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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14 - 유목민 몽골 제국의 창시자인 칭기즈 칸 이란 인물에 대해 돌아보다!
몽골인들은 유목민이라 이슬람, 중국, 유럽 문명과 달리 기록을 남기는데 관심이 없다보니, 타인의 입장으로 역사가
기록되어 칭기즈 칸 역시 나쁜 사람이 될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실제 당한 입장에선 맞으니....
몽골들은 심리전의 일환으로 자신들을 나쁜 인간으로 표현하는데 능숙했다고 하며 그대로 반영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칭기즈 칸은 훌륭한 정책을 펴기도 했으니 첫째 계급 폐지로 15세 ~ 70세 사이의 남자는 모두 전사로 명시했는데,
몽골에서 전사의 위상이 높고 대장장이, 양치기 등은 하층 계급으로 이해되었는데, 신분제를 철폐하고 군사화를
추진한 것이니.... 여성은 예외라 한계가 있긴 하지만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비교적 여성의 위상도 높은 편이었습니다.
두번째는 종교의 자유 보장이니 몽골의 신앙은 하늘 (Tengri) 숭배 수준이었지 별다르게
조직화된 것이 없었는지라 유입된 종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때문에
'하늘 숭배' 를 직접적으로 배격하지만 않는다면 모든 종교들은 관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칭기즈 칸이 상대했던 나라들은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국가들이었는데,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유일신교로서 자기
종교외 다른 모든 종교는 거짓이라고 부정하는 배타성이 기본적 교리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종교가
다른 경우 종교를 탄압하는 일이 흔했지만 몽골은 종교에 관대한지라 정복한 땅 사람들의 환심을 얻기 쉬웠습니다.
세번째는 약탈혼 금지니..... 유목민 사회에서 여성이 당하기 쉬운 약탈혼을 법으로 금지
하였으니, 칭기즈 칸 본인 조차 약탈혼으로 태어난 존재이며 2대에 걸쳐
약탈혼 때문에 납치와 전투가 벌어졌으니 개인적으로도 약탈혼이 싫을만도 했습니다.
네번째는 인종차별 금지로.... 단, 후대에는 몽골 제국을 이어받은 원나라에서는 1위 몽골인, 2위 색목인, 3위 한인
(漢人), 4위 남인 (강남의 송 宋) 순으로 등급을 나눠 관직 진출이 가능한 한계나 직업의 자유, 거주지 이전의
자유 등을 제한하며 인종 차별 정책을 펼쳤다는 주장이 있으며 고려인은 북방 한인 (漢人) 과 같은 3순위 였습니다.
다만 원나라가 방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어서 차별 정책을 할 행정력이 부족하고 또 이주정책 등으로 동화
하려는 정책을 펼치지 않아 생각 보다 체감하긴 힘들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물론 후대 원의 경우
행정력이 미치는 중심부에서는 구분이 철저하게 이루어졌고 계급 마다 부르는 명칭도 달랐다고는 합니다.
금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지만 호라즘과 달리 자리잡은지 오래되고 생산력도 큰 나라라 여러번 공격해야 했고
칭기즈 칸 시대에는 완전히 멸망을 시키지 못했는데, 칭기즈 칸은 금나라 장군 흘석렬구근 (紇石烈九斤)
과 완안구근 (完顔九斤) 의 부대를 격퇴하는 중에 다퉁에서는 빗나간 화살을 맞아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징기스 칸은 인간적으로는 털털하고 소박하며 사치를 싫어했고, 소심하기까지 한 인물이었으니
저항하는 적에게는 무자비했으나 자기 사람에겐 베풀줄 아는 사람이었고 때문에 과거
몽골 부족과 달리 습격 과정에서 전사한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은
몫을 주거나...... 후방에서 전쟁 물자등 보급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전리품 배분에 신경씁니다.
조직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어떤 배려를 해줘야 하는지를 제대로 꿰뚫고 있었던 것인데, 현대 사회의 조직 운영
에서 상식이 된 "기여한 만큼 대가를 줘라" 를 이미 몇백년 전 과거 사람인데도 제대로 알고 있었던 셈입니다.
한번 결심하면 끝없는 끈기와 추진력으로 밀고나가는 인물이었으니.... 그가 12세 때 나이로는 형이었던 이복
형제 벡테르를 죽이는데서도 명확히 드러나는데, 그가 두번 이상 직접 침공한 나라는 금나라
정도였으며 반란이 있을 것 같으면 도시 자체를 불태워 없애버렸기 때문에 반란 가능성도 최대한 줄였습니다.
이것이 악명의 큰 원인이라고도 볼 수도 있는데 몽골족은 유목 민족이라 도시의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불태웠지만, 정복당한 사람들은 도시민들이니 악마 처럼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항복해 한번 용서해주었더라도 반란을 일으키면 다 죽이고 불태워버렸습니다.
후손을 자처한 티무르가 같은 땅을 몇번이고 침략해야 했던데 비하면 칭기즈 칸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데.... 타타르를 정복하고는 수레 바퀴 보다 큰 타타르인 남성
은 다 죽이라거나 또는 두 발로 걷는 것들은 다 죽이라거나 하는등의 명령을 내립니다.
미국이 스페인과 전쟁에서 빼앗은 필리핀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 밀림까지 추격하는 일이 벌어지자 미군이
전투에서 죽으면 마을에서 남자들을 모아 성인은 죽이는데, 나이를 알수 없으니 큰 막대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키가 막대기 보다 큰 남자아이는 죽은 미군 병사의 10배 숫자만큼 죽인 것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테무진 자신은 인간적으로는 강인한 전사로만 해석될수 없는 인간적으로도 털털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던 것
으로 보이며, 세계 정복 프로젝트가 이뤄지던 말년의 죽기 며칠 전에 한 말이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사람
으로 평범한 게르에서 살다 평범하게 늙어 죽고싶다" 라는 부분은 그의 전반기 인생 여정을 보여주는 것인가 합니다.
몽골 민족 전통 풍습을 죽을 때 까지 따랐고 사치를 싫어했으며 자신을 높이는 형용사마저도 싫어하여
황족들은 그를 “테무진” 이라고 불렀으며, 공문서에도 그의 이름 앞에 다른 명칭이 붙는 것을
싫어했고 종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 때문에 몽골의 풍습이 침식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몽골인은 씻을때 기운이 빠진다 여겨 세정의식을 거부했지만 이슬람교는 세정의식을 중시하며, 또한 몽골인은
피를 신성시한 탓에 가축을 잡을 때도 가슴 부위만 약간 절개한뒤 손을 집어넣어 심장 동맥을 따서
즉사시키는 도축 방법을 썼으니 다른 방식으로 도축하던 이슬람교 지도자와 몽골 정복자들의 갈등은 컸습니다.
죽을 무렵 도교의 사제 장춘 진인 (구처기) 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때 그 자신에 대한 상세한 얘기를
했으니 칭기즈 칸 본인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적들이 사치스럽고
불경하여 승리한 것이라고 얘기했는데, 그의 후예를 자처한 티무르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으니, "걔네들이 못난 짓만 하지 않았어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을....." 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칭기즈 칸은 사치를 싫어하며 백성은 자식 처럼, 능력있는 자는 출신을 불문하고 형제처럼 대했다고
얘기했으며 장군들과는 끈끈한 우애로 이어져 있다고 얘기했는데, 몽골 통일전쟁때
오로오드족의 수장으로 자무카의 부하였다가 13익 전투에서 패배한 자신을 따라온
주르체데이 를 신뢰의 의미로 천호장으로 만들고는...... 자신의 아내 중에 한명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장춘 진인은 처음 칭기즈 칸을 만났을때 칭기즈 칸이 살육을 멈추도록 설득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는데
하지만 칭기즈 칸은 그와 긴 시간 얘기한뒤 그를 마음에 들어해서 그가 중국으로 돌아갈때
까지 편안히 가도록 조치를 취해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중국의 도사들을 통제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장춘진인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덧붙이기도 했으니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자신을 따라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 칼리스테네스가 아시아식으로 자신을 숭상하는 것을 거부하자 나중에 죽인데 비해,
칭기즈 칸은 장춘 진인이 칭기즈 칸의 저녁 초대를 거부하고 도사로서 술을 거부해도 그를 공경하며 대했습니다.
칭기즈 칸의 주 전술은 "심리전" 이었으니.... 일부러 마을들을 공격한뒤 마을 사람들을 성 안에
몰아 넣어 성 안의 식량이 떨어지게 만들어 스스로 공격하게 하는 것인데.... 이는
훗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칠레의 포토시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은광신인 시마네현의
이와미 은광산을 넣기 위해 입구인 동해(일본해) 에 면한 돗토리성을 공격할 때 쓴 전술과 유사합니다.
히데요시는 상인을 풀어 돗토리성 인근에서 쌀을 시세 보다 높게 사들이니 심지어 돗토리성에서 비축미 일부를
내다파는 것을 보고 군대를 출진시켜 인근 마을에 불을 지르고 학살하니 수많은 주민들이 돗토리성으로
피신하자.... 성에 도착해 나무와 돌로 방책을 두르고는 공격하지 않은채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니,
돗토리성에서는 인육까지 먹게 되고 항복후 굶주린 탓에 살아남은 사람 중에 시력을 잃은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몽골군에 대한 악명을 부풀려서 적들이 스스로 움추려들게 만들었는데 이런 소문이 과장되어 중동 역사서
에서는 나쁜 부분만 적히게 되는데, 하지만 충격적인 만행을 자주 저질렀던 것도 사실이니 뒤통수
때린 도시는 여자와 노인, 아기까지 싸그리 죽인다던가, 공성전때 포로를 앞세워 돌격시켜서
수성측의 화살을 소모시키고 포로의 시체로 해자를 메운다던가..... 징기스 칸을 타임지에서 13
세기의 인물로, 워싱턴포스트도 지난 1,000년간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로 골랐지만 깡패라고 썼습니다.
반대로 19세기 유럽이 아시아를 야금야금 정복하는 일에 반발한 인도의 네루등 아시아인들 사이에서는 칭기즈 칸
을 영웅으로 보기도 했는데.... 물론 같은 아시아지만 서아시아는 직접 침공당했기 때문에
유럽 이상으로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처음에야 살육만 했지만 원정을 하면서 점차 도시의 가치를 인정하게 됩니다.
칭기즈 칸은 고문을 법적으로 금지했는데 물론 가끔 어기기도 했지만 죽일 거면 그냥 죽이고 살릴거라면
살렸으니, 후일 구육 칸 때 구육 칸이 정치에 간섭한 여인 파티마를 죽이면서 이 법을 깼다고 합니다.
또한 살육으로 유명하지만 "원조비사" 에서 호라즘 왕국 정벌 이야기에서는 자신의 허락없이 근접 국가를 공격한
부하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죽일땐 죽이지만 이유없이 죽이지는 않은 것이니 자무카를 잡았을 때도
자무카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자 이유없이 죽일 수 없다고 해서 먼 과거에 있었던 일을 죄명으로 말하고 죽입니다.
선전포고 없이 쳐들어간 적은 없으니 선전포고는 언제나 "내가 참작할 기간 줄테니까 그때까지 항복해. 항복 안하면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니 기대해라" 라고 했고, 이 말을 어긴적이 없는데 물론 당연하게도
자신이 죽은적도 없으며, 처리도 엄격해 항복한 지역에서는 약탈을 금지했고 맞서 싸웠던 곳은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몽골 통일과정에서 점령한 부족과의 사이를 호전시키기 위해 그쪽 여자와 결혼하고 각 부족에서 찾은 아이들을 자신
의 어머니로 하여금 입양하게 하여 형제의 위치를 주었으며, 초창기엔 아버지가 죽은후 고생했던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한 일종의 보상심리에 따른 행동이었지만 나중엔 몽골 통합에 큰 도움이 되는 정치적 행동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의)형제' 라는 의식에서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야율초재를 처음 만났을때도 야율초재가
금나라에 멸망당한 요나라의 황족 출신임을 감안해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얘기하자.... 야율초재는 칭기즈
칸의 말에 "저도 그렇고 제 조상들도 금나라에서 벼슬했는데 원수고 뭐고 있나요?" 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야만스럽고 잔인하면서 자신의 사람, 믿는 사람에겐 관대하며 친절한 사람이었으니 장수를 채용할때 제1조건이 능력과
충성이었는데, 자신에게 반항했던 첫 아들 주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며칠동안 게르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접근
하지 못하게 했으며 친아들이 아닐지도 모르는 주치를 큰아들로서 사랑한 것만 봐도 인간적인 부분이 있는 사람입니다.
적을 용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예외가 의형제 자무카이니, 자무카와 몇번이고 싸웠음에도 잡혀오자 2인자로 회유
하려고 했는데, 하지만 자무카가 죽여달라고 간청해 결국 피를 보지않는 방식으로 자루에 넣은뒤 말발굽에
밟히게해서 죽이니 몽골인은 피를 영혼과 연결된 것으로 생각해 피를 흘리지 않는 죽음을 명예로운 것으로 여겼습니다.
반면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았으니 아들들이 자신의 말을 안 듣고 싸웠을땐 엄청
화가 나있다가 볼츠의 중재로 설교로 끝났지만, 항복한 도시는 약탈하지 말라는 그의 명령을
어긴 칭기즈 칸의 사위는 즉시 일반병으로 강등되어 적과 싸우다가 죽었으며 이 덕분인지
페르시아 역사서에서도 '칭기즈 칸 그 자식 재수없긴 한데 나름대로 공평한 면은 있었다' 라고 기록합니다.
어릴적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자마자 아버지 부하들에게 배신받아 일가족이 고생한 덕분에 배신자들을 싫어했으니,
전쟁 전에 자신에게 항복한 자들은 환대하였지만 자신들 주군이 강성할때는 온갖 영화를 누리다가 주군이
전쟁에 져서 불리할 때 주군을 배신하거나 죽여서 항복한 자들은 신뢰가 없는자라고 하여 모두 사형에 처했습니다.
자무카를 배신하여 포박해 투항한 부하 다섯명을 사형시켰는데 자무카는 칭기즈 칸 앞에서 "친구여 이놈들은
주인인 나를 배신하고 붙잡아 왔다. 배신자들을 용납하지 않을테지?" 라고 말하자 " 주인을 배신해
적에게 팔아먹는 쓰레기들을 받아줄리 없지" 또 칭키즈 칸은 어린시절 자신과 가족들을
버린 것도 모자라 죽이고자 했던 키릴투크의 목을 잘라서 온 키릴투크의 옛 부하들도 모두 처형 했습니다.
또한 몽골제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친족이든 공신이든 권위에 도전했던 자들은 철저히 누르면서 중앙집권화를
이루는데 성공하고 뒤를 이을 후계자로 오고타이 칸을 선정하였는데.... 이는 흉노, 돌궐 같은
유목 제국들의 고질병이었던 중앙집권화 실패와 제위 계승문제를 예방해 몽골제국이 다른
유목제국과 달리 무너지지 않고 확장할수 있도록 했는데 황후인 타타르족 예수이의 충고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몽골에는 2010년에 40m 기마 동상이 세웠졌으니 현존하는 전 세계 기마 동상 중 가장 높으며.... 몽골의
화폐인 투그릭 지폐 도안도 칭키즈 칸이니 몽골인들에게 시조와도 같은 존재로, 한국으로 치면
단군왕검 + 광개토대왕 + 세종대왕급 위인으로 숭상받고 있으니 칭기즈 칸이 몽골 부족들을
하나로 모아 통일하지 못했더라면 오늘날 몽골 또한 나라없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몽골의 문자와 법전도 만들었는데, 칭기즈 칸 본인도 고향을 매우 사랑했으니 몽골에서 시조로 모시기엔
이만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니... 한국의 단군, 고대 로마의 로물루스에 비할수 있는 위상인데 단군과
로물루스가 신화속 인물인데 반해 징기스 칸은 역사적 인물이니 몽골사적으로 신화적인 존재라고 할수 있습니다.
유목민족 중 현재까지 자신들의 나라를 가진 민족은 몽골족과 튀르크족 뿐이니 역사에 이름을 떨친 유목민족인 흉노
·선비· 거란도 잠깐 빛났을뿐 차례차례 사라졌던 것을 볼 때, 청나라까지 이어진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의
여진과 함께 연약했던 부족들을 끌어모아 유목제국을 일으켜 하나의 민족으로 뭉친 칭기즈 칸의 업적은 확고합니다.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이 오늘날 나라 없는 민족이 되어 언어, 문화적으로도 한족에 거의 동화되어
사라질 위기에 처했음을 감안하면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은 대단한 업적인데,
만주족은 300년간 중원을 지배하였으며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였으니 한족에 동화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지만 몽골족은 100여년 짧은 시간만 지배한지라 민족적 독자성을 유지했습니다.
20세기 냉전 시절에는 칭기즈 칸에 대한 찬사가 금지되었으니 키예프 공국 시절 몽골-타타르의 멍에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소련이 위성국인 몽골에게 압력을 넣었기 때문으로, 공산주의 시절
몽골에서는 징기스칸에 대해 역사시간에 배우지도 못했고, 공식적으로 언급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1990년후 몽골은 칭기즈 칸 국제공항 처럼 그를 기리는 명칭이 많으니 상표에도 이름을 따오는 경우가 많은데
2013년에는 수도 울란바토르 시내에 수흐바타르 광장을 칭기즈 칸 광장으로 바꿔서 옛 공산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간의 갈등이 있기도 했지만, 몽골에선 칭기즈 칸과 담딘 수흐바타르가 모두
영웅시되고 있으며 명칭 변경이 위법이라는 사법부의 판결에 따라 다시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돌아갔습니다.
한국은 고려시절 몽골제국에 짓밟힌 역사가 있음에도 칭기즈 칸에 대해 호평하니 20세기엔 서양까지 동양의 힘을
떨쳤다는, 서양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는 옥시덴탈리즘 대리만족적 성향이 겹쳐져 긍정적인 내용만 부각되던
시절도 있었으나 21세기 들어선 칭기즈 칸에 대한 얘기가 대중들에게도 알려지며 학살자임도 인식하는 추세입니다.
여몽전쟁이 칭기즈 칸 사후 일어난 전쟁이기에 칭기즈 칸과 고려는 직접적인 악연이 없다는 것도 고려된 것이니....
몽골이 고려와 수교를 맺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게 칭기즈 칸 말기 부터였지만, 정확히는
몽골과 고려가 수교를 개시한후 칭기즈 칸은 서방원정을 갔고 고려와 관계는 동생 테무게 옷치긴이 맡고 있었습니다.
양국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는 “저고여 피살” 사건은 1225년에 일어났지만, 이 당시 칭기스칸은 서하 원정 중이라
당시 몽골의 대 고려 정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그는 여몽전쟁이 시작되기 4년 전인 1227년에 사망했습니다.
고려가 몽골에 항복할 때도 주변의 금나라, 남송, 서하 처럼 나라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고 오히려 고려
왕실은 몽골 공주와의 혼인을 통해 황금씨족과 접점이 생겼다는 점도 몽골을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 이유인데, 물론 황금씨족은 부계만 이어지며 부마인 덕분에 원 제국의 제1 번국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고려왕은 직위 자체만 보면 징기스칸의 동생으로 만주에 분봉된 동방 삼왕가에 버금가는 위치까지 올라가 차기 칸을
뽑는데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이었으니.... 나라 자체가 멸망한 곳 보다는 나은 신세이긴 했는데 물론 이건
왕실 한정이고, 일반 고려 백성들은 구 금나라 고토의 북방 한족인 한인(漢人) 과 비슷한 3등 국민 대접을 받았습니다.
중국에서는 "20살이 되자 ‘우리의’ 칭기즈칸이 유럽을 정복했으며 그때가 ‘우리나라의’ 최전성기였다
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25살이 되었을 때, 소위 ‘우리나라(중국)’ 의 최전성기는
사실은 몽골인이 중국을 정복해서 우리를 노예로 만들었을 때 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 루쉰
루쉰의 글은 몽골족까지 품은 만주족이 다스리는 다민족 국가 청나라 사람으로 자라났다가, 20세기 초 젊은 시절
“멸만흥한”의 기치를 띄고 한족들이 청나라를 몰아내자고 외치던 당시의 중화권 분위기를 느낀 루쉰 자신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라 할수 있겠으며...... 정작 오늘날 56개 민족의 다민족 국가라는 중국인의 입장은 묘합니다.
중국에서는 한족 (漢族) 을 중시하는 대한족주의자들은 칭기즈 칸을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오늘날 중국
은 엄연히 다민족 국가지만 한국을 비롯한 외부에선 '중국 = 한족 (漢族 혹은 한족이 주류 민족으로
소수민족을 지배하는)‘ 이렇게 보는 경우가 많기에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지만 전반적으론 좋아하는 편입니다.
칭기즈 칸 자체는 몽골족이고 몽골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인지라 중국에 속하며 북방 한족들은 혈통상으로 몽골족
과 매우 가까우니.... 몽골족의 중국 지배 이전에도 같은 몽골 제민족인 선비족과 거란족이 중국
북부를 다스리며 북방 한족들과 혼혈된바 있으니 역사적 논란이 있는 쿠빌라이 칸이나 원나라
뿐만 아니라 "칭기즈 칸도 중화영웅이고 몽골 제국도 중화제국이다." 몽골 제국도 중국사라는 식으로 주장합니다.
칭기즈 칸과 몽골의 원정 관련 동영상들을 보면 "중화민족이 세계를 재패했다.", "이것이 중화의 힘이다!" 라며
흡족(?)해 하는 중국인들의 댓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중화사상에 써먹는 모델로서
내몽골 자치구에 가짜 무덤까지 만들고 몽골이 지배한 곳은 죄다 중국 땅이라는 주장을 하는 네티즌도 있습니다.
중국 정권 차원에서 칭기즈 칸을 품으려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상당수 내몽골인들 사이에 잠재되어
있는 독립욕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정치적 필요에 더해 이른바 칭기즈 칸이 돈이 되는 관광자원이기
때문일 것인데..... 내몽골 출신 중국인들과 북방 지역 한족들이 칭기즈 칸을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는 편입니다.
칭기즈 칸 + 몽골제국사를 중국사로 끌어들이려는 해석은 중공뿐 아니라 청나라 시기나 그 이전에 중화사상
지지자들 사이에서 지지받은 오래된 이론이라고 봐야 할 것이며, 이전에는 소수민족이 지배층이다 보니
생존의 문제까지 겹쳐 소수민족끼리 혹은 한족까지 단결용으로 써먹는 소재였다면, 한족(漢族) 이
주류가 된 지금의 중국은 한족만의 나라가 아니라 미국 처럼 56개 민족 모두의 다민족 국가라고 말합니다.
20세기 초중반 중화민국 시대에는 중화인민공화국 보다 더했으니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쫓겨난 이후에도
타이완에서 판매되는 중국 지도에는 몽골이 중국 영토로 되어있었으니 즉, 칭기즈 칸을 중국인으로 주장
하되 몽골인의 나라 정도는 인정하는 중국과는 달리, 대만(중화민국) 은 아예 한술 더 떠서 몽골인의
나라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대만 독립주의자들한테도 비웃음을 받아서인지 2012년 후에는 옛말이 됐습니다.
2020년 10월, 프랑스 낭트 박물관에서 칭기즈 칸 몽골 전시회를 하자 중국에서 칭기즈 칸은 중국인이라고 항의
하면서 무산시켜 버렸는데.... 칭기즈 칸 본인은 당시 정체성이 몽골인이었지 중국인은 아니었으니 굳이
연관성을 찾자면 몽골 제국에서 중화문명에 편입되는 원나라가 세워진후 원나라 태조로 추존되었을 뿐입니다.
일본도 한국과 비슷하게 정복군주 + 학살자 정도 시각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직접 연관이 없는데다가,
훗날 후손인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가 일본을 침공하긴 했지만, 원나라의 침공을 저지했기 때문에
악의적인 수준까지 폄하할 이유가 없기도 하니 코에이의 게임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서도
제목 부터가 몽골이 주인공에, 몽골계 세력도 강력하며 부정적인 묘사는 거의 없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칭기즈 칸은 동서양 가리지 않은 무자비한 정복자니 서양에서는 공포의 상징이었는데, 서양에서 칭기즈 칸과
비슷한 평가를 받는 인물은 몽골로이드 계열과 유럽계 인종이 혼재된 것으로 추정되는
훈족의 왕으로 공포의 대왕 현세에 도래한 악마들의 군주 수준으로 묘사되는 “아틸라” 외에는 없다시피 합니다.
반면 칭기즈 칸이 같은 동양인으로서 역사상 가장 큰 제국중 하나인 몽골 제국을 세운 창업 군주이기 때문인지, 동양
에서는 몽골에게 호되게 당한 국가라도 유난히 이미지가 좋은 편이니 터키나 중국 같은 곳에서는 자기나라
위인으로 추앙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직접 피해를 받은 서아시아와 러시아에서는 전쟁광, 학살자 취급을 받습니다.
중세때 몽골군이 유라시아와 아랍 지역에서 이슬람 교도들을 쳐부술때, 유럽 기독교 나라들은 전설속의 기독교왕인
프레스터 존이 자신들을 구원하러 왔다고 멋대로 착각을 하기도 했으니, 유럽 기독교 국가에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온 이슬람 측(아사신 교단) 사신이 "아니다... 저들은 기독교도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적이던 우리가 구원을
요청하다니 이가 갈리겠지만 저들은 우리보다 더하다. 우리가 당한다고 기뻐하지 마라. 곧 당신들 차례가 올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유럽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의 사신을 비웃으며 내쫓았는데 이때 아사신 교단의 사신들은
멀리 잉글랜드에까지 가서 도움을 요청했으니, 잉글랜드의 대주교가 "어차피 너희 아사신이나
몽골군이나 우리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모두 불신자요 개들이다. 그러니 너희들끼리
서로 물어뜯게 내버려두는 편이 낫다." 라고 말하면서 아사신 교단 측의 도움 요청을 거부합니다.
동유럽이 점령당하고 중부, 남부 유럽이 피해를 본 것을 빼곤 딱히 접촉이 없었고 오히려 십자군 왕국들은 일 칸국의
유력한 동맹 후보국으로 몇차례씩 동맹 요청 사신이 오갔다는걸 보면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딱히 틀린 것만도
아니니.... 캅카스에 있던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 왕국 같은 경우에는 몽골군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존중을
얻고 몽골의 속국으로 편입되었으나 낙후된 공국이던 러시아는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제외하면 처참하게 짓밟혔습니다.
후손인 몽케 칸이 로마까지 본격적인 유럽 정벌을 준비하다가 병들어 죽는 바람에.... 몽골의 전통에 따라
이미 떠난 원정군들도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반쯤 짓밟았던 중부 유럽을 그냥 포기하고
돌아오다 보니 때를 놓치고 무산되어 버렸는데...... 만일 몽케 칸이 안 죽고 좀 더
살았더라면 이슬람 사신이 말한대로 유럽이 몽골 말발굽에 밟혔으리라는 주장을 펼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칭기즈 칸은 지옥에서 만나게 될 사람 목록에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과 함께 올려져 있으며, 훈족의
수령 아틸라와 더불어 무식한 야만인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는데.... 희화화된 이미지
와는 반대로 몽골과 칭기즈 칸을 이국적으로 신기하게 바라보는 서유럽인도 많으니 괜히
칭기즈 칸 노래가 독일에서 나온게 아닌데 몽골에 직접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이라 더 그런 듯 합니다.
해롤드 램은 몽골인을 이란과 튀르크계의 혼혈로 보았지만 유목 민족들이야 생활권을 공유했고... 동돌궐이나 위구르
는 원래 내,외 몽골에 있었으며 위구르 수도 카라발가순은 현재 울란바토르 인근이니 두 민족이 얽히는 것
자체는 당연하지만 몽골초원에 잔류하던 튀르크인들은 서아시아의 연계성은 없었고 중국과 접촉이 가장 많았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칭기즈 칸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는데 러시아 소 공국들을 무너뜨리고 240년이나 지배한
몽골~ 타타르의 멍에를 치욕으로 여기며 몽골 타타르의 대칸들 중 칭기즈 칸도 증오의 대상이며
타타르계 칸국은 러시아가 독립한 뒤에도 수백년간 러시아인들에게 살인, 강간, 약탈,
납치, 인신매매를 저질렀으니 '슬라브 금발미녀 노예' 가 이슬람 제국으로의 정기 수출품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왜구 이상으로 나쁘게 보는데 원조인 칭기즈 칸을 싫어하지 않으면 이상할 노릇이니,
러시아의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타타르의 지배는 파괴말고는 남긴게 없다는
글을 남길 정도였으니, 정확하는 몽골인들을 “대수학을 갖추지 못한 아랍인” 이라고
표현했는데 몽골 지배후 러시아는 다른 유럽에 비해서 낙후된 상태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키예프공국이 있던 우크라니나는 비옥한 농경지라 부유했으며 몽골의 침략 이전까지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받았던 러시아의 문화적 수준은 서유럽보다 낮지는 않았으니.... 러시아라면 춥고 척박한 땅이라는 이미지야
말로 몽골 제국의 정복후 형성된 것이니 몽골의 침략후 키예프~ 루스의 중심 지역이 약탈과 학살로 철저하게
파괴된후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이 땅을 접수하는 바람에 러시아의 중심지가 춥고 척박한 동북쪽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결국 키예프 루시 공국 중에서 후발주자로 세력이 작았던 모스크바 공국이 킵차크 칸국의 세금 수취를 대리하는
과정에서 세력을 축적하여 러시아를 통합하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키예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
하였으며,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별개의 정체성을 주장하며 친서방 행보를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까지 이릅니다.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키예프공국 성립후 350년간 개발이 진행되었던 알토란 같은 영토를 몽골의 침입으로
상실하고, 춥고 척박한 동북쪽에서 새 영토를 개척해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며 250년 가까이
몽골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문화적 정체와 사회적 퇴보를 겪고 농노제가 각박하고 잔인해졌습니다.
그 사이 대등했던 서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를 추월하며 발전하였으며, 러시아는 18세기 ~ 19세기가 되어서야 따라잡을
수 있었으니 러시아가 열강으로서 유럽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 18세기 초중반, 표트르 1세의 개혁 이후임을
생각해 보면....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후 피폐해진 국력을 수습하는데 2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음을 알수 있습니다.
쿠빌라이가 세운 원나라는 1271년부터 1368년까지 97년간 중국 대륙(중원)을 지배했으며 수도는 칸발리크
(대도, 베이징) 였는데.... 일본을 2차례나 침공하고 동아시아를 호령하던 원나라는
권신들간의 권력 다툼, 홍건적과 같은 한족들의 대규모 반란, 흑사병의 창궐 등으로 점점 쇠락해 갔습니다.
결국 1351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고, 홍건적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이 1368년 명나라
의 건국을 선언했으니.... 주원장은 명나라 건국 직후 대규모 북벌를 단행하여 원의
수도 대도를 함락시켰고, 원나라 혜종은 북쪽의 몽골 고원으로 달아나면서 북원을 건립합니다.
북원은 중원을 되찾기 위해 명군과의 전쟁을 끊임없이 벌였지만 큰 성과는 없었고, 북원의 제3대
황제인 천원제로 부터 제위를 찬탈한 조리그투 칸이 원나라의 황제 위를 버리고
몽골 대칸의 지위만 잇기로 하면서...... 1388년 원나라는 완전히 멸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숲속의 사람들인 몽골 서북쪽 오이라트 족은 칭기즈칸에게 패한후 그 수하로 들어가서 몽골군의 전위대로
싸운적이 많은데 훗날 지도자인 에센은 1449년 무역문제를 구실로 명나라에 대한 전격적인 침공을 개시합니다.
그러자 당시 명나라 황제인 정통제는 대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출진해 오이라트군과 전쟁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명군이 대패하니 황제인 정통제는 오이라트군에 사로잡히는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자 이 기세를 몰아 에센의 오이라트군은 남진해 명나라 수도 베이징을 포위하는데 까지 성공했으나
명나라 장수 우겸의 우주방어로 명나라 정복은 실패하고 말았으며..... 그뒤로도 중국을
정복할 기회를 엿보았지만 알라그와 타이시 임명 문제로 다투다가 살해당하니 명나라는 한숨을 돌립니다.
이후 오이라트에서는 내분이 일어나서 나라가 세 개로 쪼개져 버렸으니.... 준가르와 호쇼트
에다가 칼미크인데, 칼키크는 러시아제국에서 코스카 부대와 같은 대우를
받았고 호쇼트는 티베트를 침공해 정착햇으며 준가르는 마지막 몽골 제국으로 불립니다.
준가르는 기병에만 의존하지 않고, 화약과 무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했으며, 강력한 전투력으로
최후까지 청나라를 괴롭혔는데..... 유목과 수렵채집 생활을 주로 했으나, 상업
발달은 물론 기후가 허락하는 한 농경도 병행했을 정도로 유연한 경제적 구조를 갖고 있었습니다.
준가르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최악의 잔혹사의 주인공이니 시조인 하라후라 부터 나라를 버린채
도망쳤고, 역대 군주들을 보면 임기를 제대로 마치거나 제명에 죽은 케이스가 하나도 없었으며,
존속 기간 내내 타민족들을 학살했고 자기들도 학살당해서 지구상에서 민족 자체가 거의 소멸해 버립니다.
갈단 칸은 준가르의 초대 홍타이지 에르데니(에르딘) 바아투르의 4남으로 1676년 준가르를
평정한후 과거 오이라트의 맹주였던 호쇼트 부족을 정복해 서몽골을 통합하고,
티베트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림 분지로 영토를 넓혀 나갔습니다.
1720년 청나라는 달라이 라마 7세 겔상 갸초를 앞세우고 라싸에 진주해 준가르 세력을 몰아냈으며 세종 옹정제때
준가르는 청나라 목마장들을 습격하고 투루판을 공격하니 옹정제는 200,000명의 병력을 파견했는데 푸르단이
이끄는 북로군이 호톤노르에서 준가르의 유인전술에 넘어가 50,000명을 잃고, 장수들이 전사하는 참패를 당합니다.
그나마 청군은 칭기즈 칸의 20세손인 보르지기트 체링이 준가르군을 격퇴하고 10,000명을 살해하여 티베트
를 유지했는데, 이후 후계자 문제로 내분이 일자 청나라 건륭제는 4명의 칸을 세워 분할하려
하자 아무르사나가 이에 반발해 전투가 벌어져 결구에는 청군에 패해 나라가 망하고 땅은 중국령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