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악 매니어
예술에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사람이 무가내하(無可奈何)로 배우겠다고 떼거리 쓸 때, 유구무언(有口無言)일 사람이 많을 것이다. ’93년 여름에 내가 그렇게 황당무계(荒唐無稽)하게 굴었는데 그게 엊그제 일만 같다. 그 때, 나이는 이미 상수(桑壽)1)이면서 제대로 부르는 가곡도 한 곡 없고, 세계적인 성악가도 모르고, 자신의 성역(聲域)도 모르고, 어떤 노래가 쉽고 어려운지조차도 구별 못하면서 뻔뻔스럽게도 성악을 배우겠다고 무턱대고 나섰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격’으로 겁도 없이 대든 것이다.
이태리어*독일어*프랑스어*러시아어*스페인어*영어 등을 가곡에 맞게 발음해야 하므로 딕션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콘코네(Concone)와 바카이(Vaccaj) 곡을 통하여 새롭게 솔페지오2)를 연습하고, 벨칸토3) 연주기법을 위주로 발성법(vocalization)을 익힘으로써 성악의 기본 소양을 다졌다. 마라톤을 통해 다져진 튼튼한 심폐기능을 뒷받침으로 열심히 갈고 닦았다. 규칙적인 반복운동에서 무수한 변화가 일어나는 마라톤처럼, 같은 곡을 되풀이 부르더라도 가사*곡*발성 등에서 부를 때마다 색다른 느낌의 절묘한 변화가 생긴다.
몇 년에 걸쳐 충남성악선교대학을 다니며 국내외 가곡, 오페라 아리아 등에서 많은 바리톤 곡을 익혔지만 아무리 연습하더라도 늘 모자랐고, 재주마저 하잘것없는지라 혼자 부르며 흥겨워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성악은 예술이므로 타고난 재주에다가 많은 연습이 더해져야 ‘소리다운 소리’가 연주된다. 모두 부족해서 부르면서 한번도 만족한 적이 없다. 발성이 무엇인지 눈뜬 것만도 솔직히 감지덕지(感之德之)할 일이다. 바리톤은 국내외에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애피셔 디스카우*티타 루포*레나토 브루손*파스콸레 아마토*김성길*황병덕*최현수*고성현 등의 걸출한 바리톤 연주를 음반(compact diskette)을 통해 자주 접하면서, 대전시민회관을 비롯하여 몇 군데에서 연주회도 가졌다.
연주회를 하려면 작사와 작곡의 배경을 이해하고, 가사와 악보를 암기한 후 넌더리나도록 연습해야 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박자*가락*음정*발성*호흡*감정 등이 조화된 무난한 연주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어느 한 가지가 부족하거나 한 곳에서의 실수도 너그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연주할 때마다 아마추어는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긴장이 지나쳐서, 잠결에서도 읊조리던 가사를 정작 무대에서는 흔히 잊어버리기도 한다. 노련하거나 요령 있는 연주자는 리듬과 멜로디를 맞추면서, 즉흥 작사로 부드럽게 그 고비를 넘긴다. 외국 노래를 연주할 때, 말도 안 되는 가사로 위기를 벗어나는 낌새를 알아차리는 사람이 별로 없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이다. 요령 없는 새내기는 있는 그대로 속살을 드러내고 만다. 인생처럼 연주회에도 ‘한 번 더(once more)’가 없다. 순간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우물우물하는 가운데 연주를 망치면, 그것으로 그간의 모든 준비는 하나마나가 된다. 순간의 실수가 인생을 완전히 그르치는 것과 왜 그리 똑같단 말인가.
연주회는 열지 않더라도 음반을 통해 틈틈이 무아지경(無我之境)에서 가곡을 감상하고 따라 부르니까 마음이 한결 넉넉하다. 알고 있는 가곡이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면, 성악가의 음색이나 멜로디에 금방 매료되어 음악감상 삼매경에 빨려든다. 새벽 길 달리며 가사를 외우고, 곡조에 맞춰 연습하다보면 저절로 흥취에 젖는다. 잘 하든 못 하든, 노래에 흠뻑 빠진 삶이 즐겁다. 열심히 갈고 닦으니까 자신도 모르게 성악 매니어가 된다.
매니어가 되면 질문도 잘 받는다. “있는 음반도 죽을 때까지 다 배우지 못할 텐데 뭘 더 사느냐? 프로가 될 것도 아닌데 왜 열심히 배우느냐? 잘하지도 못하는 노래 왜 자꾸 부르느냐?” 대답은 ‘미소’일 뿐이다.
‘그러니 매니어이지요. 사람은 유한하게 태어났지요? 가진 것 모두 머리와 마음속에 넣고 사는 사람 어디 있소? 즐거운 마음으로 부르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것이 종요로운 것이지, 잘 부르고 못 부르는 것은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오. 나는 이따금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나의 삶 가운데 보람찬 활동은 무엇인가? 내가 참으로 즐겁게 활동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하는 활동을 보고 남이 참으로 즐기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남과 더불어 참으로 즐겁게 할 수 있는 활동은 무엇인가?’
등의 자문자답(自問自答)은 속내에 감추고~~.
1) 상수(桑壽) : 상(桑)자를 십(十)이 네 개와 팔(八)이 하나인 글자로 파자(破字)하여 48세를 이름. 2) 솔페지오(solfeggio) : 도레미파 연습. 3) 벨칸토(bel canto) : 이탈리아에서 18세기에 확립된, 가창법의 한 가지. 소리의 아름다움이 특히 강조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