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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얼을 찾아서(5) ‘가락지-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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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쌍의 금가락지. 가장 왼쪽에 있는 금가락지에는 박쥐문양이 새겨져있는데 박쥐문양은 복(福)과 다남(多男)을 염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동양에서는 오복의 상징으로서 경사와 행운을 나타낸다. |
경상남도 진주에 가면 촉석루와 진주성, 그리고 진주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 남강의 다리 진주교에 끼어있는 금가락지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진주교에 끼워져 있는 이 금가락지들은 바로 논개가 끼고 있던 금가락지를 상징하는 것인데, 논개는 조선 중기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왜장과 함께 죽은 인물로 왜장을 껴안은 손이 풀리지 않도록 하기위해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웠다고 전해진다.
경상남도 진주를 가로지르는 남강 위의 진주교. 진주교에 끼워져있는 이 금가락지들은 열손가락에 가락지를 낀채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투신한 논개의 가락지를 상징한다. |
가락지는 안은 판판하고 겉은 통통하게 만든 손가락에 끼는 두 짝의 고리로써, 고리가 하나로 된 것은 ‘반지’라고 하며, 지환(指環)은 가락지와 반지의 총칭이면서, 가락지만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말의 ‘반지(斑指 혹은 半指)’는 본래 두 짝으로 이루진 가락지의 한쪽 ‘반(半)’을 의미한다. 보통 ‘가락지’와 ‘쌍가락지’를 혼돈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락지 자체가 두 짝의 고리를 의미하므로 쌍가락지는 같은 의미를 이중으로 잘못 쓰는 ‘역전 앞’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대개 반지는 미혼과 기혼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끼지만, 가락지는 기혼녀가 끼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재료는 금·은· 구리·옥·비취·호박(琥珀)·마노·밀화(蜜花)·산호·진주 등을 사용한다.
조선시대에는 종류에 따라 계절에 맞추어 끼기도 했는데, 재료에 따라 겉을 민패로 하기도 하고, 문양을 세공하기도 했다. 가락지는 신분에 관계없이 일반화되었지만 재료에 있어서 상류층에서는 옥, 비취 등을, 서민층에서는 간결한 박쥐무늬가 새겨진 은이나 백동 등을 많이 썼다. 조선후기에는 궁중이나 상류층 부녀자들이 계절에 따라 다른 가락지를 착용했는데 제24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가 쓴 필첩인「사색복색자장요람(四節服色資粧要覽)」을 보면 ‘10월부터 정월까지, 즉 겨울에는 금지환을 끼고 2월부터 4월까지는 파란 지환을 낀다. 5월 단오날 더위 초사 당한삼을 입을 때에는 옥 지환이나 자마노 지환을 끼고 8월 중순 광사 당고의를 입을 때에는 다시 파란 지환을 껴서 9월의 공단 당고의를 입을 때까지 끼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당시 가락지가 계절과 옷차림에 따라 달리 착용되며 그때 그때 다른 느낌의 장식적인 미를 더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손가락에 끼기에 둔하고 두툼한 가락지는 노리개 대용으로 옷고름에 매어차기도 했는데, 이중 월패(月佩)라고 불리던 옷고름에 단 반지는 아녀자가 남편에게 자신의 생리를 알리는 수단으로도 쓰였다고 전해진다.
한편 가락지는 양반 집에서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에게, 친정어머니로부터 딸에게 가보로 전해지며 부를 자랑하는 패물로 간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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