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범선의 유족 우장춘(禹長春)은 정말로 서울에 왔을까?
(*)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1898~1959)의 전기인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의 <우장춘 박사 일대기 :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 (교문사, 1992)에 따르면, 우장춘이 귀국하던 1950년 이전에 우리 나라를 찾았던 사실이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책 저자의 경우 당초 1950년 귀국이 최초의 한국방문인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여러 가지 증언을 통해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수정되고 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언제 우장춘이 식민지 시절의 조선을 찾아왔던 것인지는 특정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시기도 기껏해야 일제 말기의 어느 때인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아래의 <매일신보> 수록기사를 보면, 우범선의 유족 우장춘은 일본천황이 내리는 은사금공채를 수령하기 위해 서울에 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적어도 신문기사만 보면, 그렇다는 얘기이다. 이 점에 있어서 사실관계가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거나 우장춘은 이를 통해 일제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아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 대목에 관련된 사항들을 쓰노다의 책에서 다시 추출해보면, 이러하다.
(39쪽) "아버지는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마음에서 일본을 떠나 한국에 간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 건너가기 전에 아버지는 나한테 일본한테서 입은 '은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나에게 학비를 대주고 공부를 시켜준 곳은 일본이다. ...... "
(81쪽) 처녀 마사코는 "이때 박영효의 주선으로 총독부로부터 어버님의 양육비가 지급되었다고 합니다"고 말했다. 금액은 확인할 수 없엇으나 그 돈을 받은 우장춘의 어머니 나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107쪽) 내가 이렇게 말을 꺼내자 M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태연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시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줄곧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씨로부터 매월 40엔을 지급받았습니다."
(287쪽) [1929년생 강우창의 증언] ...... "우장춘 박사는 학창시절부터 아버지(강원달)의 집에 와서 오래 머물렀다고 어머니가 나에게 말해 준 적이 있다. 나 자신도 국민학교에 다닐 때 몇번인가 우박사를 집에서 본 기억이 있다."
(290쪽) "아뇨, 아버님이 젊었을 때부터 한국에 있는 누님의 집에 이따금식 갔었다는 등의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요. 아버지는 1950년, 한국에 갈 때까지 그 나라에 가 본 적이 있을 리가 없어요. 아참, 중국을 시찰하러 갔을 때 기차로 한국에 들렀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하고 말했다.
(290~291쪽)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M(=우장춘의 남동생)은 말했다. 그는 그 해, 당시는 경성이라고 부르던 서우의 지점장으로 부임했다고 한다. "그 때, 어머니는 다르지만 누님인 우희명의 집에 갔었죠. 그 뒤 얼마 후에 나는 중국으로 가게 되어서 누님의 집에는 한번 뿐이었고, 그래서 아무런 느낌도 없었습니다만 ......"
"그것이 우박사가 가자고 해서 간 것이었나요? 애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 하며 나는 물었다.
"아니에요. 형님과는 관계가 없어요. 내 회사에 한국인 변호사가 있어서, 그 사람을 따라갔던 것으로 기억돼요. 우희명에 관해서는 형님과 얘기를 나눈 적도 없고, 형님이 그 집에 갔었는지 아닌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님이 혼자서 한국에 갔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조선총독부가 우범선의 미망인에게 돈을 준다고 해서 그것을 받으러 갔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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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급천괴(은급천괴(恩給泉壤)
<매일신보> 1910년 10월 16일자
낭자(낭者) 조선귀족(朝鮮貴族)의 수작(授爵)의 명(命)이 하(下)하셨으나 ○일에 우(又) 당시(當時) 현관(顯官)으로 친일(親日)의 기치(旗幟)를 번(번)하야 예의(銳意)로 국사(國事)에 분주(奔走)하다가 불행(不幸)히 중도(中途)에 흉도(凶徒)에게 피살(被殺)한 인(人)의 공로(功勞)를 가납(嘉納)하샤 천황폐하(天皇陛下)께서는 기 사자(其 嗣子)에게 대(對)하야 은상금 약간(恩賞金 若干)을 하사(下賜)하시매 성은(聖恩)의 융숭(隆崇)하심을 감읍(感泣)하야 각기(各己) ○부(○父)의 영(靈)의 고유(告由)할 터이라는데 금(今)에 기 은상금(恩賞金)을 수(受)한 인명(人名)을 거(擧)하건데 여좌(如左)하더라.
금 일만원(金 一萬圓)
고 호조참판 김옥균(故 戶曹參判 金玉均)
고 이조참판 홍영식(故 吏曹參判 洪英植)
고 탁지부대신 어윤중(故 度支部大臣 魚允中)
고 내각총리대신 김홍집(故 內閣總理大臣 金弘集)
고 군부대신 안경수(故 軍部大臣 安駉壽)
금 오천원(金 五千圓)
고 제학 정병하(故 提學 鄭秉夏)
고 경무사 권형진(故 警務使 權瀅鎭)
고 학부대신 서광범(故 學部大臣 徐光範)
고 육군정령 우범선(故 陸軍正領 禹範善)
고 육군정령 이주회(故 陸軍正領 李周會)
고 도승지 박영교(故 都承旨 朴泳敎)
금동(金同)
고 남부도사 조총희(故 南部都事 趙寵熙)
금동(金同)
고 외부대신 유기환(故 外部大臣 兪箕煥)
이외(以外) 2명(名) 합(合) 15명(名)의 사자(嗣子)에게 기 은상공채(其 恩賞公債)를 하사(下賜)하실 지(旨)를 테라우치 총독(寺內總督)이 전달(傳達)하였다더라.
공채본권교부(公債本券交付)
<매일신보> 1911년 1월 14일자
우악(優渥)한 성지(聖旨)에 기(基)하야 하사(下賜)하신 귀족반족(貴族班族)의 은사공채권(恩賜公債券)은 작일(昨日) 총독부(總督府)에서 기보(旣報)와 여(如)히 차제교부(次第交付)하였는데 다수(多數)한 인원(人員)에게 일시(一時)에 교부(交付)키 난(難)함으로써 오전 오후 양도(午前 午後 兩度)에 분(分)하야 야마가타 정무총감(山顯 政務總監)은 코쿠분 인사국장(國分 人事局長), 후지나미 통역관(藤波 通譯官)을 대동(帶同)하고 총감실(總監室)에 설(設)한 교부장(交付場)에서 친자교부(親自交付)할 새 수령자(受領者)는 별실(別室)에서 수령증(受領證)을 서(書)하고 퇴출(退出)한지라. 오전(午前)의 부(部)는 좌기(左記) 45씨(氏)니
후작 이재완(後爵 李載完), 동 이재각(仝 李載覺), 동 이해승(仝 李海昇), 동 윤택영(仝 尹澤榮), 동 박영효(仝 朴泳孝), 백작 이지용(伯爵 李址鎔), 동 이완용(仝 李完用), 자작 이완용(子爵 李完鎔), 동 이기용(仝 李埼鎔), 동 박제순(仝 朴齊純), 동 고영희(仝 高永喜), 동 조중응(仝 趙重應), 동 이용직(仝 李容稙), 동 권중현(仝 權重顯), 동 이근택(仝 李根澤), 동 송병준(仝 宋秉畯), 동 임선준(仝 任善準), 동 이재곤(仝 李載崑), 동 윤덕영(仝 尹德榮), 동 조민희(仝 趙民熙), 동 이병무(仝 李秉武), 동 이근명(仝 李根命), 남작 한창수(男爵 韓昌洙), 동 이근상(仝 李根湘), 동 박제빈(仝 朴齊斌), 동 조동희(仝 趙同熙), 동 박기양(仝 朴箕陽), 동 장석주(仝 張錫周), 동 조동윤(仝 趙東潤), 동 남정철(仝 南廷哲), 동 이건하(仝 李乾夏), 동 이용태(仝 李容泰), 동 이종건(仝 李鍾健), 동 이봉의(仝 李鳳儀), 동 윤웅렬(仝 尹雄烈), 동 이근호(仝 李根澔), 동 정낙용(仝 鄭洛鎔), 동 이재극(仝 李載克), 동 이윤용(仝 李允用), 동 이정로(仝 李正魯), 동 이용원(仝 李容元), 동 박용대(仝 朴容大), 동 조경호(仝 趙慶鎬), 동 이주영(仝 李胄榮), 동 정한조(仝 鄭漢朝)
오후(午後) 1시(時)에는 좌기(左記) 2씨(氏)니
이강공전하(李堈公殿下) 이희공전하(李熹公殿下)
오후(午後) 1시(時) 30분(分)에는 좌기(左記) 42씨(氏)니
백작 민영린(伯爵 閔泳璘), 자작 민병석(子爵 閔丙奭), 동 김윤식(仝 金允植), 동 민영규(仝 閔泳奎), 동 민영소(仝 閔泳韶), 동 민영휘(仝 閔泳徽), 동 김성근(仝 金聲根), 남작 성기운(男爵 成岐運), 동 김춘희(仝 金春熙), 동 김사준(仝 金思濬), 동 민상호(仝 閔商鎬), 동 최석민(仝 崔錫敏), 동 민영기(仝 閔泳綺), 동 김가진(仝 金嘉鎭), 동 민종묵(仝 閔種默), 동 김영철(仝 金永哲), 동 김종한(仝 金宗漢), 동 김학진(仝 金鶴鎭), 동 김사철(仝 金思轍), 동 김병익(仝 金炳翊), 동 민형식(仝 閔炯植), 이준용(李埈鎔), 이용구(李容九), 조명구(趙明九), 홍규식(洪奎植), 김갑규(金甲圭), 김흥규(金興圭), 김필한(金弼漢),
고 김옥균 유족 김영진(故 金玉均 遺族 金英鎭)
고 김학우 유족 김준흥(故 金鶴羽 遺族 金俊興)
고 이주회 유족 이명렬(故 李周會 遺族 李明烈)
고 김홍집 유족 김교영(故 金弘集 遺族 金敎英)
고 정병하 유족 정규용(故 鄭秉夏 遺族 鄭圭容)
고 어윤중 유족 어영선(故 魚允中 遺族 魚英善)
고 안경수 유족 안국선(故 安駉壽 裕族 安國善)
고 박영교 유족 박태서(故 朴泳敎 遺族 朴太緖)
고 서광범 유족 서재덕(故 徐光範 遺族 徐載德)
고 유기환 유족 유치금(故 兪箕煥 遺族 兪致禽)
고 신기선 유족 신호영(故 申箕善 遺族 申昊永)
고 권형진 유족 권승빈(故 權瀅鎭 遺族 權承斌)
고 조총희 유족 조중은(故 趙寵熙 遺族 趙重恩)
고 우범선 유족 우장춘(故 禹範善 遺族 禹長春) 등(等)
인데 오후(午後) 2시(時)에 각기 수령(各記 受領)을 종료(終了)하고 퇴산(退散)하였더라.
첫댓글 박정희때 한국에 왔다가 억류됨 대전의 연구실에서 연구에 일생을 보냄 일본에 가족에게 못가게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