 타마코를 찾는 일이 자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시 숨을 죽이고 있는 타마코의 귀에 다시 타다오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키리시탄 같은 건 좋아할 수 없어)' 타마코는 스스로에게 타일르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타마코는 스스로도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깨닫지 못했다. 우콘이 타마코의 아름다움에 아무런 놀라움도, 찬탄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에 타마코는 역으로 이성으로서 끌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만하게 자란 타마코의 피는 시집와서 정돈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피는 역시 타고난 것이었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놀라지 않는 우콘을 타마코는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환영 속의 우콘에게 자신을 안기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의식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타마코 자신조차 설명할 수 없는 엉뚱한 형태로 우콘은 나타난 것이다. 타마코는 그날 동틀 무렵 꿈을 꾸었다. 수십 마리의 검은 말떼가 소리도 없이 달려온다.
모든 말이 타마코를 겨냥하고 달려오는 것이다. 타마코는 말떼가 팍팍 눈앞으로 달려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도망치려 해도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소리치려 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맨 앞의 말이 크게 다가왔다. 그때, 쩍 팔을 벌리고 막아서는 남자가 있다. 보니 하츠노스케(初之助)였다. “앗, 하츠노스케.” 하츠노스케는 가만히 타마코를 바라보았다. 맑고 쓸쓸한 눈이었다. 조금 전까지 있던 말은 그림자도 형체도 없다.
“고마워, 하츠노스케.” 하츠노스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하츠노스케는 그저 가만히 타마코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문득 싹 사라지듯 보이지 않게 되었다. 흠칫하는 순간, 타마코는 깨어났다. 하츠노스케의 꿈 따위를 꾼 것은 처음이다. 평소에는 떠올려 본 적도 없다. 하지만 지금 꿈속에서 본 하츠노스케의 쓸쓸한 눈망울이 너무나 또렷해서 역시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성실한 젊은이였다고, 음지나 양지나 가리지 않고 일하던 하츠노스케를 타마코는 떠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하츠노스케가 그립다기보다는 부모가 있는 사카모토성(坂本城)이 그립다는 감정이었다. 하츠노스케는 타마코에게 사카모토성의 정원에 있는 매화나 소나무가 그리운 것과 다름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꿈에서라도 보지 않았다면 떠올리지 않았을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타마코는 꿈을 꾸고 하츠노스케가 무사히 지내고 있는지 생각했다. 말에 쫓긴 꿈 때문인지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하츠노스케는 그 말떼 앞에 막아서 주었다고 타마코는 꿈을 되새겼다. 정말 하츠노스케답다고 타마코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째서 하츠노스케의 꿈 따위를 꾼 것일까.
자신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아버지 미츠히데(光秀)도, 남편 타다오키도 꿈속에 나타나 주지 않았다고 타마코는 생각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부모님께 편지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타마코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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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낭 (匂い袋) 11-2
야헤이지(弥平次)와 하츠노스케(初之助)는 나란히 활에 살을 먹이고 있었다. 사카모토 성내의 활터이다. '쓩' 하고 활시위가 울리고 야헤이지가 쏜 화살이 약간 과녁을 비껴가 꽂혔다. 이어 쏜 하츠노스케의 화살이 과녁의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훌륭하구나, 하츠노스케.” 야헤이지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2월에 가까운 오늘 햇살은 등에 따스하다.
“황송합니다.” “백발백중이로구나.” “아닙니다, 아직 미숙합니다. 야헤이지 님은…” 말을 시작했다가 하츠노스케는 야헤이지를 보았다. “무엇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야헤이지는 하츠노스케를 귀여워하고 있다. 하츠노스케도 야헤이지의 호탕함을 경애하여 야헤이지에게는 때로 거리낌 없는 말을 건넨다.
“무엇이냐? 말하다 그만두지 마라.” “노하시지 않겠습니까?” “때와 경우에 따르지.”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씩 웃으며, “무엇이냐? 말해보아라.” “야헤이지 님은 오린(お倫) 님과의 혼담이 정해지고 나서부터 과녁을 비껴가게 되셨군요.” “뭐야,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거냐.” 야헤이지는 소리 내어 웃으며, “당연하지 않은가! 무엇을 보든 오린 도노로 보인다. 과녁도 오린 도노의 검은 눈동자로 보인다. 도저히 맞을 리가 없지.” 태연하게 말했다.
“과연, 야헤이지 님은 행복하시군요.” 한쪽 어깨를 드러낸 하츠노스케의 불거진 근육에 얇게 땀이 배어 있었다. 하츠노스케는 다시 화살을 매겼다. “너에게는 저 과녁이 무엇으로 보이느냐?” 하츠노스케는 흘끗 야헤이지를 보고 일순 묵묵히 있다가, “과녁은 과녁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팍 눈을 뜨더니 정적 속에 화살을 쏘았다. 활시위가 울리고 화살은 다시 과녁을 통과했다.
“훌륭하다!” 솔직하게 야헤이지는 칭찬했다. “이봐, 하츠노스케. 오타마 도노는 4월에 출산하신다는구나.” “예?” 하츠노스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오타마 도노가 아이를 낳으신다는구나. 어제 영주님 계신 곳에 편지가 왔다.” “……” “하츠노스케는 안녕한가 하고 그 편지에 쓰여 있었다더구나.” “야헤이지 님!” 단호하게 하츠노스케는 야헤이지를 보았다.
“무엇이냐.” “놀리지 말아 주십시오.” “뭘 화내고 있느냐.” “야헤이지 님. 그분께서 저 같은 놈의 안부 따위를 물으실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물어오셨다.” 하츠노스케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하고 절을 올린 뒤 훌훌 떠나려 했다. “기다려라! 하츠노스케.” 멈춰 서서 하츠노스케는 자신의 발끝으로 시선을 옮겼다. 짚신을 꿰찬 맨발가락이 붉다.
“놀리는 게 아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너를 놀리겠느냐.” “……” “자, 여기 앉아라. 잠시 할 말이 있다.” 활터 한구석의 큰 돌에 야헤이지는 엉덩이를 걸쳤다. 하츠노스케도 어쩔 수 없이 야헤이지 옆에 앉았다. “오타마 도노가 네 꿈을 꾸었다더구나.” “꿈을요?” “음. 아무튼 말떼에 쫓기고 있는 오타마 도노를 네가 구했다더구나.”
“그것을 편지 끝머리에 적어서 네 안부를 물어오신 거다.” “…믿기지 않습니다…” 타마코의 아름다운 자는 모습을 하츠노스케는 상상했다. 그 꿈속에서 그 타마코를 자신이 구했다니, 아무리 꿈이라 해도 하츠노스케는 믿기 어렵다.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해서 너를 놀리기라도 한단 말이냐?” “……” “만약 거짓이라 생각하면 영주님께 물어보아라.” “……” “이봐, 하츠노스케. 너는 오타마 도노를… 마음에 품고 있지?” “아닙니다, 그런… 당치도 않습니다.”
“되었다. 이봐, 하츠노스케. 나는 네 기분을 잘 안다. 나도 오린 도노가 아라키(荒木) 님에게 시집간 이래 괴로운 심정이었으니까.” 하츠노스케는 야헤이지를 보았다. “그것이 아라키 님의 모반으로 인연이 끊겨 돌아오셨고, 뜻밖에 내가 얻게 되었다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소인은 오타마 도노를 마음에 품고 있지 않습니다.”
“품고 있지 않다면 안 품고 있어도 좋다. 하지만 마음에 두지도 않은 자가 지금처럼 금방 버럭 화를 내겠느냐?” “…그것은…” “좋은 기회니 내가 말하겠다. 오타마 도노가 설령 무슨 불려의 사고로 오린 도노처럼 인연이 끊어져…” 말을 시작하려던 차에 하츠노스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불길한 말씀 마십시오. 오타마 도노는 평생 행복하게 사실 분입니다.”
하츠노스케의 얼굴을 야헤이지는 가만히 보고, “알았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이라 단념하고 있는 거로군. 아니,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인 줄 알면서도 단념하지는 못하겠지. 잊지 못하겠지.” “……” “잊을 수 없는 것이지. 나도 그랬다. 그러니까 말하는 거다. 하츠노스케, 너는 오타에(お妙)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오타에 님요?” 오타에는 2년 전쯤부터 미츠히데의 아내 히로코(熈子)의 시녀가 되어 있었다. 올해 열일곱 살. 살결이 희고 뺨이 통통한 처녀이다. “슬슬 아내로 맞아도 좋을 나이다. 너는 아마 올해 스물셋이 될 터지.” “야헤이지 님, 하츠노스케는 평생 장가들지 않겠습니다. 야헤이지 님도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평생 장가들지 않겠다고?” “예, 장가들지 않겠습니다.”
주군인 미츠히데에게도 유랑의 시절이 있었다. 미츠히데의 사촌인 야헤이지도 미츠히데와 유랑한 적이 있었다. 하츠노스케 자신, 과거에는 한 어민의 자식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은 무사로 등용되어 기마가 허용되고 있다. 지금 시대는 강한 자, 기량이 있는 자가 출세한다. 반대로 힘이 없는 자는 설령 장군의 자리에 있어도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처럼 쫓겨나 버린다.
실력의 시대인 것이다. 좋은 시대라고 하츠노스케는 생각하고 있다. 하츠노스케는 강해지고 싶다. 출세하고 싶다. 타마코의 남편인 타다오키보다 위가 되고 싶다. '(아직 나는 젊다)' 지금 하츠노스케의 가슴은 평소보다 부풀어 있었다. 타마코가 자신의 꿈을 꾸어 준 것이 하츠노스케를 고무했다. 어떤 아름다운 자태로 자신의 꿈을 꾸어 주었을까 하고 하츠노스케는 생각한다. 언젠가 자신은 타마코를 당당히 만날 날이 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쩌면 타마코가 꿈을 꾸어 준 것처럼 타마코를 구하기 위해 타마코 앞에 나타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가슴속은 야헤이지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츠노스케.” 눈을 내리깔고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 하츠노스케를 야헤이지는 안타까운 듯 보았다. “예.” “오타마 도노에 대한 네 마음, 남에게 말하지 않으마.”
“고맙습니다. …그건 그렇고 야헤이지 님. 남의 아내를 사모하는 것은 역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겠지요?” “음,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오린 도노를 사모하는 것을 도리에 어긋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오린 도노가 시집가기 전부터 사모했으니까.” “야헤이지 님, 실은 소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사모했던 분을 무도하게 빼앗겼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견딜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자기 편리한 대로 해석하는 법이다. 역시 남의 아내는 남의 아내,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되는 법으로 되어 있다.” 그렇게 알면서도 누를 수 없는 가슴속의 불꽃을 어떻게 꺼야 할지 스스로는 모르겠다고 하츠노스케는 생각했다. 조금 전에도 타마코가 타다오키의 아이를 낳는다는 말을 들은 순간, 하츠노스케는 현기증이 날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결혼한 이상 언젠가는 아이를 낳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할 수 없는 질투의 감정이 몸을 꿰뚫은 것이다. 타마코가 시집가던 날이었다. 가마에서 내려서서 미동도 하지 않고 들판 저편의 노을을 바라보고 있던 타마코의 모습이 하츠노스케의 눈에 선명하게 박혀 있다. 그날 이래 노을이 지는 것을 볼 때마다 하츠노스케는 신부 모습의 타마코의 아름다운 자태를 떠올리며 가슴을 죄어왔던 것이다.
'(그때는 아직 처녀였는데)' 하츠노스케는 그렇게 생각하며 타다오키에 대한 적의를 은밀히 불태워 왔다. '(강해져야 한다)' 하츠노스케는 벌떡 일어나 다시 한쪽 어깨를 드러냈다. “더 쏠 것이냐?” “예, 조금 더 쏘겠습니다.”
햇살은 따스하다고는 하나 비와호(琵琶湖)를 스쳐 불어오는 음력 1월 하순의 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하츠노스케는 활에 화살을 매겼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쏜 화살은 과녁을 2촌(약 6cm) 정도 비껴가 왼쪽 위에 비스듬히 꽂혔다. 하츠노스케는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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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낭 (匂い袋) 11-3
텐쇼 8년(1580년) 4월 27일 밤, 나가오카(長岡) 근처에 격렬한 뇌우가 내렸다. 하늘을 쪼갤 듯한 번개가 치고 쏟아붓는 듯한 비가 내리는 가운데, 타마코는 쇼류지성(勝竜寺城) 안에서 첫아이를 낳았다. 눈이 크고 포통포통한 사내아이였다. 타다오키는 사내라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뇌우 속에서 태어났으니 라이노스케(雷之助)라 이름 짓겠노라” 했다.
후지타카(藤孝)는, “벼락은 떨어지는 법이다. 이 아이의 운이 떨어질 것 같아 불길한 이름이다. 쿠마치요(熊千代)는 어떠냐. 강해 보이고 천대 팔천대(千代八千代)의 치요(千代) 자가 붙으면 운수도 좋다.” 이렇게 해서 뇌우 치는 밤에 태어난 사내아이는 할아버지 호소카와 후지타카에 의해 아명이 쿠마치요라 지어졌다.
---- 영원토록 강건하거라 쿠마치요라
이름 지어 비옵나니 신령님 앞에 ---- 후지타카는 직계 손자의 출생을 축하하여 탄자쿠(短冊)에 시를 적었다. 이 쿠마치요가 나중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요이치로(与一郎)라 칭하고 성인이 되어 타다타카(忠隆)가 된 것이다. 쿠마치요가 태어나고 50일 남짓 지났다. 6월도 중순의 흐린 날이다. 유모 코우(こう)에게 쿠마치요를 안겨주고 타마코는 정원에 나와 있었다.
오랫동안 노부나가에게 저항했던 오사카의 혼간지 코사(光佐)를 비롯해 종도들도 화친을 맺고 물러났고, 후지타카는 탄고(丹後)를, 미츠히데는 탄바(丹波)를 대강 평정하여 요즘은 화창한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코우는 체격이 좋은 여자로 순박했다. 교토의 상가 출신으로 성품도 부드러웠다.
쿠마치요는 코우의 품 안에서 타마코를 보고 방긋 웃었다. 타마코는 두 손을 내밀어 쿠마치요를 받아 안고, “오코우, 물러가서 좀 쉬어라.” “하지만…” “괜찮다, 물러가라.” 타마코는 조금이라도 긴 시간 쿠마치요를 안고 있고 싶은 것이다. “예, 그러면…” 기저귀 빨래가 코우는 마음에 걸렸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걸음을 서둘러 물러갔다.
때때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지나가고, 그때마다 성 밖의 대숲이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쇼류지성은 성이라 부르기보다는 절이라 부르는 편이 나을 정도의 작은 성이다. 매미 소리가 요란하다.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자식의 감촉을 품에 느끼면서 타마코는 좌우로 조용히 몸을 흔든다. 쿠마치요를 낳고 타마코의 살결은 더욱 하얗고 더욱 매끄러워졌다.
쿠마치요를 바라보며 내리깔고 있는 그 긴 속눈썹이 때때로 조용히 깜빡인다. '(이 아이가 배 속에 있었을 때…)' 타마코는 몇 번인가 우콘의 환영에 안겼던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무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될 비밀이 가슴속에 있음에 타마코의 마음은 맑지 못하다.
“쿠마치요 님.” 타마코는 나지막이 자기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쿠마치요는 타마코의 목소리에 또 다시 방긋 웃는다. “너의 어미는 못된 어미란다.” 중얼거리듯 타마코는 말한다. 쿠마치요는 가만히 타마코를 바라보고 있다. “너의 어미는 못된 어미란다.” 다시 타마코는 말했다. 자기 마음속에 생각지도 못했던 분방한 정념이 있음을 타마코는 알았다.
그것은 처녀 시절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마음이었다. 육체 속에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때 이래 자신은 우콘을 구하지도 않는데 우콘은 나타나는 것이다. “너의 어미는 추악한 어미란다.” 또다시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이다. “무엇이 추악하단 말이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났다. 타다오키의 동생인 톤고로 오키모토(頓五郎興元)였다. “아, 톤고로 님.”
자신도 모르게 타마코는 얼굴을 붉혔다. 자신의 비밀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쿠마치요.” 톤고로는 두 손을 내밀었다. 타마코가 쿠마치요를 넘겨주려 했다. 그때 타마코의 손과 톤고로의 손이 닿았다. 순간 톤고로는 흠칫하며 손을 뺐다. “앗!” 자신도 모르게 타마코는 소리를 질렀다. 만약 타마코가 손을 완전히 떼었더라면 쿠마치요는 땅에 떨어질 뻔했다.
“왜 그랬습니까?” 겨우 쿠마치요를 다시 안아 들고 타마코는 조금 나무라듯 말했다. “아니, 미안합니다.” 톤고로는 얼굴을 붉혔다. “앞으로는 쿠마치요를 안겨드리지 않겠습니다.” 타마코는 부드럽게 오키모토를 흘겨보았다. 오키모토는 매일처럼 쿠마치요를 안으러 오는 것이다. 평소에는 유모의 손에서 전달받지만, 오늘은 타마코의 손에서였다.
톤고로는 타마코의 손에 닿은 순간 반사적으로 자기 손을 빼 버린 것이다. 톤고로 오키모토에게 타마코가 어떤 존재인지 타마코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니, 안게 해주세요.” 톤고로에게 쿠마치요는 그야말로 타마코의 분신이다. 쿠마치요의 부드러운 몸은 톤고로에게 타마코 자신이다. 쿠마치요를 안을 때마다 톤고로는 이 갓난아이가 타마코의 태내에 열 달 열흘 동안 있으며 그 아름다운 몸속을 통하여 태어났음을 상상하는 것이다.
“오키모토 님은 정말 아이를 좋아하시는군요. 그럼 이번에는 떨어뜨리시면 안 됩니다.” 타마코는 신중하게 쿠마치요를 건넸다. “그래, 쿠마치요, 오늘은 큰일 날 뻔 했구나.” 오키모토는 쿠마치요의 하얀 뺨에 뺨을 비벼댔다. “형수님. 이 쿠마치요를 이 오키모토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부탁드립니다. 아이는 또 태어날 텐데.” “그렇게 갓난아이가 좋으시다면 톤고로 님이야말로 어서 결혼하십시오.” “아니, 장가들어서 아이를 낳느니 얻는 편이 손쉽지. 그렇지, 쿠마치요야?” 열여섯 살치고는 오키모토는 조숙하다. 체격도 형인 타다오키를 능가하고, 마음도 타다오키처럼 직정형이 아니다. 자기 기분을 교묘히 숨길 줄 안다.
타다오키처럼 섬세하고 다정한가 싶다가 욱해서 격노하거나 비정해지거나 하는 것과는 다르다. 얼핏 천진난만해 보이면서도 톤고로 오키모토는 마음 밑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톤고로 님은…” 타마코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어라? 쿠마치요, 방해꾼이 왔구나.”
못 쪽을 보고 톤고로는 입을 내밀었다. 타마코가 돌아보니 키요하라 카요가 그 날씬한 모습을 연못물에 비추며 걸어오는 참이다. “오키모토 님.” 타마코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엇입니까?” “카요 님은 아름다운 분. 그렇게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래서요?” “오키모토 님과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치사해, 치사해. 치사합니다, 형수님.”
카요는 단아하게 다가와, “어머, 시끌벅적하네요” 하며 두 사람의 얼굴을 동시에 보았다. “이봐요, 카요 도노. 내가 쿠마치요를 원한다고 했더니 형수님은 장가들어서 아이를 낳으라 하오. 내가 장가드는 것보다 얻는 편이 수고가 안 든다 하니 카요 도노를 보고…” “아니, 오키모토 님, 안 됩니다.” 타마코가 당황했다. 오키모토는 일부러 천진한 척하며, “이봐요, 카요 도노. 카요 도노와 이 내가 어울린다고 형수님이 말씀하셨소.”
“그것이 어째서 치사한 일이 됩니까?” 카요는 미소를 지었다. “형수님은 쿠마치요가 아까워서 나더러 장가들라 하시는 것이오. 치사하다고 생각지 않소?” 카요는 재미있는 듯, “치사한 것은 오타마 님이 아니라 오키모토 님. 하필이면 장남을 원하시다니…” “그렇소? 하지만 형님과 달라서 얹혀사는 나에게 장가들 능력이 있겠소?” “있고말고요.” “그럼 카요 도노는 내게 와주시겠소?”
갑자기 오키모토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그 오키모토의 얼굴을 카요는 가만히 보고, “그러겠어요.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하고 카요도 진지하게 말했다. 그 순간 오키모토는 소리 내어 웃으며, “카요 도노, 카요 도노는 심술이 궂구려. 그렇지, 쿠마치요? 카요 도노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놀리고 있단다. 어찌할까, 쿠마치요 님?” “쿠마치요 님은 저에게…”
카요는 능숙하게 받아 안고, “타다오키 님이 깨어나셨습니다” 하고 타마코에게 말했다. 타다오키는 약간 배탈이 나서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아, 깨어나셨습니까?” 타마코는 옷깃을 매만지고 오키모토에게 절을 했다. “그럼…” “형수님.” 떠나려는 타마코를 톤고로는 용건이 있는 듯 불렀다.
“아직 무슨 할 말이 있으신지…?” “이 쿠마치요는 힘들다 치더라도 다음에 태어날 아이는 이 오키모토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또 그런 말씀을… 네, 네, 드리지요, 그러니 지금은 이만…” 오키모토의 마음이 깊다는 것을 카요는 눈치채고 있어도 타마코는 모른다. 타마코의 둘째 아이인 오키아키(興秋)는 결국 오키모토의 양자가 되었는데, 그것은 후일담이다.
서둘러 떠나는 타마코의 소매 끝에서 향낭이 떨어졌다. 오키모토는 그것을 주워 타마코를 부르려다 그만두었다. 향낭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향기에서 오키모토는 타마코의 향기를 느꼈다. 오키모토는 향낭을 재빨리 품에 넣었다. 그것을 마루로 나온 타다오키가 보고 있었다는 것을 오키모토는 눈치채지 못했다. 타다오키의 짙은 눈썹이 씰룩 올라갔다.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상권)
● 향낭 (匂い袋) 11-4
“깨어나셨습니까?” 쿠마치요를 안은 키요하라 카요를 뒤따르게 한 타마코가 툇마루에 선 타다오키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타다오키는 험악한 얼굴을 정원으로 향한 채 대답을 하지 않는다. 카요는 쿠마치요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살짝 허리를 굽힌 뒤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떠났다.
“복통은 아직 낫지 않으셨습니까?” 타마코는 툇마루에 올라앉아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것에는 대답하지 않고 타다오키는 말했다. “무엇을 톤고로와 이야기하고 있었느냐?”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톤고로 님과 말입니까?” 타마코는 의아한 듯 남편을 올려다보며, “톤고로 님은 쿠마치요가 귀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키모토가 쿠마치요를 원한다고 했던 말은 타마코는 하지 않는다.
타다오키의 기분이 좋을 때라면 웃고 넘길 일도, 일단 불기운이 오르면 솔직하게 통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타마코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뿐만은 아닐 터!” “그것뿐입니다.” “거짓말 마라! 쿠마치요가 귀엽다고 한마디 했을 뿐이라고?” “아니, 왜 이리 화를 내십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쿠마치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
“아직 배가 아프십니까? 그럼 배를 문질러 드릴 테니…” “필요 없다! 타마, 너는 내가 준 향낭을 가지고 있느냐?” “예, 여기에.” 하며 타마코는 그 고운 손을 왼쪽 소매에 넣었으나, “어라? 없습니다.” 하며 오른쪽 소매에 손을 넣었다. 향낭은 타다오키가 교토 도성에 나갔을 때 선물로 사 온 비단 짜임의 훌륭한 물건으로, 타마코는 소중히 항상 가지고 다니던 것이었다.
“보아라, 없지 않느냐. 어디에 잊어버렸느냐?” “…분명 조금 전까지…” “너는 내가 준 향낭을 어째서 소중히 다루지 않느냐?” 방금 타마코가 향낭을 떨어뜨린 것을 보았으면서도 타다오키는 심술궂게 추궁했다. “타마!” “예.” “톤고로를 불러라!” “톤고로 님을요?” “놈이 너의 향낭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 “없다고는 말 못 할 것이다. 톤고로를 불러라!” 타마코는 일순 눈길을 떨구었다가 받아치는 듯한 시선을 흘끗 타다오키에게 던지고 방으로 돌아가는 타다오키 뒤를 따랐다. 심부름 간 시녀와 함께 톤고로가 나타날 때까지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았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느릿느릿 톤고로 오키모토가 방으로 들어왔다. 타다오키는 흘끔 톤고로를 보았다. 타마코는, “지목하여 불러내어 죄송합니다” 하고 두 손을 짚었다.
“천만에요, 천만에.” 밝게 웃으며 손을 옆으로 저어가며, “기분이 언짢으시군요, 형님” 하고 톤고로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톤고로!” “뭘 그리 화내고 계신지.” “너는 타마의 향낭을 가지고 있지?” “향낭요?” “시치미 떼지 마라. 향낭이다.” “향낭이라 하면 이것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머! 톤고로 님, 그것은…” 톤고로는 품 안에서 조금 전 주운 비단 향낭을 덤덤히 꺼내어 냄새를 맡았다. 타마코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그것 보아라. 타마, 톤고로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어째서 그것이…” “네가 톤고로에게 주었겠지.” 비꼬듯 말하며 타다오키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뭐요, 형님, 보고 계셨군요. 아까 형수님이 떨어뜨리셨을 때 내가 주운 것을.” 톤고로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오냐, 보고 있었다, 톤고로!” 하고 타다오키는 날카로운 어조로 받았다.
그 타다오키를 보는 타마코의 눈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래서 화내고 계신 거요, 형님은?” “어째서 타마에게 향낭을 돌려주지 않고 네 품에 넣었느냐?” “어째서라 생각하시오?” “톤고로, 너는 타마를…” “형수님을요?” 주춤하지 않는 오키모토의 대담한 눈빛에 타다오키는 단호하게,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형수님이라 생각하고 있소.” “그것뿐이냐?” “그것뿐이지 달리 어떻게 생각한단 말이오?” “그럼 왜 그 향낭을 소중한 듯 품에 넣었느냐?” “하하, 그렇군요.” 톤고로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큰 소리로 웃으며, “형님은 내가 형수님을 사모해서 그래서 이 향낭을 소중히 간직했다고 생각하시오? 참나, 이거 유쾌하군요.”
타마코는 흠칫하며 톤고로를 보았다. “그럼 왜 돌려주지 않았느냐?” “그건 말할 수 없소.” “어째서냐?” “부끄러우니까요.” 턱수염을 획 한 가닥 뽑고 톤고로는 씩 웃었다. “톤고로, 너는 형인 나를 바보로 만들 셈이냐?” “바보로 만들 생각은 없소.” “그럼 왜 말을 못 하느냐?” “그렇게 고압적으로 나오시면 말하고 싶어도 말을 못 하지요.” “어째서냐?”
“남녀 간의 이야기에는 기분이라는 것이 중요하오, 형님. 좀 더 점잖게 물어보시면 대답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만.” “그럼 점잖게 묻겠다. 어째서 그 향낭을 소중히 간직했느냐?” “그렇게 정색하고 물으셔도 난처하오만. 이봐요, 형님. 형님이 만약 독신이고 말이오,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는 것을 주웠다면 나도 모르게 황홀해지지 않겠소?” “……”
“돌려주고 싶지 않겠지요. 선녀의 옷도 필시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겠지요.” “게다가 나에게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소.” 묵묵히 듣고 있던 타다오키의 표정이 크게 바뀌며, “누구냐, 그 여자는?” “비밀이오.” “누구냐? 말해라.” “…멋없군요, 형님은.” “말하지 못할까!” “말하지요, 말할 테니…” 흘끗 타마코를 보고 톤고로는 머리를 긁적이며, “카요 도노이오” 하고 내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카요 도노인가? 자, 앉아라. 하지만…” “문득 카요 도노에게 이 향낭을 주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오.” “참말이냐?” “참말이오.” 화난 듯이 톤고로는 타마코를 보았다. 불꽃같은 그 격렬한 시선을 타마코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호소카와 가라샤 부인 (상권)
● 탄고의 바다 (丹後の海) 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