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으로 간 족보
유형오
<작은 아버님, 이 대학에선 외국 유학생들이 박사 학위를 받을 때는 대학 박물관에 기증품을 남기는 게 전통이라고 합니다. 구라파 친구들은 집안이 넉넉하여 귀중한 물건을 기증한다고 하는데, 저 같은 고학생에겐 너무 부담되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나라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 미국이란 나라는 역사적으로 200년 남짓한 나라인데 가문의 족보를 전혀 모르고 있으니 문화 류씨 족보와 다른 족보 몇 권을 소포로 보내주세요 >
1957년 둘째 사촌 형님이 학위를 받기 전에 아버님께 우편엽서로 보낸 내용이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산파 역할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아들과 딸을 출가 시킨 후 늦둥이로 아버지를 출산하셨다. 일본 침탈을 받은 식민지 시절엔 하루에 한 끼 먹기도 힘들었다. 할아버지는 ‘만주에 가서 돈을 벌어오겠다’며 큰아들 집에 할머니와 아버지를 맡겨놓고 떠났고, 할머니는 넉넉하지 않은 큰아들 살림에 부담이 될까봐 치악산 아래 조그만 동네 움막에서 6살인 아버지를 데리고 생활하였다. 동네 허드렛일과 산을 개간해서 살았는데 겨울이 지나갈 무렵 먹을 양식이 떨어져서 며칠을 굶다가 할머니가 ‘먹을거릴 구해온다’며 나가서 저녁 늦게 감자 두 개를 가져와서 아버지가 드신 후 할머니 품 안에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 할머니는 아버지를 꼭 안은 채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울면서 맨발로 걸어서 이십 리 떨어진 큰아버지 집에 소식을 전하고 쓰러졌다. 아버진 할머니 얘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흘리셨다.
아버지는 큰아버지 집에서 조카들과 같이 자랐는데 한 살 많은 큰 조카는 삼촌인 아버지를 때렸고 아버지는 분풀이로 한 살 적은 둘째 조카를 때리면서 자랐다. 형 밑에서 자란 아버지는 학교는 근처도 못가보고 어려운 살림 입이나 하나 덜 자면서 10살 때 원주 시내에 있는 일본인 쌀 전포에 맡겨졌다. 청소와 빨래, 심부름을 하였는데 일본인인 주인이 틈틈이 일본어와 글쓰기를 알려 주었고 자라면서 성실하게 일을 하며 배달을 하니 품삯을 다른 사람들 보다 많이 받았고 경리 일을 맡겨 주었다. 집안에서 한 명이 돈을 벌면 온 가족 생계를 책임졌다고 하는데 큰집 살림엔 도움이 되었고 큰 아버지는 아들 중 둘째만 똑똑하다고 보통학교에 보냈는데 아버지 품삯으로 학비를 대주었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라는 징용이 나와 일본군에게 끌려 갈 때 일본인 주인이 당신께 ‘일본에 있는 자기 아들도 군대에 갔다가 도로 나왔다며, 몸에 상처를 내고 대변을 바르면 몸이 부풀어 오르고 진물이 나오면서 전염병 환자 같이 보여 군대에서 쫒아 냈다며, 네가 살고 싶으면 꼭 이렇게 하라’고 하였다. 제주도에 도착해서 조선인 단체수용소에서 남들이 자는 한 밤중에 옷을 벗고 바닥과 벽에 몸을 긁어 상처를 내고 대변을 상처에 짓이겨 바르고 잤다. 제주도에서 오키나와로 가는 배 안에서 몸이 붉게 변하고 부풀어 오르면서 진물이 흘러내리고 온 몸이 펄펄 끓는 상태로 도착하니, 일본 군인들이 전염병이라며 제주도로 가는 배에 태워 쫒아냈다. 그때 같이 끌려갔던 조선인들은 대부분 남태평양 섬에서 생을 마쳤다.
어려운 식민지 시절을 보낸 후 어머니와 혼인을 하고 6.25때 경찰에 입직하여 생활하셨는데 남들이 학교 얘기를 꺼내면 항상 조카 자랑만 하셨다. 6.25가 끝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나라 발전을 위해서는 인재들을 외국에 보내 배워 와야 한다.’며 국비 유학생 모집 공고를 하였다. 교직에 있던 사촌 형님은 응시하여 다행히 하버드대 대학원에 입학자격을 얻어 유학을 가면서 데리고 있던 동생들을 아버지에게 부탁하고 떠났다.
그 당시 국비 유학생들은 나라에서 학비만 지원해 줬으며, 미국 교포들은 자신들도 타국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고국에서 유학생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약간의 돈을 모아서 보내 주었다. 생활비와 필요한 책을 구입하는데 너무 부족해서 5년 내내 식당에서 접시 닦기와 청소를 하며 시간제 급여를 받았고, 방학 중에는 돈을 많이 받는 공사장을 찾아다니며 일을 해서 어렵게 교육학 석,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버지께선 자신이 못 배운 한을 푸는 방법으로 10년 동안 몸담았던 경찰직에서 나와 사업을 하며 돈 버는 데만 집착 하였고, 조카의 학력으로 위안을 삼았다. 우리 4남 2녀를 억척같이 공부 시켰고 제천에 유치원이 개원 했을 때도 둘째 형님부터 입학을 시켰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막내, 나도 막내니 형님들과 누님들 보단 내가 부모님과 더 가까웠다. 특히 나에겐 어렸을 때부터 ‘가 봐도 대’를 말하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주입을 시키니 난 “안 가 봐도 대”라며 반항 하였고. 오히려 책을 멀리 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았다.
그 후 형님들은 사촌 형님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군대 안 가려고 교육대를 지원해서 교직에 종사했으니 어차피 아버지의 못다 이룬 한을 자녀들이 이뤘다고 볼 수 있겠다. 괴산호국원에 다녀오면서 하늘에 비친 당신의 평안한 모습이 떠오르는 걸 보니, 천국에선 아등바등 살지 않고 할머니 품 안에서 어머니와 잘 지내고 계시는 것 같다.
<알렉스 헤일리>라는 작가가 <뿌리>라는 책을 미국에서 출간 했었는데, 이 작가는 1960년대 우연히 하버드대 박물관에 가서 전시되어 있는 한국 족보를 감명 깊게 보고 영감을 받아 아프리카와 미국을 오가면서 자료를 찾아 <뿌리>를 집필한 계기가 되었다고 하니, 아버지께서 소포로 보내신 족보가 생각이 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