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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hilharmonic 원문보기 글쓴이: philharmonic
빗속의 여인
잊지 못할 빗속의 여인 그 여인을 잊지 못하네 <빗속의 여인>은 그 유명한 <락의 대부 신중현> 곡이다. 이 노래를 많은 가수들이 앞다투어 불렀다. 많은 이들이 <펄시스터즈나 김건모>의 곡을 원곡으로 아는데 그건 착각이다. <애드포-리드보컬 서정길>란 락그룹에 의하여 1964년에 발표된 곡으로 이미 불혹을 넘긴 노래다. 그러나 40년이 넘은 노래치곤 전혀 촌스럽지 않은, 아니 오히려 요즘 감각에 더욱 잘 어울리는 훌륭한 음악성을 지닌 노래로서 젊은이들의 착각도 다 용서가 된다. <신중현>은 1960년 스물 둘 약관의 나이에 미군 정보부 소속 <시빌리언 클럽>에서 최초로 기타 독주공연을 가져 미군들의 폭발적 반응을 이끌어낸다. 이에 자신감을 얻어 당시로는 상상하기 힘든 락 밴드 결성을 감행한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락그룹이란 영예를 얻은 <애드포-Add4>다. 전설적인 <비틀스>보다도 앞섰던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선각자적인 그룹이다. 아무튼, 락 밴드의 바람이 전 세계적으로 불 때에 결성된 <애드포>는 <기타 신중현><리드보컬 서정길><베이스 한영현><드럼 권순권>으로 결성되었다. 이들은 주로 미8군 무대에서 연주를 했으며, <빗속의 여인>이 실린 <애드포>의 첫 앨범을 만든 때는 1964년 가을이다. 그러나 <비틀스>가 미국을 정복한 그해 겨울에 음반을 낸 탓인지 음반시장에서는 죽을 쒔다고 한다. 그러나 40여년이 지난 지금 이 노래는 큰 빛을 발하고 있다. 나중에 <신중현>이 회고한 내용을 보자. <<그룹을 만들고 나서 '비틀스'의 바람이 영국을 강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어? 비틀스가 우리랑 같네'하며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비틀스' 붐에 뒤늦게 편승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고, 다만 시기적으로 일치했던 것뿐이죠. 물론 나중에는 '비틀스'를 흉내 내 유니폼을 맞춰 입고, 'I wanna hold your hand'같은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신중현, 1938, 01, 04 ~ 서울 종로구 명륜동, 이발사인 아버지 신익균과 일본인 어머니, 신대철, 신윤철, 신석철, 1941년경 만주 신경으로 이주, 아버지 재혼, 배다른 남동생과 여동생이 생김.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로 복귀 1950년 전쟁 발발과 함께 충청북도 진천으로 이주 1952년 아버지 사망 1953년 어머니 사망 1955년 미 8군에서 공연 시작 1958년 첫 음반 <히키 신 기타 솔로집> 발표 1963년 한국 최초의 로큰롤 밴드 ‘애드훠’ 결성 1964년 애드훠 첫 음반 발표 (‘비 속의 여인’ ) 1964년경 미 8군 최초 한국인 여성 드러머인 명정강씨와 신촌에서 살림살이 시작 1966년 그룹 ‘덩키즈’ 결성/ 가수 이정화 데뷔 (‘봄비’ ‘꽃잎’ ) 1968년 ‘신중현 빅 밴드’ 결성/ 가수 ‘펄 시스터즈’ 데뷔 (‘님아’ ‘커피 한잔’ ) 1969년 가수 김추자 데뷔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 1970년 그룹 ‘퀘션스’ 결성/ 가수 박인수, 장현 데뷔 (‘나는 너를’ ) 1971년 가수 김정미 데뷔 (‘간다고 하지 마오’ ‘봄’ ) 1972년 그룹 ‘더 멘’ 결성 (‘아름다운 강산’ ) 1973년 그룹 ‘신중현과 엽전들’ 결성 (‘미인’ ‘저 여인’ )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5년간 활동 금지 1980년 그룹 ‘신중현과 뮤직 파워’ 결성 (‘너만 보면’ ‘저무는 바닷가’ ) 1983년 그룹 ‘신중현과 세 나그네’ 결성 (‘떠나는 사나이’ ) 1985년 록 까페 ‘라이브’ 운영 1987년 라이브 공연장 ‘록 월드’ 운영 1994년 <무위자연> 음반 발표 1995~1997년 수원여대 대중음악과 교수 1996년 신중현 헌정 음반 <트리뷰트 투 신중현> 발매 2005년 신곡을 실은 음반 <도시학>과 과거 노래를 재해석한 음반 <안착> 발매 현재 경기도 용인. 3남 중 장남 대철은 그룹 ‘시나위’의 리더로, 윤철, 석철은 ‘서울전자음악단’에서 기타와 드럼을 각각 맡고 있다. 한국 록음악의 대부인 신중현은 상징적인 인물로 통한다. 트로트가 주류를 이루었던 60년대의 가요계에 로큰롤을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록커로서 대중음악 장르의 복합화와 다양화에 기여했다. 신중현의 활동사는 곧 국내 록음악 발달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중학교 때 부터 기타를 익힌 신중현은 미군 통신용 무전기로 AFKN 전파를 잡아서 외국 음악을 들으며 독학을 했다. 1955년 경에 그는 김광수의 주선으로 라이브홀과 백화점에서 엄토미, 송민영, 김광수등과 함께 공연활동을 했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 기타연주 실력이 소문나 음악학원의 강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6개월동안 음악학원 강사일을 한 신중현은 미8군 쇼무대에 서게 되면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에서 많은 인기를 얻게 된 그는 1959년에 함께 일하던 선배들과 앨범을 발매, 이것이 첫 녹음이며 이 음반에는 재즈풍으로 편곡된 동요와 한국 민요가 담겨있다. 신중현은 1962년에 황무지와 다름없는 국내 음악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음악 교육에 힘쓴 이교숙에게 음악 이론을 배우게 되었고 이 기간동안 앞으로 음악 활동을 하는데 중요한 작곡,편곡등의 실력을 키워갔다. 그 해 신중현은 한국 최초의 록 그룹 <에드 훠(Add 4)>를 결성했다. 물론 에드 훠 이전에도 그룹이 있었지만 어떤 그룹으로 활동했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어 <에드 훠>를 최초의 록 그룹이라 규정했다. 에드 훠는 결성된지 2년후에 첫 앨범을 발표, 이 앨범은 한국 최초의 록 음반이며 한국 최초의 록 창작곡으로 기록되었고 `빗속의 여인`, `커피 한잔`, `내 속을 태우는 구려` 등 신중현의 대표적인 노래들이 수록되었다. 그는 <에드 훠> 앨범에 장미화를 데뷔시키기도 했다. <에드 훠>는 부산에서부터 인기몰이를 시작하여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계속적인 공연으로 큰 인기를 누린 에드 훠는 해체된 1965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70년 초반에 <퀘션스>라는 그룹을 결성한 신중현은 `김상희 리싸이틀 쇼`에 참여 반주를 담당했고, 이 쇼는 음반으로 제작되어 신중현의 곡들이 담기기도 했다. 신중현은 <퀘션스>와 함께 공연실황 앨범을 발표했는데 이 앨범은 음반회사에서 몰래 녹음해서 불법으로 제작한 것이다. 이렇게 가수들의 앨범에도 참여하였던 <퀘션스>는 그해 가을에 해체되었다. 김추자와 캐롤음반을 발표한 신중현은 김추자의 앨범에 자신이 작사, 작곡, 편곡까지 했던 `님은 먼곳에`를 수록하도록 했다. 처음에는 이 곡을 패티 김에게 주려고 했지만 갑자기 패티 김이 자취를 감춰 버리자 급한대로 김추자에게 주었던 것이다. 어찌되었건 김추자의 앨범은 삼판까지 제작되는 큰 인기를 누렸다. 이 무렵 신중현이 발표한 `봄비`를 일본 음악쪽에서 높게 평가하여 여러가지 좋은 조건을 내걸고 끌어가려했다. 당시 일본 음악 수준은 우리나라보다 낮았기 때문에 그를 데려감으로써 음악적 수준을 높이려 했었다. 그러나 신중현은 그들이 일본인, 일본이름으로 활동해야만 한다는 조건을 내걸자 단호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는 1980년에 그룹 <뮤직파워>를 결성하고 자신의 독집음반을 발표했다. 신중현은 1986년 록의 활성화를 위해 전용 라이브 클럽 `록 월드(Rock world)`를 개관했다. (신대철, 김종서, 임재범 등 `시나위`의 멤버들은 이곳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년 뒤에는 스튜디오 `우드스탁`을 개관했다. 30년이 넘는 기간동안 꾸준히 자신의 음악 세계를 추구하면서 활동해온 신중현은 1994년 앨범 `무위자연`을 발표했다. 그리고 전기 기타 산조를 완성시키면서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되었다. 1996년과 1997년에는 헌정앨범 `A Tribute to 신중현`과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는 `김삿갓`을 내놓았다. 특히 `A Tribute to 신중현`은 국내 최고의 뮤직션들이 대거 참여하여 만든 헌정 앨범으로 국내 최초의 헌정 앨범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김삿갓`은 김삿갓의 시에 곡을 붙인 곡으로 고전적인 맛과 현대적인 맛이 어우려진 앨범이라는 평를 받았다. 김건모1968, 1, 13 ~ '데뷔 10년, 7집 100만장 돌파(2001년 8월 13일), 총 음반 판매량 1000만장 돌파!' 김건모는 1992년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로 데뷔했다. 까무잡잡한 피부, 까만 눈썹, 개그맨을 웃기는 말솜씨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그만의 독특한 창법을 무기로 현재 총 음반 판매량 1천만 장 돌파라는 대기록을 가지고 있다. 어려서부터 작·편곡에 관심을 가져 온 그는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대중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후 서울예대 국악과를 입학, 재학 중 해군 홍보단에 입대하여 음악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 제대 후 그룹 '평균율'에서 보컬과 건반을 맡아 활동하던 중 뮤직디렉터인 김창환을 만나 정식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데뷔곡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1992)로 신인가수로는 드물게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기도 했으며, 이후 93년 발매된 2집 '핑계'는 국내에 레게열풍을 몰고 오며 김건모를 확실한 대형가수로서 자리매김해 주었다. 이어 '잘못된 만남'으로 한국음반판매량 사상 280만장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3집(1995)은 기네스북에 오르는 영예를 차지하게 되고 '국민가수'라는 호칭을 얻은 것도 이 즈음. 소속사에서 독립, 직접 프로듀싱한 4집 'Exchange(1996)'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완성도면에서 높은 평을 받았다. 성인 취향의 소울풍 발라드로 새로운 변신을 시도한 5집 'Myself(1998)'는 IMF 경제한파로 침체된 음반시장에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는 '김건모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발표한 6집 'growing(1999)'이 기대만큼 판매되지 않아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던 그는 2001년 발매한 7집 'Another Days'이 다양한 연령층의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 20명중 한 명 꼴로 소장하고 있다는 그의 앨범은 '떴다 하면 100만장'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발매할 때마다 밀리언셀러를 기록, 조용필의 기록을 14년 만에 갱신했다. "무대에서 관객들과 같은 공기, 같은 노래, 같은 감정을 숨쉬며 부르며 느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김건모. 앞으로도 경쾌한 멜로디와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팬들 곁에 오랫동안 남아있기를 기대한다. 1995년 3집 《잘못된 만남》의 판매량이 330만장을 기록하여 한국 기네스에 등재되었다. 김추자 金秋子, 1951년 1월 2일 ~ 강원도춘천에서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춘천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때에는 응원단장, 강원도 배드민턴·기계체조 선수였다. 춘천향토제에서 전통 창인 〈수심가〉를 불러 3위에 입상하였다. 1969년에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였다. 대학교 신입생 노래자랑에서 1위를 하였고, 그 해 신중현의 녹음실로 찾아갔다. 신중현은 김추자의 노래를 듣고 곡을 주었고, 1969년 데뷔 음반이 발표되었다. 가창력과 섹시한 춤을 겸비한 김추자는 1970년대에 큰 인기를 끌었고,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까지 생겼다.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그녀는 신입생 노래자랑 대회를 통해 교내 최고인기학생이 된후 신중현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데뷔와 더불어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자신에게 고정시킨 여가수는 당시로서는 유래가 없었다. 1969년 공식데뷔 후 신데렐라가 된 후 갖은 스캔들이 당시 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정말로 70년대 뭇 남성들은 육감적인 몸매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현란한 춤사위를 선보인 그녀 때문에 의식이 몽롱했다. 확실히 그녀의 꽉 조이는 의상과 섹시한 춤은 굉장했다. 섹시한 외모뿐 만 아니라 노래의 맛을 아는 가창력까지 겸비했던 그녀는 정적인 당시 사회를 한순간에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중장년층 대중은 '잠자던 돌부처도 불러 세웠다'는 그녀를 지금도 한국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가수로 기억한다. 섹시한 이미지로 사랑받는 지금의 이효리와 곧잘 비교되는 건 그 때문이다. '님은 먼 곳에'는 김추자를 일약 최고인기가수로 떠올린 출세 곡이다. 원래 이곡은 1969년 11월부터 1970년 2월까지 3개월 동안 동양TV의 주말연속극 주제가로 먼저 대중에게 알려졌고 사랑받았다. 저작권 소송에 의해 작사자가 바뀐 이 곡은 가수결정 때도 기막힌 사연을 연출했다.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 처음 취입하기로 내정된 가수는 당대 최고의 가수 패티김이었다. 하지만 주제가 취입제의를 받은 패티김은 '그런 리듬의 곡은 부르지 않겠다'며 녹음 날 자신의 리사이틀 무대에 출연하는 과오를 범했다. 이 때 문에 첫 방송이 임박한 방송국에 긴박한 사태가 발생했던 것은 당연한 일. 급한 김에 대타가수 취입을 요구한 방송사의 요청으로 신중현이 내세운 가수가 김추자였다. 14년 후인 1984년, 패티 김도 뒤늦게 이 노래를 취입함으로써 당시의 아쉬움을 대신했다. ‘님은 먼 곳에’가 수록된 음반은 무수하다. 시대를 초월해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기 때문이다. 음반으로 처음 발표된 것은 드라마 종영 4개월 후인 1970년 6월. 대중가요의 신흥명가로 부상한 신중현의 작편곡집으로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의 타이틀곡이다. 이 음반에 김추자의 노래는 ‘메모만 남기고’가 한 곡 더 수록되어 있다. 연주곡을 포함해 수록된 총 11곡은 밴드 퀘션스 시절 신중현사단 가수들인 김상희, 박인수, 송만수, 임성훈과 음악영화 ‘푸른교실’ 작업 때 만난 조영남, 트윈폴리오의 노래들로 구성되어있다. 대중가요의 명곡 ‘님은 먼 곳에’는 장현, 위일청, 나미애, 조관우, 장사익등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최근 신세대가수 거미는 동명의 영화개봉과 함께 발라드로 원곡을 편곡했다. 애절한 70년대식 사랑의 정서를 담은 이 노래는 사랑의 열병에 빠진 무수한 젊은 남녀들의 영혼을 어루만진 불후의 명곡이다. 음원출처:http://cfs10.planet.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