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펜광주 2024년 제22호>
낙법/ 김종
살구나무
오르던
한 마리 고양이가
갑자기
낮아질 일이
생겼는가
한 그릇
액체처럼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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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는 챗봇/ 서연정
김소월의 연보를 순식간에 외운다
즈려밟힌 ‘진달래꽃’ ‘개여울’에 뿌리고
홀연히 쇠의 가슴에 자라나는 꽃나무
존재를 상상하며 시를 읽고 시를 쓴다
리필할 수 없는 생生을 쉬지 않고 대필하며
한없이 사람의 일상을 연습하는 중이다
새하얀 종이 위에 배열되는 낱말들
낯선 쇠의 흉금을 멍하니 바라볼 때
누구의 그리움일까 꽃송이가 흐른다
✽챗봇 : 문자 또는 음성으로 대화하는 기능이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 또는 인공 지능. 주제를 제시하면 시나 에세이를 단숨에 써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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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바람/ 김정
바람의 취미는
책 읽기인가 봐
언니가 책 읽다
졸고 있는 사이
문틈으로 살짝
들어온 바람
차례를 살폈다
그림을 보았다
책갈피를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언니가 잠 깨기 전
다 읽고 가려고
팔랑팔랑 서둘러
책장을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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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이성자
유치원 문 닫은 지
벌써
여러 달 지났는데
울타리 장미꽃
속도 모르고
활짝 피었다
아니, 아니
아이들이 돌아오길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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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벌/ 전원범
호박벌이 맨발로
호박꽃 속에 들어간다
들어갔다 나오면서
노란 꽃신을 신고 나온다
호박꽃이 준
꽃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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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시조의 눈빛 말씀
- 『투명하게 서글피』를 읽고- / 오덕렬
서연정 작가께서 시조집을 보내왔다, 『투명하게 서글피』를…. 표제와 표지화에서 다양한 눈빛이 번득임을 느꼈다. 시인은 <단시조>집을 한 권 갖고 싶어 했다. 왜, 그런 생각이 피어났을까? 3장 6구 45자 내외의 시형에 다양한 변화를 꿈꾸었을까? 이번이 8번째 작품집으로 단시조 62수의 꽃밭이다. 겉과 속이 다른 꽃들이 6부로 나뉘었다.
처음은 「봄까치꽃」으로 열어, 「상강 민들레」로 마감했다. 시형이 혹은 정통 3장으로, 혹은 한 줄 떼어 연으로, 혹은 초장을 변주하고, 혹은 종장을 변주하여 아기자기스럽다. 활짝 피어나는 꽃은 절정이다. 꽃의 절정은 사랑의 절정처럼 황홀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경계를 넘었다.
워따, 여그는 야달 가지 글제로 님의 뜻을 담았네. 표제작, 「투명하게 서글피」부터 세배상을 받듯 정갈한 마음으로 읽었다. “폭설 견딘 나뭇가지/ 우수雨水에 꺾이는 소리// 헙수룩한 발자국에 투명하게 서글피// 인연들 붉은 눈시울/ 봄이 오면 봄과 함께” 3연 5줄-2·1·2-에 생각과 느낌이 담겼다. 극서정시로 말없이 우리를 느끼게 한다. ‘봄이 오면 봄과 함께’
음마, 옆에서 「짧은,」이 말을 걸어온다. “나도 좀, 나도 좀 봐요” 영락없이 손녀딸 어리광을 닮았다. 아가! 찬찬히 볼란다. 글제에는 문장부호 안 붙이는데, 아니 시조집 본문에는 문장부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데, 여기 제목에 쉼표(,)가 붙었네…. 큰 뜻 감췄을까 짧은 생애에 숨 한 번 멈추고 생각해 보자는 의도일까. 시와 삶의 고갱이를…, 단시조 응축 미를 놓치지 말라는 은근한 바램일까.
어허, 옆 경계에 발을 넣자마자 들이당짝 의인화다. 「웃는꽃」이 박장대소 하고, 「한해살이풀 연보年報」에서는 모종이 몸을 떨고, 실뿌리가 기를 쓴다. 또 「샐비어」는 뭉클뭉클 터지는 울음의 불꽃놀이를 하고 있다. 꽃들도 사람처럼 이런 의지적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응, 문학적 진실이니 가능해. 의인법은 은유의 특별한 종류인데, 은유는 서로 다른 소재에서 동질성을 찾아내는 일이래. 그리고 의인화의 세계는 본질상 상상력의 세계라데. 그래서 의인화는 상상력 없이는 불가능하고, 창작도 마찬가지래. 창작이 뭔데? 그것은 시詩다. 그것은 구성이다. 그것은 발견이요, 그것은 천 냥 빚을 갚는 한 마디 말이다.
싸목싸목 걷다보니 젤 끄터리 꽃밭이다. 첫들머리 「풀밭」 속에는 문학 광맥이 숨어 있네 그려. 서나서나, 그 시조 형상을 쪼매 보소라. 오-매, 시조 한 수가 한 문장이네. 시조와 가사歌辭가 친연이네. 역사로 보면 시조 천 년! 가사 700년! 시조는 단가요, 가사는 장가인데. 두 시형이 결구에 이르면 3·5·4·3으로 마무리하는 점이 친연성이지. 삼·오·사·삼, 중에서 성城처럼 지켜야 하는 수가 ‘3’이다. 그 다음은 ‘5’이나, 이 다섯은 5음 이상이면 좋다. 그러나 4음보를 지키는 율격 장치는 두 장르가 매한가지 아닌가.
망주막의 「추상화를 보다」에서 은유들이 부푸는 문구를 보듬고, 맨 앞쪽 표지화로 돌아갔다. 다시 봐도, 혁신의 눈빛들이다. 눈빛은 그냥 사그라질 기세가 아니다. 또 천 년을 내다보는 눈빛이다. 꼭 하고 싶은 말씀도 있다. 단시조 고정관념을 혁신하자는 눈빛 말씀이다.
* 오덕렬 선생은 《한국창작수필》 발행인으로 전라도 토박이말 연구의 대가이며 현재 사전 발간을 계획 중임. 이 작품은 전라도 말맛이 잘 살아 있는 글이어서 전문을 수록함(옮겨 적은 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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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인간은 신과 똑같았다. 하지만 신과 같은 능력을 지닌 사
람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사고를 일으키자, 최고의 신 브라흐만은
인간에게서 신성을 빼앗아 깊숙한 곳에 감춰 버렸다. 어디에 숨겼
을까? 바로 우리의 마음속이다.’ 이는 힌두교 신화에 나오는 이야
기다. 우리는 왜 어려움에 빠진 이를 보면 무작정 돕고 싶어질까?
그 답은 상대의 힘든 처지가 내 안에 담긴 신의 고귀한 성품을 자
극해 그 신성을 펼칠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른 것이다. 스님들
법문 중 귀 아프게 들었던 복전(福田) 일구기와 같은 맥락이다.
- 이정선 수필, 「세상에서 가장 큰 사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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