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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회수에 땀 흘리며
증 언 자 : 정건호(남)
생년월일 : 1958. 6. 15(당시 나이 22세)
직 업 : 대학생
조사일시 : 1988.9
개 요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면서 시위하다 5월 17일 서울역 회군을 목격하였으며, 광주로 내려온 이후 집단발포 상황을 목격하였다. 해방구가 된 후 도청에 들어가 무기회수반에서 활동하였음.
서울에서의 투쟁
나는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던 관계로 소위 '80년 서울의 봄'이라 불리는 상황과 직접 대면을 할 수 있었다.
1980년 5월의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민주화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학생운동의 기본적인 입장은 그때까지 유지되었던 유신체제를 끝장내고 유신잔당과 다시 유신체제를 일으키려는 무리들을 분쇄하려는 것이었다.
5월 17일 아침 나는 오후에 있을 서울역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1천명 정도의 다른 학생들과 스크럼을 짜고 한양대와 장충체육관을 거쳐 종로 5가에 이르렀다. 이때 우리가 종로 5가로 갔던 것은 동부지역 학교 (한양대학교, 세종대학교, 건국대학교 등)는 일단 오전 10시(?)에 종로 5가에서 집결해 서울역으로 가기로 결정되었던 때문이었다.
종로 5가에 도착하고부터는 뒤에 도착한 학교(동부지역 학교)의 학생들과 합세하여 서울역으로의 진출을 저지하려는 전경들과 공방전을 벌인 끝에 오후 1시쯤 되어서야 남대문까지 진출했다. 남대문에는 이미 많은 전경들이 우리들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방패를 든 채 여러 겹으로 열을 서 있었으므로 자연히 가두투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경들은 최루탄보다는 가스차를 이용한 페퍼포그 공세로 학생들의 진출을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뒤늦게 도착한 학생들도 합세, 연신 투석전을 감행하여 치열한 싸움이 진행되었다. 그러다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 나는 학생들 중 맨 앞에 있었다. 나는 전경들에게 올 테면 와보라고 손짓하고 전경들은 전경들대로 내게 똑같이 손짓하고 있었다. 그때 열지어 서 있는 전경들 뒤쪽에서 버스 한 대가 달려오더니 전경들을 그대로 밀어버렸다. 퍽 소리를 내며 방패가 떨어지고 그대로 3명(?)의 전경이 쓰러졌다(후일 전경 1명[?]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돌발사고가 발생하자 학생들은 뒤로 몰리면서 타워호텔(?)(남대문 바로 옆에 있는 빌딩)뒤로 돌아 서울역으로 곧장 진출했다.
서울역에서의 모임은 민주화로 이행되는 과정, 즉 민주화 일정에 대한 확답을 듣기 위한 것이었는데, 유사 이래로 가장 많은 인원이 서울역에 집결했다. 이때의 지도부는 당시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전남 출신이며 현재 MBC의 기자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음)을 주축으로 하여 서울의 여러 대학 총학생회장단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마이크로버스 안에서 회의를 진행했다. 당시의 집행부로는 사실상 거기 모인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극히 불가능한 상태였다.
지도부가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 군용 헬기 다섯 대가 서울역 상공을 빙빙 돌고 있었다. 또한 서울역에서 멀지 않은 효창운동장에 군인들이 진주해 있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고 있었는데,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회의를 마친 심재철이 단신으로 마이크로버스 위에 올라서서는 마이크로폰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것 같다. 이제 당국의 태도를 지켜보자. 그리고 이화여자대학교의 회의에서 평가를 할 것이다" 등의 회의결과를 발표했다. 지도부의 이런 회의결과 발표가 있자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 시작되었다. 지도부의 결정에 그대로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침부터 계속된 시위와 집회로 학생들은 이미 피로해 있었으며 효창운동장에 군인이 진주해 있다는 등의 소문과 하늘에서 빙빙 돌고 있는 다섯 대의 헬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생들의 입장에 있어서는 "학생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으므로 정치인이나 기성세대들이 어떤 태도를 보여줄 것인가 지켜보며 다음 조치를 취하자"는 낙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비상계엄이 확대될 경우 동대문운동장에 집결하자는 결의를 하고 서울역에서의 집회를 마쳤다. 막상 17일 밤 12시를 기해 계엄이 확대되자 학교의 출입이 통제되는 바람에 기숙사생활을 하던 나는 더 이상 기숙사에 머무를 수 없게 되어 귀향하기로 마음먹고 광주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그래 광주에 도착한 시간이 5월 18일 오후 5시 30분이었다.
광주에서의 투쟁
광주에 도착한 나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지산동 법원 근처에 있는 집에 갈 요량으로 택시를 탔다. 집에 도착한 나는 그날은 별일 없이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지냈다.
다음날(5월 19일) 오전 10시쯤 나는 그간 학내운동 열기로 인해 줄곧 집에 내려오지 못했으므로 옆집에 사는 친구 정민(마정민, 현재 하남공단에 근무)에게 전화를 했다. 정민이 집에 있어 법원 앞에서 만난 나는 중흥동에 살던 친구 민수(김민수, 현 조선대학교 서무과에 근무)를 만나러 정민이와 함께 버스를 타고 갔다. 민수네집에 도착한 나와 정민이는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다 무슨 일이 있어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버스를 타고 오는데 버스가 대인동의 시민관을 지나칠 무렵이었다. 20여 명의 청년이 시민관 사거리 시민다방 앞에서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잡혀 있는 청년들 곁에는 곤봉을 들고 어깨에 M16 소총을 멘 개구리복 차림의 군인 3, 4명이 있었다.
MBC방송국 앞 버스 승강장에서도 시민관 앞에서와 같은 차림의 군인들이 지나 가는 버스를 세워놓고 검문했다. 차는 이미 서너 대 밀려 있었고, 버스에 같이 타고 있던 아주머니와 운전기사가 "군인들이 젊은 사람들을 잡아간다. 젊은 사람들은 어서 엎드리라"고 해서 얼른 몸을 낮췄다. 이때 운전기사가 차를 세우지 않고 곧장 질주하는 바람에 나랑 정민이는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아버님께서 우리를 향해 "얼른 가서 개 고리 좀 사와. 저놈들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꽉 묶어두게!"라고 호통을 치는 통에 정민이는 집에 돌아갔고, 나 또한 서울에서의 피로와 돌아오던 길에 보았던 군인들에 대한 공포심 등으로 집에 있었다.
다음날(5월 20일)에도 종일 집에 있다시피 했던 것 같다. 골목골목이며 법원 주변에 몇몇씩 서서 수근거리던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은 다 잡아간다. 지산동까지 잡으러 온다"고 하여 공포심이 더욱 가중되었다.
5월 21일에는 길거리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수근거리던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계엄군이 도청 안으로 들어가고 도청을 제외한 시내 일원에는 계엄군이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집에 와 있던 성일(정성일, 당시 전남대 경제학과 1년이었던 사촌동생)이와 안심하고 11시쯤에 밖으로 나갔다. 시내버스가 다니지 않아 걸어 갔다. 노동청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불에 타버린 차량과 택시, 그리고 콘크리트 화분대 등으로 만든 바리케이드를 앞에 둔 채로 모여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성이 울리면서 선두에 서 있던 시민 5명이 이마와 가슴 등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내가 '시민들이 왜 저러는가' 하고 쓰러진 시민들을 향해 막 뛰쳐나가려는데 성일이가 팔을 잡았다. 순간 잘못하다가는 죽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쓰러진 사람을 구하러 나갔던 시민 3명이 또 사살되었다. 남도예술회관이나 전일빌딩 옥상에서 정조준하여 쏜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역 대행군시 차에 치어 전경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이후 총에 맞아 죽어가는 사람을 처음으로 목격하였다. 공포와 허탈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전남여자고등학교 쪽으로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무기회수반으로 활동
22일 아침에 집 앞으로 나가보았다. 도로 가운데 모여 있는 사람들부터 군인들이 모두 철수했다는 말을 들었다. 11시쯤 '광주가 이 꼴이 되고 있는데 나도 무엇인가를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어 혼자 도청을 향해 걸어갔다.
남도예술회관 앞에서 학생수습위원을 모집하고 있어 거기에 갔다. 16절지에 소속대학과 이름을 적었는데 혹시 아는 사람이나 우리 학교 학생이 있을까 해서 명단을 살펴보니 전남대, 조선대생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학교(건국대) 학생은 축산과 3학년인가 4학년인가 단 한 사람뿐이었는데, 역시 모르는 사람이었다.
남도예술회관 앞에 모여 있던 2백여 명의 학생(?)들 중 학생수습위에 자원 서명한 사람은 50명 정도 되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도청에 들어가 말쑥한 차림을 한 아저씨들로부터 하얀 헝겊에 파란 색 스탬프로 '도청 공보실'(?)인가 하는 도장이 찍힌 완장을 받고 무기회수반에 들어갔다(완장은 지금도 내가 보관하고 있다. 완장은 항쟁기간 내내 어깨에 차고 다닌 게 아니라 23일까지만 차고 다녔다. 왜냐하면 24일쯤 되던 날 아침에도 완장을 차고 나갔는데 도청 안에 완장을 찬 사람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아 나도 떼어버렸다. 그리고 24일쯤에는 아무나 도청에 들어와 수습위원이 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완장도 맨 처음 수습위를 모집할 때만 배부하고 이후로는 배부하지 않았다).
도청에 들어간 나는 자발적으로 무기회수반이 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무기회수반으로 활동을 한 사람은 10명 이내였다. 무기회수의 목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처음의 목적은 일단은 수습해야 한다는 것과 총기가 나돌아다니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어떻게 하면 사태 그 자체를 빨리 끝맺고 마무리할 것인가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이는 소극적이라기보다는 당시의 상황과 피해의식으로 보아 당연한 것이었으며 결코 비겁이나 타협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기회수의 목적은 무기를 회수하여 효과적인 전투체제를 갖추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도청에 들어간 첫날은 무기회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도청 안이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날은 공수부대원들이 철수하면서 남기고 갔던 무기(앞이 볼록 튀어나온 케리바 기관총 한두 개, 판초우의, 파이버, 중령 계급장이 달린 베레모, 상당수의 카빈 소총과 대검, 사과탄 등의 일종의 전리품)를 도청 본관과 민원실 앞의 뜰에 펼쳐놓았다. 이날 낮 3명의 TBC(언론통폐합 조치 때 통합되어 지금은 없어진 동양방송) 기자가 와서 펼쳐놓은 무기며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우리들을 카메라로 찍어갔다.
도청 안의 모습
나는 아침에 도청으로 출근하여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다음날도 나는 도청에 들어갔다. 수위실에 발디딜 곳도 없을 만큼 많은 실탄과 카빈, M1 소총이 회수되어 쌓이기 시작했다. 도청 민원실과 본관을 이어주는 2층 통로(본관과 민원실은 1층부터 곧바로 연결된 게 아니고 고가도로처럼 위에서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밑에 임시방편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관을 모셔놓았으며, 이날부터 시민들의 도청 출입이 통제되는 가운데 시민들의 시체확인이 시작되었다. 시체확인을 위해 시체의 인상착의 및 추정되는 나이, 혹은 주민등록번호를 검은 매직으로 하얀 전지에 적어 수위실 옆에 붙여놓았다.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무연고자들은 특별한 사항, 예컨대 오리엔트 시계를 찬 몇 세 가량의 남자 등으로 적었다. 그 벽보를 보고 확인한 사람도 있었다. 시체확인을 위해 도청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이 많아 정문에서 시민들을 줄을 서게 하고는 비표를 발부해 통제했다.
이날 도청에는 관이 20, 30개 정도 있었는데, 관은 광목으로 묶어져 있었고, 관 위에 인상착의 및 여러 가지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적혀 있었다. 관 사이에는 라면박스가 한두 개 있었다. 어린 아이의 시체와 시체의 일부가 들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또한 도청 지하실에 TNT가 있다는 소문이 수습위원들 사이에 나돌았다. 호기심이 생겨 민원실 밑의 지하실로 TNT를 보러 갔다. 적어도 도청 안에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자유였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TNT 보는 걸 단념하고 말았다. 지하실 입구에 방석모를 쓰고 판초 우의를 입은 청년이 떡 버티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청년에게 말하면 들여보내줄 것도 같았지만, 나 자신이 알려지는 게 싫어 그만두었다. 사실 일종의 피해의식이 있었으므로 수습위원을 모집할 때 이름을 쓴 것도 후회스러웠고 걱정되었다. 건국대 축산과의 선배를 찾아 확인하지 않았던 것도, 도청 안에서 거의 얘기를 않고 지냈던 것도 모두 피해의식 때문이었다.
나는 지하실을 그대로 지나쳐 본관과 민원실 사이로 빠져나가 담배 한 개비를 피우고는 다시 돌아와 뜰에 깔려 있는 무기며 진압장비들을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대체로 처음 보는 것들이라 신기했고, 호기심도 느꼈기 때문이다. 시체를 확인하러 들어온 시민들도 그것들을 둘러보기는 했어도 만지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기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것 같았다.
내가 무기를 둘러보고 있을 때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쳐다보니 친구 손병현(당시 신학대 재학중)이 쇠창살로 된 도청 담에 손을 짚고 있었다. 항쟁기간 중 병현이를 두번째로 만나는 순간이었다. 첫번째는 20일 친구 정민이와 함께 전남여고 부근에서 태극기를 들고 시위하는 시위대(태극기를 든 사람은 수피아 여고생이었다)를 보고는 전남공고 있는 데까지 걸어 올라갔는데, '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병현이가 트럭 뒤에서 부르고 있었다. 손에는 몽둥이가 들려있었다. 녀석은 차를 타고 떠나가면서 이러고 있는 나를 봤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고 했었다. 나와 병현이는 도청의 담과 담 옆으로 나무가 심어져 있는 화단을 사이에 두고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내게 어떻게 해서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가 하는 것과 도청 안에 들어가고 싶다고, 들어가서 뭔가 일을 하고 싶다면서 도청에 들어올 방법을 물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영향력도 힘도, 그리고 방법도 몰랐기 때문에 정문에 가서 알아보라고 했다. 그러나 도청 안에서 내가 병현이를 본 적은 없다.
그리고 이후로도 나는 계속 도청에 출퇴근하듯 나갔는데 안에서의 활동은 완전히 자발적인 것이었다. 무기회수를 할 때는 총알까지 모두 회수했는데 차량이 도청 입구에 들어오면 아무나 차에 올라가서 '무기를 회수한다'며 총과 총알을 수거했다. 총알은 차 바닥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총기회수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무기를 회수하여 효율적으로 사용하려한다고 설득시켰다. 이런 과정에서 오발 사고도 있었다. 한번은 지프차가 들어와 내가 무기를 회수하는데 운전석에 앉아 있던 청년이 내게 총을 들이댔다.
"왜 무기를 회수하는 거요?"
그가 총의 노리쇠를 당겼다.
"어어, 이러지 마시오."
하니까 총구를 위로 쳐들었는데 총알이 발사되었다.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 청년도 아무 말 없이 내게 총을 내주었다.
그런데 차량들이 도청으로 모여든 것은 차량의 통제를 위해 일단 모든 차량은 도청으로 와 달라고 한 때문이었는데, 일단 차량이 도청으로 오면 차에 실려 있는 무기를 회수하고, 8절 정도 크기의 하얀 종이에 매직으로 번호를 써서 붙여주었다. 어떤 차에는 '특'자를 써서 붙이기도 하고, 어떤 차는 '비상', '차량통제반' 등을 써서 붙이기도 했으며, '무기회수반'이라 써서 붙이고 수습위원이 타고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20명 정도의 여자들이 2층 취사실에서 밥을 짓고 했는데, 밥을 먹고 싶은 마음도 없고 밥을 먹기도 극히 힘들어 두 번인가 도청 안에서 밥을 먹었다. 또한 투사회보가 도청 주변에 뿌려져서 줍기도 했는데 투사회보는 거의 다 모으다시피 했다. 이들 투사회보는 항쟁 이후 백민서점의 오기만 씨에게 빌려주었다가 분실하는 바람에 잃어버렸다. 그런데 내가 도청에서 나오기 전날(24일이나 25일)쯤에 괴이한 일이 있었다. 수습위원에 있던 사람 두세 명이 인쇄물을 몇백 장씩 들고 오며 '불순분자가 만든 것'이라고 했다. 투사회보는 YWCA에서 만들어 도청에서 배포했는데 내가 보기엔 그것도 투사회보 같았다. 하지만 가서 달라기에는 아무래도 멋적고 의심을 받을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렇게 지내던 나는 25일 밤 9시쯤 김영택(아버님과 친구, 당시 동아일보 주재기자) 씨의 전화를 받았다. 도청에 다시 계엄군이 진주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면서 도청에 들어가는 것을 삼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와 항쟁의 수습방안에 대해 묻는 전화였다.
선생님도 집에서 전화를 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부터 도청에 나가지 않았으며 내가 제의한 수습방안은 10일간의 취재수첩에 동생의 이름으로 나와 있다. 서울에서의 활동 등으로 내가 노출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동생 영미의 이름으로 동아일보에 실렸다.
도청의 마지막
27일 새벽 잠을 자는데 총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깨어보니 아버님께서는 나보다 먼저 기침하셔서 라디오를 듣고 계셨는데, 도청 쪽에서는 두두두두 총소리가 들려오고, 라디오에서는 '제17포로수용소'라는 영화의 주제음악을 배경으로 깔며 방송을 하고 있었다. '다라라라……폭도들은 자수하라……밤바바바' 하는 식이었는데, 영화 '제17포로수용소'의 주제음악은 당시 학생들이 데모 때 즐겨 부르던 노래 - '흔들리지 않게', '우리 승리하리라', '훌라송' - 중 '전두환이 물러 가라, 훌라훌라'하던 훌라송의 원곡이었다.(조사.정리 심인택)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