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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동쪽 끝은 열하와 요령성에서 후에는 만리장성 안쪽, 영양왕 때는 조백하 동쪽이 모두 고구려 땅이었다-1
◉한사군의 최초 설치 지역의 동쪽이 난하와 요령성 지역이다가 축소되었다는 이유
◉한반도내 한사군 설치설은 왜곡된 허위 조작된 학설임을 증명 한다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멸하고 BC 108년 진번, 임둔, 현도, 낙랑의 한사군을 두었다고 한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인들의 주장과 이병도란 자가 제시했다는 학설을 금과옥조로 추종하여 현재까지도 한반도 내 한사군 설이 계속되고 있다.
이병도는 진번군(眞蕃郡)의 강역을 대체로 황해도 재령평야를 중심으로 동쪽은 지금의 춘천 일대, 북쪽은 자비령, 남쪽은 한강 북안에 이르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후에 후한말 요동태수 공손강이 설치했다는 대방군(帶方郡)도 이병도는 각종 해괴한 논리의 학설을 내세워서 예전 진번군이던 황해도 일대와 경기도 북부 일대에 대방군을 설치해다고 주장했다. 이 이병도의 주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입둔군(臨屯郡)을 원산 지방 함경남도와 가원도 북부 지방에, 현도군(玄菟郡)을 평안북도 산악지대 일부와 압록강 중류 지역에, 낙랑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 일대에 설치했다고 주장하며, 이같은 한사군 한반도 내 설치설이 그대로 역사교과서에도 실리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나 이병도 및 이병도를 추종하는 역사학자 들의 주장은 왜곡 날조된 허위 거짓의 주장임을 이 글에서 분명히 밝힌다.
◉낙랑국이나 낙랑군은 평양이 될 수 없고, 고구려는 요서 지방에서 건국되었다.
한무제가 BC 108년 낙랑, 진번, 임둔 및 현도 4개의 군을 설치하엿다고 한다. 설치한 한사군은 불과 26년 후인 BC 82년 진번군은 낙랑군에 폐합되고, 임둔군은 현도군에 폐합(廢合) 되었다고 하였다. 또 불과 7년 후인 BC 75년에는 임둔군이 토착민에게 쫓겨 북쪽으로 도망쳤다고 하였다. 이 기록을 보면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은 불과 33년 후 3개의 군이 거의 소멸되고, 낙랑군 만 남은 것이다.
먼저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이 수도로 사은 졸본(卒本)또는 忽本홀본)은 당태종이 고구렬를 침략할 당시 요동성(遼東城)에 고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 안에는 쇠사슬로 된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것은 고주명이 전연 시대에 나라를 세울 때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곡구려의 건국지 졸본성은 요동성과 같은 지역이거나 요동성 부근 지역일 것이다. 고주몽이 압록강변에서 건국하였따면 고주몽의 사당과 그 물품이 압록강변에 존재해아 되기 때문이다.
고구려 2대 유리왕 때 전한 말 신나라를 세운 왕망은 현도에 있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때의 현도(玄菟)는 지금의 압록강이나 무순(撫順이 아니고, 조백하 상류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수경주(水經註)의 기록에 의하면 왕망이 요수(遼水: 조백하) 상류에 있는 고구려 오랑케의 땅 현도를 침략하면서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멸시 비하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제4대 대무신왕(재위 18-44)의 아들 호동왕자가 대무신왕 15년(AD32년) 유람 중 옥저(沃沮)에서 낙랑왕 최리를 만나 그의 땅 낙랑공주와 결혼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 역사학자들은 평양에 위치한 낙랑국의 왕 최리가 압록강 중류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의 왕자 호동이 각각 함견도와 연해주에 걸쳐서 있었다는 옥저를 놀러 가서 서로 만난 것이된다. 또 호동왕자를 평양까지 데리고 와서 딸과 결혼시켰다는 불가능한 내용이 성립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옥저는 결코 함경도와 연해주에 걸쳐서 존재한 사실이 없고, 낙랑국은 결코 평양에 존재한 사실이 없다.
오동왕자 이전인 고구려 2대 유리명왕 31년(AD 12년) 전한(前漢) 말 왕망은 현도(玄菟)를 침략하였다. 고구려 장수 연지의 목을 베고, 왕망은 현도군을 점령하고 있는 고구려왕에게 하구려후(下句麗候)라고 제멋대로 고구려를 비하하였다. 이때의 현도는 요수의 상류 만리장성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 결코 압록강변에 있지 않았다.
호동왕자(AD32년) 이후 불과 17년 후인 다음 왕인 5대 모본왕은(AD49년) 후한의 상곡, 어양, 북평(우북평), 태원을 공격하였다가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慕本王 二年, 春, 遣將襲漢 北平·漁陽·上谷·大原, 而遼東大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건무 25년(AD 49년) 봄에 고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 제융이 은혜와 신의로 초유하니 모두 다시 경계를 회복하였다(建武 二十五年 春, 句驪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祭肜以恩信招之, 皆復款塞) 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위의 삼국사기와 후한서의 기록을 보면 호동왕자와 낙랑와을 만난 AD32년과 모본왕이 상곡, 어양, 북평(우북평), 태원을 공격한 AD49년은 불과 17년의 차이이다. 고구려는 요서지방에서 건국하였기 때문에 주몽이 고루려를 건국하였다는 BC 37보다 불과 86년 후인 AD 49년 5대 모본왕이 상곡, 어양, 북평, 태원까지 공격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압록강 중류에서 건국하였다는 한국 사학자들의 학설은 불가능한 거짓 사실을 왜곡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또 고구려 6대 태조왕도 3년(AD 55년) 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군대에 대비하였다(太祖大王 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 영토인 요서 10성은 하북성 석가장시 부근이라는 설도 있고, 환단고기에는 그 위치가 정확히 표시되어 있으며, 요서지방이며, 결코 압록강 주변이 아니다. 특히 환단고기에 기록된 안시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로 기록되고 있다.
태조대왕 94년(AD 146년) 추 팔월에 왕이 군대를 보내 한나라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와 그 처자들을 사로잡아 돌아 왔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후한서에도 태조대왕의 안평현 정복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기록된요동군 서안평현은 역사학자들이나 중국 동북공정에서 말하는 압록강변 단동이 결코 될 수 없고, 지금의 중국 형주시 안평현으로 추정된다.
위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낙랑과 대방은 후한말 공손강이 AD 220년 대방군을 설치하기 훨씬 이전안 AD 146년 태조왕은 황해도가 아닌 요서 지방을 공격하고 그곳에 있는 대방현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으ㅘ 그 가족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보 황해도 대방이 있을 수 없고, 평양의 낙랑태수가 있을 수 없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태조왕이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와 그 가족을 사로잡았다는 AD 146년 보다 167년이나 이후까지 낙랑이 평양에 있었고, 대방이 황해도에 있었다는 일본인들이나 이병도 같은 자의 주장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
고구려 6대 태조왕이 후한(後漢: AD 25-220)과 싸워 빼앗은 요서 10성이나 요동의 서쪽 안평은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압록강 주변이 될 수 없고, 안평현 역시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지금은 압로강변 단동이 결코 될 수 없으며, 거짓이다. 고구려가 후한과 싸운 지역은 압록강 주변이나 평양이 아니고, 글자 그대로 요서지방이며, 서쪽의 안평 역시 지금의 중국 안평현이다.
고구려는 서쪽 요서 지방에서 건국했으며, 고구려가 건국한 비류수는 지금의 난하이거나 연남생의 묘비명에 나오는 건국지 패수(浿水: 지금의 영정하로 추정)일 것이다. 고대사 연구가 황순종씨는 『패수(浿水)와 열수(列水)에 대한 고찰』이란 논문에서 패수는 대요수(大遼水)와 같은 강이며, 조백하의 지류인 백하(白河)라고 하였는데, 고구려의 건국 장소가 요서지방임에는 틀림없으며, 학자들의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 낙랑의 위치는 요서지방에 있었다.
힌국의 역사학자들은 낙랑국이나 낙랑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 주장은 한국의 모든 역사교과서에 그대로 실려 있다. 그러나 낙랑은 아래에 설명하는 여러 역사서에 나오는 바와 같이 낙랑은 분명히 평양이 아닌 요서지방에 있었음을 부인해서는 아니된다.
●낙랑군 수성현이 위치한 갈석산에 대한 기록
서한군국도(西漢郡國圖)와 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에 낙랑과 대방은 지금의 만리장성 안쪽에 그려져 있다. 결코 우리나라의 평안도나 황해도가 아니다.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長城)의 시발점이다(樂浪遂城縣 有碣石山 長城起所)”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갈석산에는 진시황(秦始皇)을 비롯한 9명의 황제가 올라서 9등 황제산(九登皇帝山)으로도 불린다. 고조선 침략하기 전의 한무제(漢武帝),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의 수양제(隋煬帝)와 당태종(唐太宗)이 모두 이 산에 올라 전의(戰意)를 불태웠다. 서기 207년 위(魏)나라의 조조(曹操)는 유성(柳城)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동쪽 갈석산에 임하여 푸른 바다를 바라보노라(東臨碣石 以觀滄海)”라는 시를 남겼다.
당나라 때 인물인 두우(杜佑)가 편찬한 의례서의 일종인 ‘통전(通典)’에서 두우는 자신이 살던 당시에 존재하던 노룡현(盧龍縣)이란 곳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노룡현은) 한나라 때의 비여현(肥如縣)이다. 갈석산(碣石山)이 있고,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으므로 이런 이름을 얻었다. 진나라 때의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가 말하는 것과 같이 진(秦)나라의 장성(長城)이 시작된 곳이다.
**참고: 갈석산(높이 695.1m)은 중국 하북성 창려(진황도시 남부)현에 위치한 산으로 부근에 진황도시, 산해관 등이 있다. 그러므로 낙랑국이나 낙랑군은 갈석산 부근이다.
[사기] 조선전 집해集解)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集解] 「조선에는 습수濕水·열수洌水·산수汕水가 있고, 이 세 강물이 합하여 열수洌水가 된다. 낙랑樂浪이나 조선朝鮮이란 여기에서 취한 이름으로 추정된다」([集解] 張晏曰 朝鮮有 濕水洌水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朝鮮取名於此也, [索隱] 案 朝音潮, 直驕反. 鮮音仙. 以有汕水, 故名也. 汕一音訕)
위의 기록을 보면, 수경주(水經註)에도 기록된 습수와 열수 등이 조선 낙랑을 지나는 강이며, 조선이나 낙랑이라는 이름도 이들 강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였다. 습수와 고하는 북경지방을 흐르는 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역사학자들은 낙랑이나 조선현이 모두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아눈 명백한 잘못이다.
심지어 이병도는 대방군 황해도설을 주장하면서 열수가 황해도 은율의 율천이란 주장을 하고 잇다. 그러나 습슈, 열수,산수가 합친 곳에 위치한 조선현은 수양재의 고루려 침략경로 좌12군 10째에 있었고, 낙랑은 좌12군 12번째의 침략경로에, 대방은 우12군 11번째에 위치하고 있어서 모두 평양이나 황해도가 아닌 요서 지방에 있었던 것이다.
●낙랑군(樂浪郡)의 설치 기록 및 지리적 위치
한서와 후한서 및 진서에는 다음과 같이 낙랑군의 설치 기록이 있다.
한서에 전하는 낙랑군의 속현은 모두 25개였는데 후한서에는 18개로 줄고, 진서에는 6개로 줄고, 6개가 대방군으로 나온다.
낙랑군 속현 현명(縣名)
漢書(25개소)
朝鮮조선, 屯有둔유, 渾彌혼미, 遂城수성, 鏤方누방, 駟望사망, 帶方대방, 列口열구, 長岑장잠, 提奚제해, 含資함자. 海冥해명, 남감邯감, 浿水패수, 粘蟬점제(점선), 增地증지, 昭明소명, 呑列탄열, 東𦖮동이(동시), 不而 불이, 蠶台잠태, 華麗화려, 邪頭昧사두매 前莫전막, 夫租부조
後漢書(18개소)
朝鮮조선, 屯有둔유, 渾彌혼미, 遂城수성, 鏤方누방, 駟望사망, 帶方대방, 列口열구, 長岑장잠, 提奚제해, 含資함자. 海冥해명, 남邯남감, 浿水패수, 粘蟬점제(점선), 增地증지, 昭明소명, 呑列탄열,
晉書(12개소) : 연의 공손연이 대방군을 별도로 설치함
樂浪낙랑군 소속(朝鮮조선, 屯有둔유, 渾彌혼미, 遂城수성, 鏤方누방, 駟望사망)
帶方대방군 소속(列口열구, 長岑장잠, 提奚제해, 含資함자. 海冥해명, 呑列탄열)
***진서에 포함된 대방군은 ”공손강(公孫康)이 건안 연간(建安年間 : 196∼220)에 낙랑군 소속 둔유현(屯有縣 : 지금의 黃海道 黃州?) 이남의 땅을 떼어서 새로 대방군을 설치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일본인들과 이병도란 자의 학설을 그대로 추종한 한국 역사학자들의 참으로 개탄스러운 기록이다. 이 기록 그대로 대방군의 지도는 지금의 황해도와 경기도 북부지방까지 포함된 것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대방군에 대한 기록은
위와 같은 낙랑군과 후에 설치된 대방군의 현 이름은 고구려 영양와조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설정한 좌12군 및 우12군과 2개의 특별군대 침략경로에 거의 대부눈 포함되어 있다. 이는 뒤에서 다시 설명하거니와 모두 고구려의 서쪽 국경 지역의 고구려 영토에 속해 있었음을 증명한다.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의 낙랑군은 동으로는 난하에서 서로는 갈석산과 북경지역으로 남쪽은 지금의 천진시 갈석산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한사군의 동쪽 한계로
[열하특별구경熱河特別區境]을 보면 춘추시대春秋時代 산융지山戎地(조선지역), *한초漢初에 흉노속匈奴屬(흉노지역), *무제武帝 무렵엔 새경塞境(국경지역), *후한後漢 시 오환烏丸, *선비지鮮卑地, *동진東晋 때 모용씨慕容氏의 지역이라 하였으니 아마 모두 열수(列水: 난하)를 기댄 서북과 서남 지역을 말한 듯하다 이 기록을 보면 한무제의 한사군 경계(새경塞境)이 지금의 열하, 즉 난하의 서쪽까지 미쳤으며, 그 동쪽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더구나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 중에서 옥저는 한사군 설치 25년 후 현도에 통합되었다. 이를 보면 옥저는 현도보다 먼 위치 즉 난하에 인접해 있다가 후에 중국과 가까운 현도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사군의 서쪽 한계는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에는 '한무제(漢武帝)는 양복으로 하여금 해군을 이끌고 제(齊)에서 발해(渤海)를 건너게 하고, 순체(荀彘)는 육군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으로부터 위만을 쳤다 '고 하였다.
제(齊)는 산동반도에 있던 나라이고 발해(渤海)는 당시나 지금이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사이에 있는 바다이므로 해군은 산동반도를 출항하여 발해를 건너 위만조선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왕검성(王儉城)으로 향했다는 것이다. 왕검성은 아래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지금의 평양이 아니고, 진황도시 부근이나 개주시(개평) 부근이므로 요서지방에 있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의 묘비명에도 연남생이 요동군 평양성인(遼東郡 平壤城人)이라고 분명히 기록된 바와 같이 연남생이 태어난 고구려 27대 영류왕 시절의 요동성은 요수(遼水: 조백하) 동쪽의 요동을 말하는 것이며, 평양성이 이 요동군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요동(遼東)은 수경주(水經註)에 기록된 바와 같이 대요수와 소요수가 지금의 조백하(조하와 백하)이므로 한무제의 육군은 조백하를 건너 요동의 위만조선을 공격한 것이다.
한사군의 서쪽 한계는 위만이 처음 정착한 곳이 상하운장지역이므로 지금의 북경지역이고, 그 남쪽은 당시의 패수(浿水: 영정하로 추정) 동쪽인 요동에서 남쪽 갈석산 천진시에 이르는 지역에 한사군이 위치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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