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에서 싱크탱크 수장으로, 벤처 CEO를 거쳐 지식 사업을 벌이는 1인 기업으로.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의 인생 항로다. 하루에 대여섯 꼭지의 원고를 소화하고 해마다 5~6권씩 책을 내는 공 소장은 1인 기업의 대명사다. 브랜드 가치가 상한가지만 그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어지간한 상장사 CEO만큼은 법니다. 결국 돈으로부터의 자유도 얻은 셈이죠.”
‘1인 기업의 대명사’가 된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은 “재벌 회장만큼은 못 벌지만 대신 강연?저술 활동을 통해 영향력을 얻었다”고 말했다.
‘지식 사업가’인 공 소장이 하는 일은 강연?저술?컨설팅과 사외이사 활동 등이다. 이들 활동이 말하자면 1인 기업 공병호의 사업 포트폴리오다. 기자가 만난 날 그는 오전에 강연을 했고 인터뷰가 끝난 후 강화도에서 다른 강연이 있다고 했다.
가장 큰 수입원은 강연이지만 그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준 건 독보적인 저술 활동이다. 지난 7월 한 경제주간지는 경영학자, 컨설턴트, CEO, 자기개발 전문가 등을 대상으로 한 서베이를 통해 한국에서 영향력이 큰 경영 대가를 선정했다.
공 소장은 이 서베이에서 윤석철 한양대 석좌교수(1위), 조동성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2위), 안철수 KAIST 석좌교수(3위), 『블루오션 전략』을 쓴 김위찬 프랑스 인시아드 교수(5위) 등과 함께 10위권에 포함됐다. 순위는 8위. 대학?기업 등 조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는 그가 유일했다.
그는 해마다 5~6권의 책을 쓴다. 2004년에 쓴 『10년 후 한국』은 50만 권 넘게 팔렸다. 적게 팔리는 책도 2만~3만 권은 나간다. 다작의 비결은 창작 과정을 하나의 패키지로 만드는 것이다. 책을 쓰기 전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여기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더해 일종의 구조물을 만든다.
건축에 비유하면 집을 효율적으로 짓기 위한 설계도를 미리 그리는 것이다. 이 패키지를 그는 지속적으로 혁신해 버전업시킨다. 다독의 비결에 대해서는 『핵심만 골라 읽는 실용독서의 기술』이란 책도 냈다. 그는 ‘실용문 쓰는 기술’도 책으로 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명품 인생을 만드는 10년 법칙』 등 몇 권의 책은 군 부대에 비치하는 진중문고로 지정돼 있다. 그의 책을 읽은 젊은 병사들에게서 “가치관이 바뀌었다”는 e-메일을 받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그는 말했다.
공 소장은 일찍이 브랜드 관리에 신경을 썼다고 했다. 이코노미스트 시절 그는 논쟁적인 이슈가 제기됐을 때 우파 진영의 선봉에 섰다. 정부의 업종 전문화 정책과 재벌정책을 비판하고 『재벌, 비난 받아야 하는가』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신념에 따른 행동이었지만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확실한 타이밍으로 판단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스로 브랜드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상당히 전략적인 포지셔닝이었던 셈이다. 그 시절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그가 주력한 것은 언론매체에 대한 기고였다. 두 번째 브랜드 전략이다.
“1993년 『한국기업흥망사』란 책을 냈습니다. 사회과학 분야 연구소 출신이 처음으로 시도한 상업적 출판이었죠. 저로서는 목숨 걸고 한 모험이었습니다. 이 책 때문에 욕도 많이 먹었고, 몸담았던 한국경제연구원을 떠날 뻔했습니다. 이 책을 내고 나서 신문?잡지에 가리지 않고 칼럼을 썼습니다.”
기고 활동엔 두 가지 노림수가 있었다. 하나는 공병호라는 브랜드를 널리 알리겠다는 것, 다른 하나는 글 쓰기 훈련이었다. 그는 이때 기자들을 접하면서 연구를 많이 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개척한 세계는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결합, 일종의 크로스오버였다. 그때까지 이 라인을 공략하는 이코노미스트는 없었다.
그 무렵 업종 전문화 정책을 둘러싸고 훗날 노무현 정부 마지막 총리를 지낸 한덕수 상공부 국장과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대 상대를 수석 졸업한 한 국장은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의 엘리트 경제 관료였다. 공 소장은 30대 초반의 젊은 박사였다.
국가 번영과 개인 성공이 화두
외환위기는 그가 우파 이론가로 자리매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그동안 그가 축적한 지식은 확실한 자산이 됐다. 그는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했다.
2000년 공 소장은 자신이 설립을 주도한 자유기업원을 떠난다. 인티즌과 코아정보시스템의 CEO를 거쳐 이듬해 공병호경영연구소를 설립한다. 자기 경영이라는, 여태 없었던 영역을 발굴해 낸 그를 가리켜 우파 이론가라고 하는 사람은 지금은 별로 없다.
그는 이런 이미지 변신이 철저한 브랜드 관리 전략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부단히 혁신하는 것이 그의 세 번째 브랜드 전략이다.
그는 항상 새로운 것을 써낼 수 있어야 저술가로서 롱런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트를 축적하고 생산 과정을 혁신하는 1인 기업가가 자신 말고 없다는 점에서 그는 공병호의 경쟁자는 없다고 주장했다.
“끊임없이 콘텐트를 축적하고 자기 혁신을 하지 않으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축적한 콘텐트를 바탕으로 열심히 기고하고 책도 써서 지식 시장에서 공병호라는 브랜드를 구축한 겁니다.”
그는 한국경제연구원에 근무할 때 한 경제 일간지에 외국 신간을 읽고 그 내용을 요약해 싣는 일을 했다. 주변에서 “그런 일을 왜 하느냐”고 했지만 새로운 지식을 집중적으로 축적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1인 기업가도 어제까지 무엇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고 귀띔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핵심적인 조건이라는 것이다. 강연이 없는 날 그는 하루에 5~6꼭지의 청탁 원고를 소화한다. 강연이 겹칠 때도 있다.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지만 성취감도 크다고 말했다. 이렇게 쌓인 성취감은 자신감으로 승화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도 생겨 스트레스도 잘 받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아웃사이더 체질이라고 했다. 기성의 권위에 도전하다 보니 조직을 관리하는 일은 잘 맞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누가 저더러 지사(志士)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지사로 살아가려면 많은 욕구를 포기해야 합니다. 권력욕, 물욕, 편안히 살고 싶은 욕구 같은 것들이죠.”
그의 일관된 관심사는 그가 지사형 인간이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20대 때부터 그는 두 가지 화두에 천착해 왔다고 했다. 하나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야 잘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10년 후 한국』 『10년 후 세계』 같은 책들이 그 성과물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이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가다.
“『10년 후 한국』 같은 책을 일부에서는 돈 벌려고 썼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를 향한 저 나름의 애정 표현입니다. 우리나라는 훨씬 더 잘살 수 있어요. 우리 국민은 4만, 5만 달러 시대를 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는 데 일조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걸 저는 느낍니다.”
이런 주장을 펴는 그의 어조엔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의 책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왜 내 돈 내고 스트레스 받느냐”는 것이다. 그런 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신념을 버릴 생각은 없다. 그를 추동하는 내면의 힘은 무엇일까?
그는 “사람들에게서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라고 말했다. 역사 발전의 한 원동력이 인정투쟁(認定鬪爭?struggle for recognition)이라고 설파한 사람은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다. 공 소장이 쌓아 올린 브랜드 가치는 어쩌면 그가 벌여온 인정투쟁의 전리품이 아닐까?
누구나 브랜드 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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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치열하게 일해 뛰어난 성과를 올리면 누구나 브랜드가 될 수 있습니다.” | |
그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면 영향력 있는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무나 쉽게 할 수 없으면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 아니 다른 사람들은 시도하려고조차 마음먹지 않았던 일을 해낼 때 브랜드 가치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에게 그것은 독보적인 저작물이었고, 이노디자인의 김영세 사장에게는 독창적인 디자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는 재능보다 성과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지속적으로 성과를 보여줘야 사람들이 존재를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의 브랜드화는 범인이 넘볼 수 없는 경지인가?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윤생진 금호아시아나그룹 전략경영본부 전무를 예로 들었다. 흑산도 출신인 윤 전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8년 금호타이어 곡성공장에 생산직 사원으로 입사해 지난해 전략경영본부 전무로 승진했다.
생산직 출신은 주임도 달기 어려웠던 시절 부장이 꿈이라고 했다가 웃음거리가 됐지만 30년 만에 전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비결로 윤 전무는 열정, 자신감, 공부를 꼽는다.
“윤 전무가 브랜드 관리를 했겠습니까? 열정적으로 일하다 보니 신화를 만들어 냈고, 책 내고 강연 다니다 보니 회사의 가치가 올라갔고, 마침내 임원까지 달게 된 것이죠. 부지런하고, 성실하고, 치열하게 일해 뛰어난 성과를 올리면 누구나 브랜드가 될 수 있습니다.”
4년 전 인터뷰했을 때 공 소장은 건강 관리를 위해 연구소로 쓰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서 조깅한다고 했다. 요즘은 아침 일찍 조깅할 때도 있지만 실내 러닝머신에서 달린다고 했다. 운동량도 만족스럽지만 30~40분 러닝머신 위에서 전력 질주하고 나면 긴장이 풀린다고 했다. 더 효율적인 건강 관리법을 찾은 것이다.
공 소장은 새벽 4시면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이다. 잠은 보통 5시간가량 잔다. 수면을 5시간 미만 취하면 생체 리듬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밤을 새우는 일도 없다. 로스 타임을 줄이고 집중적으로 일하면 밤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여가시간에는 주로 책을 읽는다. 강연을 오래 하고 귀가해 피곤할 때도 책을 읽는다. 몇 십 권을 쌓아 놓고 끌리는 책을 골라 읽는다.
역사에서 그가 주목하는 인물은 볼테르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계몽 사상가였던 볼테르는 사망 당시 전 프랑스에서 20위권에 드는 재력가였다고 한다. 반봉건?반교회 운동의 선봉에 섰고, 당시로서는 도발적이라고 할 만한 문서를 많이 발표했다.
“자신이 어떤 재능을 지녔는지 깨닫고 그 재능을 특화해 성공을 거둔 대표적 인물입니다. 볼테르를 존경했던 애덤 스미스는 그의 흉상을 집 안에 두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자유주의자인 하이에크도 제가 존경하는 인물이죠.”
뜻밖에도 그는 “인생은 운에 많이 좌우된다”고 말했다. ‘운7기3’까지는 아니지만 운의 비중을 50%로 잡았다. 그래서 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다 기회가 오면 리스크 테이킹하라고 했다. 1인 기업은 배우자 등 가족의 협력이 중요하다.
공 소장은 아내와 대화를 많이 한다고 했다. 부인 서혜숙씨는 고양시에서 ‘오월의 향기’란 패밀리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아내가 바쁘다 보니 빨래?설거지 등의 가사가 그의 차지가 될 때가 많다. 두 아들은 순종적이다. 그는 방임적인 교육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아들이 언젠가 저더러 ‘카리스마 있게 늙어간다’고 하더군요. 자식들이 말을 안 듣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겠습니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끊임없이 규율하고 강제해야 합니다.”
그는 세월이 더 흐르고 나면 더 깊이 있는 책을 써 보고 싶다고 했다. 시오노 나나미처럼 언젠가 역사책도 써 볼 생각이라고 했다. 베스트 셀러가 아니라 밀리언 셀러를 쓰고 싶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많은 책을 썼지만 어떤 책이 팔리는지는 그도 예측이 안 된다. 공병호, 그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