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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문학』7월호 수필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문학관에서 만난 나의 수필』저자
【필자노트】『월간문학』원고청탁서를 받고
『월간문학』편집국장으로부터 원고 청탁서를 받았다. 7월호에 게재될 원고라고 했다. 3월 30일에 원고청탁서를 받았으니 3개월 전에 받은 셈이다. 글 한 편 쓰는데 3개월 여유를 주다니, 그만큼 공 들여 써달라는 주문이기도 했지만 ‘숙제’를 받아 놓고 곧바로 제출하지 않으면 등이 근질거려 못 견디는 성미이므로, 원고 마감일 이전에 서둘러 보냈다.
문단 경력 30년 세월,『월간문학』원고 청탁을 받은 게 언제였는지 헤아려 보았다.『월간문학』으로부터 처음 원고 청탁을 받은 것은 등단 경력 6년째 되던 해인 1996년이었다. 그 해 2월호에 처음 졸고가 실린 뒤 2002년까지 몇 차례 수필이 게재되고 나서, 무려 18년 만에 원고 청탁서를 받은 것이다.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된 전국 회원 수가 1만 4천여 명이다. 수필가만 3천 명이 넘는다. 회원 자격으로 원고 청탁서를 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졸고 수필이 실렸거나 월평(月評)에서 평론가가 나의 졸고를 언급한『월간문학』지를 찾아 보았다. 수필작품 게재가 4회, 월평 언급이 3회, 도합 7회『월간문학』誌에서 내 이름자를 발견했다. 지난 졸고와 작품평을 다시 읽어보니 ‘세월’이 묻어난다.
1968년 창간(발행인 겸 편집인 김동리)된 52년 전통의『월간문학』誌는 구독자 수가 가장 많은 순수 문예지다. 전국 방방곡곡의 독자는 물론, 해외 구독자도 많다.『월간문학』지에 수록되는 글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문단 활동 족적(足跡)이다. 개인적인 작은 발자취에 불과하지만 성명 삼자 박힌 졸고가 역사의 기록으로 남는다는 생각을 하면 귀한 지면이 부담스럽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
게재 연도 | 글의 성격 | 필자 | 제목 | 지면 |
1996. 2월호 | 수필 | 윤승원 | 수필 <글 상처> | 99~102쪽 |
1996. 3월호 | 월평 (이달의 수필 평) | 이상보 (국민대 교수, 수필가) | 윤승원의<컴퓨터와 육필서신> | 254쪽 |
1998. 2월호 | 수필 | 윤승원 | 수필 <겸손 실종시대> | 242~244쪽 |
1998. 3월호 | 월평 (이달의 수필 평) | 정주환 (문학평론가, 수필가) | 윤승원의<겸손 실종시대> | 192~193쪽 |
1999. 6월호 | 월평 (이달의 수필 평) | 하길남 (문학평론가, 수필가) | 윤승원의<구멍 난 양복바지> | 230~231쪽 |
2002. 1월호 | 수필 | 윤승원 | 수필 <털 깎는 일> | 392~394쪽 |
2020. 7월호 | 수필 | 윤승원 | 수필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186~189쪽 |
▲ 작품과 월평이 게재된『월간문학』표지(1996.2월호~2002.1월호)
『월간문학』2020. 7월호
『월간문학』7월호 신작수필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윤 승 원
100세를 바라보는 장모님을 모시러 시골에 갔다. 거동 불편한 노인을 시골집에 혼자 계시게 할 수 없었다. 아내와 아들도 동행했다. 연로하신 장모님을 업어 바깥마당에 주차한 승용차로 모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동식 들것을 별도로 준비하지 않았다. 등에 업어 차에 태워 드리면 되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달려온 것이다.
재래식 시골집 구조는 연만하신 노인에게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안방에서 마루로 나오면 뜰팡[土房]이 있다. 뜰팡에서 안마당으로 내려오면 대문 문턱을 넘어야 바깥마당으로 나올 수 있다.
장모님이 마루까지는 가까스로 나오셨는데 마루에서 뜰팡에 내려오기 힘들었다. 내가 업으려고 하자 장모님은 손사래를 치면서 한사코 거부하셨다. 아내가 업으려고 했다. 하지만 힘이 부쳤다. 안간힘을 쓰면서 업으려 했으나 허리조차 펴지 못하고 마룻바닥에 주저 않고 말았다. 바깥마당 승용차 운전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들을 불렀다. 외할머니를 등에 업어보라고 했다.
아들이 장모님을 업으려고 등을 구부렸다. 그러자 장모님은 역시 외손자의 등을 단호히 거부하셨다. 이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절대 안 된다.’고 고개를 저으셨다. 난감한 일이었다. 마루에서 더 이상 운신(運身)하지 못하고 오도카니 앉아계신 노인이 안쓰러웠다.
안마당 한 구석에 바퀴 달린 농업용 손수레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얼른 손수레를 갖다 대었다. 사위와 외손자의 등을 완강히 거부하시던 장모님이 손수레에는 순순히 올라 타셨다. 2인이 뒤에서 밀고, 1인이 앞에서 끌어당겨 가까스로 대문 앞에 이르렀으나 이번엔 문턱이 장애물이었다. 손수레에 타고 계신 장모님을 3인이 마치 가마 들어 올리듯 번쩍 들어 올려 바깥마당 승용차 안으로 모셨다.
장모님께 여쭈었다. “사위와 외손자가 업어서 차에 태워 드리려고 했는데, 왜 한사코 마다하셨어요?” 장모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귀가 어두워 잘 알아듣지 못하셨는가 싶어 큰 소리로 재차 여쭈었으나 역시 침묵하셨다.
대전에 도착하여 처제네 집 앞에 차를 댔다. 처제가 자기 집으로 모시겠다고 일찌감치 예고하고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제가 승용차 뒷좌석에 누워계신 장모님을 업으려고 하자 장모님이 벌떡 일어나 순순히 업히셨다. 놀라운 일이었다. 사위의 등 다르고 딸자식 등이 다른 이유가 뭔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처제도 60대 중반의 나이지만 아내보다는 힘이 셌다. 3층까지 좁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하는 주택 구조인데도 처제는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혼자서 장모님을 등에 업고 거뜬히 계단을 올라갔다. 처제가 장모님을 편안히 모시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안도했다.
집에 돌아오면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아내에게 말했다. “딸자식(처제)의 등에는 순순히 잘도 업히시면서 왜 사위와 외손자 등에는 업히시기를 한사코 거부하셨을까?”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본래 까다로운 분이잖아요. 남자 등에 여자가 업힌다는 게 어머니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것이지요. 더구나 사위 등에 업힌다는 것은 남세스러운 일이고, 아직 장가도 안 간 총각인 외손자 등에 여자가 업힌다는 것은 더구나 용납이 안 된다는 것이 어른의 상식이고, 평생 몸에 밴 법도인 셈이지요.”
법도? 모처럼 듣는 말이라 신선했다. 어디서 잠자고 있던 말이 여기서 툭 튀어 나오는지 생경하면서도 언어의 무게가 느껴졌다. 아내의 뜻하지 않은 해석을 들으면서 문득 과거 총각시절에 고향 이장님이 내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자네가 이웃동네 원(元)씨 가문으로 장가간다면서? 어려울 걸! 윤(尹)씨도 둘째가라면 서운한 ‘꼿꼿 가문’이지만 원 씨네 가문도 대단히 어려운 집안이지. 참한 아가씨 고른다고 애쓰더니, 결국 그 어려운 댁으로 장가를 가는구먼! 쯧쯔~”
축하의 말씀 대신 ‘쯧쯔~’라니, 혀를 차는 동네 이장님이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40여 년을 살아보니, 옛 시골 이장님 말씀이 틀린 말씀이 아니었다. 당시 이장님이 내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까다롭게 느껴지는 ‘어려운 상황’을 수없이 경험했다.
구체적인 사례 설명 없이 ‘어려울 걸!’이라고 막연하게 암시했던 당시 이장님의 애매한 표현을 달리 해석해 보면, ‘법도를 지키면서 올곧게 살아가기가 결코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나 마찬가지였다.
법도란 무엇인가. 원칙과 상식이다. 전통을 말한다. 예의범절을 뜻한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도 함축돼 있다. 공맹(孔孟)도 들어 있다.
‘그런 것을 지키면서 왜 불편하게 사느냐’, ‘좋은 세상에 왜 옛 사고방식을 고집하느냐’라고 물으면 집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본디 그렇게 보고 배웠기 때문이지요.’, ‘몸에 밴 생활 습성인 걸 당장 어떤 식으로 바꾸라고 요구하지 마세요.’
그렇다. 불편하게 산다는 것은 그렇게 보는 사람의 눈이지, 정작 본인은 까다롭다거나 외곬인생이라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정도(正道)라고 생각한다.
장모님이 융통성이 없어서 그런 옛날 방식의 생활철학을 고집하는 분은 아니었다. 따뜻한 정을 가진 분이다. 초파일이 되면 절에 가서 사위 무사기원 등(燈)을 다셨다. 몸을 아낄 수 없는 경찰관 직업을 가진 사위를 위해 부적(符籍)을 만들어 오신 적도 여러 번 있다. 지갑 속에 소중히 넣고 다녔다. 그 덕분인지 모르겠으나 거칠고 험한 경찰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고추장 담글 거라면서 시골에서 무거운 찹쌀을 머리에 이고 오신 적도 있다. 찹쌀 한 말쯤 가까운 쌀가게에 전화만 하면 손쉽게 배달해 주기도 하고, 더 편케는 만들어 놓은 고추장을 사다 먹을 수도 있는 것을 노인이 멀리서 시외버스를 두세 번씩 갈아타면서 힘겹게 머리에 이고 오셨던 것이다.
사위가 용돈을 드리면 한 번도 덥석 받으신 적이 없다. 언제나 손사래를 치면서 도망가다시피 했다. 그러면 쫒아가서 치마 주머니에 찔러 드리곤 했다. ‘염치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분, ‘분수를 지키라’고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 주신 분,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視聽言動 四勿(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논어)]’라고 가르치신 분.
이제는 거동이 어려워 방안에만 계신 노인이지만 사위가 찾아뵈면 여전히 어려워하신다. ‘남자’인 사위나 손자들 앞에서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정숙한 장모님.
사위가 문간에 들어서면 화들짝 놀라면서 옷매무새부터 고치시는 100세 노인.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시는 어른의 반듯한 가르침과,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꼿꼿한 충청도 선비 가문의 극기복례(克己復禮) 정신을 나는 존경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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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청양 '장수마을' 풍경
▲ 청양 장수 마을 입구 - 즐거울 낙(樂)자가 들어간 '낙지리(樂只里)'라는 지명이 좋아서 일까. 칠갑산 정기(精氣)가 흐르는 '농촌 건강 장수 마을'을 다녀올 때마다 이곳의 청량한 공기와 맑은 물이 장수(長壽)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고향 선배님이자 저명 역사학자인 낙암(樂庵) 정구복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아호에도 '낙(樂)'자가 들어가 있다. 정 박사는 낙지리 지명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 낙지(樂只)라는 말은《시경》의 <소아편>에 세 번 나오고 있다. 하나는 "낙천적인 군자여! 나라와 가정의 바탕이로다.(樂只君子 邦家之基)"요, 다른 하나는 "낙천적인 군자는 천자 나라의 후원세력이 된다.(樂只君子 殿天下之邦)"요, 마지막은 "낙천적인 군자여 만복이 함께 하리라!(樂只君子 萬福攸同)"이다. 참으로 멋진 마을 이름이다. 이를 볼 때 아마도 '낙지리'는 어느 한학자가 붙인 이름으로 생각된다. (정구복 著《우리 어머님》137쪽)
장모님께서도 청양 낙지리 출신 역사학자 정구복 박사에 대해 평소 칭찬을 많이 하셨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자수성가(自手成家)한 분으로, 학문과 인품이 훌륭하여 성공한 학자로 평판 받고 있다."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칭송하셨다. '인걸지령(人傑地靈)'이라고 했던가. 내 고향 청양 출신 중엔 그 말에 합당한 훌륭한 인물이 많다. 이곳 산수(山水)와 지령(地靈)은 전래 미풍양속과 인간의 기본 도리를 강조하는 법도와도 맞닿아 있다. 예(禮)를 중시하는 연로하신 어른의 평소 생활 철학과도 무관하지 않다.
▲ 면사무소 민원실에서 글씨 쓰시는 모습 - 인감증명서를 떼기 위해 청양군 장평면사무소에 가셨을 때의 일이다. 고령의 장모님이 글씨 쓰시는 모습을 이 때 처음 보고 놀랐다. 또박또박 쓰시는 글씨체가 반듯했다. 서체(書體)에 '반듯체'라는 용어는 없지만, 당시 구순 넘으신 노인이 장부에 기재하는 성함 삼자도 함부로 흘려 쓰지 않고 반듯하게 정성을 기울이시는 것을 보면서 '반듯체'라는 서체 이름을 '장모님 필체'에 붙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성이 깃든 장모님 글씨체에서 평소 정숙한 몸가짐과 건실한 생활방식까지 엿볼 수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자동차 타시는 걸 좋아하셔서 시골에 갈 때마다 사위인 내가 승용차로 모셨다.
▲ 외손자와 무 구덩이 파는 모습 - ROTC 육군 장교로 복무하던 외손자가 휴가 나왔을 때다. 외할머니와 함께 남새밭에 무 구덩이를 파고 있다. 고령임에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시는 것도 장수 비결인 듯하다. 휴가 나온 외손자가 열심히 삽질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견해 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외손자를 끔찍히도 사랑해 주셨다. 두 아들이 외가를 방문하면 '외할머니 즉석 강의'를 최소한 한 시간 정도는 들어야 자리를 뜰 수가 있었다. '강의 내용'은 생활 법도와 건강비결을 주로 말씀하시면서, 특히 '저출산 시대'에 '다산(多産)'을 강조하셨다. 집안이 번창하고 대(代)를 온전히 이어 가려면 '자식(아들)을 많이 두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지론이자 소원이셨다.
▲ 시골집 풍경 - 서양화가인 외손자가 고드름 매달린 시골 처마 밑에서 겨울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예술가에겐 이채로운 '화재(畵材)'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외할머니가 한 평생 생활하셨던 안방과 마루, 뜰팡이 보인다. 184cm 장신(長身)의 외손자가 등을 바짝 구부려 거동 불편하신 외할머니를 바로 이곳 마루에서 업어 승용차에 태워 드리려고 했으나, 완고하신 외할머니는 '남자 등'에 업히는 것을 끝내 허(許)하지 않으셨다.
[댓글 정리]
※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에서 낙암 정구복 박사님(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충남 청양 장평 낙지리 출신)과 나눈 댓글이 소중하여 글 순서에 맞게 정리했습니다.[필자]
■ 낙암 (정구복) 2020.6.27. 08:20
1) 장천 윤승원 선생! 선생의 수필을 읽고 나니 장모님 생각이 50여년 전 기억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새삼 떠오릅니다. 장모님은 제가 시골에서 살 때 논에 오셨다가 가시는 길에 저의 집 앞을 지나가시면서 몇 차례 만나 뵙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때 장모님은 '법 없이 사실 분'이라는 평이 나있던 분이십니다. 장모님이 지금 건강이 불편하시다니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백세에 가까우셨다는 말씀에 저의 숙모님과 거의 동년배이신 것 같습니다. 바르게 키우신 두 따님 덕분에 장수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2) 훌륭하신 사위님과 외손자가 올바르게 활동하심을 보시고 고생하시면서 살아오신 자랑스러움을 느끼실 것입니다. 장천선생의 깊은 인연으로, 그리고 장모님과의 인연으로 저에 대한 과분한 칭찬을 해주신 점이 송구스럽습니다.
앞으로 장모님께 맑은 마음과 바른 마음으로 다음 세상에서는 축복이 있기를 삼보님께 기원합니다. 귀가 듣기에 불편하시다니 전화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습니다. 함께 기도해드립시다.
3) 그리고 장천선생의 주옥같은 수필로 '뜰팡'이라는 표현을 보니, 시골집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한 장의 사진보다도 더 정겹고, 인간의 애정이 넘치는 멋진 수필이었습니다. 장모님을 위해 시 한 수를 지어 올리겠습니다.
90평생 힘든 여행하셨습니다.
바르고 올곧게 살아오신 공덕
자식과 외손자에 큰 힘을 주셨도다.
이런 공덕 크게 크게 자라나
내생의 새 인연 심으셨네요.
건강하게 100세를 넘겨 사시옵소서!
장모님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마음을 비우시라고
삼보님께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 낙지리 출신 정구복 합장 3배 올림
■ 답}윤승원 2020.6.27. 09:23
1] 거동은 어려우시지만 총기는 여전히 좋으셔서 사리 판단도 명확하시고 말씀도 잘하십니다. 청력이 좀 떨어지시다 보니 언어 소통이 예전만 못하십니다. 장모님이 평소 칭송하셨던 정 박사님과 제가 이렇게 따뜻한 인연의 정을 이어가는 모습을 장모님이 아신다면 참으로 기뻐하실 일입니다. 정 박사님이 저희 장모님 50년 전 옛 모습을 기억해 주시고, ‘법 없이도 사실 분’이라고 존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2] 제가 이런 삶의 이야기를 쓰면서 마치 잊혀 가는 과거를 재생하는 작업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온갖 세상 풍파를 다 겪으시고 100년 세월을 살아오신 어른이시니, 자식 손자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말씀이 얼마나 많으시겠습니까. 이제는 자식, 손자들이 평소 어른이 강조하셨던 말씀을 컴퓨터 기억장치에 잘 저장해 놓고 필요할 때마다 재생해 보면서 생활의 나침반으로 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정 박사님의 정중하면서도 따뜻한 정이 배어나는 귀한 말씀에 두서없는 답글 감상을 적었습니다. 감사합니다.
3] 저의 장모님을 위한 정 박사님의 ‘만수무강 기원 시’는 제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감동입니다.
4] 장모님도 불심이 깊으셨습니다. 절에 가셔서 기원 드리시고 우리 가족 건강과 행운을 비는 연등도 다셨습니다. 언젠가 부처님 오신 날, 장모님 뫼시고 공주 신원사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정성을 드리시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평소에는 가까운 정혜사에 다니셨습니다. 정 박사님이 저의 장모님 만수무강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합장과 3배 올려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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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 장천선생! 선생의 수필을 읽고 나니 장모님 생각이 50여년 전 기억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새삼 떠오릅니다.
장모님은 제가 시골에서 살 때 논에 오셨다가 가시는 길이 저의 집 앞을 지나가시면서 몇 차례 만나뵈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때 장모님은 법없이 사실 분이라는 평이 나있던 분이십니다. 장모님이 지금 건강이 불편하시다니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백세에 가까우셨다는 말씀에 저의 숙모님과
거의 동년배이신 것 같습니다. 바르게 키우신 두 따님 덕분에 장수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2) 훌륭하신 사위님과 외손자가 올바르게 활동하심을 보시고 고생하시면서 살아오신 자랑스럼움을 느끼실 것입니다.
장천선생의 깊은 인연으로 그리고 장모님과의 인연으로 저에 대한 과분한 칭찬을 해주신 점이 송구스럽습니다.
앞으로 장모님께 맑은 마음과 바른 마음으로 다음 세상에서는 축복이 있기를 삼보님께 기원합니다. 귀가 듣기에 불편하시다니 전화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습니다. 함께 기도해드립시다.
그리고 장천선생의 주옥 같은 수필로 뜰팡이라는 표현을 보니 시골 집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1] 거동은 어려우시지만 총기는 여전히 좋으셔서 사리 판단도 명확하시고 말씀도 잘하십니다. 청력이 좀 떨어지시다 보니 언어 소통이 예전만 못하십니다. 장모님이 평소 칭송하셨던 정 박사님과 제가 이렇게 따뜻한 인연의 정을 이어가는 모습을 장모님이 아신다면 참으로 기뻐하실 일입니다. 정 박사님이 저희 장모님 50년 전 옛 모습을 기억해 주시고, ‘법 없이도 사실 분’이라고 존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윤승원 2] 제가 이런 삶의 이야기를 쓰면서 마치 잊혀져 가는 과거를 재생하는 작업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온갖 세상 풍파를 다 겪으시고 100년 세월을 살아오신 어른이시니, 자식 손자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말씀이 얼마나 많으시겠습니까. 이제는 자식, 손자들이 평소 어른이 강조하셨던 말씀을 컴퓨터 기억장치에 잘 저장해 놓고 필요할 때마다 재생해 보면서 생활의 나침반으로 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정 박사님의 정중하면서도 따뜻한 정이 배어나는 귀한 말씀에 두서없는 답글 감상을 적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승원 3] 저의 장모님을 위한 정 박사님의 '만수무강 기원 시'는 제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감동입니다. 고맙습니다.
축시의 오자가 나왔음을 발견하고 삭제하고 다시 싣습니다.
3) 한 장의 사진 보다도 더 정겹고, 인간의 애정이 넘치는 멋진 수필이었습니다.
장모님을 위해 시 한 수를 지어올리겠습니다.
90평생 힘든 여행하셨습니다.
바르고 올곧게 살아오신 공덕
자식과 외손주에 큰 힘을 주셨도다.
이런 공덕 크게 크게 자라나
내생의 새 인연 심으셨네요.
건강하게 100세를 넘겨 사시옵소서!
장모님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마음을 비우시라고 삼보님께 지극 정성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낙지리 출신 정구복 합장 3배 올림
장모님도 불심이 깊으셨습니다. 절에 가셔서 기원 드리시고 우리 가족 건강과 행운을 비는 연등도 다셨습니다.
언젠가 부처님 오신날, 장모님 뫼시고 공주 신원사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정성을 드리시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평소에는 가까운 정혜사에 다니셨습니다.
정 박사님이 저의 장모님 만수무강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합장과 3배 올려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낙암선생님과 윤승원작가님 사이에 오가는 글들을 잘 읽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연들이 오고가는 것이 보기에도 좋기만 합니다.
한국 최고의 문학지로 군림하고 있는 <월간문학> 617호 (2020년 7월호) pp.186~189에는
윤승원작가님의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가 게재되어 돋보이고 있습니다.
'예'는 전통윤리의 가장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으로 기능하였고
사회가 극도로 변천한 현대사회에 이르서도 공자가 주장하였던 '예'라는 철학은
모든 규범의 기초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개념으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윤리에 대한 새로운 조명이 요구되는 오늘날
두 분의 아리따운 담론이 더욱 아름다운 빛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성남시분당구탄천로95. 424-902 지교헌
귀한 댓글 말씀을 뒤늦게 이제야 보았습니다. 용서하십시요.
'청계산'이라는 필명을 쓰셔서 그렇지, 수필계의 대가 '지교헌 존함'을 기억하는 저로서는
크게 영광스러운 댓글 옥고입니다.
부족한 졸고를 따뜻한 눈길로 살펴주셔서 죄송스러운 마음이 큽니다.
지교헌 수필가님의 작품은 그동안 수필 전문지에서 많이 뵈었던 기억이 납니다.
수준 높은 중량감 있는 수필을 많이 쓰셨지요.
선생님의 옥고를 통해 그동안 많은 공부가 됐습니다.
오랜만에 존경하는 수필가님의 댓글 옥고를 대하고 보니, 반갑고 기쁩니다.
늘 건강하셔서 귀한 가르침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