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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문학예술 원문보기 글쓴이: 팔색조이상미
미당 10주기 / 두 아들이 말하는 大시인 서정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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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20세기 한국시의 第一人(제일인)이었으나 한평생 반절은 미쳐 사셨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그렇게 無能力者(무능력자)일 수 없었어요.”(장남 서승해)
“아버지의 시가 우리 마음을 울렸던 것은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가슴으로 쓰신 글이기 때문입니다.”(차남 서윤)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수부룩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매추래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소리...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폭으은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處女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소리. ...
(중략)
(서정주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중에서)
새천년이 저무는 2000년 12월 24일 오후 11시 7분 삼성서울병원. 큰 별이 졌다.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ㆍ1915~2000) 선생이 타개한 것이다. 향년 85세.
당시 문인들은 “20세기 한국 현대문학에 고해진 終焉(종언)”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삼성서울병원측은 “폐렴악화로 전날부터 혼수상태에 빠진 뒤 고령으로 인한 노환까지 겹쳐 고비를 못넘겼다”고 했다. 그해 10월 부인 方玉淑(방옥숙)씨와 사별한 뒤 꼭 74일 만에 세상을 뜬 것이다.
그날 차남 徐潤(서윤) 씨는 형수와 함께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미국에 거주하던 장남 徐升海(서승해) 씨는 귀국하지 못한 상태였다. 윤 씨는 영안실에서 나와 함박눈이 내리는 병원 마당을 거닐었다. 그의 마음에 떠올랐던 것은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일생, 그 뜨겁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당이 1950년대에 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이라는 시였다. 함박눈이 내리는 情景(정경)을 노래한 이 시는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와 그 시대를 절망했던 이들의 꽁꽁 언 마음을 위로하는 시였다. 차남 윤씨의 말이다.
“함박눈을 맞으며 울던 저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음성으로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며 저를 위로하시는 것을 느꼈어요.”
2010년은 미당이 타개한 지 10년째 되는 해다. 그가 마지막을 보냈던 ‘서울 관악구 남현동 1071-11번지’ 家屋(가옥)은 주인을 잃고 버려진 채 세월에, 역사에 사그라져 가고 있다.
현재 두 아들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장남 승해(70) 씨는 美(미)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Raleigh)에서 변호사로, 차남 윤(53) 씨는 미 시애틀 인근 버지니아 매이슨 병원에서 내과 의사로 재직 중이다.
필자는 미국에 사는 두 아들을 수소문했다. 미당의 詩歷路程(시력노정)을 더듬기 위해서였다. 얼마 뒤 답신이 왔다.
<사진 왼쪽부터 미당의 장남 승해 씨와 차남 윤 씨.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역마
미당은 1938년 3월 24일 전북 정읍 출신의 방옥숙 씨와 결혼, 두 해 뒤인 1940년 1월 20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질마재에서 장남 승해 씨를 낳았다. 질마재는 미당의 生家(생가)가 있는 곳으로 여섯 번째 시집 ‘질마재 神話(신화)’로 유명한 곳이다.
승해 씨의 기억 속에 질마재는 “바닷물이 들어오는 아늑한” 곳이다. “석류나무, 감나무, 돌다리가 있고 神仙圖(신선도)에 나올 법한 산이 굽이굽이 이어진 마을”이다. 장남의 이름은 미당이 직접 지었다. 승해 씨의 이야기다.
“제 이름은 중국 신화와 서양 중세 신화에서 유래해요. 신선 한 분이 바닷속에 아주 귀중한 진주를 떨어뜨렸다고 해요. 몇 십년, 몇 백년 바닷가에 앉아 됫박으로 바닷물을 퍼내자 신선이 감동해 진주를 돌려주었다는 얘기입니다.”
미당은 장남의 이름을 손수 짓고 ‘長男 升海의 이름에 부쳐서’라는 시도 남겼다.
그러고는 그래도 고추 달린 녀석이 생겨났기에
머리에 맨 먼저 떠오른 대로
‘升海’라고 이름을 붙여주었지.
바닷물을 뒷박으로 품고 있으란 것이지.
미당은 장남을 낳자마자 만주로 떠난다.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11월 미당은 만주로 가서 양곡주식회사 간도성 연길시 지점에 경리사원으로 입사한다. 처자식을 데려가지 않았다. 3개월 뒤 용정출장소로 자리를 옮겼으나 일본인 소장과 마음이 맞지 않아 일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몇 달 뒤 귀국하고 만다.
젊은 시절, 미당은 驛馬(역마)탓인지 어느 한 곳에 ‘정박’하지 못했다. 제주도로, 해인사로, 금강산으로 바람처럼 흘러다녔다. 중이 되고 싶어 금강산에 찾아가지만 ‘후회할 것 같아’ 하산한 그였다. 그런 아버지를 지켜 본 승해 씨의 이야기다.
“문학청년을 꿈꾸던 제게 아버지는 영웅이셨어요. 제 어린 시절, 아버지의 시 전부를 기억으로 낭송할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20세기 한국시의 第一人(제일인)이십니다. 그렇게 큰 시인이 되기 위해 가족이 고통당한 것은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한평생 반절은 미쳐 사셨습니다. 먹고 사는 일은 아버지나 어머니 모두 그렇게 無能力者(무능력자)일 수 없었어요.”
한평생 반절은 미쳐 살았기에 生前(생전) 미당의 아버지(徐光漢)는 역마가 낀 아들에게 “이 놈아. 넌 사람이 아니다. 뻘(진흙)로 만든 놈이지. 사람이 아니여”라고 말하곤 했다.
일제 치하, 날짐승 시대에 미당은 정처없이 세상을 떠돌았다. 배고픈 시인에게 생계를 맡기기란 불가항력이었다. 게다가 집에는 언제나 배고픈 문우들이 몰려들었다. 없는 살림에 밥상ㆍ술상을 차리는 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차남 윤씨의 이야기다.
“고교생에서 대학생, 중년 문인, 화가, 음악가, 사업가, 심지어 군인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었어요. 아버지는 당신을 찾아온 모든 이를 사심없이 대하셨고 그 사람의 말 또한 의심없이 믿으셨어요. 돌아가시기 전, 많은 제자들이 親日(친일)과 軍部(군부) 협조를 문제삼아 아버지를 외면해도 섭섭함을 입에 안 올리셨어요. 아버지가 제일 싫어했던 사람들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이었는데, 의심할 줄 모르는 아버지는 많은 실망과 상처를 당하셨어요.”
親日의 덫
미당의 첫 시집 ‘花蛇集(화사집)’은 만주 유랑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온 뒤 출간됐다. 그리고 1941년 아내와 아들을 서울로 불러 행촌동 어느 문간방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 시인으로 이름을 알려서인지, 미션계통의 동대문여학교 교사로 자리잡는다. 하지만 1학기를 마치고 동광학교로 자리를 옮겼고, 교사직이 직성에 맞지 않아선지 이듬해 봄, 학교를 그만뒀다. 그런 다음 행촌동에서 연희동, 흑석동으로 옮겨 다니며 ‘옥루몽’ 번역 일로 밥벌이를 했다.
1943년 가을. 미당은 소설가 崔載瑞(최재서)의 요청으로 인문사에 들어가 일본말 시잡지 ‘國民詩人(국민시인)’의 편집일을 호구책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親日派 文人(친일파 문인)으로 지탄받게 된다. 승해 씨의 말이다.
“1943년 무렵, 일본 형사들이 괴롭게 따라다니다가 유치장에 구속되셨어요. 그때 어머니의 이모부가 검사셨는데 그분이 끄집어 냈을 정도입니다. 그런 판국이니, 일본 형사들과 일제 문화 담당자들이 쓰라고 강요해서 일본 징병정책을 찬성하는 시와 글을 쓸 수밖에 없었어요.”
승해 씨는 조심스레 속 얘기를 털어놨다.
“아버지는 중학생 때 일본 기마대 순경들한테 돌멩이를 던졌다가 퇴학당하셨지요. 그 뒤 일본 순경들이 계속 쫓아 다녔습니다. 당시 쓰신 글을 잘 읽어 보면, 진심으로 쓰신 글이 하나도 없어요. 이런 분을 친일파라고 한다면 한국 사람 중에 친일파 아닌 사람이 있을까요? 아버님이 6.25 전쟁 뒤 反共(반공)에 대해선 하도 완고하셔서 아마 좌익 계통 사람들이 트집 잡을 게 없으니까 그 알량한 글을 두고 친일이라 떠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인간의 도리로 볼 때 더이상 돌아가신 분의 영혼을 괴롭혀선 안 됩니다. 제자들 중 反(반) 미당 선동자들이 생긴 것도 유감스러운 일이지요.”
이번에는 차남 윤 씨의 얘기다.
“일제 시대 태어나 제 나라가 없었던, 이십대의 아버지가 호구연명을 위해 ‘국민시인’ 이라는 잡지사에서 6개월간 일하며 몇 편의 친일 시와 산문을 쓰신 일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그 일을 평생 부끄럽게 여기셨고, 자서전을 통해 분명히 잘못된 일이라고 인정하셨지요. 아버지는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시인이셨기에 그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요령껏 처신할 줄 모르셨어요. 많은 경우 아버지의 대답들이 본인에게는 정직하지만 오해 소지가 다분한 대답들이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그때 하신 일들은 분명하게 잘못된 일이고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친일논쟁을 보면서 당시 사회 지도층도 아닌 이십대의 젊은 시인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잘못한 일을 두고 평생 이루셨던 일을 매도하는, 참 잔인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당은 1980년대 자신의 친일행적이 불거지자 ‘從天順日派?(종천순일파?)’란 시를 썼다. 적극적이지도 않고 그저 애매하달 수밖에 없는 글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의 나를
‘친일파’라고 부르는 데는 이의가 있다.
‘친하다’는 것은
사타구니와 사타구니가 서로 친하듯 하는
뭐 그런 것도 있어야만 할 것인데
내게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으니 말씀이다.
‘附日派(부일파)’란 말도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나는 해당되지 않는 걸로 안다.
일본에 바짝 다붙는 무얼 가졌어야 했을 것인데
나는 내가 해준 일이 싼 월급을 받은 외에
그런 끈끈한 걸로 더불어 보려고 한 일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이하 생략)
미치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터졌다. 미당은 피난민 행렬에 끼었다. 미처 가족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시인 趙芝薰(조지훈)ㆍ李漢稷(이한직)과 함께 한강을 넘었다. 승해씨의 말이다.
“그때 할머니와 고모는 정읍으로 피난을 가셨지만 어머니와 저는 서울에 남았어요. 길에서 포도와 참외, 수박을 팔며 3개월 동안 겨우 살았습니다.”
- 전쟁 당시 미당 선생은 어떻게 지내셨다고 하던가요.
“국군이 대구에서 부산으로 후퇴할 때 아버지는 완전히 정신이 돌았다고 해요. 좌우익 추종자들을 재판도 없이 총살 할 때였지요. 從軍(종군) 문인으로 참전하시던 어느 날, 수건으로 눈을 가린 채 트럭에 올라탄 한 청년이 몰래 손으로 수건을 올려 보다가 아버지를 발견하고 ‘서 선생님!’ 하고 고함쳤대요. 그걸 듣고 아버지가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또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수 천 구의 전사자 시체가 길가에 쌓인 것을 보고 완전히 정신이상이 되셨어요.”
미당과 조지훈ㆍ이한직 선생의 피난 이야기는 시인 高銀(고은)이 쓴 ‘1950년대(청하 刊)’라는 책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 고은은 미당의 집에서 살다시피하며 총애를 받던 愛(애)제자였다.
<그날 밤 그들은 한강대교 폭파를 눈으로 똑똑하게 보았다. “모든 번개와 모든 우레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밤이었다”고 서정주는 말하고 있다.
그들은 원효로 4가의 한강 언덕에서 거의 마포 쪽으로 돌아가면서 인파 속을 벗어나 약간 높은 언덕에 이르렀다. 천정이 마련돼 있는 놀잇배가 그 아래로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서정주는 그의 전무후무한 기적의 소뇌 신경작용을 발휘해 떠나는 배에 떨어져 내려 기둥을 잡았다. 조지훈이 다음, 이한직이 마지막으로 떨어졌다. 그들이 노량진 모래펄에 건너갔을 때는 한강 건너는 일이 거의 포기된 채 한강 이북의 피난민들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가족을 남겨두고 渡江(도강)한 미당은 실어증과 환각증세로 자살을 기도하며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리고 9.28 수복 후 서울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완전한 폐인의 모습이었다. 승해 씨는 “그 뒤로 평생 정신병으로 고난 당하셨다”고 했다.
“수복한 뒤 10월 15일쯤 집에 오셨는데, 저는 아버지가 죽었다 살아오신 것처럼 반가웠어요. 그런데 아버진 저를 못 알아 보셨어요. 저는 울지도 못하고 기가 막혔어요. 그러다 12월쯤 다시 피난을 떠났는데 그때 아버지는 완전히 환자였어요. 이런 상태에서 한국 문학사에 최대 작품들이 나온 것은 기적입니다.”
전쟁체험과 詩
마흔의 미당이 1955년 펴낸 제3시집 ‘徐廷柱詩選(서정주시선)’은 그가 경험한 강렬한 전쟁체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동양적 사유’를 담은 1946년 제2시집 ‘歸蜀途(귀촉도)’가 출간된 뒤 9년 만에 나온 시집이었다.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역시 이 시집에 담겼다. 승해씨의 계속된 얘기다.
“‘서정주시선’에 담긴 시만큼 누구도, 이렇게, 한국인의 가슴을 울리는 시들은 없습니다. ‘무등을 보며’, ‘학’, ‘국화 옆에서’도 그 시집에 실렸어요. 그때는 그렇게 알려진 시가 아니지만 ‘풀리는 한강가에서’를 한번 읽어 보세요. 전쟁 직후 한국의 예레미야 先知者(선지자)가 있었다면 서정주 시인의 시가 예레미야의 통곡과 같은 것이에요. 저는 눈물없이 이 시를 잘 읽을 수 없습니다.”
‘풀리는 한강가에서’의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저 민둘레나 쑥니풀 같은 것들
또 한 번 고개숙여 보라함인가
黃土 언덕
꽃 喪輿
떼 寡婦의 무리들
여기 서서 또 한번 더 바래보라 함인가
강물이 풀리다니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강물은 또 풀리는가
차남 윤씨 의 말이다.
“근ㆍ현대 격동기를 산 젊은이로서 아버지의 시 ‘풀리는 한강가에서’나 ‘무등을 보며’를 읽고 위로받던 기억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요. 아버지의 시가 우리 마음을 울렸던 것은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가슴으로 쓰신 글이기 때문입니다.”
미당은 이번에는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난다. 1950년 12월말 전북 이리까지 내려가는 화물차 행렬에 동승했다. 이리에 도착한 뒤에는 소 구루마에 병든 미당을 싣고 다시 전주로 향했다. 하지만 정착하지 못한 채 전주에서 대여섯 번, 광주로 옮겨가 여섯 번 이사를 다녔다.
직장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1951년 전주고 교사로 근무하다 전시연합대학 강사로 일했고 이듬해 광주로 가서 조선대 부교수로 1년간 근무했다. 이마저도 한 자리에 적응하지 못해 1953년 상경, 서울 공덕동에 자리잡았다.
승해 씨는 “하도 유명한 시인이어서 주위 사람이 아량있게 봐줘서 그렇지, 이런 病者(병자)가 직장을 갖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했다.
“정신이상은 收復(수복) 뒤에도 이어졌습니다. 毛允淑(모윤숙) 선생이 운영하시던 文藝誌(문예지)에 아버지 원고료를 받으러 간 적이 있어요. 고료를 받고 버스 정거장에 앉아 잡지를 펼쳤는데, 모윤숙 선생의 수필이 눈에 띄었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耳鳴(이명)에 대한 글이었어요. ‘미당이 자신의 귀에 맥아더 사령부가 보낸 메시지가 들린다고 아우성친다. 이명의 내용인즉, 공산당이 暗號(암호)망을 통해 사람을 다 죽이려 한다’는 것이었어요. 저는 그 글을 읽고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20세기 두보
전쟁으로 몸과 정신은 만신창이였지만 大(대)시인은 시를 놓지 않았다. 뻔뻔스럽게 현실의 고통에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무간지옥에서 부르는 노래는 절절했다.
“전주고 선생을 하시다가 정신병 때문에 못하시고 정읍으로 이사갔던 때가 생각나요. 눈이 펑펑 오던 날, 빨치산 때문에 버스가 산을 못 넘자 오두막 식당 밖 평상에 멍하니 앉으셔서, 하염없이 눈을 바라 보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내리는 눈발속에서는’이란 시는 아마 그 때 쓰신 것 같아요. 돌아가실 때 마지막 말씀도 시 구절의 하나인 ‘괜찮다’였습니다.”
시 ‘上里果園(상리과원)’도 그 즈음에 썼다.
<하여간 이 한나도 서러울것이 없는 것들옆에서, 또 이것들을 서러워하는 微物 하나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서뿔리 우리 어린 것들에게 서름같은 걸 가르치지 말 일이다. 저것들을 祝福하는 때까치의 어느것, 비비새의 어느것, 벌 나비의 어느것, 또는 저것들의 꽃봉오리와 꽃숭어리의 어느 것에 대체 우리가 행용 나즉히 서로 주고받는 슬픔이란 것이 깃들이어 있단 말인가.>(이하 생략)
승해 씨의 계속된 회고다.
“상리과원은 우리 고모부의 과수원이었어요. 외할머니 댁에서 논밭을 거쳐 과수원엘 가던 길이었어요. 아버진 또 그 ‘암호망’ 소리를 듣고 두 손을 예수처럼 쳐들면서 우뚝 서 계셨어요. 그러다 아버지는 다시 외할머니 댁으로 돌아가셨고, 저 혼자 고모집을 향했지요. 고모부가 ‘그 정신에 아직도 시를 쓰느냐’고 묻길래 제가 아버지의 시 ‘상리과원’을 기억으로 낭송했지요. 곁에 계시던 고모님 말씀이 ‘내 오빠같이 큰 시인은 이 세상에 또 없다’고 하셨습니다.
광주에 가서도 이사를 여섯 번 다녔던 것 같습니다. ‘무등을 보며’와 ‘학’이 광주에서 쓴 시들입니다. 한번 다시 읽어 보세요. 詩聖(시성) 杜甫(두보), 李白(이백)이 20세기에 다시 생겨난 큰 작품들입니다.”
서울 공덕동 살구나무집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되자 전주와 광주에서의 피란생활을 접고 서울 공덕동 살구나무집으로 돌아왔다. 그해 9월의 일이다. ‘서울 마포구 공덕동 301번지’.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서른과 마흔의 젊은 미당이 살던 집이다. ‘徐廷柱詩選’과 제4~5시집 ‘신라초’, ‘동천’의 출간도 이 집에서 이뤄진다.
공덕동 집은 ‘살구나무 집’으로 유명했다. 살구나무는 해마다 봄이 되면 꽃을 피웠고 미당은 이 나무를 ‘몇 백살 먹은 귀신’으로 여겼다. 그리곤 “이 늙은 할망구(살구나무)가 나를 제켜놓고 밤이나 낮이나 집 주인노롯을 했다”고 말하곤 했다. 청요릿집 외상값도 호주인 ‘서정주’ 대신 ‘살구나무집 主人前(주인전)’이라고 썼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김학동 교수는 <서정주 연구(새문사 刊)>라는 저서에서 살구나무집을 이렇게 표현했다.
<살구나무집은 그의 가족들에게는 편안한 휴식의 공간으로 소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가족들은 중국집 외상 우동을 진수성찬으로 알고 먹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늙은 살구나무 귀신의 덕분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이 고맙기만 한 살구나무집의 택호를 ‘聽黍堂(청서당)’이라 하였다.>
생전 미당 역시 ‘공덕동 살구나무집과 택호-청서당’이란 산문시를 남겼을 정도다.
<그리하여 이 늙은 살구나무에 꽃과 열매가 다 없어져버린 여름철에는 나는 고 허전하게만 되어버린 내 뜰에다가 잎사귀 사운거리는 소리가 시원한 우리 시굴의 고 수수의 밭을 만들고, 사각, 사각, 사각매양 소곤거리기만 하는 고 수수의 소리를 듣고 지내며, 宅號도 고 뜻으로 聽黍堂이라고 해두었는데, 이것은 물론 고 살구나무 귀신님의 기분에 잘 듣기 위해서 였굽쇼.>
늦둥이 潤(윤) 씨가 태어난 것도 살구나무 집이었다. 1957년 미당의 나이 마흔둘. 장남 승해 씨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윤’이란 이름에 대해 승해씨는 “자꾸 늘어나고 불어나는 것을 원하는 뜻”이라며 “한참 가난하게 살 때의 꿈이었다”고 회고했다. 생전 미당은 ‘차남 潤 출생의 힘을 입어’라는 시를 남겼다.
그러나 1957년 2월 4일
그 아이 윤이 태어나고부터
우리 집 살림은 서서히 자리가 잡히어
부부 사이의 이해도 더 늘어가고,
내 직장의 인내력도 배가하게 되고
저축도 한푼 두푼 더 모으게 되고 하여
말하자면 그 ‘착실한 살림꾼’의 길로 접어들긴 했으니
이게 이 현실을 사는 사람의 복의 입구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승해 씨의 말이다.
“동생이 태어난 것은 제가 열여덟 때였어요. 윤이가 난 뒤로 아버지가 많이 달라지셨어요. 예전에는 신들린 사람처럼 시를 쓰고, 동료 문인과 문학 얘기로 밤을 지새는 줄 모르셨어요. 하지만 윤이 나고부터 많이 달라지셨어요. 사실 중요한 작품 전부가 그 이전에 쓰여진 것들이죠. 윤이는 기억력이 뛰어나 늘 어디 갈 때마다 데리고 다녔어요.”
둘째가 태어나면서 그의 생활도 바뀌게 된다. 늦둥이를 공부시키기 위해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했고 좋아하던 술도 줄여야 했다. 직장에서 웬만한 일도 참고 견뎠다. 차남 윤 씨의 회고다.
“제가 태어난 공덕동은 차도 올라갈 수 없는 꼬불꼬불한 골목길 언덕에 위치한 가난한 동네였어요. 목재와 돌흙담으로 지어진 낡은 집이었는데, 동사무소에서 일하시던 임 선생님과 집 한 채를 반으로 나눠 살았어다. 정원에는 살구나무, 감나무, 대추나무, 오동나무가 있었고 국화와 붓꽃이 많았어요. 비가 오면 지붕에서 물이 새고, 벽도 기운 가난한 가옥이었지요.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한 달에 한 번씩 고기 사주라며 어머니에게 봉급 봉투를 건네시던 생각이 납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고기 한 근으로 조그만 잔치를 했었지요.”
승해 씨는 살구 열매가 너무 시어 먹지 못하고 씨만 모아 동네 약국에 갔다주고 대신 계피를 받아온 기억이 난다고 했다. “공덕동 집 입구에 있던 살구나무와 거실 앞에 있던 라일락 나무는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죽고, 마당 오른쪽 담 옆에 사십여년 된 살구나무가 있어 ‘살구나무집 명맥’을 이었다”고 회상했다.
동국대 교수시절과 남현동 집
미당은 1960년 마흔여섯 무렵 동국대 국어국문과 교수로 취임했다. 동국대 출강은 1954년 가을부터 줄곧 이어졌지만 늦둥이를 보고 3년 뒤 정식 교수가 된 것이다. 젊은 시절, 한 직장에서 1년을 넘긴 곳이 몇 군데 되지 않을 정도로 방랑벽이 심한 그였다. 그러나 모교인 동국대에서 정년(1979년)을 마쳤다. 그렇다고 교수 봉급만으로 살림이 넉넉한 시절이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부모님은 자식들이 궁핍함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셨어요. 어떤 면으로는 아버지의 자존심이 가난을 용납 못하셨는지 모릅니다. 어려웠지만 집에는 항상 손님들이 많았었습니다. 문인과 제자, 예술인들이 찾아와 아버지와 술을 나누며 시대와 인생과 예술을 토론했었습니다. 어머니는 매번 손님들을 치렀는데, 없는 살림에 나물로 안주를 만들어 내시곤 하셨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희생적인 내조가 아니었더라면 아버지는 평생 시를 쓰며 사실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해요.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시인을 아버지로 둔 형과 제가, 그나마 정신적으로 정상인으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어려움을 참으시면서, 시인의 아내로, 두 아들의 어머니로 제자리를 지켰던 어머니 덕이라 생각해요.”
시인 고은이 살구나무집에 거의 살다시피 드나들었고 이호철ㆍ박재삼ㆍ김초혜ㆍ이성교ㆍ문정희 씨 등 문인들이 자주 찾아 저녁을 먹고 막걸리를 마셨다. 미당은 독한 술도 곧잘 마셨지만 나중에는 하루에 맥주 4캔 정도를 마셨다고 한다.
미당은 1970년 3월 공덕동 살구나무집에서 관악구 사당1동(현 남현동)으로 이사간다. 살구나무 집 인근에 무허가 철공소가 생기면서 소음이 요란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시를 쓸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관악구 사당동(現 남현동) 산비탈에 집을 지었다. 그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윤씨의 회고.
“1970년 허물어져 가던 공덕동 집을 떠나 남현동에 있는 ‘예술인의 마을’에 방 세칸짜리 집을 지어 이사를 가게 됐어요. 당시 정부에서 가난했던 예술인들을 위해 포장도 안 된 동네에 마을을 조성, 분양했는데 한푼 두푼 적금을 부어 마련한 새 집으로 이사 가게 된 것이었어요.”
두 아들 모두 미국으로 떠나
장남 승해 씨도 소설가 黃順元(황순원) 선생의 추천으로 1959년 <현대문학>를 통해 등단했다. 또 한 해 앞서 1958년 한국일보 신춘문학 추천에 제일 단편으로 뽑힌 일도 있다. 승해씨는 “아버지는 제가 문학하는 것을 흐뭇하게 여기셨고 제 작품 중 ‘기아’와 ‘무당’을 아주 좋게 생각하셨다”며 “돌아가시기 전에도 계속 글을 쓰라 당부하셨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남은 1963년 결혼과 함께 그해 5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당도 말리지 않았다고 한다. 먹고 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는 미국 캠벨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에서 영문학 석사와 도서관 석사를 받았다. 또 노스캐롤라이나중앙대 로스쿨를 졸업, 법학박사(J.D.) 학위를 받았다.
“영문학을 전공한 이유는 아버지 영향이었던 것 같아요. 뭐든지 문학을 최고로 치는 집에서 문학외에 다른 직업은 시시하게 생각했어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영문과는 그때 미국에서 제일 가는 영문과로 아주 까다로워서 석사만 따고 박사 학위는 못했어요. 도서관학은 직업 때문에 전공했지요.”
승해 씨는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도서관 사서로 직장을 잡았지만 점점 흥미를 잃었다. “도서관학은 암만 잘해봐야 사회에 영향을 줄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흔다섯 무렵,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가 됐다.
“로스쿨 다닐 때를 제외하고 유학 생활 모두를 고학으로 다녔습니다. 방학 때는 체육관과 호텔에서 수위와 벨보이를 했고 대학원에 다니면서는 파자마를 만드는 공장에서 짐을 날랐어요. 나중 유대인 여자 행정관이 저를 귀엽게 여겨, 대학 도서관 조수 일을 맡겼어요. 틈틈이 신문 배달도 했고 한번은 시카고에서 여름방학 동안 하루 16시간씩 일하다가 다리를 다치기도 했어요.
아버지 장례식 때 만났던 무용가 김백봉 여사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우리집 큰 놈이 미국에서 법대를 간다해서 도와주려고 강사노릇을 하고 있다’고요. 제가 로스쿨에 다닐 때 아버지 도움을 받았습니다. 나중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처음 탄 월급으로 아버지에게 금 회중시계를 사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늘 함께 했습니다.”
차남 윤 씨도 공부를 곧잘했다. 경기고를 졸업한 뒤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군 복무를 끝내고 스물여섯 무렵 미국으로 건너갔다. 형이 다닌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뒤 듀크대 의대를 나왔다. 알라바마주립의대 조교수를 거쳐 현재 시애틀 소재 버지니아 매이슨 병원 내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는 엘리티즘(elitism)에 회의를 느끼셨는데, 일류학교를 나와 성공을 하는 것보다 ‘사람구실’을 하며 사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과외열풍이 불 때에도 아버지는 ‘그렇게 공부해서 뭐하니. 그냥 쉬엄쉬엄하라’시며 과외공부를 막으셨습니다. 제가 딱 한 번 과외를 받았는데 수학 성적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었어요. 이러다가 대학에 들어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아버지를 졸랐던 겁니다. 고3 때 폐결핵으로 한 달 간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아버지는 ‘그냥 쉬어라, 쉬었다가 좀 쉬운 대학에 들어가면 어떻겠니?’하셨어요. 제가 서울대에 진학했을 때에도 아버지는 ‘잘했다’는 한마디 뿐이셨습니다.”
차남 윤 씨가 서울대 재학 시절 대학街(가)는 군사정권 타도를 외치는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 역시 시위를 하다 잡혀 경찰서에서 구류를 살기도 했다.
“1977년 데모에 가담했다가 경찰서로 연행돼 하루 저녁 구류를 살고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 일로 대학 당국에서는 아버지를 소환했고 아들 또래의 젊은 교수의 충고를 말없이 듣고 각서를 쓰셨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시인이셨던 아버지가 자식 때문에 고개 숙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당시의 저를 보면서 당신 자신이 중앙고보에서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돼 퇴학 당한 뒤 고향으로 내려가던 생각을 하시지 않았나 싶어요. 그 일이 있고나서 아버지는 저를 유학 보내리라 마음을 먹으셨던 것 같습니다.”
미당은 1929년 仁村 金性洙(인촌 김성수) 선생이 운영하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듬해 광주학생사건의 중앙고보 주모자 4명 중 하나로 지목당해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퇴학당했었다. 그 퇴학이 미당의 삶에 역마를 드리운 첫 始發(시발)이었다.
군사정부 지지 문인으로 낙인 찍혀
독재화로 상징되는 유신정권이 붕괴되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찾아왔다. 미당은 1979년 동국대에서 정년을 마치고 대우교수가 됐고 몇 년 뒤 명예교수가 됐다. 全斗煥(전두환) 대통령이 미당의 시를 좋아했던 것처럼 그 역시 전 대통령을 좋아했다. 미당은 한국문인협회 회장이던 1987년 전두환 정권의 ‘4.13호언조치’를 구국의 결단이라고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동료문인들과 제자들이 그에게서 멀어져 갔고 미당을 대놓고 비난하기에 이른다.
당시 군부세력과의 밀접한 관계는 어떻게 해서 이뤄진 것일까. 승해씨의 얘기다.
“대통령 중에서 아버지를 좋아하신 분은 李承晩(이승만) 대통령과 朴正熙(박정희)ㆍ전두환 대통령이셨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도 전 대통령이 직접 오셔서 한참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아마 한국전쟁 경험이 낳은 완고한 반공정신이 두 분의 공통점이었던 것 같아요. 정치인 중에 아버지를 그만큼 이해하시고 존경한 분은 이승만ㆍ전두환 두 대통령 뿐이셨어요.”
차남 윤 씨는 “군 복무 후 대학에 복학했던 1980년 무렵, 아버지는 당시의 사회갈등과 정치적 혼란을 무척 염려하셨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사람 말을 잘 믿으셨던 아버지는 당시 군부에서 주는 정보만으로 모든 혼란의 저변에 공산주의 세력이 깔려있다고 생각하셨어요. 오직 군사정권만이 공산화를 막을 수 있다시며 군사정권의 지지 연설을 하시겠다고 했어요. 저는 아버지께 ‘군부가 주는 정보만을 믿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잘못이고, 군부에게 이용당하시는 것이고,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하는 것이며, 평생 후회하실 것’이라고 말렸습니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언성을 높이며 설득하고, 홧김에 가출까지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인간적으로도 좋아했던 전두환 대통령의 말을 믿었던 아버지는 결국 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하셨어요.”
미당은 그로 인해 군사정권을 지지했던 문인으로 낙인찍혔고, 그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걸려오는 수많은 협박 전화들과 남현동 집을 향해 날아드는 돌팔매질을 감수해야 했다. 윤 씨의 계속된 말이다.
“아들의 간청을 물리치고 군부의 부탁을 들으신 아버지로 인해 저도 오랫동안 괴로웠어요. 돌이켜 보면 순수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졌던 아버지가 정치꾼들에게 이용 당하셨다고 밖에 볼 수 없어요.”
남현동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1071-11번지. 1970년부터 2000년까지 30년을 산 미당의 마지막 창작 産室(산실)이자 문인들의 사랑방. 제6시집 ‘질마재 신화’과 그의 말년 작품이 모두 이곳에서 쓰여졌다. 미당은 생전 남현동 집을 ‘蓬蒜山房(봉산산방)’이라 불렀다. 곰이 쑥(蓬)과 마늘(蒜)을 먹으면서 웅녀가 됐다는 한국 신화의 원형이 시작된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인 잃은 집은 지난 10년간 버려졌다. 찾아오는 이도 없었다. 필자가 찾은 남현동 집 마당은 무성한 잡초와 마른 낙엽만이 미당의 커다란 餘白(여백)을 채우고 있었다. 대문은 삭아 주저 앉아 버렸고 지붕 위에 잡풀까지 솟았다.
간간히 復元(복원) 얘기들이 나왔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친일과 군부에 附逆(부역)했다는 손가락질 때문이었다. 두 아들 역시 집을 내놓았다.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에 재직할 2003년 무렵 서울시 소유가 됐다. 미당 기념관으로 복원할 계획을 세웠지만 예산상 이유로 지금까지 방치돼 왔다.
두 아들은 남현동 자택을 왜 팔려고 했을까. 아버지의 창작 혼이 밴 공간을 버렸어야 했을까. 미당이 거쳐갔던 서울과 전주, 광주의 집들은 모두 사라지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나마 전북 고창의 질마재 생가와 남현동 집 뿐이다.
승해 씨의 말이다.
“아버지가 자식한테 재산이라 남기신 게 남현동 집 밖에 아무 것도 없어요. 저희들이 그 집을 무상으로 정부에 내놨다면 부모님이 먼저 반대하셨을 겁니다. 아버지 말씀도 ‘나 죽거든 집 팔아서 사는 데 보태쓰라’고 하셨어요. 어머니가 평소 원고료를 조금씩 저축해 모은 돈으로 질마재 생가를 매입한 것은 後代(후대)를 위해 고창군에 기증 하려 마음 먹고 하신 일이었어요.”
윤 씨는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평소 남현동 집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위해 지은 집이니 당신이 돌아가시면 바로 처분해 반반씩 나눠 자녀 교육에 쓰라고 유언을 남기셨어요. 기념관이 필요하다면 고향에 있는 문학관 하나로 족하다고 하셨지요. 처음 서울시가 그 집을 매입해 기념관으로 이용할 계획이었지만, 친일 문제를 들어 반대하는 단체들의 압력으로 지연됐던 겁니다. 미국에 사는 저희로선 그 집을 관리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이미 廢家(폐가)가 된 집을 어찌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내놓았던 겁니다.”
미당의 10주기
미당은 평생 시로 말을 걸었다. 부정당하고 무너지는 날짐승의 시대를 거치면서도 자신의 언어를 잃지 않았다. 집단의 정의가 방해할 때도, 전쟁이 그를 미치광이로 만들 때도, 보수와 진보의 이념이 詩語(시어)를 조롱할 때도, 시인은 편애와 편견을 뒤로 하고 시를 썼다. 세상이 가파르고 다급하게 바뀌었을 망정 가짜 희망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시의 政府(정부)’ 였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그의 시는 여전히 울려퍼진다. 노래불린다.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는 ‘山海經(산해경)’의 새처럼 저승에서도 자신의 언어로 노래 부를 것 같다. 사그라져가는 남현동 집도 그가 세상을 향해 부르는 한 편의 시와 같다. 그는 죽어서도, 떠나가 버린 사람들의 고통을 폐가로 노래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버팅기는 것이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