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박시설이 불편한 사천 곤양에서 하룻밤을 묵었지만 심한 편두통으로 밤새 잠을 잘 수 없었다. 집으로 귀가하려다 다솔사와 보안암이 눈에 어려 발길을 다솔사로 향했다. 이른 아침 적막한 진입로에는 측백나무가 열병을 기다리는 병사처럼 도열해 있다. 봄날 새싹이 움틀 무렵이면 향내에 세상만사 잊을 것 같다. 주석하시는 스님이 불편하더라도 시멘트 포도를 들어내었으면 좋으련만 이것도 객의 욕심일까?
소나무가 많아 다솔(多松)이라는 설과 산의 형국이 장군대좌형국과 관련된 설이 있다. 장군 휘하에는 부하가 있어야 하므로 도선국사는 절집을 중창 승려를 부하로 상징하여 다솔사로 명명했는지 모르겠다.. 장군대좌형국 앞에는 천안 병천 아우내 장터처럼 인위적으로 장터를 조성하여 부하를 상징하는 비보책을 세운다.
다솔사 중건비. 대양루 앞마당에 있는 중건비는 1704년(숙종 30)에 세워진 것으로 귀부는 멸실되었다. "채팽윤(蔡彭胤)이 글을 짓고 이진휴(李震休)가 썼으며, 제액(題額)은 권규(權珪)가 썼다. 채팽윤은 그는 사찰의 사적비를 여러 편 지었는데, 이 「영악사중건비」를 비롯하여 전라남도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대화사중창비(大花寺重創碑)」와 「대흥사사적비(大興寺事蹟碑)」, 그리고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의 「석가여래영골사리부도비(釋迦如來靈骨舍利浮屠碑)」 등이 있다."...한국전통사찰 영악사 중건비 부분 陀率이 보인다. 아래 비문 내용처럼 자장율사가 陀率로 하였는데 왜 다솔로 바뀌어 여러 설이 난무하는지 알 수 없다. 우리카페 유현은 이게 늘 불만이다.제대로 알고 난 후에 글을 올리라는 이야기인데 병도 깊다. 아무튼 내친김에 비에서 陀率 명문도 찾고 비문과 해석을 가져오니 우리님들은 훗날 가볍게 다솔사를 다녀오기 바란다.
朝鮮國慶尙右道昆陽郡智異山靈嶽寺重建碑
곤명 남쪽 끝 바다에 진좌한 곳에 지리산이 있다. 산봉우리들이 파도치는 듯, 구름 속에 우뚝 솟아 있는 듯한데 경상도와 전라도 아홉 고을 수백 리에 걸쳐 뻗어 있다. 곤명의 북쪽에 있는 그 봉우리를 봉명(鳳鳴)이라 하며, 봉일암으로 2리를 더 가서 오른쪽으로 돌아보면 청학대(靑鶴臺)와 순용정(循湧井)이 있고 동쪽으로 석문이 있는데 사람 셋이 모여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전하는 말로는 최치원과 지영(智英) 및 능민(能敏) 두 스님이 노닐던 곳이라 한다. 다솔사는 중국 양나라 천감 2년 신라 지증왕 계미년에 처음 영악사(靈嶽寺)로 창건되었다. 중창은 자장 율사가 타솔사라 한 것인데 곧 당 정관 10년 선덕왕 병신년이다. 삼창은 원교대사 의상이 영봉사라 하였다. 사창은 요공대사 도선이 다시 영악사라 했는데 이 때는 함통과 건부의 때로서 신라 경문왕과 헌강왕의 사이였다. 오창은 고려 공민왕의 왕사인 보제존자(普濟尊者) 혜근(惠勤)이 사찰을 크게 중창하여 대가람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왜구의 침략으로 그 반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신양자(神陽子) 영일(靈日), 곤봉자(昆奉子) 혜능 사연(惠能思衍), 주지 자청(自淸) 스님 등의 네 도인은 남종(南宗)의 뛰어난 분들인데 숙종 12년 병인에 석장을 잡고서 이곳을 돌아보고는 말하기를, “아하 참으로 신령스러운 땅이로구나!” 하였다.
이 사찰은 초조 달마 대사가 동쪽으로 건너 올 무렵 개산(開山)하여 이어오다가 140년 후에 자장 율사가 주석한 이래 40년 후 의상 대사가, 200년 후에 도선 국사가, 400년 후에 보제존자 혜근 스님이 주석했었다. 그리고 200년 후 화재로 소실되었으니 지금으로부터 165년 전이다. 본래 존재하였던 것이 홀로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뜻을 합하여 서원을 같이 하여 널리 시주를 모아서 10년만에 중창하였다. 전(殿) 세 채, 당(堂) 여섯 채, 각(閣) 세 채, 요사 한 채, 그리고 그 사이에 두 문이 있으니 각각 천왕문(天王門)과 증산문(增山門)이라 했다. 계곡이 넘치도록 옛날과 같이 복원했다. 그 복원한 공덕은 처음 창건한 공덕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옛 기록을 모면 자장 율사가 중국에 들어가 문수보살 화신을 종남산 운제사에서 만났는데 신물(神物)을 자장 율사에게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삼한 땅은 본래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 시체가 골짜기를 메울 정도다. 이는 부처님의 영험이 아니면 구제하지 못함 이니 반드시 남추단(南湫壇)의 독룡(毒龍)을 항복시킨 뒤에야 그 재앙이 끝날 것이다.” 하였다.
또한 요공대사 도선은 중국의 일행(一行) 선사에게 수학했는데 일행 선사가 우리의 산수도경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지세가 본디 전쟁터다. 비유하자면 병이 있으면 그 혈처를 침으로 다스려 병을 낳게 하듯이, 너희 나라의 지세는 기혈이 고르지 못한 곳이다. 때로는 산세가 끊어진 듯하고 혹은 갑자기 솟았다 사라지는 가파른 형국이 많아 마치 기혈이 고르지 못한 사람과 같다. 그 혈의 요소 요소마다 사찰을 건립하여야만 국토가 평안하게 되어서 국운을 도울 것이다. 이것이 곧 산천 비보술(裨補術)에 의 한 것이며 이로써만 국운이 흥할 것이다. 지리산은 천하의 신령스런 산임을 말할 필요조차 없거늘 어찌 네 도인이 우리 산문의 조종 이신데 폐허된 사찰을 복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오호라! 노승이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면서 주변의 빠짐없이 돌아보고 깨끗이 하여 석가여래를 세우고 부연을 걸고 단청을 새롭게 하여 보배로운 궁전을 장엄하였다. 이것을 비견하면 아침 이슬과 저녁 연기가 같으니, 마음과 마음으로 수승한 업을 늘렸다. 때로는 겁화가 있으나 지혜의 등불로 길게 이어갔다.
다솔사 대양루(大陽樓)는 호남지방 평지가람 루대처럼 루하가 막혔다(호남지방은 폐쇄가 아니라 낮게 루대를 조성 진입공간은 아니다). 산지 가람에서는 고성 옥천사 자방루, 완주 화암사 루대가 같은 모습이다.
적멸보궁에서 바라보면 대양루는 법요식 등의 행사 편의를 위해 전면을 개방하여 공간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구조이다. 좌우와 뒷면에는 벽을 설치하여 문을 달아 놓았다. 앞마당과 누각의 마루는 떨어져 있지만 차라리 이었으면 더 좋지 않을까?
다솔사 적멸보궁(寂滅寶宮). 대웅전 건물이었는데 1978년 2월 8일 당시 대웅전 삼존불상의 개금 불사 때 후불탱에서 108과의 사리가 발견되자 적멸보궁으로 바꾸고 불사리는 사리탑을 적멸보궁 뒤에 새로 만들어 봉안하였다고 한다.
적멸보궁에는 불단에 와불을 모셨다 와불은 열반에 드신 석가모니인데 안상처럼 유리를 내고 사리를 모신 부도를 볼 수 있게 하여 어쩐지 중복된 느낌이다. 5대 적멸보궁에 이런 와불상이 있었던가?
적멸보궁 동종. 한마리 용이 걸린 용뉴. 음통은 보이지 않고 상대에는 범어가 새겨져 있다. 어깨에서 떨어진 육곽으로 미루어 조선시대 동종으로 추측되며 중대에는 4개의 유곽, 9개 유두가 봉긋하고 사이사이 보살상이 있다. 두겹 선으로 종신을 둘렀지만 하대는 아니다.
김동리씨는 ‘등신불’을 쓰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한다. “1937년 가을인가, 38년의 봄인가, 그 무렵 만해(卍海) 한용운씨가 다솔사(多率寺)에 왔을 때의 일이다. 나는 다솔사에서 10리 남짓 떨어진 원전(院田)이란 곳에서 광명학원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연락을 받고 다솔사로 달려갔던 것이다.
절 큰 방에는 만해와 내 백씨와 그 절의 지주인 석란사(石蘭師)가 앉아 있었다. 석란사는 엽차를 끓여서 모두에게 대접했다. 차를 마실 때 만해가 무슨 이야기 끝에, “범부, 우리나라 승려 중에서 분신공양한 분이 있소?”하고 내 백씨에게 물었다. “형님이 못 보신 걸 난들 어떻게 알겠소.”백씨의 대답이었다. “분신공양이 뭡니까?”내가 물었다. 석란사가 설명해 주었다. 나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 나는 일찍부터 충격 받은 이야기는 작품으로 멍을 푸는 방법을 쓰고 있었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랄까.”
고교시절에 공부한 등신불이 까마득한 우리님들을 위해 줄거리를 요약한다.
'나'는 일제 말기 학병으로 끌려가 남경(南京)에 주둔해 있다가, 대학 선배인 진기수의 도움으로 탈출, 정원사란 절에 몸을 의탁한다. 그곳에서 금불각의 화려한 외양에 반감을 가지게 된다.그러던 중 금불각에 안치된 등신불을 보게 되는데, 그 불상 같지도 않은, 인간적인 비원을 담고 있는 모습에서 충격과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 불상은 옛날 소신 공양(燒身供養)으로 성불(成佛)한 '만적'이라는 스님의 타다 굳어진 몸에 금을 씌운 것이다. '나'는 원혜대사를 통하여 신비로운 성불의 역사를 듣게 된다.
후원 차밭을 조성한 다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 효당 최범술이라고 한다. 효당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가 정찬주 선생의 글로 대신하며 다솔사 이야기를 접어야겠다.
차를 대중화하는 데 효당 최범술만큼 공헌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 다도계의 정설이다. ‘한국의 차문화’ 저자 운학 스님도 “효당의 다통(茶統·차살림)을 일본식이라고 평하는 경향이 있지만, 설사 그의 다통에 그런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차를 이만큼 인식할 수 있게 된 데에는 그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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