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의 이름이 <일본서기>에 처음 나오는 것은, 케이코오(景行)기 27년 2월, 히가시노쿠니(東國)에서 돌아와서, '에미시' 지방을 '정벌하였다'고 보고하는 기사이다.
케이코오기에 의하면 케이코오의 붕년은 케이코오 60년. 그 다음의 세에무(成務)천황의 재위 년수가 60년, 츄우아이(仲哀)의 재위가 9년, 이것만으로도 102년이 되는데, 다케우치노스쿠네의 이름은, 그 뒤 진구우(神功) 섭정 69년간을 거쳐, 오오진(應神) 10년 4월조까지 나타나고 있으므로, 가령 히가시노쿠니에서 돌아왔을 때를 스무살로 하더라도, 그는 205세의 장수를 누린 셈이 된다.
물론 이런 것을 요즘 진짜로 믿고 있는 사람은 없다. 이와 같은 모순은, <일본서기>가 완성되었을 때(720년)의 그 자체가 아니라, 후세에서 임의로 손을 댄 것을 웅변하는 이야기의 한 사례가 되는데, 여기에서는 그것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지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이 인물은 대단히 의문에 둘러싸인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나의 생각이어서 단정할 수 있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지만, 타케우치노스쿠네는 아마도 진구우황후의 친아버지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본서기>에는 진구황후는, 오키나가스쿠네노오오키미(息長宿禰王)의 딸로 명기되어 있다. 그러나, 200살 이상 살아있었다고 하는 전설의 인물 '타케우치노스쿠네'가 특정한 개인의 이름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이 진구우황후의 아버지라고 되어 있는 '오키나가스쿠네노오오키미'를 이 경우 '타케우치노스쿠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근거는 '스쿠네(宿禰)'라고 하는 단어에 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밝히기로 하겠다.
'타케우치노스쿠네대신 모래마당에 앉아, 신의 말씀을 청하다'(츄우아이기), '즉 타케우치노스쿠네에게 명하여 가야금을 뜯게 하시다'(진구섭정 전기·츄우아이 9년 3월)등, 다케우치노스쿠네는 진구황후가 신탁을 할 때에는, 반드시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 <일본서기>와 <고사기>의 어디를 찾아봐도 시집간 딸인 황후를 이 정도로 따라다니는 아버지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소가씨의 본질이기도 하다.
타케우치노스쿠네가, 이른바 신탁의 장본인인 황후를 설득하는 장본인이었던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일의 발단이 타케우치노스쿠네에게 있는 것은 확실하다.
쿠마소정벌에 나서는 츄우아이천황에게 신탁을 주는 것처럼 한 것은 그였고, 신라를 공격하라고 하는 황후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던 츄우아이의 의문의 죽음도, 타케우치노스쿠네에 의한 살해일 가능성은 높다고 나는 보고 있다.
왜 타케우치노스쿠네는 이 정도로 신라를 눈엣가시로 생각했던 것일까? 그의 자손을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