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圭峰:二는 發起序者는 謂乞食威儀가 離於邪命이니라 是爲持戒이니 戒能資定하고 定能發慧이니 故以戒定으로 發起般若正宗이니라 於中에 有二이니 一은 戒요 二는 定이니 今初라
규봉:(2) 다음 發起序(법문의 동기와 인연을 말하게 된 서문)는 걸식하는 거룩한 모습(威儀)이 삿되게 목숨을 유지하는 것(거지의 구걸)을 떠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계율에 맞는 것(持戒)이 되나니, 계는 능히 定을 돕고 定은 능히 慧를 발하므로 계정(戒定)으로써 반야(智慧)의 바른 종지를 발기한 것이다. 그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①은 戒(아래 본문)이고 ②는 定이니 지금 시작이다.
爾時에 世尊이 食時가 되시어 着衣持鉢하시고 入舍衛大城하시어 乞食하되 於其城中에 次第乞已하시고 還至本處하시어
그때 세존께서 공양하실 때가 되시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가지시고 사위대성으로 들어가시어 밥을 빌으시되 그 성중 가운데에서 차례로 밥을 빌으시고 다시 본처로 돌아오시어
淸峯:세존께서 내라는 상을 여의시고 사시에 하루 한 끼 드시는 밥을 비셨다. 차별하지 않고 일곱 집을 차례로 복 지을 기회를 주는 자비행으로 밥을 빌으셨던 것이다. 부자도 항상 부한 것이 아니므로 복을 지어야 하고 가난한자는 가난을 면하게 해주기 위해 고르게 복을 지어주신 것이다.
이때의 밥을 받는 자가 福田이 되는 것이다.
圭峰:分七節釋하리니 一은 化主이니 成實論에 說하되 具上九號하여 爲物欽重이니 故曰世尊이라하니 天上人間이 共所尊故라니라 二는 化時니 食時辰이니 當日初分으로 求乞易得하여 不惱自他요 乞已歸園이 正當巳時하니 如常齋法이니라 三은 化儀니 着僧伽梨衣하고 持四天王의 所獻鉢이니라 四는 化處이니 園이 在城東南五六里이니 自外之內가 爲入이요 處廣人多曰大니라 五는 化事이니 佛이 爲欲顯頭陀功德하시어 令放逸者로 ?愧하여 以同事攝이니 故自乞食이니라 瓔珞女經에 說하되 化身은 如全段金剛하여 無生熟藏이라하다 今所乞者는 利益他故니라 故로 淨名이 云하되 爲不食故로 應受彼食이라하다 六은 化等이니 於中에 有五이니 一은 由內證平等理하여 外不見貧富相이요 二는 心離貪慢하여 慈無偏利요 三은 表威德이 不懼惡象沽酒?女等家요 四는 息凡夫의 猜嫌이요 五는 破二乘의 分別이니라 七은 化終이라 然이나 已字는 義屬下句이나 文連上句요 飯食字는 義屬上句이나 文連下句이니 若廣其文하여 令當句中備者하면 應云次第乞하시고 乞已에 還至本處하시어 飯食하시고 飯食訖에 收衣鉢하리니 佛若不食이면 他福이 不滿이니라 寶雲經에 說하되 隨所乞得하여 分爲四分하여 一은 擬與同梵行하시고 二는 擬施貧病乞人하시고 三은 水陸衆生이요 四는 自食하시다하다 十二頭陀經에는 唯說三分하고 除梵行하니라 二는 定이라
규봉:일곱 마디(節)로 나누어 (戒에 대해) 해석하리니,
一. 化主 (교화의 주인)이니 成實論에 말씀하되 “부처님은 아홉 가지 [세존이 제十구족에 해당(완전한)되므로 具上九號라 하며 그 아홉은 如來, 應供, 正?知, 明行足, 善逝, 世間解, 無上士, 調御丈夫, 天人師이며, 十은 불세존]를 갖추었으므로 공경하고 존중함을 받을 수 있게 되므로 世尊이라 하나니 天上과 人間이 함께 존중하기 때문이라”하였다.
二. 化時이니 식사 할 辰시이니 당일 아침으로 구걸함에 얻기 쉬워서 자타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 밥을 얻고 나서 돌아오면 巳時에 해당하니 항상 여법한 공양이 되는 것이다.
三. 化儀로 가사(僧伽梨)를 수하시고 四天王이 헌공한 발우를 가지심이다.
四. 化處이니 기원정사는 성의 동남쪽 五~六리에 있으니 밖에 있다가 안으로 가는 것을 入이라 하고, 장소가 넓고 사람이 많으므로 大라 한다.
五. 化事이니 부처님이 두타공덕을 나타내고자 게으른 이로 하여금 부끄럽게 해서 함께 거두게 하기 위하시어 스스로 걸식하시었다. 영락여경(瓔珞女經)에서 말씀하시기를 “화신(부처님)은 한 덩어리의 금강과 같아서 소화기관(生熟藏)이 없다(잡수시는 것에 탐착함이 없다는 뜻)” 하셨다. 지금 밥을 비시는 것은 남에게 이익되게 하기 위함이시라, 그러므로 유마힐(淨名)이 이르되 “먹지 않음이 되므로(탐식이 아님) 마땅히 음식을 받는다” 하였다.
六. 化等으로 그 가운데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 안으로 평등한 이치를 증득하여서 밖으로 빈부의 모습을 보지 않고 둘째, 마음에 교만과 탐하는 것(貪慢)을 여의었기에 자비가 치우침이 없으며 셋째, 부처님의 위덕을 나타내어 惡象(성난 코끼리:무서운 것), 沽酒(술 파는 집:파계), ?女(음탕한 여자:유혹)등의 집을 두려워하지 않음이요 넷째, 범부의 시기하여 싫어하는 것을 그치게 함이요 다섯째, 소승(二乘)의 분별심(我에 집착)을 깨뜨림이다.
七. 化終이니 그러나 그칠 이(已)자는 뜻은 下句(가벼운)에 속했으나 글은 앞 글귀(上句)에 이어 해당(連)하고 공양하는 飯食자는 뜻은 앞 글귀 (上句:깊은 뜻)에 속했으나 글은 下句에 이어지니 만약 그 글을 넓혀 마땅히 글귀 가운데에 갖추어서 구체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땅히 “차례로 비시고 빌고 나서 본처에 돌아오시어 공양을 드시고 공양이 끝나시매 의발을 거두셨다”할 것이다. 부처님이 만일 잡숫지 않으시면 시주한 사람의 복이 만족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寶雲經에 이르되 “얻은 것을 따라 따로 넷으로 나누어 하나는 같이 수행하는 이들과 더불어 함께 하시고, 두 번째는 가난하고 병든 걸인에게 베푸시고, 세 번째는 물과 뭍의 중생에게 주시고, 나머지는 자신이 잡수셨다”고 했다.
(十二頭陀經엔 오직 세 가지만 설하고 梵行은 제외하였다)
② 둘째는 定이다(발기서 가운데 두 번째)
飯食訖하시고 收衣鉢하시고 洗足已하시고 敷座而坐하시다
공양을 마치신 뒤,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어 마치시고,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淸峯: 공양을 드시고, 발우를 씻고, 발을 씻고,
자리를 펴시고, 가만히 앉아(양구) 계심이,
참으로 희유하고, 참으로 희유하시도다.
說誼:入城乞食은 法身不癡이니 以般若로 開示也요 收衣洗足은 般若無着이니 以解脫로 開示也요 敷座而坐는 解脫寂滅한 以法身으로 開示也니라 方談般若를 以此開示者는 般若之所以爲般若也를 指其本體則名爲法身이요 指其大用則名爲解脫하며 指其當體則名爲般若니라 何則하면 直般若는 非般若이고 般若는 具法身解脫이며 直解脫은 非解脫이니 解脫은 具法身般若이니 直法身은 非法身이라 法身이 具解脫般若니 擧一면 卽具三이요 言三은 體卽一이니라 方談般若에 以此開示者가 不其然乎인가
설의:성에 들어가 밥을 비는 것은 法身이 어리석지 않은 것이니 반야로써 열어 보임이요, 옷을 거두고 발을 씻으심은 반야가 집착함이 없음이니 해탈로써 열어 보임이로다. 자리를 펴고 앉으심은 해탈로 적멸한 법신을 열어 보이시는 것이니라. 바야흐로 반야를 이르시려 할 때 이것으로써 열어 보이신 것은 반야가 반야된 까닭으로 그 본체를 가리키니 이름이 법신이요, 큰 작용을 가리켜 해탈이라 하며, 당체를 가리켜 반야라 이름하느니라. 왜냐하면 바로 지혜만의 반야는 般若(참)가 아니고 반야는 법신과 해탈을 갖춰야 하며, 바로 해탈만은 解脫(참)이 아니니 해탈은 법신과 반야를 갖춰야 하고, 바로 법신만은 법신이 아니라 해탈과 반야를 갖춰야 하는 것이니, 하나를 들면 곧 셋을 갖춤이고 셋을 말하나 體는 곧 하나이니라. 바야흐로 반야를 말씀하시려 할 때 이것으로써 열어 보이신 것이니 그것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청봉착어:체는 정이요 혜는 용이라, 정혜를 갖춤을 요달하면 곧 해탈이니 정과 혜와 해탈은 곧 둘 아님이요, 체와 용이 곧 열반을 이루니라. 그러하므로 공양을 드시고,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앉으심(良久)이 희유 하심이니라.
圭峰:分三節釋하면 一은 屛資緣이니 將欲入定이면 須息攀緣이니라 衣鉢을 不收하면 心有勞慮이니 故佛示現하시어 爲後軌也이니 卽收大衣하시고 着七條니라 二는 淨身業이니 阿含經에 說하되 佛行에 離地四指하여 蓮花承足이라하나 今示現洗者는 順世表法하여 爲後軌也니라 三은 正入定이니 敷座坐禪者는 由身端故로 心離沈掉故니라 魏譯에 云하되 如常敷座하여 結跏趺坐하고 端身而住하여 正念不動이라하며 唐譯에는 云하되 端身正願하여 住對面念이라하다 無着이 云하되 顯示唯寂靜者어야 於法은 能覺能說故라하시나 然이나 大聖現迹은 必有所表시니 表本覺之佛이 在五蘊之都하여 覺魔軍本空을 名爲戰勝이요 照心識具德이 卽是給孤요 求法養神을 名乞士衆이니라 覺心을 旣發이니 寧棄塵勞하랴 將欲?觀하되 遂入識藏하여 心心數法을 次第思惟하면 卽妄而眞이니 皆得法喜라니 法喜無體하여 融合覺心이로다 思惟는 假緣이니 忘緣하여야 可符眞性하고 觀照는 是迹를 拂迹하여야 返本還源이니라 返本還源하면 法空心寂이니 空寂眞體에 般若朗然이라 欲談般若正宗하시어 如是示現發起시니라 資聖?에 云하되 夫身有二하니 一은 僞요 二는 眞이라 五陰僞軀는 假衣食以生育이나 法身은 無相하여 因般若以照成하니 群生은 保僞遺眞이며 諸佛은 養眞棄僞라하다 群生은 旣迷眞而取僞하면 佛乃假僞迹而引眞이로다 故託乞食之緣하여 將施法喜之化니라 故로 涅槃經에 云하되 汝諸比丘는 雖行乞食이나 初未曾乞大乘法食이라하시니라 上釋序分은 竟하다 二는 正宗分을 二門分別하니 初에 且約無着의 七種義句하여 以懸判이요 後는 正用天親이 答問斷疑하여 以科釋이니라
初中에 七義句者는 一은 種姓不斷이니 謂護念付囑이고 二는 發起行相이니 謂申請讚許이며 三은 行所住處니 謂十八住이니라 從佛正說로 直至經終히 是無相行의 所住處矣며 四는 對治니 謂一一住處에 皆具邪行과 共見正行의 二種對治이고 五는 不失中道니 謂由對治로 離增減二邊하여 不失中道이며 六은 地位니 謂由不失中道로 成賢聖位의 信行地와 淨心地의 如來地며 七은 立名이니 謂由前六에 智慧堅利하고 位地闊狹이니 故名金剛이니라 後四는 但約第三句中十八住說고 無別經文이니라 十八住處者는 一은 發心住이니 經에 云하되 應如是降伏其心이니 所有一切等이고 二는 波羅蜜相應行住니 不住色布施等이고 三은 欲得色身住이니 可以身相見等며 四는 欲得法身住로 法身은 有二하니 一은 言說法身이니 頗有衆生等이니 因言顯理故요 二는 證得法身이니 復有二種이니 一은 智相이니 如來 得阿?耶等이요 二는 福相이니 若人이 滿三千等이니라 五는 於修道得勝中無慢住인 須陀洹等이니 從此로 至十六住에 如次對治十二種障이니 意明欲求色身法身이면 須離是障이니라 障盡故로 入十七證道이니 今當對治第一慢障하고 六은 不離佛出時住니 昔在然燈等이며 離第二少聞障이니 不離佛世하면 則具多聞이며 七은 願淨佛土住이니 菩薩이 莊嚴佛土不等이니 離小攀緣作念脩道障이니 緣形相土則小요 無緣則大이니 契法界故이며 八은 成熟衆生住이니 人身이 如須彌等이니 離捨衆生障이니 若見大小하면 不能濟物이며 九는 遠離隨順外論散亂住이니 如恒河中所有沙等으로 離樂隨順外論散亂障이니 恒沙寶施도 不及持經이거늘 如何外學하여 不脩正法인가 이요 十은 色及衆生身搏取中에 觀破相應行住이니 三千世界所有微塵等이라 離破影像相中無巧便障이니 旣離散亂하여 與定相應하면 以細末不念二種方便으로 破?至細하고 泯細至空則除影像之相想이라 十一은 供養給侍如來住이니 可以三十二相으로 見如來不等으로 離福資粮不具障이니 不以相見하고 常見法身을 名爲給侍이니 福無邊矣이며 十二는 遠離利養과 及疲乏熱惱故로 不起精進과 及退失住이니 恒沙身命布施等이니 離樂味懈怠利養障이니 恒沙命施도 猶劣受持거늘 豈爲一身하는 耽着利養하여 身疲心惱而懈怠耶이고 十三은 忍苦住이니 忍波羅蜜의 割截身等으로 離不能忍苦障이니 無我等相이면 累苦能忍이고 十四는 離寂靜味住이니 當來之世에 若有能於此經을 受持讀誦等으로 離智資粮不具障이니 日三時捨身을 一一沙數라도 不及信經이거늘 如何唯專禪定하여 耽寂靜味하고 闕於智慧하여 而不持說이며 十五는 於證道時에 遠離喜動住니 云何住降伏等이라 離十一不自攝障이니 我能住降하면 心生喜動이니 動則不能自攝이고 十六은 求佛敎授住이니 於然燈佛所에서 有法得菩提等이라 離十二無敎授障이니 欲入初地면 須佛敎授이니 故約遇佛하여 得無所得而證道矣이고 十七은 證道住이니 人身長大等이라 攝種性智로 證?行如하며 成法報身이니 故로 長大矣라하며 十八은 上求佛地住이니 於中에 復有六種具足하니 一은 國土淨具足이니 我當莊嚴佛土等이라
此는 敎二地已上諸大菩薩이라 二는 無上見智淨具足이니 有肉眼不等이라 此下는 皆唯佛果이니 故云無上이니 無上之言이 貫通下四이며 三은 福自在具足이니 若人이 滿三千界七寶等이며 四는 身具足이니 佛을 可以具足色身等이고 五는 語具足이니 汝勿謂如來說法等이요 六은 心具足이니 佛得阿?菩提인가 爲無所得耶에서 乃至應作如是觀이니라 又十八住를 略爲八種하여도 亦得滿足하리니 一은 攝住處요 二는 波羅蜜淨住處이니 一 二는 次配하고 三은 欲住處로 攝三及四요 四는 離障?住處이니 卽前十二障也이며 從五乃至十六이고 五는 淨心住處요 六은 究竟住處이니 上二는 次配十七十八이고 七은 廣大住處요 八은 甚深住處이니 上二는 各皆攝十八住處이니 一一住中에 皆深皆廣이니라 十八住文을 配位地者하면 第一은 十住요 第二는 十行中前六이요 三은 第七行이요 四는 後三行이요 五至十四는 如此配十廻向하고 十五는 煖頂이요 十六은 忍世第一이요 十七은 初地요 十八은 從二地에서 乃至佛地니라 上來懸判을 竟하다
규봉:세 마디(三節)로 나누어 해석하면
一. 돕는(② 定을) 인연을 막음(屛資緣)이니 장차 정에 들고자 하면 모름지기 반연을 쉬어야 한다. 의발을 거두지 않으면 마음에 번거로움이 있으므로 부처님이 나타내 보이셔서 후세에 규칙을 삼게 하시고자 곧 큰 옷을 거두시고 七조가사(평상복)를 수하신 것이다.
二. 몸으로 짓는 온갖 죄업(身業)을 깨끗이 함이니, 아함경에 이르시되 “부처님이 행하시면 네 곳을 여의지 않고(항상 주위 모두) 연꽃이 발을 받든다”하였으나 이제 발을 씻으심은 세간의 모든 모습을 따라서 후세의 규칙을 삼게 하신 것이다.
三. 바른 정에 들어감이니 자리를 펴고 좌선하는 것은 몸이 단정함으로써 마음이 혼침과 산란함을 여의는 까닭이다. 魏나라 번역에는 평소와 같이 자리를 펴고 가부좌하여 몸을 단정히 하여 생각을 바르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하였으며 唐譯에는 몸을 단정히 하고 원(願)을 바르게 하여 생각을 한 곳으로 머물게 했다고 하였다.
無着이 이르되 “오직 적정을 드러내어야만 법을 능히 깨닫고 능히 설할 수 있는 때문이라” 하시나, 그러나 大聖人(부처님)의 자취를 나타내어 보이신 바가 반드시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本覺을 보이시니 오온의 마을에 있어서 마군이 본래 없음을 깨닫는 것을 戰勝이라 하고, 의식을 비추어 덕(慧)을 갖추는 것이 곧 외로운 이(定)를 돕는 것이요, 法을 求해서 정신을 기르는 것을 걸사중(乞士衆)이라 이름한다. 覺心(깨달은 마음)을 이미 드러내게 되니 어찌 수고로움(修行)을 버리랴. 장차 두루 觀하고자 하되 번뇌로 가린 眞如(여래공)에 들어서 마음과 마음의 여러 가지 것(心數法)을 차례로 사유하면 妄이 곧 眞이니 모두가 법의 기쁨(法喜)을 얻게되는 것이다. 法喜는 體가 없어서 깨달은 마음에 융합(契合)하게 되는 것이다. 思惟는 인연을 빌림이니 인연을 잊어야 가히 참 성품에 부합(契合)하고 [思惟로 인연을 빌린다는 것은 가사를 수 하시고 발우를 드신 것에 대한 것이요(用), 인연을 잊고 참에 부합한다는 것은 의발을 거두신 것에 대한 것이니, 걸식하는데 이미 의발을 써서 구하였고 사유하는 데는 인연을 빌려서 정에 들어가나, 이미 인연의 도움을 물리쳐 없애고 理(眞)에 계합하여 모름지기 일체의 생각을 잊게 된 것이다]
觀照는 자취를 떨어버려야 근원에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관조아래 두 구절은 발을 씻음에 대한 것이니 만일 편안히 앉고자 한다면 반드시 모름지기 발의 때를 씻어 없애야 할 것이고 만일, 본원에 돌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모름지기 마음에 생각을 털어 없애야 하는 것이다]
근본을 돌이켜 근원에 돌아오면 法이 空하고 마음도 고요하니, [근본을 돌이켜 아래 두 구절은 자리를 펴고 앉음에 대한 것이니 법이 공 함은 곧 자리를 편 것이요, 마음이 고요함은 곧 자리에 앉음인 것이다. 자리를 펴야 바야흐로 사람이 앉을 수 있고 법이 공 하여야 마음이 비로써 고요함을 얻는 것이다. 心寂 아래 두 구절은 정종법에 대한 것이다. 편히 앉아야 비로소 능히 경을 설하고, 마음이 고요하여야 바야흐로 묘한 지혜가 드러남을 말하는 것이다]
空寂한 참된 체에 반야가 밝게 되는 것이다. 반야의 바른 종지를 말씀하시고자 이와 같이 일으켜 드러내신 것이다. 資聖疏에 이르되 “무릇 몸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거짓(僞)이요, 둘은 참(眞)이라. 오온의 거짓 몸은 衣食으로써 生育되거니와 法身은 相이 없어서 반야로써 비춤(나툼)을 이루니 모든 중생은 거짓에만 집착하고 참을 잃어버리며 모든 부처님은 참을 기르고 거짓을 버리는 것이다”했다. 중생은 이미 참에 어두워 졌고 거짓을 취하며 부처님은 거짓의 자취를 빌려서 참을 이끌어 오는 것이니, 그러므로 걸식의 인연에 의하여 法喜의 교화를 베풀고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경에 이르되 “너희 비구들은 비록 걸식을 행하나 일찍이 大乘의 法食은 구걸하지 못하였다”고 하셨다.
이상 해석으로 序分(법회 연유분)은 마친 것이다.
둘은 正宗分을 二門으로 분별하니 (1) 처음에 무착의 七種義句를 잡아서 미리 科判(종목을 나눠 판단)해 봄이고 (2) 나중은 참으로 天親이 물음에 답하여 의심을 끊는 것으로써 과목을 해석한 것이다.
처음 가운데 七義句는
①은 성품의 씨(種性)가 끊어지지 않음(種性不斷)이니 호념하고 부촉함을 말한 것이고
②는 처음 들어 심식의 성능을 살펴(發起行相) 수보리의 물음에 기꺼이 답하신 것이고
③은 行이 住한 곳(行所住處)이니 十八住를 말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정종분으로부터 경을 마칠 때까지 이 無相行이 住한 곳이며
④는 對治니 낱낱이 주 하는 곳마다 모든 삿된 행과 바른 행(正行)을 함께 보는 두 종류의 대치(상대적으로 견주어 다스림)를 갖춘 것이고
[삿된 행은 곧 바르지 않는 행이니 불도에 어긋나는 것은 삿된 행이라 하며 共이라는 것은 하나가 아님을 뜻하며 見(소견)이란 것은 분별하는 생각이니 이러한것을 정행이라 하는 것은 곧 잡된 소견이니 순수한 바른 행이 아니다.
2종대치란 것은 정행으로써 사행을 다스리는 것이 1대치요 무분별 智로써 분별소견을 다스림이 2대치이다. 그러나 邪는 곧 모두 다스리거니와 함께 하는 가운데에는 곧 다만 見만 다스리고 정행을 다스리지 않으니 마치 모래를 헤쳐 금을 가리는데 모래만 버리고 금은 버리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⑤는 中道를 잃지 않음이니 對治함으로 말미암아 增滅의 二邊을 여의고 中道를 잃지 않는 것이며
⑥은 地位이니 中道를 잃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賢聖位의 信行地와 淨心地의 如來地를 성취한 것이며
⑦은 立名이니 전육식에 지혜가 견고하고 날카로우며 지위가 넓고 좁기 때문에 금강이라 이름하게 되는 것이다.
[謂由아래는 뜻을 해석한 것이니 三種法上 ①편계소집성으로 나와 일체법이 실체가 있다는 망념에 집착함 ②의타기성으로 타의 인연으로 갖가지가 생긴다는 것 ③원만실성으로 법성진여등의 일체유위법의 체성을 금강의 이름으로 세운 것을 거두어 이르니 ①은 반야의 체와 용을 들어 금강이라 일렀으니 이것은 금강의 예리함을 이른 것이고 ②는 지위의 넓고 좁은 것을 들어 금강이라 일렀으니, 이것은 금강봉의 형상과 같은 신행(불법 아닌 외도를 믿는 것)은 일아승지겁(一僧祗)이고 깨끗한 마음은 다만 한순간이나, 불지는 무량지겁(二僧祗)이 거듭되니 금강저가 처음과 끝은 넓고 중간은 좁은 것과 같음이다. ③은 문자를 들어 금강이라 하니 이것은 그림의 영상(畵像)과 같다. 信行地를 말하는 것은 七紙餘經이요 불지(佛地)는 3지여문이요, 깨끗한 마음 땅(淨心地)은 五行經인 것이 저 화상과 같으니, 또한 처음과 뒤는 넓고 중간은 좁은 까닭인 것이다]
나중의 ④는 다만 三句 가운데 十八住로 분별해서 설한 것이고 별다른 경문은 없다.
十八住處는
一. 發心住이니 경에 이르되 “응당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을지니 있는 바 일체 등등...”이고
二. 波羅蜜相應行住이니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며...”이고
三. 欲得色身住이니 가히 색신상견등 즉 “몸의 모양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느냐” 등이며
四. 欲得法身住로 法身은 둘이 있으니 첫째는 言說法身이니 “자못 어떤 중생이..” 등으로 말로써 이치를 나타내는 까닭이고
둘째는 證得法身이니 이것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智相이니“여래가 아뇩다라를 얻었느냐” 등이고 또 하나는 福相이니 “만약 사람이 만삼천대천 세계...” 등이다.
五. 닦아서 수승함을 얻는 가운데 게으름이 없이 머무는(於修道得勝中無慢住) 수다원 등이니, 여기서부터 十六住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十二種障을 대치하니 뜻이 색신과 법신을 밝게 구하고자 하면 이 두 가지 장애를 여의어야 하는 것이다. 장애가 다했으므로 十七證道에 들어가니 第一의 게으른 장애(慢障)를 대치함에 해당하고
六. 不離佛出時住이니“옛적에 연등불회상에서...”등이며 第二少聞障(가르침을 들음이 적은 장애)을 여읨이니 부처님의 세상을 떠나지 않으면서 多聞을 갖추는 것이며
七. 願淨佛土住이니 “보살이 불 국토를 장엄하느냐”등이니 작은 인연으로 생각을 지어 수도하는 장애를 떠남이니 形相土(모습)를 인연하면 小이고 인연함이 없으면 大니 法界에 계합한 까닭이며
八. 成熟衆生住이니 “사람 몸이 수미산 같다면...”등이니 중생심을 버리는데 있어서 장애됨을 여의는 것이니 만약 大小(차별상)를 보면 능히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며
九. 遠離隨順外論散亂住이니 “항하 가운데 있는 바 모래 수...”등으로 외도의 소견(여법한 불교 외)에 쫓아 산란함에 머무는 것을 즐기는 장애를 여의게 하는 것이니 항하사와 같은 많은 보물로써 보시하는 것도 경을 가지는 것에 미치지 못하거늘 어찌 다른 학문을 하여 正法을 닦지 않는가 하는 것이고
十. 色及衆生身搏取中에 觀破相應行住이니 “三千世界에 있는 미진”등이다. 影像相을 破한(형상은 있으나 실체가 공한) 가운데는 선교 방편이 없다는 장애를 여의는 것이니
[離破아래는 여의는 것이 막힘이니 영상상이라는 것은 색신등 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법계가운데 영상이며 또한 가히 업식의 영상이다. 無巧便障이란 것은 바른 방편이 없으므로 인하여 능히 이 영상을 파하지 못하는 것을 이에 막힘이 된다 하는 것이니 만일 방편의 재주가 있어 파하면 그 머묾을 이루게 된다]
이미 산란을 여의어서 定에 相應하면 細末과 不念의 두 가지 방편으로 거친 번뇌를 깨뜨려 細에 이르고 미세한 것을 없애서 空한 데까지 이르면 영상의 相想(상을 생각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며
十一. 供養給侍如來住이니 “가히 三十二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등으로 복덕이 갖춰지지 않는 장애를 여의는 것이니 相으로써 보지 않고 항상 法身을 보는 것을 “받든다”고 이름하니 그 복이 한량이 없으며
十二. 遠離利養 及 疲乏熱惱故로 不起精進 及 退失住이니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몸으로 보시하면”등이니 게을리(懈怠)하고 재리를 탐함을 즐겨하는 장애를 여읨이니 항하사와 같은 몸을 보시함도 오히려 경을 가지는 것만 못하거늘 어찌 一身을 이롭게 하는 재리에 탐착하여 몸이 피로하고 마음이 번거롭다고 해서 게으름을 피우겠는가 하는 것이고
十三. 忍苦住이니 忍辱波羅蜜의 “신체를 낱낱이 베일 적에...”등으로 능히 고통을 참지 못하는 장애를 여읨이니 我相, 人相 等이 없으면 온갖 고통을 능히 참는 것이고
十四. 離寂靜味住이니 “오는 세상에 만약 능히 이 경을 수지 독송하면...”등으로 智資粮(지혜의 양식)을 갖추지 못한 장애를 여의는 것이니 하루에 세 번씩 몸을 바쳐 보시함을 낱낱 모래 수만큼 할지라도 經을 믿는 것에 미치지 못하거늘 어찌 오로지 禪定만 노려 고요함에 빠져 지혜를 잃어 지녀서 설(經)하지 않으며
十五. 於證道時에 遠離喜動住이니 “어떻게 머물며 항복하리까”등이다. 十一의 스스로 관대히 거두지 못하는 장애를 여읨이니, 내가 능히 항복하여 머물면 마음에 기쁨이 생기니 움직이면(마음이 動하면) 곧 능히 스스로 거두지 못하는 것이고
十六. 求佛敎授住이니 “연등불회상에서 법이 있어서 보리를 얻었는가...” 등이다. 十二의 가르치고 전할 것이 없다는 장애를 여읨이니, 初地에 들고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해야 하므로 부처님을 만나 도를 깨달아(證道) 얻을 바 없음을 얻는 것이고
十七. 證道住이니 “사람 몸이 장대함...” 등이다 성품의 지혜종자를 거두어 두루 진여를 깨달아 행하며 法身과 報身을 이루므로 크다고 하며 [성품의 종자를 거두는 아래는 머무는 뜻을 해석하여 이룬 것이다. 지혜의 체는 곧 관조반야이니 이는 능히 증오한 것이다. 곧 묘관찰지와 평등성지의 무분별이니 이 지혜를 얻어 여래의 집에서 나와 결정코 부처의 종자를 잇는 까닭이다. 이는 마음 땅 앞에 행함을 더하는 지혜이니, 처음 마음 땅에 이르러 구르고 굴러 이름을 받은 것이다. 두루 증하는 등이란 것은 체가 곧 실상 반야이니 이를 증하는 것이다]
十八. 上求佛地住이니 이 가운데 다시 六가지가 구족하니
첫째 國土淨具足이니 “내가 마땅히 불 국토를 장엄하리라”등이다. 이것은 二地이상의 모든 대보살을 가리킴이다.
둘째 無上見智淨具足이니
[見淨이란 것은 곧 5안이니 見이 곧 봄이 없음을 이름하여 깨끗함이라 하고 보지 못할 바가 없음을 이름하여 具足이라는 것이다. 智淨이란 것은 곧 모든 마음을 모두 안다 하는 등이니 智가 곧 아는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깨끗함이라 하고 알지 못할 바 없음을 이름하여 具足이라 하는 것이니 智와 見이 다르지 않으므로 한 곳에 마땅한 것이다]
“육안이 있느냐”등이다. 이 아래로는 모두가 오직 佛果이므로 위없다(無上) 하는 것이니, 위없다는 말이 아래 四가지와 서로 통하며
셋째 福自在具足이니
[묻되, 앞에서 이미 보시의 복을 여러 번 설하였으니 이것으로 더불어 무엇이 다르냐? 답은, 앞에서 설한 바는 다 이 받아 지님의 복에 미치지 못함을 비교해 이른 것이거니와 지금 이것을 설한 것은 이에 이 머물지 않는 성품의 복이니 능히 비교할 것이 아니므로 갖지 않는 것이다.
묻되, 佛은 이 果요, 보시는 이 因이거늘 어찌하여 果 가운데 곧 因行을 말씀하는가?
답은, 무릇 이 과와 덕이 모두 저 인이 이룬 것이니 저 무주의 인을 들어서 성품이라 칭하는 복을 밝힌 것이다. 自在라 말한 것은 유루의 복은 자재하지 못함으로 가린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등이고
넷째 身具足이니 “부처를 구족한 색신으로써..”등이고
다섯째 語具足이니 “너희는 여래께서 설법한다 말하지 말라”등이며
여섯째 心具足이니 “ ‘부처가 아뇩보리를 얻었느냐?’ ‘얻은 바 없게 되었는가?’로부터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까지이다.
또 十八住를 간략히 八種으로 나누어도 역시 만족함을 얻으리니
一은 攝住處요 二는 波羅蜜淨住處이니 一과 二를 (18주 중) 차례대로 배열하고 三은 欲住處로 三과 四를(18주 중) 거두는 것이고
[攝은 이 籠羅包納의 뜻으로 곧 중생을 널리 제도하여 현재 어기는 것(違反)이 없음을 쓴 것으로써 제일 발심주와 같다고 짝(配)하는 것이다. 깨끗함에 상응함이 대개 한 뜻이니 그러므로 제二住와 같다고 짝(配)하는 것이다. 三攝三四란 것은 비록 三色과 四法이라도 가히 얻고자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3, 4의 二住와 같다고 짝(配)하는 것이다]
四는 離障?住處이니 곧 앞의 二十障?며 곧 五에서 十六까지 이고 五는 淨心住處요 六은 究竟住處이니 위(18주 중)의 둘은 차례대로 十七, 十八로 배열하고 七은 廣大住處요 八은 甚深住處이니 위 두 가지는 각각 모두 十八住處 전체를 거두는 것이니 낱낱의 주처 가운데 모두 깊고 모두 넓은 것이다.
十八住文을 각 位地로 배열하면 一은 十住요 二는 十行가운데 앞의 六行이요 三은 제七行이요 四는 뒤의 三行이요 五에서 十四까지는 이같이 十廻向(보살수행 52위 가운데 제31위에서 제40위로 대자비심으로 일체중생을 구호함)으로 배열하고 十五는 煖頂이요 十六은 忍世의 第一이요 十七은 初地요 十八은 二地부터 佛地까지이다. 이상으로 科判을 마친다.
六祖:爾時者는 當此之時요 食時者는 是今辰時이니 齋時欲至也이고 着衣持鉢者는 爲顯敎示迹故也니라 入者는 自城外而入也요 舍衛大城者는 名舍衛國豊德城也이니 卽波斯匿王의 所居之城이니 故言舍衛大城也니라 言乞食者는 表如來가 能下心於一切衆生也니라 次第者는 不擇貧富하고 平等以化也니라 乞已者는 如多乞에 不過七家하고 七家數滿하면 更不至餘家也니라 還至本處者는 佛意는 制諸比丘하시어 除請召外에는 不得輒向白衣舍故로 云爾니라 洗足者는 如來示現으로 順同凡夫이니 故言洗足이니라 又大乘法은 不獨以洗手足爲淨이니 蓋言洗手足으로 不若淨心이니 一念心淨하면 卽罪垢悉除矣니라 如來가 欲說法時에 常儀敷施檀座하니 故言敷座而坐也니라
육조:爾時는 그때를 말함이며 食時는 지금의 辰時(오전7시~9시)이니 齋時(사시 9시~11시 공양 때)에 이르고자 한 것이고 着衣持鉢은 가르침을 나타내어 자취를 보이시기 위한 것이니라. 入이란 성밖으로부터 들어간 것이요 舍衛大城이란 사위국의 크게 풍성한 성(城)임을 이름한 것이니 곧 파사익왕이 사는 성으로 그러므로 사위대성이라 말하는 것이다.
걸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래께서 능히 일체중생에게 下心한 것을 나타낸 것이다.
次第는 빈부를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교화하신 것이니 乞已는 언제나 밥을 빌으실 때 일곱 집을 넘지 않고 일곱 집의 수가 차면 다시 다른 집에 이르지 않으셨다. 還至本處란 부처님의 뜻은 모든 비구를 제어하시어 속인들이 초청하지 않을 때에는 수시로 속인의 집에 가지 못하게 하시고자 하므로 이른 것이다. 洗足이란 여래가 보이심으로써 범부들이 이같이 따라서 하게 하시고자 하는 것이므로 세족이라 말하는 것이다. 또 大乘法으로는 손발을 씻는 것만으로 깨끗하다고 여기지 않으니 대개 손발을 씻는 것은 마음을 깨끗이 함과 같지 못하니 한 생각 마음이 깨끗하면 곧 죄와 허물이 모두 없어지는 것이다.
여래가 설법하고자 하실 때에는 항상 위의를 갖춰 자리를 펴고 檀에 앉으시므로 敷座而坐라 말하는 것이다.
傅大士:法身은 本非食이요 應化도 亦如然이나 爲長人天益하여 慈悲作福田이로다 收衣는 息勞慮요 洗足은 離塵緣이니 欲說三空理하여서 跏趺示入禪이로다
부대사:法身은 본래 먹지 아니하며
응신, 화신도 또한 그러하나
길이 人天의 이익을 위해서
자비로써 복전을 지어 자비를 베푸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