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4.주일오후찬양예배 설교
*본문; 삼하 11:1~5
*제목; 사무엘하서강해(11) 영적 독해력을 가져라!
1. 영적 징조를 알아차려야 한다.
지진이나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이를 먼저 알아채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로 쥐나 뱀들입니다. 먼저 알아차리고 먼저 피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영적인 일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전조 현상이 있습니다. 이를 사전에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있다면, 미리 영적인 일들을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영적 독해력”이라고 합니다. 말씀과 상황 그리고 내게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2. 다윗에게 나타난 영적 징조
오늘 본문의 다윗에게도 이러한 영적 징조가 나타납니다. ‘1절’입니다.
“1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삼하 11:1)
이스라엘의 왕의 가장 큰 책무는 이스라엘의 전쟁에 선봉에 서서 그 전쟁을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이 전쟁에 나갈 때마다 대승을 거두니, 더 이상 다윗이 전쟁에 선봉이 서지 않아도 될 것 같았습니다. 또한 이제 다윗에게는 용맹하고 지혜로운 장수가 너무나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굳이 왕이 전쟁에 나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쁜 영적 징조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늘 신실했던 다윗이, 그리고 그 책무를 최선을 다해서 지켰던 다윗이, 오늘 그 일을 내팽개치고 궁에 머문 것입니다.
이 “나쁜 징조”을 알아채는 영적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가장 두드러진 영적 나쁜 징조의 특징은 바로 “나태함”입니다. “나태함”은 결국 더 큰 죄를 불러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2절’입니다.
“2 저녁 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삼하 11:2)
드디어 목욕하는 여인을 보게 됩니다. 나태한 태도로 활동해야 할 때, 활동하지 않으니 늦잠을 자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밤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런 그에게 죄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아내가 없었나요? 그런데 그가 이 ‘밧세바’에게 음욕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결국 데리고 오도록 명령합니다. ‘3~4절’을 봅시다.
“3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그가 아뢰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하니
4 다윗이 전령을 보내어 그 여자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그 여자가 그 부정함을 깨끗하게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그 여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하 11:3~4)
그의 종들의 보고가 특별하게 보입니다. 그냥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입니다.’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는 다윗의 범죄를 넌지시 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을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녀를 불러 간음하게 됩니다. 죄가 시작된 것입니다.
다윗은 그녀가 그의 충신 우리의 아내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알고도 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나태함”이 죄의 출발점이라면, “알면서도 행하는 것”이 죄의 성장입니다.
3. 죄의 노예가 된 다윗
그런데 이제 조용하게 다 덮일 것 같았던 죄가 더 커져만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속성입니다. 죄는 일단 시작되면 그 죄의 터를 완전히 초토화시킬 때까지는 멈추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는 그 시작을 아예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건은 ‘밧세바가 그만 임신을 한 것’입니다. ‘5~9절’입니다.
“5 그 여인이 임신하매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임신하였나이다 하니라
6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7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8 그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9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의 주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잔지라” (삼하 11:5~9)
이를 덮기 위해 다윗은 한 꾀를 냅니다. 전장에 나간 우리아를 불러 밧세바와 동침케 해서 그의 죄를 덮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동료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자신만 집으로 가서 평안하게 아내와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다윗의 말대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부하들과 함께 야영을 한 것입니다.
죄의 노예가 된 ‘다윗’과 대비되는 거룩하고 경건한 종 ‘우리아’입니다. 하나님은 이 둘의 비교를 통해서 다윗을 죄를 더욱 드러내려 하신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려는 계획을 짭니다. ‘14~17절’입니다.
“14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15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16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17 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 (삼하 11:14~17)
“나태함”으로 시작된 죄가, “알면서도 행하는 죄”로 성장하고, 이제 “살인”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죄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살전 5:22)은 옳습니다. 일단 시작되면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그러나 다윗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이러한 간음자요 행악자요 살인자인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십니다.
왜입니까? ‘대하 21:7’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7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대하 21:7)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부족한 다윗이라고 그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이를 기억합시다!! 그러므로 언약을 품는 백성이 됩시다! 아멘.
첫댓글 죄가 시작되면 '나태함'과 '알면서도 행지 않는 죄'가 일어납니다. 이 때 돌이켜야 합니다. 아니면 죄가 우리를 삼켜버리는 지경까지 가게 됩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이 그랬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약속 있는 백성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과 죄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