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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6/19 대천 성주산자연휴양림 화장골 숲을 걷다
자유인 조동화는 대천 성주산자연휴양림 삼림욕 화장골 4km를 걷는일을 한후 심연동으로 하산길에 백운사를 답사하였다.
화장골 등산로는 약 4km의 구간으로, 햇빛이 보이지 않는 심산유곡이여.
아름들이 소나무가 많은산 성주산!
숲속에 들어오면 왜 기분이 좋고 몸이 가벼워질까?
피톤치드 덕분이여.
성주산자연휴양림은 옛 탄광지역으로 자연휴양림으로 개발했으며, 화장골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약 4km에 걸치는 하늘로 쭉쭉 뻗은 숲이 장관이었으며, 성주산까지 등산하는 동안 흙길은 없고 등산로가 자갈길이라 그다지 좋은 등산로는 아니나 발바닥 용천을 자극하여 발바닥에 지압효과는 좋을 것 같았다.
자연휴양림 편백숲에 삼림욕 후 아주 천천히 성주산 560m까지 오르는 동안 큰 소나무가 많아 유심히 관찰한바 소나무 밑둥에 껍질이 벗겨지고 칼로 골을 탄 상처가 나 있었다.
이는 태평양전쟁(2차대전)때 일제가 자원부족으로 한국인을 이용하여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다.
성주산은 옛 탄광지역으로 1990년대까지만 해도 출입이 금지되였던곳으로 삼림이 울창하여 아직도 천혜의 원시림처럼 청정지역으로 삼림욕 피톤치드 마시려면 성주산 화장골4km 삼림욕을 권장하고 싶은곳이다.
깊고 깊은 넓고 넓은 성주산!
성주산자연휴양림 화장골4km 삼림욕!
날씨가 좋아 화장골과 심연동 깊은 산중의 공기는 무엇에 비교할수 없이 최고의 보약을 먹고 왔다고 자랑하고 싶더이다.
조동화의 오늘 하루는 심산유곡 화장골4km의 삼림욕, 심연동 깊은 계곡 물소리에 귀가 즐거웠고, 새들의 노래소리를 들으며 세월을 낚으니 기분이 상쾌하고 감개무량하였다.
조동화의 벗님들!
성주산화장골 4km 울창한 숲을 걷는일 최고의 보약이었지.
태초의 원시림처럼 울창한 초록색 자연을 맛보며 걷는 것이 최고의 보약이여.
자연에서 울려퍼지는 새소리 들으니 귀가 즐거웠수다.
삶의 여정에 즐겁고 행복해야지요.
걷지 못하면 인생 끝장이여.
황혼의 여정에 걷는일 열심히 하여 건강 챙기시고,
행복과 행운이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이런 명언을 했지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일에 열중하라. 이것이야말로 이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약보다도 강력한 효력을 지닌 영약인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걷는 것은 인간에게 최고의 보약’이라고 말했다.
걷자! 또 걷자. 틈나면 걷자.
두발만능자가용에 감사하자.
감사 감사........
☛산책시간 및 거리 : 11:00-17:00(6시간) 10.0km
☛산책코스 : 성주삼거리-성주산자연휴양림-화장골4km-성주산전망대-성주산광장(560m)-심연동임도-심원동계곡길-백운사-백운교-성주사지-성주삼거리
☛귀로 : 대천역21:02 무궁화 승차 익산22:03도착 귀로(버스 놓치는 바람에 두시간을 기다려 무궁화 열차를 타다.)
☛참고 : 대천역 바로 앞에서는 시내버스 정류장 2개가 있다.
해수욕장 방면, 시내 방면 두 노선으로 나누어 역사 정면에 있는 정류장이 해수욕장 방면이고, 좌측 정류장이 시내방면입니다. 배차시간은 10분간격으로 이동이 아주 편리하다.
성주산 방면은 요양병원에서 환승해야 되나, 대천역에서 1km정도 되므로 도보로 10분정도 이동하면 될수 있는 거리임.
☛성주산 “소나무”들의 상처-일제식민지시대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다.
일제말기(1943~45년 2차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 자원이 부족한 일본군이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해서 군수물자인 항공기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한 흔적으로 70년이 지난 지금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성주산에는 큰 소나무들이 등산로에 많이 있는데 거의 모든 소나무가 껍질이 벗겨지고 칼로 골을 탄 상처가 선명히 남아 있다.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때 전투기 항공유가 많이 부족했으므로 소나무 송진을 정제 가공하면 테려빈유라는 기름이 되는데 항공기용 기름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일제는 전국의 굵은 소나무에 껍질을 벗기고 흘러 내리는 송진을 받아 기름을 만들었지요.
전국 각지에 아름드리 소나무는 이런 상처가 남아 있으므로 등산 하실적에 소나무 주의깊게 살펴보세요.
"일제는 쓸만한 소나무마다 껍질을 벗기고 톱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만들어 송진이 쉽게 흘러내릴 수 있도록 깊은 생채기를 냈고 채취된 송진을 1차로 끓여서 가공한 후 드럼통에 넣어 반출해 군수물자로 사용했다"고 한다.
송진을 모으기 위해 일제는 소나무마다 최대 가로 70㎝ 세로 100㎝를 절개한 일제 36년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직접 가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소나무들의 생명력은 대단해서 쓰러지지 않고 우뚝 우뚝 서 있습디다.
<자갈길 등산로에 왠 두꺼비 한 마리가 나타났다.
도망가지도 않고 가만히 있네.
어디론가 살길을 찾아 성주산 화장골을 헤메이리라.
두꺼비여 안녕하고 두발만능자가용으로 성주산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었다.
두꺼비는 신령스런 동물이라고 하며 두꺼비를 잡으면 죄가 된다고 하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피부에 부포톡신이라는 독이 있는 물질을 내뿜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여!
점심은 가지고 온 도시락으로 챙겨 먹어야지.
앉을 자리는 나뭇잎으로라도 만들어 편안히 먹어야 하는거여.
반찬은 김치 한가지면 되야.
걷는일도 일이라 하며 아내는 토마토로 수분을 섭취하라고 잘라 챙겨주었구먼.>
☞성주산
아름들이 소나무가 많은산 성주산!
성주산에는 유난히 적송이 정상부근까지 분포되여 있다
맑은 공기와 함께 피톤치드를 마음껏 마시면서 대자연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
차령산맥 끝자락 산악지대인 보령 성주산 일대는 1950년부터 1980년까지 무연탄을 년간 15만 톤 생산하는 탄광지대였다.
점차 매장량이 줄고 채산성이 떨어져 폐광이 잇따르자 1989년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 조치에 의거 폐광 조치가 내려졌다.
성주리 일대가 탄광촌이었다.
<소나무 적송 한구루가 2층집을 휘어 감고 있어 유심히 살펴보았지.
아래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는 주인에게 다가가 집이 운치가 있다고 하니 소나무를 중심삼아 집을 지었다고 하였으며, 조동화는 목을 축이기 위해 물을 한컵 얻어 마셨지요.
이소나무는 이집의 2층입구를 햇빛을 가릴만큼 큰 소나무로 이집의 보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소나무를 어디서 옮겨온 것 같진 않고 원래 있던 소나무위치에 집을 지은 것 같다.
2층집 구조로 된 이집은 입구에 돌간판이 세워져 있는데 “늘소나무가든펜션”이라고 되어 있으며, 펜션 바로 아래에 계곡물이 흐른다.
계곡에 설치된 평상이 몇개 되는데 펜션 이용고객에 무료로 대여 해 주겠지요.
펜션요금은 1일 숙박하는데 17만원이라 하였다.
위치는 심연동 성주1리 마을회관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백운사 스님의 두유 한팩
화장골 성주산을 오른후 심원동계곡길 하산길에 백운교 이르러 “백운사”이정표가 있어 시간여유도 있고 해서 들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 700여미터 오르막을 걷는일을 하며 백운사 경내에 도착하였지.
여자보살님이 경내의 풀을 뽑고 있길래, 혼자 사찰 지키며 일을 하려면 힘 들겠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니 머리를 깎고 절에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 스님이라 하시며 백운사에는 스님이 네분 계신다하며, 시원한거 주까요 하고 베지밀 한팩을 가져와 주며 의자에 앉아 마시고 가라 하시었다.
아이고 스님 고맙습니다. 하고 나무그늘 의자에 앉아 감사히 잘 마시었다.
마음씨 고운 여승(여자스님)의 베지밀 한팩이 어찌나 고마운지 조동화는 시주는 다음에 백운사를 찾을 때 필히 하기로 작정하였다.
백운사(白雲寺)
☞위치주소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심원계곡로 259-200
☞전화 : 041-933-5569
백운사(白雲寺)는 대한불교조계종에 소속된 사찰로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며, 임진왜란때 불에 탓다가 조선조 순조 25년(1925년) 중건됐다.
신라 때 무염(無染:801∼888)이 창건하여 숭암사(崇巖寺)라고 하였다. 1592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근처에 있는 성주사(聖住寺)와 함께 불에 탔다가 중건한 이후 절이 높은 곳에 있어 흰구름 속에 있는 것 같다고 해서 절 이름을 백운사로 바꿨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고, 유물로는 대낭혜대사송덕문(大郎慧大師頌德文)이 전한다. 이 송덕문은 창건주 무염의 덕을 기린 것으로 문장이 뛰어나고 필체도 명필로 알려져 있다.
성주산의 주산 장군봉(677m)은 들머리가 백운사를 거쳐 왼쪽 샛길로 시작한다.
백운사에서 장군봉까지는 이정표 나무표지에 2.2km로 되어 있다.
<<백운사 오르는 길 좌측에 밤꽃향기가 코끝을 자극하길래 사진을 한컷하다.>>
◐남성호르몬 냄세 밤꽃◑
6월의 산하는 밤꽃이 약간 비릿한 내음을 바람에 흩날리며 마치 여인네들을 유혹이나 하려는 듯 밤냄세를 풍긴다.
꽃의 향기라면 당연히 달콤하고 감미로워야 할 텐데 밤꽃 향기는 독특한 향이난다
흔히 남자의 정액 냄새 같다고도 한다.
옛날에는 밤꽃이 필 무렵이면 부녀자들이 외출을 삼가 하였고. 과부들은 이때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데 . 무슨 성분이 때문에..그렇게 만들까?
놀랍게도 그 이유는 밤꽃 향기의 성분이 정액 냄새의 성분과 같기 때문,그리고 .향기로음이 아닌 정액 냄새....그성분이 무엇 이길레.
정액 성분은 스퍼미딘(spermidine)과 스퍼민(spermine은 정액이란뜻 )푸트레신(putrescine)과 카다베린 분자등으로이루어 지는데.
네 분자는 모두 휘발성이 있어 대체로 냄새가 고약한데 생선 비린내도 아민류 화합물 때문이다. 이런성분은 질 내부환경이 산성으로 이루어져. 정자가 산성을 못 견뎌 죽게되므로 중화시켜 정액속의 정자를 보호하는 완충제 역할을 한다 함다는것, 자기 방어 본능의 액취인셈이지요.
서양에서도 밤꽃 향기는 ‘남자의 향기’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평소 새침하던 여인도 밤나무 숲을 함께 거닐면 사랑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는 말이 있는데, 아마도 남자의 향기에 취해서 그렇다는 의미로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은 한낯 속설에 지나지 않겠지요.
초여름 달밝은 밤에 하얗게 핀 밤꽃과 유월 뙤약볕 아래 뿜어대는 향기.... 아시다시피 꽃 모양은 길죽하여 볼품 없지만 그 향만은 유월의 열기에 따라 온 산야를 진동합니다.
밤꽃에는 피침처럼 뻗힌 수많은 흰수술 끝에 노란 방울을 달고 있는데, 아래로 길게 처진 수꽃은 마치 여우 꼬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수꽃에 달려있는 수많은 핀은 남자의 정자를 닮은 것 같기도 합니다.
성주산자연휴양림
☞위치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화장골길 57-228
충남 보령시 동쪽 성주면 일대에 위치한 성주산 자연휴양림은 산림청에서 폐광지역을 개발하여 휴양림으로 조성한 곳이다. 예전에는 휴양림을 포함한 성주면 일대가 광산지역이었다고 하는데 산림청에서 성주산내 약 500ha에 이르는 지역을 개발, 지난 1991년 5월 15일에 자연휴양림으로 지정한 것이다.
성주산자연휴양림은 대천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지나 성주삼거리에서 하차한 후 10분 정도 걸어가면 휴양림 입구에 다다른다.
휴양림에서 도보로 약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석탄박물관이 있으며, 성주사지도 성주삼거리에서 1km 쯤 걸으면 도로 왼쪽으로 널찍한 절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유명한 성주사지(사적 제307호)다.
성주산자연휴양림은 차령산맥이 빚어낸 아름다움이 뛰어난 곳으로 성주면 성주리의 화장골계곡은 4km에 이르는 울창한 숲이 장관인 계곡으로 산림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보령시 유래
1914년 보령,남포,오천군이 보령군으로 통합되었고 1986년 보령군이 보령군과 대천시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1995년 대천시와 보령군이 보령시로 통합이 되었습니다. 현재 보령시는 16개 구역(웅천읍, 주포면, 주교면, 오천면, 천북면, 청소면, 청라면, 남포면, 주산면, 미산면, 성주면, 대천1동, 대천2동, 대천3동, 대천4동, 대천5동)으로 나뉘어 행정과 시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보령시 홈페이지 옮김===
조동화의 벗님들!
주위의 지인 한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사람이 없다고 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오고 싶어서 온 사람은 아무도 없을거여.
그냥 이 세상에 왔으니 자기만의 삶을 누리다 가면 그만인거여.
자기만의 생각과 주간으로 그낭 저낭 즐거움과 행복 누리고 살면 되야.
은행에 있는 돈은 내돈 아닌거 알제.
돈은 내가 써야 내돈인거여.
인생을 살면서 작은일에 감사하며 살자구랴.
☞죽음 직전 사람들의 ‘이것이 인생’ 5가지☜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것이 언제였는가? 아침의 냄새를 맡아 본 것은 언제였는가? 아기의 머리를 만져 본 것은? 정말로 음식을 맛보고 즐긴 것은? 맨발로 풀밭을 걸어 본 것은? 파란 하늘을 본 것은 또 언제였는가?
많은 사람들이 바다 가까이 살지만 바다를 볼 시간이 없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한 번만 더 별을 보고 싶다고, 바다를 보고 싶다고 말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지금 그들을 보러 가라.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라.”
우리 모두 영원히 살 것처럼 하루하루를 무심히 살아가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인생의 끝은 온다. 단 한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이 진리를 직시하는 순간 또 누구나 묻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진정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한번뿐인 인생’이라는 말을 자주, 쉽게 하면서도 언젠가 정말 나에게도 삶의 마지막 순간이 오리라는 것은 대부분 망각하고 있다. 어쨌든 죽음은 삶의 다른 경험들처럼 여러 번 해볼 수도, 미리 느껴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에 스스로 직면해 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어떤 가르침보다 우리에게 큰 울림을 남기는 것이 아닐까? 인생과의 작별을 앞둔 사람들은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을 배웠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을 더 원했을까?
1 당신의 임무는 사랑의 방해물을 찾아내는 일
“삶의 이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의 임무는 사랑을 찾는 일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사랑의 방해물을 찾아내는 일이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은 사랑에서, 삶에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도 가장 중요한 일이다.”
몇 해 전 한 병원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목격되었다. 그 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던 환자들의 얼굴이 몰라보게 밝아진 것이다. 한 의사가 자세히 관찰해 보니 그것은 어느 청소부 아주머니 때문이었다. 그 아주머니가 중환자실에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그 의사는 아주머니의 비결을 알 수만 있다면 백만 달러도 아깝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느 날 복도에서 그 아주머니를 마주친 의사는 다소 무뚝뚝하게 물었다. “도대체 내 환자들에게 어떻게 하는 거죠?”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그냥 병실을 청소할 뿐이에요.” 그녀가 어떻게 환자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지 알고 싶어서 의사는 그 뒤로도 눈에 안 띄게 아주머니를 쫓아다녔다.
하지만 그녀가 별달리 특별한 일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식으로 뒤를 밟은 지 2,3주가 지났을 때, 아주머니가 의사를 붙잡아 간호사실 뒤켠에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여러 해 전 겨울에 자신의 여섯 아이 중 하나가 몹시 아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주머니는 한밤중에 세 살 난 아들과 함께 응급실에 가서 아들을 무릎에 앉혀 놓고 몇 시간 동안이나 의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고, 그녀는 품 안에서 어린 아들이 폐렴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과거의 고통과 아픔을 어떤 증오나 원한, 분노도 담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의사가 물었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것이 죽음을 앞둔 환자들과 무슨 관계가 있죠?”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죽음은 내게 더 이상 낯설지 않아요.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 같아요. 가끔 중환자실에 들어가 보면 환자들은 몹시 겁에 질려 있어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그들을 쓰다듬게 돼요. 나는 그들에게, 나도 죽음을 보았는데 죽음이 다가와도 무섭지 않을 거라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그냥 함께 있어 줍니다.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아요. 나는 다른 사람들 곁에 있어 주려고 노력해요. 그것이 사랑이지요.”
심리학도 의학도 공부하지 않았지만 아주머니는 삶의 가장 큰 비밀 하나를 알고 있었다. 사랑은 바로 곁에 있어 주는 것이며 돌봐 주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2 당신 속에 다른 사람이 지나다니게 하라
“사람과의 관계에서 때로 텅 빈 공간이 되라. 다른 사람이 지나다니게 하라. 그것이 진정한 관게이다. 삶은 거울과 같다. 삶에 미소 지으라. 그러면 삶이 당신에게 미소 지을 테니까.”
건설 노동자 잭슨은 백혈병 진단을 받은 뒤에도 최선을 다해 살았다. 그리고 곧 앤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앤은 생의 마지막 해가 되리라 여겨지는 날들 동안 잭슨을 정성껏 보살펴 주었다. 앤은 잭슨과 함께 보낸 두 해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내가 누군가를 이토록 깊이 사랑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사랑에 나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걸 두려워했지만, 이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게 되었어요. 잭슨을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사람과도 1년 이상 관계를 지속해 본 적이 없었어요. 잭슨이 아팠기 때문에 나는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모두 이겨 낼 수 있었어요. 잭슨을 사랑하면서 마침내 제대로 된 인간으로 돌아온 것 같아요.”
바로 그때 최고의, 그리고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수많은 치료법을 시도한 끝에 잭슨은 마침내 골수 이식 수술을 받을 수 있었고,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가 살아난 잭슨은 눈에 띄게 건강을 회복해 갔다.
6개월 정도가 지나자, 누구도 그가 백혈병을 앓던 사람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그러나 둘 사이의 관계는 전과 같지 않았다. 앤은 무엇엔가 갇힌 듯한,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열정이 식었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한쪽이 심각한 병을 앓으며 죽음을 향해 치달아 가는 상황에서 맺어진 관계의 경우, 이런 일이 흔히 발생한다. 앤의 변화를 눈치 챈 잭슨은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은 날 사랑하고 존중했고,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내 아내로 남겠다고 했어. 하지만 그건 내가 6개월 뒤에 죽을 경우의 이야기였지. 난 죽지 않았고, 실질적인 관계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이것은 평생토록 이어갈 결혼 생활의 시작이기도 해. 나를 옥죄고 있던 죽음의 굴레가 벗겨졌으니, 우리에겐 일상적인 일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겪는 일반적인 문제들만이 남은 셈이야. 난 다시 한 번 삶을 살아갈 기회가 주어져서 기쁜데, 당신은 마치 종신형이라도 선고 받은 사람처럼 보이는군. 난 결국 살아남게 되었지만, 결혼 생활을 지속시켜 줄 마법 같은 해결책은 없는 것 같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가 앞으로도 50년이나 남아 있으니 일상적인 일들에 잘 대처하기가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
감정에 대한 혼란스런 고민 끝에, 앤은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심리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절박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걸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깨달았다.
“잭슨의 말이 옳았어요. 내가 어리석었어요. 지키지도 못할 근시안적인 약속을 한 거죠.
잭슨의 삶이 끝나가는 시점에 나타나 그의 곁을 지키는 영웅적인 여인이 되는 것과, 그가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깨닫게 되었어요.
잭슨이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해 준 덕분에, 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삶이라는 긴 여정을 함께하면서 일상적으로 겪는 경험들 속에 숨어 있다는 걸 터득했어요.
잭슨의 병 덕분에 헌신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함께하면서 그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죽음이라는 극적인 요소의 도움 없이도 다시 그에게 열정을 느낄 수 있게 되었어요.”
잭슨과의 관계를 통해 앤은 자신의 내부를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대개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더 나를 화나게 할 때가 많다. 그들의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 필요한 사람은 바로 그들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종종 나에게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다. 인간관계가 가져다주는 상황들은 삶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때로 우리는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들에서 어떤 부분이 달라진다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바라는 이유는 관계를 통해서 행복해지고 싶기 때문이다. 배우자를 바꾸거나 관계를 변화시키면 완벽해지고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실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우리의 행복은 상대방을 ‘더 좋게’ 바꾸는 것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가 진정한 자신이기를 원한다면, 그들도 진정한 그들로 있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3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을 발견하라
“배움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갑자기 더 행복해지거나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더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더 평화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당신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당신만의 여행이다.”
죽음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행동에서는 놀라운 상징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처음엔 마치 “나는 한때 이곳에 존재했었다.”고 말하려는 듯이 열심히 자신의 사진을 찍는다. 그러다가 병세가 차츰 악화되고 감정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면 더 이상 사진을 찍지 않는다.
사진조차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기껏해야 그것들은 여러 세대를 거쳐 자신들이 누군지도 모르는 후손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 결코 사라지지 않을 자기 자신의 진정한 부분이라고.
죽어가는 한 여성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 누구입니까?” 그녀가 말했다.
“지금껏 내게 맡겨진 역할들 속에서 내 삶은 너무나 평범했어요. 다른 이들과 똑같은 삶을 살아온 것 같았어요. 도대체 내 삶이 다른 사람들의 인생과 뭐가 다를까 싶었어요. 하지만 병을 앓게 되면서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어요.
난 아주 특별한 사람인 거예요. 어느 누구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거나 삶을 경험하지 못했을 거예요.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이 세상이 시작된 이후부터 끝나는 날까지, 나와 똑같은 사람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이것은 누구에게나 진실이다. 아무도 내가 겪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 내가 겪은 특별한 역사와 사건들로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다. 진정한 ‘나’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특별한 존재이다. 자신만이 느끼고 자신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시간 동안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라.
4 고통을 선물로 여긴다면 당신은 성장한다
“당신이 아름다운 정원에 앉아 있다면 당신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고통 속에 있다면, 상실을 경험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 고통을 아주 특별한 목적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선물로 여긴다면 당신은 성장할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로부터는 상실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흥미로운 점들은 다음과 같다.
의학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둘째, 그들은 죽음이란 필요 없어진 옷을 벗는 것처럼 육체를 떠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셋째, 그들은 죽음 속에서 온전한 자신을 느꼈고, 자신이 모든 사물,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고 한다. 더불어 어떤 상실감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절대 외롭지 않았으며 누군가가 자신과 함께 있음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살아가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늘 고통스러워한다. 상실을 겪었기 때문이 아니라 상실을 겪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힘겨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결국 언젠가는 잃게 될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삶이 곧 상실이고 상실이 곧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평생 상실과 싸우고 그것을 거부한다. 옛 유대 격언에 “많은 결혼식에 가서 춤을 추면 많은 장례식에 가서 울게 된다”는 말이 있다.
당신이 많은 시작의 순간에 있었다면, 그것들이 끝나는 순간에도 있게 된다는 뜻이다. 만일 당신에게 친구가 많다면, 그만큼의 이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이 하나의 학교라면 상실과 이별은 그 학교의 주요과목이다.
집과 자동차, 직장, 돈과 젊음, 사랑하는 사람, 그 어떤 것도 영원히 붙들어둘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사실 때문에 슬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자각으로 인해, 지금 이 순간 누리고 있는 경험들의 소중함과 사물들의 가치를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상실이 주는 고통과 배움을 통해 삶에서 하찮게 여기던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도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잃게 되었을 때 느끼는 슬픔의 감정은 당신이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이다. 상실의 아픔을 겪으면서 당신이 잃어버렸다고 슬퍼한 사람이나 사물이 사실은 한 번도 당신에게 소유된 적이 없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그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열렬히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이 한 번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상실 없이는 성장도 없다. 상실로 인해 고통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결국 더 강해지고, 더 온전한 존재가 된다.
5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라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별의 순례자이며, 단 한 번의 즐거운 놀이를 위해 이곳에 왔다. 우리의 눈이 찬란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세계를 반영할 수 있는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시골길에서 자전거를 타던 거 기억나니?” “그때 바닷가에 간 일 기억나?” 삶의 마지막에 이르면 가장 즐거웠던 놀이의 순간들을 회상한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단 한 사람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더 일했어야 하는데”라거나 “근무시간이 8시간이 아니라 9시간이었다면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 텐데” 하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을 누리고 놀이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것도 일평생 동안.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항상 생산적이고 성공적이어야 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느라 존재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어느 성공한 사업가는 암과 한판 승부를 벌인 후에 말했다.
“난 곧바로 암 전문의를 찾아갔고 그 즉시 부어오른 부위를 제거했어요. 그리고 화학 치료를 받았죠. 난 부지런한 사업가에서 부지런한 환자로 변해 갔어요. 검사 결과를 꼼꼼히 확인하고, 약을 먹고, 의사의 진찰을 받았습니다. 병을 앓는다는 게 그렇게 큰일인 줄 몰랐어요.
화학 치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복직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암 때문에 이제는 내 삶도 너무 심각해졌어요. 모든 게 살아남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었고, 어쨌든 내가 살아 있음을 신에게 감사드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궁금해지더군요.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살아남았을까? 일을 더 많이 하려고? 더 생산적으로 살기 위해서?’ 난 그때 비로소 깨달았어요.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공허한 삶을 살아왔는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은 삶의 의미를 성공에 두었고, 난 성공이라는 이름의 벽을 구성하는 하나의 벽돌에 불과했어요. 난 그런 삶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어요. 나는 삶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있었어요. 지금은 그것들을 되찾을 시간이에요.”
삶의 종착점에 있는 환자들은 곧잘, 자신들이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이 없고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뒤 무한한 행복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아니다. 두려움 속에서 살 때 당신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헬렌 켈러가 말했듯이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가슴 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도서출판 이레 <인생 수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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