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출간되는 자기 계발서나 인생 지침서는 독자들에게 세상일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긍정적으로 리모델링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긍정의 힘이 세상과 개인을 변화, 발전시키고 더 나은 삶을 가져온다고 설득하면서. 그런데 여기, 주어진 틀 안에서 생각하고 살아가는 긍정으로는 삶과 역사를 한 치도 발전시킬 수 없다고 반박하며, 불안정과 상실의 두려움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현실을 여는 ‘부정의 힘’을 강조하는 철학자가 있다.
인류 사상사에서의 세계사적 스캔들을 보자. 우주관을 송두리째 뒤흔든 갈릴레이, 창조의 비밀을 과학으로 증명한 다윈, 삶을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이 노동과 경제임을 밝힌 마르크스, 잠자는 무의식을 깨워 불러낸 프로이트. 이들은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긍정의 세계에 도전하여 그것을 부정・비판하였으며, 역사가 흐른 뒤 그들의 부정은 이제 우리의 긍정이 되었다.
이제까지 소소한 일상에서 깊고 큰 철학을 건져내는 글을 써온 깐깐한 철학자 김범춘 씨가 『철학, 세상과 소통하기』를 내면서 이전보다 더 호되게 가벼운 세상과 중심 없는 대중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며 질타하고 있다. 총 4부에 걸쳐 62편의 글이 실린 이 책은 그 내용의 깊이로 보면 무게감이 엄청나다. 위기에 처한 가족과 부부 관계, 경제적 불평등과 자원의 평등, 현대인의 분노와 우울증, 감각적 유머가 판치는 방송 오락프로그램, 극히 개인주의적인 인간 관계, 가식적인 정치인과 경제인의 행태 등 사회문제와 일상사의 근원을 파헤치는 저자의 글은 엄중하며 비판의 날이 날카롭다.
근래 보기 드물게 필력이 센 철학자로 평가받는 저자의 글은 우선 사람들의 상처를 건드려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긍정에 익숙한 독자들은 저자의 글에서 행복감과 즐거움보다는 뭔가 거슬리고 기분이 상하고 거부감이 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부정’의 과정에서 상처받는 사람도 있고, 자신을 깨닫는 사람도 있음을 잘 아는 그는 독자들을 값싸게 동정하거나 하지 않는다. 상처 자리에 새 살이 돋듯, 상처입은 마음은 자기 부정의 과정을 거쳐 정신적인 변화와 성장이라는 새 살이 돋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자신과 남의 인간적 삶을 위해 강함을 꿈꾸는 사람’이 되자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한다.(책의 내용과 문체가 따로 놀지 않는 것도 큰 특징이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저자의 눈이 있다면, 입으로는 ‘잘난 놈들, 정치꾼들, 교양 있는 척하는 놈들’이라고 지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저자는 누구나 강자가 되고 싶어하는 세상에서 강호의 고수(高手), ‘센 놈’을 얘기한다. 그가 말하는 센 놈은 서양에서의 강자(the strong), 즉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포괄적 의미로는 뭐든 다 할 수 있는 놈이 가장 센 놈이다. 천한 강자들이 하지 않는 일, 즉 약자를 위해 자신을 나누고, 더 나아가 약자가 없는 세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비현실적인 꿈을 가진 사람이다. 예컨대 의사였던 혁명가 체 게바라처럼.(‘누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말하는가?’, 273쪽, 276쪽) 또 뭔가를 들어서 아는 놈보다는 앎을 처음 만들어낸 놈이 더 세고, 앎을 문자로 남기는 놈이 더 센 놈이다. 그리고 자신의 지식과 문제의식을 실천으로 연결시켜 문제를 해결하는 놈이 가장 센 놈이며, 이것은 저자가 추구하는 진정한 강자의 모습이다.(‘말과 문자를 넘어서’, 255쪽)
일상을 바라보는 그의 삐딱한 시선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가 보기에, 가족 형태가 다양화되고 가족 관계가 해체되고 있는 이 시대에 가족 관계는 이해관계가 ‘없는’ 인간들의 관계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색다른’ 인간들의 관계이다. 사람들은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속내를 숨기고 얘기하지만, 가족 위기의 근원은 경제적인 문제일 경우가 많음을 저자는 날카롭게 파헤친다.(‘가족이라는 굴레의 비밀’, 21~22쪽) 돈 있는 남자와 가난한 남자 사이의 타협의 산물로 등장한 일부일처제는 오늘날 이혼을 합법화함으로써 사실상 일부다처제와 다름없다. 능력 있는 남자는 삼혼사혼을 하면서 실질적으로 일부다처제를 행하고 있고, 엄청난 이혼 위자료를 챙길 수 없거나 이혼으로 경제적 형편이 더 악화되는 경우 여성들은 남성들의 외도를 용인해야 하는 고통스런 현실에 처해 있다.(‘일부일처제의 위기’, 175~177쪽)
마치 주군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신하처럼 입 다물고 감옥에 다녀오는 정치꾼들은 한결같이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선거철 정치꾼들은 나라를 위해 몸 바치겠다는 최상급의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건 선의의 거짓말이 아니라, 뿌리부터 악의적인 거짓말이다. 나와 남에게 이익이 되는 거짓말이 있다면, 그건 선의의 거짓말이 아니라 봉사 같은 선의의 행동으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선의는 없다!’, 300~303쪽)
천박함이 필수조건인 오늘날 소비 사회는 진지한 고민을 하는 주체적 인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학 강의마저 가벼운 농담과 오락이 차지하고, 연예・오락 프로그램에는 가학적인 말장난이 판을 치고, 인터넷을 누비는 누리꾼이나 댓글꾼, 한마디꾼은 엄청난 지적 에너지와 비판적 열정을 지닌 열혈 사회 구성원처럼 보이나, 그 속은 참으로 허전하다. 저자는 천박함의 시대에 천박해지는 걸 천박하다고 하기보다는, 천박함의 시대가 천박하다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을 천박하다고 고백해야 천박함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한다.(‘천박함의 시대’, 224~227쪽)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위로가 더없이 따뜻한 강자의 철학”
저자의 시선이 가난한 사람, 약자에게 머물면 사회 개혁을 말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강건해지고, 그들의 마음을 달래는 위로와 좌절하지 말라는 격려는 아주 따뜻하다. 자본주의에서 경제적 불평등은 사회적 부자유로 이어지고 결국 계급 차이로 굳어진다. 사람들은 평등을 얘기하면서 기회의 평등을 마치 금과옥조인 양 읊조린다. 그러나 평등은 야만적인 운수(brute luck)까지 문제 삼아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원의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 자원을 평등하게 가진 사람은 주어진 기회를 활용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천부적인 재능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불평등까지 고려해서 사람을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마르크스의 좌파적 평등이다. 저자는 진정 평등한 사회를 바란다면, 자본주의 자체를 거부할 것을 주장한다. 그래야 달동네 아이가 “아빠, 우리도 대치동에서 살 수 있을까요?” 하고 묻는 말이 실현 가능한 물음이 될 것이다.(‘우리도 대치동에서 살 수 있을까’, 29~35쪽)
일반인들은 우울증을 무슨 큰 잘못 있는 우울한 사람이 걸리는 병으로 안다. 그러나 우울증은 도덕적이고 양심적이고 소심한,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인간적인 질병이다. 뻔뻔하고 거리낌없고 사악한 인간들은 실제로 우울증에 잘 걸리지 않는다. 정치인이나 대기업 총수들처럼. 저자는 대담하게 제안한다. ‘뻔뻔해지자, 더러워지자, 이기적으로 살자, 무관심하자,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도둑놈들을 친구하자.’ 그리고 마음의 병, 우울증이 없는 세상에 살자고 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병, 우울증’, 209~214쪽)
그리고 저자는 사람 관계에서, 취업이나 학업 등 일상에서 좌절을 겪는 척하며 자신과 주변 사람을 속이는 사람들에게 어쭙잖게 좌절 연기를 하지 말고,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여 그에 맞춰 자존심을 낮추고, 현재 자신의 실력과 조건에 맞는 목표를 세우라고 따끔하게 충고한다.(‘좌절 연기 그리고 좌절 대처법’, 214~218쪽) 그렇다면 사회적 약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먼저 자신부터 남의 배려를 요구하지 않을 만큼 튼튼해지고 자립의 힘을 키워야 한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이 살아가는 자존(自存)과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존(自尊)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아닌 남까지도 자신의 세계 속에 품어 안아야 할 것이다.(‘누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말하는가?’, 276쪽)
“철학자 범춘 씨, 과연 어떤 사람이길래 펜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가?”
기본에 충실한 사람과 학생들을 좋아하는 지은이가 스스로 밝힌 본인의 기본 이력은 이렇다.
김범춘 : 기본-술자리에서 술 마시며 대화하기/제 할 일을 다함/되도록 남에게 도움이 되고자 함. 선택사양-꼭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됨/등산을 함께 할 수 있으면 좋음/남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고민하는 사람은 우대함. 덤-나이와 능력에 맞게 돈을 지출함/외모와 능력을 우선하지 않음(‘기본은 기본이다’, 348쪽)
소갈비 한 대에 7,500원이라는 음식점의 광고를 철썩같이 믿고 돼지갈비인 줄 모르고 사는 일상인이며, 아내와 아들이 아프지 말기를 바라는 건 자신이 불편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솔직히 털어놓는 남편이며, 개학・방학・개학・방학의 네 개의 시간대로 사는, 가르치는 기쁨에 새 학기를 늘 기다리는 천생 선생이다.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글을 쓸까봐 두려워하며 글을 쓰는 소심한 교수님이며, 서울 북부의 불암산・수락산・도봉산・북한산에 오르기를 즐기는 산 타는 사람이며, 김수영 시인의 시를 즐겨 읊는 김수영 시인의 팬이며, 소주 ‘참이슬’보다는 ‘처음처럼’을 잘 마시는 술 좋아하는 사람이다.
인연은 전면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그는 일상의 작은 고민도 나누고 맛있는 것, 힘든 일을 함께하는 인간 관계를 추구하면서 상처받는 ‘외로운’ 사람이다. 희망의 인연을 심기도 어렵고 사람에게서 절망을 배우는 일도 하고 싶지 않은 그가 할 일은? 바로 여기서 철학을 시작하는 철학자이다.(‘사람살이’, 359~360쪽)
*덧붙임: 주변의 학생들에게 선물주기를 좋아하는 편이나 선물받기를 반기지는 않는 저자가 그나마 좋아하는 선물은 쪼잔하지 않게 ‘뭘 마이 미기는 거’, 바로 뭘 먹고 나서 기꺼이 계산하려는 사람의 ‘계산하기’ 선물이다. 혹시 지은이께 선물하고픈 분이 있다면, 언제 한잔 하거나 밥 한 끼 할 때 주저하지 말고 기분 좋게 계산하시라. 선물은 먹혀들 것이고, 다음번에 반드시 대가가 돌아올 것이다. 뭘 마이 미기는 걸로!(‘선물과 뇌물 사이’, 342쪽)
차례
머리말 : 부정적 사고의 힘
제1부 무리짓기
가족이라는 굴레의 비밀 / 당신의 짐은 얼마나 됩니까? / 우리도 대치동에 살 수 있을까
주류는 말이 없다 / 눈은 말한다 / 용서하지 않으리! / 종교와 미신 그리고 인간
누굴 존경하세요? / 동창회, 앨범, 그리고 옛사랑 / 성공과 구멍 난 양말 혹은 낡은 구두
우연의 힘 / 부정어법의 속내 / 습격의 본능 / 노마디즘
제2부 선택하기
둘이면 족하다 / 배워야 하는 까닭 / 이성을 거부하라! / 나이를 먹다 / 무두질과 담금질
범춘 씨의 하루 / 좋은 인상 남기기 혹은 남 속이기 / 삶의 계 / 타인의 힘
차선과 차악의 미덕 / 수 또는 도표의 덫 / 꽃을 주세요 / 일부일처제의 위기
제3부 소통하기
내 안의 남 / 당신은 누구신가요? / 지루함은 지루하지 않다! / 인간의 조건/ 분노에 대하여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병, 우울증 / 좌절 연기 그리고 좌절 대처법/ 알고 모르는 일
천박함의 시대 / 감각의 과잉 / 유머의 우울함/ 가장 사실적인 것이 가장 환상적이다
준비된 사람과 행운 / 공동선의 이상:새해 인사를 겸하며 / 말과 문자를 넘어서/ 삼류 인생
잘못된 믿음으로 살아가다 / 누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말하는가?
제4부 인간되기
현존과 부재 그리고 차별성 / 순수의 함정 / 미인과 남자 / 선의는 없다!
아니마와 아니무스 / 일상의 반복에서 발견하는 행복 / 봄꽃을 곁에 하고서
시간과 백지 / 접속사의 진실 / Sie wissen das nicht, aber sie tun es / 명절증후군
선물과 뇌물 사이/ 소갈비 한 대 / 기본은 기본이다 / 체력, 정신력 그리고 인간됨
등산화 길들이기 / 사람살이
지은이
지은이 김범춘
1962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에서 사회철학 전공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건국대・서울시립대・춘천교대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학술단체협의회 대외협력위원장, 맑스코뮤날레 총무팀장으로 일했고,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연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혼자 쓴 책으로 『철학의 눈』이 있고, 같이 쓴 책으로 『스무 살을 위한 철학 청바지』, 『사회를 보는 새로운 눈』, 『박물관에서 꺼내온 철학이야기』, 『철학의 명저 20』 등이 있다. 같이 옮긴 책으로는 『실용논리학 입문』이 있으며, 논문으로 「문화철학에 관한 이데올로기적 접근」, 「맑스의 이데올로기론에 관한 연구」, 「유토피아와 이데올로기」 등이 있다.
첫댓글 일반철학서로써 읽어 볼 만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대개, 많은 사람들이은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불편해합니다. 그 불편함의 근저에는 어렵다라는 것이지요 그런의미에서 '철학, 세상과 소통하기'와 같은 책은 만만하게 볼수 있는 철학에세이입니다.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