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의 재구성2…세종과 이순신 리더십
국정호 ㈜한화 종합연구소 책임연구원
한산대첩은 병법에서 말하는 ‘장단(長短)’에 의한 압도적인 승리였다. 이순신은 길고 짧은 것을 쉽게 판단하지 않았다. 항시 멀리 생각하면서 적의 모든 면을 확인하였고 적과 아군을 비교하고 장단점을 분석했다. ‘장단’이란 류성룡의 <전수기의 10조>에서 보듯이 “병법에 이르기를, ’자기를 알고 남을 알면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고, 자기를 알지 못하고 남을 알지 못하면 백 번 싸워서 백 번 진다‘라고 하였다. 이른바 자기를 알고 남을 안다는 것은 남과 자기의 장단점을 견주어 헤아린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곧 ‘장단’이란 ‘항상 나의 장점을 적의 단점에 더하고, 적의 장점을 나의 단점에 더하지 않게 한 연후에야 싸움에 출전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시) 왜적의 장기는 세 가지나 있으니, ① 조총과 ② 창칼과 ③ 생명을 가볍게 여겨(생명 경시) 돌진하고 분투해서 끓는 물에 들어가고 불 속에 뛰어들지라도 사양치 않는다. 한편, 왜 수군에 비해 조선 수군의 장점이 여럿 있다. 소나무로 만들어진 판옥선의 튼튼함, 해상에서의 빠른 진형 변화와 함포 발사가 가능한 판옥선의 전술적 운용성, 그리고 선상 화포에 의한 원거리 타격 능력의 우수함, 우리는 적을 보면서 적은 우리를 쉽게 공격할 수 없는 거북선의 예측 불가능한 근접 전투력, 조총보다 먼거리에서도 정확히 적을 사살 가능한 사부들의 활솜씨 등이 있었다.
한산대첩에서 이순신은 전술의 기본인 ‘장단’을 실감 나도록 구사하였다. 즉, 적의 장점인 ㉠ 빠른 함선의 기동력과 ㉡ 조총과 칼, ㉢ 왜인들의 무자비한 용맹함, ㉣ 불리할 경우 인근 섬으로 상륙한다는 것을 잘 파악하여 적을 한산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하여 적들의 장점을 줄여나갔고, 이어서 우리의 장점인 ⓐ 판옥선과 거북선의 선회 용이성, ⓑ 원거리 화포 운용성, ⓒ 한번 승기를 잡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조선인의 신바람을 최대한 살려서 한산도 해상에서 ‘학익진’을 펼쳐 역사적인 한산대첩을 완성하였다. 이 한산대첩에서 적·아의 세력이 73척 : 58척으로 수적으로 불리했음에도 이순신은 “일시에 거의 다 쳐부수었다”고 했다. 조선 수군은 왜적선 59척을 쳐부수고 적들의 머리 250급을 참수하였으며, 아군의 피해는 전라좌수군의 경우 전사자는 19명, 부상자는 114명이었으며, 전선은 단 1척도 손실되지 않았다.
순천부사 권준이 제 몸을 잊고 돌진하여 먼저 왜의 층각대선 한 척을 쳐부수어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아 왜장을 비롯하여 머리 열 급을 베고 우리나라 남자 한 명을 빼앗았다. (중략, 각 장수별 전과가 소상하게 기록됨) 그 나머지의 왜대선 20척, 중선 17척, 소선 5척 등은 전라좌도와 우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모아 부수고 불태우니 화살을 맞고 물에 빠져 죽은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놈 400여 명은 형세가 불리하고 힘이 다 되었는지 스스로 도망가기 어려운 줄 알고, 한산도에서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갔으며, 그 나머지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모두 14척) 등은 접전할 때 뒤처져 있다가 멀리서 배를 불태우며 목 베어 죽이는 꼴을 바라보고는 노를 재촉하여 도망해 버렸으나, 종일 접전한 탓으로 장수와 군사들이 노곤하고 날도 땅거미가 져 어둑어둑하므로 끝까지 추적할 수 없어서 견내량 내항에서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③ 불개미떼를 거의 다 한꺼번에 몰살시킨 한산대첩
이런 통쾌한 대승의 직접적인 비결은 함선의 화력집중을 위해 해상에서 학익진을 집행한 이순신의 ‘현장리더십’ 결과였다. 한산도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이후 거제도 이서 해역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서해를 통한 왜군의 보급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후에 이순신의 학익진은 안골포해전(1592/07/10)과 제2 당항포해전(1594/03/04) 등에서 함대의 위용을 과시할 때 펼쳐졌다.
㉠ 특히 이 해전의 특징은 학익진에 의해 전력을 분산한 후 일제회전으로 포화를 집중하는 ‘일제회전 집중공격’인데, 영국의 해전사가(海戰史家)인 발라드(G.A. Ballard)는 “이순신이 해전술에 탁월한 전문가이기에 가능했다”고 평가하였다. “그때의 위기에 처한 순간에 큰 노를 저어서 함선은 모두 16점의 침로(180° 선회)를 취하게 하여 일본 추격선에 공격하였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에게는 이 기동이 지상에서는 간단한 것으로 생각될지 모르나, 해군 전문가만이 이 기동은 훈련을 쌓은 숙련된 함대의 표준이라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이 선회작전에 있어서 많은 적의 함선은 침몰되었고, 전진해 오는 조선군의 이물(함수)에 그들의 현측이 노출되고 있었다.”
㉡ 2010년 국내에 소개된 <해전의 모든 것>이라는 책자에도 한산대첩은 언급된다. 그러나 그 내용이 여기서 다룰만큼 치밀하지 못하다. (책자 내용의 수정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 책자에서 “이순신은 조선의 구세주”로 언급한다. (이 책은 또 칠천량에서 패전한 원균을 “거북선을 포함해 전선을 탕진한 장수”로 언급한다.) (거북선이라는) 기술의 혁신뿐만 아니라 이순신의 전투 기법에는 찬사를 보낼 점이 많다.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구세주’는 자비롭고 인정 많은 인물로, 피난민들이 그에게 도움을 청해 의탁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피난민들은 일본 침략자들의 위치와 의도에 관한 귀중한 정보들을 제공했다. 이순신은 해안 어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해안과 조류에 대한 지식을 늘렸고, 백성들에게 호의를 베풂으로써 조선 수군이 목표물을 추적하도록 도와주는 전문적인 관측망(척후와 요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 일본 수군의 주장인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협판안치)는 왜군 세력의 끝에 있었으므로 구사일생으로 도망하였다. 훗날 와키자카는 자신의 글에서, “이순신의 함대에 압도되어 죽기 일보 직전에 전선의 마지막에 자리하여 있었기 때문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④ 장계에 나타난 한산대첩의 특징
이순신 <장계(견내량파왜병장)>의 특징은 ⓐ 먼저 치열한 싸움으로 인해 이전 전투보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아군의 피해는 전라좌수군의 경우 전사자 19명, 부상자 114명이었다. 제1, 제2 출전에 비해 많은 전상자가 발생한 이유는 학익진 상태에서 일제회전하여 적진을 향해 함포공격을 하면서 돌입하는 교전 과정에서 근거리 해상전을 벌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상자들은 진무, 격군, 사부 등 어느 한 직책을 가리지 않았다. 이순신은 예하 장수들에게 “시석을 무릅쓰고 결사적으로 진격하다가 혹은 전사하고 혹은 부상하였으므로, 전사자의 시체는 각기 그 장수에게 명하여 별도로 작은 배에 실어 고향으로 보내 장사지내게 하고, 그들의 처자들은 휼전(恤典)에 의하여 시행하라”고 하였으며, “중상에 이르지 않은 사람들은 약물을 지급하여 충분히 치료하도록 하라”고 각별히 엄하게 신칙하였다.
ⓑ 장계에는 전공이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을 올리고, 포로된 자들의 얘기를 기록하여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게 하였다. 특히 서울 사는 사삿집종 ‘중남과 용이’는 그들이 서울에서 왜놈에게 붙잡혀 내려오면서 “왜적들이 내려올 때, 용인에 이르러 우리나라 군사들과 서로 만나 접전했는데, 우리나라 군사가 퇴패했으며, 곧 김해강에 이르러서는 왜장이 공문으로 여러 왜적에게 알리는데 마치 우리나라 장수들이 약속(約束)하는 모습과 같았다”고 언급한다. 중남과 용이는 자신들이 제3차 출전의 왜구들, 곧 용인전투에서 승리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무리에게 잡혀있었다는 사실을 잘 몰랐고, 또 그 용인전투의 왜적들이 바로 이 한산대첩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사실도 중남과 용이 등을 제외하고는 모르고 있었다. 오직 이순신의 이 <장계(견내량파왜병장)>가 바로 그런 우연의 일치와 같은 상황을 직시하도록 우리에게 알려준다. 포로된 ‘중남과 용이’의 증언으로 이순신은 한산대첩의 왜적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 이순신은 해상전투에 임하기 전에 군사들과 약속한다. 이른바 ‘당초의 약속’이다. 곧
적의 목을 베어 바쳐서 논공행상을 요청하기보다는 눈앞의 적을 한 놈이라도 더 쏘아죽여서 국토를 유린한 앙갚음을 하라는 것이다. 장계에 보듯이, “여러 장수와 군사 및 관리들이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여전하여 여러 번 승첩을 하였다고 하지만, 조정이 멀리 떨어져 있고 길이 막혔는데, 군사들의 공훈등급을 만약 조정의 명령을 기다려 받은 뒤에 결정한다면, 군사들의 심정을 감동케 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우선 공로를 참작하여 1등, 2등, 3등으로 별지하여 기록하였으며, ‘당초의 약속’과 같이 비록 왜적의 머리를 베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을힘을 다해 싸운 사람들은 제가 본 것으로써 등급을 나누어 결정하고서 함께 기록하였습니다”고 한 것을 헤아려보면, 이는 “적의 목을 베지 마라. 한 놈이라도 더 쏘아 죽여라. 너희의 논공은 내가 보는 바가 아니냐”라고 말하는 이순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⑤ 새로운 갈등의 불씨
한산대첩의 격한 싸움이 끝나고 잔적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갈등의 불씨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아래 <장계>에 보듯이, 한산대첩 후 와키자카의 왜 수군은 거의 궤멸되거나 꽁무니를 내빼고, 그중 일부는 바다에서 겨우 목숨을 건져 기진맥진하여 한산도에 숨어들었다. 이때 이순신은 전라도 적들의 남하 상황을 듣고 회군하게 되었기에 경상우수사 원균과 약속하기를 패잔병 400여 명을 소탕하고 결과를 통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경상우수사 원균은 적선이 많이 온다는 헛소문을 듣고 포위망을 풀고 가버렸고,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원균의 약속 불이행으로 인해 잔적 400여 명이 바다를 건너 되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순신 함대의 작전술이 되돌아간 적들에 의해 노출되었으며, 이후 점차 이순신과 원균의 불통(不通)과 갈등(葛藤)은 그 봉합점을 찾지 못하였다.
“지난 7월 8일 경상도 한산도 앞바다에서 접전할 때, 화살을 맞은 왜적 400여 명이 한산도로 올라갔는바, 이 외딴 섬에 올라간 것은 마치 새장 속에 갇힌 새와 같이 되었으므로 그때 한 10일만 지나면 굶어 죽을 것이 분명하여 그 도의 우수사 원균에게 “소속 수군을 거느리고 4면을 포위하여 남김없이 잡아 죽이고 그 결과를 통고하도록” 약속하고, 신과 우수사 이억기 등은 진을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원균은 그 이후 적선이 많이 온다는 헛소문을 듣고서 포위한 것을 풀고 가버렸기 때문에 그 섬에 올라간 왜적들이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어 타고 모두 거제로 건너가 버렸다’고 하는바, 솥 안에 든 고기가 마침내 빠져나간 것 같아 매우 통분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임진년 해전의 하이라이트인 한산대첩은 이순신의 현장리더십(임기응변의 상황판단, 장단과 화력집중, 기공법과 정공법의 순환 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장수와 병사가 일치단합하여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의 기세로 왜적을 물리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대승이었다. 올 여름에 보게 될 영화 ‘한산’에서도 이러한 이순신의 현장리더십을 잘 살려서 또 한번 천만 관객이 찾는 명화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https://youtu.be/L3kNd82xx6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