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韓明澮)는 말년에 한강가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지내다가 죽는다. 그리하여 지금 압구정동(狎鷗亭洞)의 유래가 되었으며, 정자는 없어지고, 있던 위치에 비석만 세워져 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뒷편에 있다. 亭子라 하였지만 겸재 정선의 그림을 보면 別莊 규모이다.
成宗시대의 최고 권력자 한명회는 자연 풍광이 좋은 이 곳을 골라 별장을 짓고, 낙성식 날에는 왕을 위시하여 조정의 문신들을 초청하여 화려한 연회를 베풀었다. 이는 당시 그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명회는 다음과 같은 詩를 지어 자신의 삶을 자찬하고 있다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젊어서는 나라를 도왔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
김시습은 두 글자를 바꾸어 비틀며 한명회를 비웃고 있다
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히네
鴨鷗亭 ⇒ 押鷗亭
한명회는 이 정자를 지어 놓고,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들어 가는 기회를 이용하여 전부터 알고 지내던 명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 예겸(倪謙)에게 정자의 이름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예겸은 갈매기와 더불어 한가로이 지내며 富貴와 이록(利祿)에 대하여는 자신에게 관계가 없는 것 처럼 지내라는 의미에서 압구정(狎鷗亭)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정자의 이름과는 상관없이 권세와 富를 추구하는 데 있어 당대 1인자이었던 한명회이었기에, 이 곳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비웃었다고 한다. 그리고 압구정(押鷗亭)... 이라고 한자를 바꾸어 그를 비꼬았다. 원래는 압(狎) ..즉 가까이 할, 또는 익숙할 압(狎)인데, 누를 압(押)으로 바꾸어 즉 갈매기를 눌러 오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의 압(押 ..누를)으로 바꾸어 불렀다.
성종임금도 1476년 압구정시(狎鷗亭詩)를 직접 지어 하사하였으며, 조정 문신들도 서로 다투어 詩를 지어 바쳐 그 詩가 수백편에 이르렀고, 중국에도 그 이름이 유명하여 중국 사신들이 서울에 오면 누구나 이 곳에 배를 띄워 놀기를 희망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 별장은 박영효(朴泳孝. 1861~1939)의 소유가 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일어나 박영효가 국적(國賊)이 되어 일체의 재산을 몰수당할 때 헐렸다.
압구정을 둘러 싼 成宗과 한명회의 死活을 건 싸움
성종12년 6월24일 한명회가 성종을 찾아 와 ' 중국 使臣이 압구정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는데, 정자가 매우 협소하니 말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에 성종은 우승지를 시켜 중국사신에게 압구정은 좁아서 놀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전하였으나, 그 사신들은 한사코 가보겠다고 우긴다.
그 다음 날 한명회가 다시 성종을 찾아 와 하는 말 ... ' 臣이 중국의 사신을 만나 보았는데, 굳이 압구정에 오겠다고 하니, 압구정은 본디 좁으므로 지금 더운 때를 당하여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해사(該司 .. 해당 관청)을 시켜 정자 곁의 평평한 곳에 큰 장막을 치게 하소서 ' 즉 한명회는 중국사신을 모시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압구정이 좁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개인적인 재산을 임시로 확장하는 데 관청을 동원하겠다는 의미이며, 더욱이 큰 장막은 바로 국왕이 사용하는 용봉차일(龍鳳遮日) 밖에 없었다.
한명회의 手決
成宗은 마침내 참을 수가 없었다. ' 卿이 이미 중국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다시무엇을 얘기하고자 함인가? 그렇게 좁다고 한다면 제천정(濟川亭 .. 한남동에 있던 )에서 잔치를 차려야 할 것이다 ' 이에 지지 않고 한명회는 한 술 더 떠 처마를 잇대어 정자를 넓힐 수는 없겠느냐고 묻는다. 한명회는 중국 사신의 위세를 빌려 성종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5살이 된 성종은 70세의 한명회에게 절대 지지 않았다. 비록 한명회의 덕으로 왕위에 오른 성종이었지만...
成宗은 ... ' 이미 압구정에서 잔치를 하지 않기로 하였는데, 어찌 처마를 잇자고 하는가 ? 지금 큰 가뭄도 들고 하였으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압구정을 헐어 없애야 마땅하다. 조정 대신들 중에 강가에정자를 꾸며 유람하는 자가 많다고 하는데, 나는 이를 아름다운 일로 여기지 않는다. 내일 제천정에서 잔치를 차리고, 압구정에는 장막을 치지 말도록 하라 ' 韓明澮 역시 지지 않고 ' 臣의 아내가 병이 있어 더욱 심해졌으므로 내일 제천정에서 잔치가 있을지라도 臣은 가지 못 할 듯 합니다 ' 하고 몽니를 부린다. 마침내 성종이 승정원에 지시한다. ' 제천정과 희우정(喜雨亭) 두 정자만 빼놓고 그 나머지 정자는 일체 헐어 없애서 뒷날의 페단을 막으라. 또 내일은 제천정에서 오찬과 술자리를 차리고, 압구정은 구경만 하게 하라 ' 그러나 이 것으로 압구정을 둘러 싼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었을 뿐이다.
이윽고 한명회가 물러가자 즉시 승정원(承政院)의 승지(承旨)들이 들고 일어났다. 한명회의 태도는 왕에게 대든 것이라고 하며 국문(鞫問)을 주장하자, 성종은 ' 그 말이 매우 옳다. 그러나 분부는 천천히 하겠다 '라고 말한다. 그 다음 날 경연(經筵)에서 당장 이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랐다. 신하들은 하나같이 한명회를 벌하여야 한다고 주청하였다. 이에 성종은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정승(한명회)이 잘못하였다. 전일 北京에 갈 때에는 아내의 병이 심하여 거의 죽게 되었는데도 갔는데, 이제 하루의 일때문에 아내가 앓는다고 사양하는 것이 옳겠는가? 내가 어진 임금이 아니라고 해도 신하의 도리가 어찌 이러할 수가 있는가. 승정원에서 말하기를 ' 한명회가 청한대로 허락받지 못하였으므로 분한 마음을 품고 이 말을 한 것이다 ' 하였는데, 실정은 알 수 없으나 그 말은 실제로 분한 마음을 품은 듯하다 ... " 그리고 즉각 한명회를 국문하라고 지시하였다. 성종의 분노는 이렇게 컸던 것이다.
겸재 정선 (謙齋 鄭敾. 1676~1759)의 압구정도 狎鷗亭圖
정선(鄭敾)은 처음에 중국 南畵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山水畵의 독자적인 특징을 살린 사생(寫生)의 진경화(眞景畵)로 전환하였다.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을 찾아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문재(文材)가 없었으므로 그림에 다만 서명과 한두개의 낙관만이 화폭의 구석에 있을 뿐 화제(畵題)가 없다.
한명회에 대한 국문 지시가 내려 간 후 7월1일 사헌부에서 조사 결과를 올리자 성종은 " 죄는 크지만 조정에 공이 있는 공신이고, 나에게도 구은(舊恩 .. 왕이 되게 하여준 것)이 있으니 직첩을 거두고 성 밖에 나가 살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 "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구했다. 분분한 의논끝에 결국 성종은 職牒만을 회수하는 것으로 결정을 내린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 성 밖으로 나가 살게 했다가 중국 사신들이 이를 알고 용서해 주기를 청하면 처치 곤란하기 때문.. "이라는 것이다.
이는 그 만큼 한명회가 중국 사신들과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며, 성종도 이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북경에 사신으로 드나들던 한명회는 성종이 점차 독자노선을 추구하자, 자신의 권력 기반이 약화되는 것을 알고 중국사신들에게 뇌물을 썼고, 이제 70세의 늙은이 한명회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중국의 힘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처벌도 불과 4개월이 지난 후 職牒을 회복시켜 주었다. 成宗의 명백한 패배이었다.
반면 훗날 숙종은 南人의 정승인 허적이 자기 아버지의 잔치를 위하여 미리 보고하지도 않고 임금 전용의 기름 천막을 가져 갔다는 이유로 허적을 죽인다. 이 때 그 어린 숙종의 입에서 나 온 말은 " 예전에 한명회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 한명회 사건은 두고두고 조선 왕실의 수치처럼 전해 내려 왔다는 뜻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