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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오씨 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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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댁 손자 글방 스크랩 문정전(文政殿)과 사도세자
오대댁(병연) 추천 0 조회 52 09.03.10 14:0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창경궁 정문 홍화문을 들어가면 옥류천이 흐르고 옥천교 다리가 걸려 있다.

다리 건너 명정문 안에 들어서면 궁의 정전 명정전(明政殿)이 버티고 있고

명정전 왼쪽에 문정전(文政殿)이 있다.

 

 

 

사진:정면이 명정전,

왼쪽으로 팔작지붕 합각이 보이는 건물이 문정전이다.

 

명정전이 조회(朝會) 등 공식 행사를 하는 정전(正殿)이라면

문정전은 평상시 신하들과 함께 정무를 보던 편전(便殿)이다.

경복궁에서 정전은 근정전이고 편전은 사정전이다.

 

 

사진: 문정전 도해

 

 

 

사진: 문정전(文政殿)

일제(日帝)가 창경궁을 훼손할 때 철거된 것을 1986년 다시 지었다.

 

 

 

 

 

사진: 문정전 내부.

 

임금 자리 뒤에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이 쳐져 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다.

임금이 창경궁에 임어(臨御) 할 때면 이곳이 어전회의가 열리는 공간이다.

삼정승 육판서가 죽 앉아 회의하면 그걸 또 사관이 일일이 기록하던 곳이다.

 

조선 왕조 시대 임금들은 이 궁궐 저 궁궐을 옮겨 다녔다.

아마 음양오행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한다.

 

사도세자의 비극이 있던 해인 1762년

국왕 영조는 창덕궁에 임어(臨御)하고 있었다.

 

따라서 창경궁 문정전을 정무공간으로 쓸 필요가 없으니

5년 전 죽은 첫째 왕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의 위패를 모셔놓고

휘령전(徽寧殿)이라 따로 이름 붙이고 혼전(魂殿)으로 삼았다.

 

빈전(殯殿)이란 왕이나 왕비의 재궁(梓宮) 곧 관(棺)을 모시는 곳이고

혼전(魂殿)은 장사를 치른 후 혼백이나 위패를 모시던 전각이다.

 

 

빈전(殯殿)이라면 민간의 빈소(殯所)인데 필자의 고향에서는

장사 치른 후 3년 상 날 때 까지 휘장을 쳐 혼백을 모시고

아침 저녁 상식을 올리는 곳을 빈소(殯所)라고 하는데

서울 지역 문상 다녀 보면 장사 나가기 전까지만 빈소(殯所)라고 한다.

 

 

정성왕후는 왕비니까 3년 상이 나면 종묘에 부묘 해야 마땅한데

문정전에 위패를 모신 까닭은, 남편 영조보다 종묘에 먼저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즈음 눈으로 보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옛날 사람들은 남편보다 아내가 앞서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정성왕후 혼령은 남편 영조와 같이 종묘에 들어 갈 그날을

문정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곁가지로 흐르지만 이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의 능은

서오릉 안 홍릉(弘陵)이다. (청량리 밖 홍릉(洪陵)과는 한자가 다르다.)

 

 

 

사진: 정성왕후 홍릉을 뒤에서 찍었다.

 

그런데 봉분이 중앙이 아니라 왼쪽에 치우쳐 있고 오른 쪽이 비어 있다.

원래 영조대왕이 정성왕후 능을 쓸 때 자기가 사후에 들어갈 요량으로

위 사진 오른 쪽을 비워 두었으나, 정작 영조 사후 능침은 는 동구릉 내

원릉(元陵)에 썼고 그 후 계비 정순왕후가 그 옆에 들어가 누워 버렸다.

 

 

아무리 임금이라도 일단 죽고 나면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조선 시대 원비(元妃)와 계비(繼妃)가 있는 경우 임금들은 보통 사후에

먼저 부인-원비 옆으로 가고 싶어했으나 이게 잘 되지가 않았다.

나중 부인-계비들이 꼭 방해를 하고 나섰다.

 

어느 글에 영조가 정성왕후 옆에 자리까지 마련하고도 가지 못한 것을

정조가 심술 부린 탓으로 설명하는 것을 읽은 적 있다.

 

손자야 할아버지가 어느 할머니 옆에 간들 무슨 상관인가?

선왕 영조의 능침을 어디에 쓰라고 최종 결재야 국왕 정조가 했겠지만

그렇게 된 까닭은 계비 정순왕후와 연결해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물론 정순왕후가 나는 남편이 먼저 부인 옆에 가는 꼴을 차마 못 본다

라고 입 밖에 냈을 리는 없었을 테니 자료를 잘 읽어야 할 것이다.

 

 

이야기가 옆으로 너무 많이 샜는데 문정전으로 돌린다.

 

 

1762년 윤(潤) 5월 13일

 

영조는 정성왕후 신위를 보러 창경궁으로 왔다가 사도세자를 부른다.

그런데 세자가 늦게 나타나고 영조는 역정을 내며 칼로 자결하라고 명한다.

이렇게 설명을 줄이니 좀 늦게 왔다고 아들더러 죽어라 한 셈이 되나

그런 건 아니고 영조는 이날 세자문제를 결판 내려고 작정했을 것이다.

 

 

 

실록 1762년 (영조 38년 임오) 윤5월 13일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란 칼로 자결하라는 말이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改過遷善)

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映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世孫)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嬪宮)·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王孫)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

 

 

신하들이 만류하자 영조는 세자를 뒤주에 가두도록 한다.

 

실록 1762년 (영조 38년 임오) 윤5월 13일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

(廢世子爲庶人, 自內嚴囚)

 

 

 

 

사진: 창경궁 문정전(文政殿) 앞뜰

 

사도세자는 저 사진에 보이는 마당에서 아버지 명에 의해 뒤주에 들어갔다.

 

 

 

 

사진: 화성행궁에 있는 뒤주.

 

사도세자가 들어갔던 바로 그 뒤주는 아니지만 대략 비슷할 것이다.

뒤주에 들어 갈 때가 그냥 5월도 아니고 윤 5월 13일이니

양력으로는 7월쯤으로 무더운 여름날이었을 것이다.

그런 날씨에 사도세자는 뒤주 안에서 8일을 지낸다.

 

 

 

선인문(宣仁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에서 남쪽 원남동 방면으로

70m 정도 떨어져 선인문(宣仁門)이라는 작은 문이 있다.

 

 

사진: 선인문(宣仁門)-맞은 편 서울의대 쪽에서 찍음

 

사도세자가 들어 간 뒤주는 문정전에서 이 선인문 안쪽으로 옮겨진다.

 

 

 

 

사진: 창경궁 안쪽에서 본 선인문.

문정전에서 동쪽으로 약 100 여 미터 떨어졌다.

 

사도세자는 저 사진에 나타난 공간 어디에서 윤 5월 중순

양력으로 7월 무더운 날씨아래 여드레를 지냈던 것이다.

 

 

 

임오화변 (壬午禍變)

 

여드레 뒤 윤5월 21일 사도세자는 뒤주 안에서 숨을 거두니

이후 이 사건을 일어난 해 간지를 따라 임오화변이라고 부른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칭호를 회복시킨다.

 

실록 영조 38년(1762 임오) 윤5월 21일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훙서(薨逝)하였다. 전교하기를,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世孫)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大臣)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한다. 후략 (後略)

 

사도세자의 는 설워할 도(悼)고, 시법(諡法) 상으로 

중년이 못되어 일찍 죽었음을 뜻한다고 한다.

나중 정조는 즉위년 1776년에 장헌(莊獻)이라는 존호(尊號)를 지어 올린다.

 

 

금등(金騰)

 

실록 정조 17년(1793 계축) 8월 8일

 

전략 ..

금등 속의 말은 하나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니 이 어떠한 미덕인가. 단지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장차 묻혀진 채 드러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

지금 전 영상의 상소로 인하여 그 단서가 발로되었고 중략 .

 

금등 가운데의 두 구절을 베껴낸 쪽지를 여러 대신들에게 보여주게 하고는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동(桐)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

 

이것이 유명한 금등 구절로 피 묻은 적삼이여 부터 바란다 까지가

영조가 말 했다는 내용이다. 이를 두고 사도세자 죽음이 노론

그 중 김상로의 계략에 영조가 속아 넘어갔음을 밝히는 증거라고

요즈음 떠들어대지만 비약이 있고,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영조가 대체 어떤 인물인데 누구에게 속는단 말인가?

또 속은 줄 알았으면 영조 스스로 (노론을) 처단할 노릇 아닌가?

자기도 힘에 버거운 상대를 어린 세손에게 하소연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영조나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 적은 내용이나 임오화변-사도세자의 죽음을

설명하는 기본 입장은 양시론(兩是論) 내지 양비론(兩非論)이다.

그럴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영조에게 산 세자는 근심거리지만, 죽은 뒤에는 더 몰아 세울 이유가 없었고

세손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명예를 회복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혜경궁은 지아비도, 시아버지도, 친정 노론(老論)도 탄할 수 없었다.

혜경궁이 한중록에서 기껏 원망한 것은 힘 없는 궁녀들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광주 청문회에서 총 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죽은 사람만 즐비하다는 꼴로 아무도 별 일 하지 않았는데

애매하게 세자만 뒤주에 갇혀 죽더라 하는 짝이  나버렸다.

혜경궁도 영조도 노론도 관계 당사자 모두 조금씩 진실을 감추었다.

 

 

사진 : 옆에서 본 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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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3.16 20:37

    첫댓글 역사공부 감사합니다 너무 참혹한일 부끄러운 역사이지요?ㅠㅠ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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