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가 어데 있니겨?” 어린 중이 노스님께 물었다.
“뜰 앞 잣나무”
“아, 시님 강화도가 어데 있냐고 묻는데 웬 헛소린 겨~!”
“딱 !”
노스님 지팡이가 어린 중의 마빡을 후려친다.
“야, 이놈아. 니 대갈빡 안에 안 있나!”
강화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강화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있지 않나 싶다.
강화를 보았는가? 물으면 강화 버스터미날, 외포리 젓갈 시장과 갈매기, 마니산에서 바라본 논과 바다, 강화 토박이 남궁씨 얼굴, 풍물시장 아지매와 순무, 고구마, 두루 보았지만 나는 내가 보는 대로 보고 있다. 우리의 의식 속의 강화, 우리의 시선 속에 강화는 어떻게 있는가?
다섯 해 전, 이 전 살던 공동체에서 나와 유배(?) 오듯 강화에 들어온 4월. 양사면 넘어가는 고갯마루 전 봉천산 기슭 빈집에 잠시 머물렀다. 허전하거나 쓸쓸하기보다는 어떤 새로운 희망의 느낌마저 있는 날들이었다. 잠시 머물더라도 빈 밭을 일구고 꽃을 심자고 조금은 폼도 잡는 느낌으로 지내던 어느 날, “쾡자 쾡자, 쾡자 쾡자”하고 풍물소리가 들려왔다. 좀 더 들어보니, 보통 풍물소리가 아니고 무당 굿하는 소리로 들려왔다. “아! 김금화 만신의 굿당이 강화도에 있다더니 혹시 근처에 있는가?” 소리는 멀지 않은 곳에서 울려오는 듯했고 일도 없는 나는 발길을 그리로 옮겼다.
“금화당이라.” 20년도 훨씬 넘은 대학생 시절, 축제의 초혼 굿을 부탁드리려고 김금화 만신을 만난 적이 있는 나는 고모님 뵙는 기쁜 심정으로 금화당의 가파른 언덕길을 올랐다. 굿은 거의 끝나가는 지점이었고 당집 안에는 음식들을 치우기 시작하는 손들이 분주했다.
그런데 김금화 만신의 얼굴을 뵙는 순간, 내 가슴 속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 얼굴에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 고모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 무당할머니의 굿 소리에는 이 조선 사람들의 가장 밑바닥에 흐르는 슬픔과 회한과 용서와 웃음의 마음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그 날 내 속에서 올라온 뜨거운 무엇은, 김금화 만신의 얼굴을 보고서 떠오른, 의식과 시선보다 깊은 곳에 있는 내 무의식의 강화다. 민족무당이라고 하시더니 그래서 강화에 터를 잡으셨나 보다.
예전에 내가 머물던 공동체는 혁명을 하자고 모인 사람들의 단체였다. 혁명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떠올리는 붉은색이 감도는, 무력을 동반한 폭력혁명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에 의한 지적혁명, 평온 혁명을 지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굳이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왜일까? 그것은 지금의 사회를 새롭고 바른 것으로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 적당한 개선이나 개량이 아니라 뿌리 밑에서부터 바꾸어 지금까지 없었던 ‘진실에 기반을 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한국 근대사상의 표현을 빌리자면 후천개벽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선천’이라고 하는 미숙한 문명이 끝나고 인간의 성장에 따른 새로운 성숙한 문명이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런 희망이나 바람을 인간의 마음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의 기구, 제도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이 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기존의 사회 기구와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해치는 것 같아 두려워하고 꺼리지 않을까? 그래서 기존의 것을 파괴하지 않고 조화 협력해가면서, 누룩이 들어가면 포도당이 알코올로 서서히 무리 없이 질적으로 변하는 방법으로 해가려고 했던 것이 지적혁명이었다.
그것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은 ‘후천이 될 때는 나라 안에 나라가 일어선다’는 선각자의 말처럼, 기존 사회의 기구제도 안에서 그것과 조화 협력하면서도 스스로는 사람의 본성을 회복한, 성숙한 사람들의 새로운 이어짐이 생겨난다는 이미지를 나는 갖고 있다. 강화로 자리를 옮길 때 떠올랐던 한 생각이 ‘강화는 그 안에서 완결되는 한 나라를 이룬 체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문화를 이루어 가는데 강화라는 유기체가 가진 DNA가 발현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근거 없는 나의 호기심에서 비롯한 생각이지만 강화를 보는 나의 정치 사회적인 시선이다.
“남북관계가 풀려야 강화가 개발될 텐데...”
“조력발전을 해야 강화가 발전한다!” “조력발전 하면 새우어장 다 죽는다~!!” “갯벌을 살리자”
인류 수만 년 이래, 최근 300년이란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사람들의 산업혁명, 과학화, 전 세계의 복음화, 식민지화, 자본화의 파도를 타고 지금은 동서양의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땅을 파헤치고 물길을 돌려 사람 살기 편하게 하는 데 인간은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인간의 경제문제가 지구적 환경문제로 된 지도 이미 오래다. 강화는 자연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나마 남북분단의 관계로 개발에서 소외되는 행운(?)을 가져 덜 파헤쳐진 땅과 덜 막힌 바다를 갖게 된 것이리라. 그러나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면 이미 수백 년래 간척을 거듭해온 것이 강화의 바다와 땅인지라 개발은 무조건 나쁘다는 것도 성립할 수 없는 조건을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기도 하다.
두 가지의 의견이 대립하여 두 집단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갈등의 원인은 의견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이익과 상대의 이익이 서로 넘을 수 없는 선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고정하고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대화하고 조정하여 갈등을 풀어가는 경험이 부족하다. 환경도 경제도, 자연과 사람 모두를 포함하여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 따뜻한 시선이 없이는 분열과 갈등의 골을 넘기 힘들 것이다. 분단과 환경과 경제의 문제가 서로 연결된 강화를 보는 나의 시선이다.
이렇듯, 한 사람 안에도 강화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이 섞여 있을 것이고, 여러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시선들이 겹쳐지고 쌓여 강화라는 이미지가 홀로그램처럼 있을 것이다.
강화시선은 이러한 시선들이 느슨하고 두서없이 모여 있는 듯한 잡지로 느껴진다. 특정한 몇 개의 시선으로 고정되지 않으며, 또 여러 시선 중 어떤 것을 배제하지도 않으면서 끊임없이 강화의 삶과 문화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것이 강화시선의 역할인 것 같기도 하다.
편집자의 한사람으로서 이 번 호에 담아보려 했던 것은 ‘20~30대의 젊은 시선’이다. 강화도도 대부분의 농어촌 지역과 같이 20대의 젊은이들이 많지 않고, 비싼 땅값으로 인해 30대들의 귀농·귀촌 지역으로서도 만만한 곳은 아니다. 젊은이들이 적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마리학교와 산마을 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의 배경도 있고 대학교도 세 곳이나 있는 지역의 특성으로 보면 그냥 당연하다고만 보기보다는 젊은이들의 관심을 받아주는 그릇과 활동을 뒷받침해주는 여력이 많지 않다는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부족함을 반성하자는 뜻이 아니라 지역의 삶을 풍요롭고 활기차게 해간다는 데서 젊은이들의 시선을 느껴보고 앞을 위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없는지 살펴보자는 뜻이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강화와 이어진 젊은이들의 시선을 함께 느껴주셨으면 한다.
그 외 여러 부문의 글들도 따뜻한 눈길로 읽어봐 주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