士君子志于學, 將欲經營四方者, 勤讀經史, 有日就月將之功, 而意外偶遭學魔, 不得已中途廢之者有之, 則豈不哀惜哉? 我再從叔主誠齋處士公是矣. 公諱洪, 字箕中, 號誠齋. 姓許氏, 文敬公諱珙之後裔, 枕溪公諱鎭之胄孫也.
生有異質, 而以器氣之淸秀才器之明敏, 初學於門老<人+免>窩先生鍊之門, 旣通文義, 而又與其表從兄李毅齋先生, 講論經與禮, 將有成就之望, 而猶未弱冠之年, 偶得貞疾, 專以治病爲念, 所讀經傳, 皆束置于於閣, 而以藥餌療養, 醫書消遣者, 數十年也. 或慮膝下之失敎, 使其長子, 就學於李毅齋鍾弘郭靜軒鍾千之冷泉書堂, 又以己巳(1929)命送於密陽之紫巖書堂, 執摯於盧小訥先生, 是亦爲三遷之敎也.
光復後, 築堂於積石山親塋下原德洞(번듯), 而朝夕展拜攀柏. 於是復深前日之所讀經傳, 尤用力於庸學, 著述學理一篇, 其意頗深奧也. 日召門子姪曰 : "今吾國光復, 則當讀吾書, 何可悠泛度日乎?" 其命峻嚴, 自是小姪輩, 朝益暮習於以會書室焉.
庚寅(1950)亂靖後, 公與吾父(泰)欲參先祖文敬公時享於長湍之招賢院, 而到臨津江, 戌兵沮止曰 : "此則緩衝地帶, 不可通行."云, 故不得已而望拜, 而歸觀鷄龍山之勝景; 又往參鎭川先塋之時享, 則金谷無愁谷龍躍泉齋宮洞之山所, 各有所感之詩也. 公居家, 則矜嚴好禮, 動止有則, 諸子諸婦, 皆模楷而畏敬, 接朋友, 則攝威儀.愼言語, 衆皆敬憚焉.
公之詩文, 在巾衍者, 其孤新庵兄, 蒐輯精書, 而附挽祭狀碣, 以成卷帙, 將欲刊行, 遽逝者十年之今日, 嗣孫<火+翌>繼其先志, 逮夫登梓也. 屬余弁文, 乃以耳目之所及, 略述如右, 以附卷首, 而公之德行, 事事諸賢之撰述有備, 故今不敢復贅也.
辛巳(2001) 重陽節 再從姪 채(木+采) 謹識
첫댓글 6.25가 끝난 1954년 가을 성재(洪).화재(泰) 두 분이 장단 초현원 문경공시제에 참석차 임진강에 도착하였으나 그곳을 지키고 있던 보초병이 "이곳은 완충지대이므로 민간인은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말을 들은 두 분은 발길을 돌려 충남 계룡산으로 향했다. 이곳의 관광을 끝낸 다음 바로 진천선영의 시제에 참석하였다는 내용이 삽입되어 있다. 이 구절은 동주사공파중앙종회 입장에서 보면 중요한 자료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고성 참의공종회에서 매년 2-3명식 파견하였는지를 입증하는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송양재의 기록이 유실되어 어느분이 초현원과 진천시제에 참석하였는지 알 수 없어 안타까워 하던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