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갖가지 담론 영역에 거침없는 필봉으로 개입해온 언론학자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마침내 현대사 분야에까지 관심을 넓혀 3권으로 된 연구서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를 내놓았다. <1970년대편>은 그의 현대사 연구의 첫 결실이며, 그는 194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역사를 모두 13권에 담아 정리할 예정이다.
강 교수 책의 특징은 이야기하듯 술술 풀리는 속도감 있는 문체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방대한 자료의 섭렵이다. 이 책에서도 그런 속도감과 성실성은 그대로 확인된다. 강 교수는 ‘현대사 시리즈’를 쓰기에 앞서 지난 10년 동안 1만개에 이르는 자료 파일을 만들었다고 한다. 신문·잡지의 기사, 회고록, 연구서 등 수많은 사료가 그의 파일 속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풍부한 자료의 지원을 받은 이 책은 1970년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온갖 사건과 쟁점과 논평을 아우르는 총체적 보고서를 이룬다. 그리고 이 보고서는 ‘문민정부’의 경제적 실패에 편승해 향수와 흠모의 대상으로 부활한 ‘박정희의 시대’에 대한 냉정한 진단과 평가를 끌어낸다.
지은이는 이 시대를 요약하는 두 개의 사건으로 1970년에 연이어 일어난 ‘경부고속도로 완공’과 ‘청년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을 꼽는다. 두 사건은 이후 점점 뚜렷해질 박정희 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예고했다.
경부고속도로는 군사작전처럼 밀어붙인 개발독재의 기념비적 상징물이었다. 1㎞당 1억원의 파격적인 비용으로 3년 만에 완공한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싼 건설비로, 가장 빠르게 진행된” 고속도로 건설공사였다. 이 공사는 대통령 박정희가 “구상부터, 계획·감독·검사를 혼자서 해낸” ‘박정희 고속도로’였다. 박정희는 추풍령 준공기념탑 전면에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통일의 길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이 몰아치기 공사는 건설 노동자 77명의 목숨을 제물로 삼았고, 뒷날 건설비의 4배에 이르는 보수비를 잡아먹었다.
인명을 돌보지 않는 박정희식 ‘조국근대화’는 무서운 속도로 효과를 냈다. 이해에 ‘수출 10억달러 고지’를 조기에 점령한 박정희는 곧바로 “중화학공업화의 깃발”을 들었다. 1973년 울산석유화학공단과 포항종합제철 준공이라는 “놀라운 업적”을 끌어낸 한국경제는 1977년 수출 100억달러 목표를 3년 앞당겨 달성했다. 박정희는 일기에 “정부와 우리 국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의지의 결정이요, 승리”라고 썼다.
그러나 빛이 강한 만큼 그림자는 짙었다. 농촌과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은 일용직 노동자로, 봉제공장 직공으로 빨려들었다. 삶의 밑바닥에 떨어진 ‘공돌이’ ‘공순이’들은 극심한 노동착취와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그때 자신의 몸을 불살라 이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린 사람이 전태일이었다. ‘전태일 분신’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의 각성을 낳고 현실 참여를 독려했다. 이후 70년대는 ‘산 박정희’와 ‘죽은 전태일’ 사이의 긴 싸움의 연속이었다.
지은이는 이 즈음에서 박정희 시대의 파시즘적 성격에 주목한다. 박정희의 파시즘은 1972년 민주제도를 파괴하고, 영구집권 기반을 확립한 ’10월유신’ 체제로 성립됐다. 박정희 파시즘은 ‘민족성 개조’라는 이름의 국민의식개조운동과, 공포와 폭력이라는 물리적 탄압의 두 가지 수단을 통해 공고해졌다.
의식개조운동은 새마을운동과 ‘이순신 성웅화’ 작업이 표본이다. 농촌 새마을운동에서 시작해 도시-공장-학교 새마을운동으로 번진 이 운동은 “10월유신과 영구집권에 필요한 대중동원 수단”이자 “유신이념과 연결된 정치적 국민운동”이었다. 현충사 성역화 사업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에게 이순신은 “‘나’는 없고 ‘국가’만 있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멸사봉공의 정신”이었다.
이 파시즘 체제에 저항하거나 의심을 품으면 돌아오는 것은 고문과 죽음이었다. 수없이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간첩’이나 ‘빨갱이’로 몰려 “일제시대 때보다 더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어갔다. “박 정권의 고문만행은 공화당 의원이라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박정희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한 ‘공화당 4인체제’를 몰락시킬 때 이들에게 가한 끔찍한 고문이 그런 예다.
유신 파시즘 체제는 1976년 ‘반상회’ 실시로 더욱 확고해졌다. “혹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불순분자가 아닌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신고하도록 몰아간” 반상회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감시체제”였다. 그러나 이 ‘병영체제’는 내부의 저항을 끝내 이기지 못하고 1979년 ‘궁정동의 총성’과 함께 막을 내렸다.
지은이는 박정희 체제가 그의 죽음과 함께 끝나기는 했지만, 그 시대가 낳은 ‘인간성 파괴’의 후유증은 여전히 한국민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한다. ‘군사독재 멘탈리티’라 부를 만한 ‘국가주의적 문화’와 ‘지도자숭배 문화’는 그 피폐해진 내면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
<퍼온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