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가을 / 차재문 (2022. 10. 경남)
세상 곳곳이 풍경이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보면 깊은 산세를 등 진 오지 산중마을을 만난다. 예전부터 지리산은 산과 강으로 에워싸인 육지의 섬이지만 억척스럽게 버텨온 사람들이 거주한 덕분에 세상과 단절되지 않고 있다. 마을 정자 쉼터에서 잠시 허리를 굽힐 수 있고 어쩌다 만난 촌로는 마을과 산 지명의 유래를 구수하게 전해주기도 한다. 몇 년 사이에 들어선 도시 아파트 단지와 다르게 유서 깊은 마을인 셈이다.
며칠 전에 추석이 지나갔다. 도시 부근의 논에도 황금 벼들이 고개를 숙였고, 풀잎에 달린 이슬은 영롱했다. 벚나무 등에 붙어 울어대던 매미 소리도 멈췄다. 가로수 이파리를 푸르게 했던 여름이 떠나려는 것이다. 그러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면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려면 둘레길이 제격이다. 나는 그때가 되면 가을이 지나가는 지리산 풍경을 잊지 못한다.
가을이 되면 기온 차가 심한 지리산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 하룻볕 무서운 줄 모르는 풀들이 비를 뚫고 논두렁을 덮으면 논과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풀들이 다투어 꽃을 피우고 논 쪽으로 영역을 확장한다. 가을 햇살은 풀잎 속을 인정사정없이 파고 들지만 항복하는 풀은 풀이 아니다. 붉은 해가 서산에 걸칠 때쯤이면 숨 고르기를 마친 풀들은 밤새 이슬을 모은다. 아침 해가 떠오르며 풀잎은 지난밤에 저장해 놓았던 이슬을 쥐어짜면서 햇볕을 버틴다. 이것만으로도 지리산 가을의 정취를 즐길 수 있다.
중가을로 접어들면 숲속 새들이 사랑타령을 부르면서 날아다닌다. 단풍은 산바람에 흩날리며 신세타령을 하고 세속의 길손은 흥얼거리며 덧없는 인생타령을 한다. 새들은 입동이 오기 전에 서둘러 집을 짓고 알집을 품는다. 늦가을 나무도 이에 질세라 수피 안쪽의 나이테에 당糖을 저장시킬 준비를 한다. 모두 눈물겹다. 덩달아 길손도 마음을 비우려고 숲길을 걸으면서 붉고 노란 나무들을 바라본다. 잠이든 듯한 숲을 그윽하게 바라만 보면 소유욕에 저당 잡힌 빗장이 저절로 풀린다.
늦가을이면 지리산 둘레길은 젊은 빛을 떠나보낸다. 여기서는 아직 계절의 바람과 빛에 민감할지라도 죽음엔 늘 초연하다. ‘받아들인다는 것.’ 살아가면서 당신에게 손을 벌리지 않겠다는 초목의 운명을 지켜보노라면 평소 어른들이 풀을 본받으라고 말했던 말이 떠오른다. 풀과 나무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도록 해주면서 정작 자신은 계절에 맞추어 물들고, 바싹 마르다가 떨어진다. 끝내 흙에 묻힌다. 순명의 그들은 생전에 기득권 없이 살았다. 포기할 게 없으니 살든 죽든 무소유자다.
그런 가을에 산청군 금서면 지막마을에서 평촌마을 가는 길을 걸었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나풀거리고, 하천에 붙은 논 두둑에는 일렬횡대로 선 감나무가 눈인사를 했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왼손으로 가지를 당긴 후 오른손으로 홍시를 뱅뱅 돌려 땄다. 손바닥에 홍시를 얹으니 감의 붉은 광채는 선명했고 푸른 추억은 아련했다. 입이 오므라들도록 홍시를 빨아 먹었다. 감색처럼 눈부신 어린 시절이 다시 다가왔다 사라졌다.
배산임수 마을인 대장(大將)마을을 지날 즈음 마을 골목길에서 털이 풍성한 강아지를 만났다. 강아지는 반가운 몸짓과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마을 안길에 자리 잡은 시골집 대문 옆 외양간에 자리한 강아지집이 천하 명당이었다. 비바람 잠잠하고 햇빛 오래 비치고 빈객을 맞이할만한 곳이었다. 흙벽에 기대어 둘레길 나그네에게 꼬리를 살랑이는데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점심 요기로 준비한 백설기 떡 두 개 중 하나를 적선했다. 마을길을 벗어날 때까지 사람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선견仙犬만이 유유자적 노닐고 있었다.
지리산 둘레길에서는 산 고개를 오를 때보다 하산길이 더 지루하다. 산허리를 감아 도는 자갈길 임도는 지루할 만큼 길게 이어진다. 건너편 달뜨기 능선이 보조를 맞추어 산 그림자를 키우면서 동행해주지만 어둠에 대한 두려움은 어쩔 수 없다. 늦가을 한해살이풀들이 오므라들지만 가을의 전령 구절초는 당당하다. 담백하다 못해 제 색깔의 원형이 눈부시다. 구절초에게 속마음으로 안부를 묻는 것도 운치다. 반갑다고 사랑한다고 연정을 담아 수줍게 인사했다.
종종 하산 길을 터벅터벅 걷다 보면 상록에 가려진 저수지가 시야에 들어오기도 한다. 산 그림자가 드리운 호수를 바라보면 저절로 눈망울이 촉촉해진다. 저수지에 비친 그림자가 고요하여 마치 존엄 존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때만큼 저수지를 에워싼 나목들이 고독한 신비주의자로 보이는 적이 없다.
내가 걷는 둘레길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회갑 년을 넘긴 내 나이도 적지 않는데 두 손으로 가을 햇살을 끌어 모아 영욕의 세월을 견뎌온 나무에게 위로 삼아 말을 건넨다. 앙상한 나무들도 바람에 부딪치면 “힘을 내자”고 주고받는 터에 나무도 사람의 도리를 아는지라 살갑게 받아줄 것이다. 그땐 무심한 강물도 노거수의 그림자를 받아들인다.
나에게 지리산 둘레길은 내 삶을 확인시켜주는 순례다. 나무가 울창하다고 숲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벌레와 짐승과 풀이 함께 어울려 지리산 숲이 이루어진다.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나무도 풀이 있어야 한다. 삶의 길을 걷다가 풀 섶에 기댄 벌레를 만나면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면서 내가 부끄러울 때가 바로 이 순간이다.
첫댓글 대장마을의 털 강아지가 금세 꼬리를 흔들며 다가올 것 같습니다.
차재문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
감사합니다. 지리산자락의 뭇생명들과 질문하고 교감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겠습니다.
지리산 둘레길을 속속들이 글로 풀어내신 선생님
또 다른 작품도 기대됩니다
신인상 축하드립니다 ~^^
조인혜 선생님의 격려에 힘이납니다. 김해수필의 든든한 동반자이신것 자랑스럽습니다. 내일 기쁜마음으로 뵙겠습니다.
‘받아들인다는 것.’ 살아가면서 당신에게 손을 벌리지 않겠다는 초목의 운명을.......함께 새깁니다.
차재문 선생님의 행보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