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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23일,
인간 노무현, 상식이 통하는 곳으로 가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盧武鉉·63)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서거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6시40분쯤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 뒤편 봉화산을 산책하던 중 30m 높이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해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오전 9시30분쯤 운명했다. 노 전 대통령의 시신은
오후 6시30분쯤 봉하마을로 운구돼 마을회관에 안치됐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사건 수사본부장을 맡은 이운우 경남지방경찰청장은 이날 오후 공식 브리핑을 통해 노 전
대통령 서거 사실을 확인하고, 사인은 두개골 골절과 늑골 골절 등 다발성 골절이라고 발표했다.
노무현(盧武鉉,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은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경상남도 김해 출신이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4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
였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사건을
변호하였다.
1988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권유로 13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된 노 전 대통령은 같은 해 실시된
‘5공 청문회’에서 정연한 논리와 날카로운 질문으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1990년 1월 3당 합당 때
김영삼 총재의 권유를 뿌리친 이후 비주류 정치인의 길을 걷다가,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인제
대세론’을 누르고 경선에서 1위를 차지했고, 여세를 몰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2008년 2월 퇴임한 뒤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 사저를 짓고 머물러 온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을 받은 혐의로 2009년 4월 30일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세 번째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이후 딸 정연(34)씨가 2007년 9월 박 전 회장의 돈
40만 달러를 송금 받아 미국 뉴저지주의 아파트를 사는 데 사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는 등 가족들과 측근들에
대한 수사가 이어지면서 정신적 고통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뤄졌으며,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23일부터 29일까지 7일장으로 이뤄졌다.
영결식과 안장식은 29일 경남 김해시 소재 진영공설운동장과 노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봉하마을에서
각각 거행되었다.
반칙과 특권이 없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하늘도 슬피 운다.
"반칙과 특권이 발붙일 수 없는 국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정치를 바로 세울 것입니다. 정치는 사회적 규범을
준수하고 원칙을 지키면서 사회갈등을 조절하고 반영해야 합니다.
사회갈등을 치유하고 공적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정치영역에서
특권과 반칙이 용인된다면 사회와 국가의 기강도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넋을 달래는 진혼제가 고인이 투신한 부엉이바위 아래에서 6월 5일 거행됐다.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이 안치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화산 정토원은 이날 오전 8시께 노 전 대통령이 투신해 발견된
지점에서 10여m 떨어진 공터에 제단을 차려놓고 진혼제를 열었다. 고인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법하는
불교의식인 '착어(着語)'형식으로 진행된 이날 진혼제는 진영 포교당 주지 한파스님의 집전으로 거행됐다.
진혼제에는 유족대표로 노건호 씨가 참석했으며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과 명계남 노사모 전 대표 및 노
전 대통령의 비서진들도 참석해 명복을 빌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유서 전문(全文)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 고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 김대중 전 대통령 추도사
나는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교동에서 독일 《슈피겔》 지와 인터뷰를 하다가 비서관으로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내 몸의 반이 무너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왜
그때 내가 그런 표현을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살아온 과거를 돌아볼 때 그렇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노 전 대통령 생전에
민주주의가 다시 위기에 처해지는 상황을 보고 아무래도 우리 둘이 나서야 할 때가 머지않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돌아가셨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나는 상주 측으로부터 영결식 추도사 부탁을 받고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지 못했습니다.
정부 측에서 반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이없기도 하고 그런 일을 하는 정부에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한 추도사는 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영결식장에서 하지 못한 마음속의 그 추도사를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의 추천사로 대신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노무현 당신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주십시오.
당신은 저승에서, 나는 이승에서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민주주의를 지켜냅시다. 그래야 우리가 인생을 살았던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신같이 유쾌하고 용감하고, 그리고 탁월한 식견을 가진 그런 지도자와 한 시대를
같이했던 것을 나는 아주 큰 보람으로 생각합니다.
저승이 있는지 모르지만 저승이 있다면 거기서도 기어이 만나서 지금까지 하려다 못한 이야기를 나눕시다.
그 동안 부디 저승에서라도 끝까지 국민을 지켜주십시오. 위기에 처해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을 지켜주십시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우리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조문객이 500만에 이르렀습
니다. 나는 그것이 한과 한의 결합이라고 봅니다. 노무현의 한과 국민의 한이 결합한 것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억울한 일을 당해 몸부림치다 저세 상으로 갔습니다. 우리 국민들도 억울해하고 있습니다.
나도 억울합니다. 목숨 바쳐온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으니 억울하고 분한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만든 민주주의입니까? 1980년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해서 박종철 학생, 이한열 학생을 포함해 민주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그런데 독재정권, 보수정권 50여 년 끝에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10년 동안 이제 좀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했는데 어느새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되돌아가고 경제가 양극화로 되돌아가고, 남북관계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꿈같습니다, 정말 꿈같습니다.
이 책에서 노 전 대통령은 “각성하는 시민이어야 산다.”, “시민이 각성해서 시민이 지도자가 될 정도로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말해온 ‘행동하는 양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
각성하는 시민이 됩시다. 그래야 이깁니다. 그래야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 길은 꼭 어렵지만은 않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바르게 투표하면
됩니다. 인터넷 같은데 글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여론조사에서 민주주의 안 하는 정부는 지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위기일 때, 그것조차 못한다면 좋은 나라와 민주국가 이런 말을 우리가 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 여러분,
노무현 대통령은 타고난, 탁월한 정치적 식견과 감각을 가진 우리 헌정사에 보기 드문 지도자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을 사랑했고, 가까이했고, 벗이 되고자 했던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항상 서민 대중의 삶을 걱정하고 그들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유일하게 자신의
소망으로 삼았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부당한 조사 과정에서 갖은 치욕과 억울함과 거짓과 명예훼손을 당해
결국 국민 앞에 목숨을 던지는 것 외에는 자기의 결백을 밝힐 길이 없다고 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알고 500만이 통곡했습니다.
그분은 보기 드문 쾌남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인간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던 것을 영원히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라던 사람답게 사는 세상,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적으로 사는 세상, 이런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뜻을 계속 이어가서 끝내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면 노무현 대통령은 서거했다고 해도 서거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500만이 나와서 조문했다고 하더라도 노무현 대통령의 그 한과 억울함을 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분의
죽음은 허망한 것으로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노무현 대통령을 역사에 영원히 살리도록 노력합시다.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
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배 여러분들이 이어서 잘해주길 부탁합니다.
나는 이 책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가 그런 후배 여러분의 정진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인터뷰하고 오연호 대표 기자가 쓴 이 책을 보니 정치인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후에
국민의 정부와 김대중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책으로 참여정부와 노무현을 공부하십시오.
그래서 민주정부 10년의 가치를 재발견해 계승하고, 극복할 것이 있다면 그 대안을 만들어내서, 결국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고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길 부탁 드립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2009년 5월 29일
15대 대통령 김대중
오열하시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한 이명박…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마치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기사가 있어 소개합니다.
그리고 진실된 마음으로 절을 올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인간 노무현의 죽음이 슬폈습니다” (OhmyNews, 2009.5.28),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42922
…
저는 대통령 노무현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정치적으로 지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보수 정치인에
대한 저의 일상적인 평가였고 자유주의 정치인에 대해 그다지 정치적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진정한 보수정치인이자 때로는 간간이 중도우파적인 사고를 보이며 인간적인
매력을 지닌 대통령이었기에 조금은 미더운 마음 또한 없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충실히 이어 받아 휴전선을 넘어 뚜벅뚜벅 걸어서 북으로 건너간 대통령의 모습은
60년 분단의 낡은 장벽을 상징적으로 허무는 장쾌한 순간이었습니다. 실로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 평화를
진전시킨 그 위대함은 두고두고 기억 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진정한 보수들은 백범 김구
선생처럼 민족을 정말로 생각하고 그를 실천에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는구나, 라고 저는 생각하였습니다.
…
불행한 서해교전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동어로구역설정과 서해 발해만 근처 북쪽 유전개발을 남북이 함께
하기로 결정한 10 • 4(2007) 선언은 대북정책의 백미였음을 저는 통일을 가르치는 도덕교사로서 통절히
절감하였습니다.
민족이 살 수 있는 길이 바로 남북관계의 개선이자 교류 협력의 동반자 관계임을 과감히 설정하고
국제적으로 선언하는 것임을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의 세계질서 속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였
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노무현은 그 때까지 존속했던 한국사회의 낡은 권위주의의 틀을 가차 없이 깨뜨려버리
고 하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든 사실에 저는 절로 고개를 숙여 그 업적을 높이 칭송하였습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으로 인해 일선 기관장들의 권위주의는 상당 부분 사라졌습니다.
…
IT 산업을 세계강국으로 끌어올린 반면에, 부동산 값의 폭등을 초래해 서민의 삶을 아주 형편없이 지치게
하였습니다. 환경문제와 교육문제 등 많은 정책에서 공과가 있었지만 대통령 노무현보다 저는 인간 노무현을
좋아했습니다. 대선 자금 수사에서 정치자금 관행상 드러난 범죄사실에 대해 스스로 잘못하였다고
고백함과 동시에 국민의 신임을 다시 물었던 인간 노무현의 진솔함과 담백함에 저는 감동을 받았습
니다. 한국 정치사상 처음 있는 대통령의 고백이자 용기 있는 자기 성찰이었기 때문입니다.
…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수십 년 부끄러움을 망각한 한국사회의 뻔뻔스러움에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단순한 자살인 양, 비난하고 조롱하는 일부 극우논객들이 없지 않지만
인간 노무현의 죽음은 죄를 짓고도 조금의 부끄러움과 수치심도 없이 뻔뻔하게 살아가는 한국사회
정상배들과 인간 군상들에게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없이 그러면서도 가슴깊이 슬프도록
보여준 사건이 되었습니다.
…
인간 노무현의 죽음을 통해 그 억울한 죽음을 막지 못한 무심한 삶을 성찰합니다. 우리의 무심한 삶이 힘없는
많은 이들의 하소연을 너무 자주 외면해버리고 절망하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무심함이 그들로 하여금 극단적
인 선택을 결행하게 했듯이 우리는 당신을 그렇게 보내버렸음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괴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조롱하고 형편없는 인간으로 발가벗긴 비열한 수구언론들의 행태를 한없이 경멸합니다.
나아가 시대의 불의함과 비열한 권력에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더 나아가 수치심을 모르고
물신주의에 푹 빠져 이중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한국사회의 얄팍함과 그들의 2007 정치적 선택에
터져버릴 것 같은 분노를 느낍니다.
...
◆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사건
2004년 노무현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한나라당이 다수를 차지하던 국회는 새천년민주당의 주도 하에 그를
탄핵하였고, 이로써 헌정 이후 사상 처음으로 탄핵된 대통령으로 낙인 찍혔다.
2004년 3월 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민주당이 고발한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지지발언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
이 선거중립 의무 위반이 있다고 인정하고 선거중립의무 준수요청을 했다. 민주당은 이 조치를 근거로 노무현
이 선거법 위반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면 탄핵을 발의하겠다며 야3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를 추진
하기 시작했다.
같은 달 그의 형인 노건평이 대우건설 사장 남상국으로부터 청탁성 명목으로 뇌물을 수수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노무현은 언론 브리핑에서 "대우건설의 사장처럼 좋은 학교 나오시고 크게 성공하신 분들이
시골에 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가서 머리 조아리고 돈 주고 그런 일 이제는 없었으면 좋겠다"면서 남상국
을 질타했고, 2004년 3월 11일 남상국은 한강에서 투신했다. 이 사건으로 노건평은 유죄가 인정되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남상국의 자살이 노무현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을 펴면서 노무현이 사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송영길 최고위원은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사건의 본질에 상관
없이 무조건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을 마녀 사냥하는 언론의 태도에 대해 비판하였고,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
을 통해 자신의 형에 대한 인사청탁에 대해서 관련된 당사자의 실명을 거론하며 공개적으로 비난한 부분에
대해서 적절치 못한 행동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 당시 송영길 의원은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탄핵반대투쟁
에 참가하였다.
3월 12일, 대한민국 국회가 찬성 193표, 반대 2표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켰다. 그로 말미암아
노무현의 대통령 직무 수행이 정지되고, 고건 국무총리가 직무 권한 대행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노무현의 탄핵은 국민들의 불만을 키우는 요인으로 적용되었다. 탄핵 당일인 3월 12일부터 3월 27일
보름 동안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탄핵무효 부패정치 척결을 위한 범국민행동'(약칭 탄핵무효 국민행동)
이 주도하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 무효를 주장하는 촛불 집회가 열린다. 13일 날에는 가장 많은 인파가 촛불
을 들고 탄핵 무효를 주장했는데, 주최 측 추산 10만, 경찰 추산 5만 명의 인파가 모였다. 한편 80여 개의 보수
단체로 이루어진 '바른선택 국민행동'이 주도하는 탄핵 찬성 집회도 3월 27일에 2000여 명(경찰 추산)이 운집
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후 한나라당을 비롯한 보수세력들은 국민들의 반감을 사고 말았다. 이 영향으로 '정신적인 여당'인 열린우리당
이 탄핵 후폭풍으로 지지도가 크게 상승하였고, 4월 15일에 치러진 17대 총선에서 단숨에 152석을 차지해 제1당
이 되었다. 이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기각했다. 그러나 헌법재판관들의 개별
의견은 공개되지 않았다.
◆ 인간 노무현
• 노무현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했던 그의 친구 중 한 명은 고등학교 때 노 전 대통령의 단짝이 빵을 하나 사서
노 전 대통령한테 나눠 먹자고 했었는데 ''반씩 먹으면 둘 다 배고프니 니가 다 먹어라. 나는 배고픈 거 잘
참는다"라고 했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보였다.
• 종교 이력이 다소 특이하다. 사시를 공부하던 시절에는 집 근처의 절에서 주로 공부했다고 전해지며, 불경도
틈틈이 외웠다고 한다. 이후 변호사 시절에는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으며 '유스토'라는 세례명을 부여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바쁜 일정 때문인지 신앙 생활은커녕 성당도 몇 번 가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대통령
시절에는 종교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채 프로필에도 '무교'라 적혔지만, 불심이 깊은 영부인을 따라 불교적
인 활동을 몇 번 벌인 적은 있었다. 참고로 투신 자살하기 직전 근처에 있던 사시를 공부했던 사찰에서 위패에
예를 표하기도 했다.
• 상당한 골초였다고 전해진다. 가난했던 고시생 시절에도 하루 2갑씩 피웠을 정도였고 생애 문단에도 담배가
몇번 언급되었듯이 담배와 관련된 일화도 제법 전해질 정도. 사망하기 직전 경호원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담배 있나?" 였다고...
• 1988년 7월 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말이 상당히 유명하다. 5월 23일 사망 이후 회자되었다.
“존경하는 의원 여러분! 그리고 국무위원 여러분!
부산동구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노무현입니다.
국무위원 여러분, 저는 별로 성실한 답변을 요구 안 합니다. 성실한 답변을 요구해도 비슷하니까요.
청년 학생들이 죽어가는 것은 감옥에 가서 참회해야 될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온갖 도둑질을 다 해 먹으면서
바른 말 하는 사람 데려다가 고문하고 죽이는 바람에 생긴 일이니까 그 사람들이 임명한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에게 무슨 대책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물으면 제가 그르지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 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와 농민이 다 함께 잘 살게 되고 임금의 격차가 줄어져서 굳이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는다 할 지라도 그
리고 높은 자리에 안 올라가도 사람 대접 받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면...”
• 백혈병으로 위독한 상태였던 한 학생이 퇴임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만나고 싶어했고, 담당교사가 사람사는
세상 홈페이지에 이런 사연을 올리면서 결국 만남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학생에게 '
의지의 승리를 기원하며 ' 라는 자필 사인을 건네주며 쾌유를 기원해주었다. 그러나 학생은 악화되어가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여 2008년 10월경 세상을 떠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8개월 뒤 사망한다. 그리고, 죽은
학생의 담당 교사들이 노 전 대통령과 이 학생의 만남을 담은 앨범을 고인의 영전에 바치면서 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 조선일보를 배달하던 신문배달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하기위해 도움을
건네줄 변호사들을 찾았지만, 서슬퍼런 조선일보의 기세에 눌려 아무도 나서서 이들을 도와주지 않았다. 이때
노무현이 발벗고 나서며 이들을 도와준다. 직접 나서서 신문사 지국을 상대로 소송을 거는 등, 3년간이나 이
일에 매달린 끝에 승소하여 그 결과 신문배달원들의 근로조건이 나아지게 됐다. 이때 조선일보 기자가 노무현
을 찾아와 이 일에서 손을 떼라고 협박을 했지만, 노무현은 기자면 기사나 잘쓰라고 받아치면서, 이때부터
조선일보와 노무현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일보는 언제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악의적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비난하고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80년대 안기부에 의해 문제변호사 4인 중 1명으로 찍혀있던 상태였다. 이때 감시역할을
맡은 안기부 직원에게 노무현은 광주항쟁을 다룬 비디오나 기록집을 보여주고 노동 • 학생운동과 관련된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 안기부직원의 기관원 의식은 무뎌져갔고, 노무현 변호사와는
서로 애환을 챙기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고 한다. 훗날 이 안기부 직원은 노무현 대통령후보의 경선, 대선
캠프에 정책특보로 합류한다.
• 훗날 부림사건의 피해자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을 참배하며 고마움을 전했고, 2014년 2월 13일 부림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무죄선고가 나온 뒤 "무엇보다 오늘의 이 무죄 선고는 33년 전 저희를 위해 헌신적으로
변호했던 노무현 변호사님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것이 어찌 회의입니까? 이의가 있으면 반대토론을 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도 있습니까?, 3당 합당에 반대했던 당시의 노무현
초선의원.
5공 청문회에서 증인을 질타하는 노무현 의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
비굴하지 않은 노무현 (상) 그러나 국민 앞에는 항상 섬기는 자세로 (하)
한나라당은 2004년 2월 27일 국회 의사당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 불법선거 규탄` 집회를 열고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불법 선거개입과 관권선거를 중단하지 않으면 대통령 탄핵 등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쓰레기장이 된 국회의사당 앞)
퇴임하시는 노무현 대통령
그는 비굴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뉘우침 없이 끝없이 군림하고자 하는 자들의 오만한 모습.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