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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頭崙山 大芚寺 山門
진입로 어귀에는 1993년 유선여관일대에 조성된 상가를 집단시설지구로 이전하면서 세운 山門이
우뚝 서 있다. 문에는 "頭崙山大芚寺"라는 옛 이름을 되살린 현판이 걸려 있어
여기서부터 사찰의 경역이 됨을 알려 준다.
대개는 사문(寺門)이나 산문(山門)이 외줄 기둥에 지붕을 얹은 일주문 형식인데 비해
이곳 산문은 넓은 2차선 포장도로를 가로지르는 높다란 집을 구성하기 위해
기둥을 둘씩 짝지어 세운 사주문(四柱門) 형식이다.
* 일주문(一柱門)
일주문 후면
일주문 후면에는 '선림교해만화도장(禪林敎海滿華道場)이란 현판이 있어
이곳이 禪宗과 敎宗 , 兩宗의 불도량임을 나타내고 있다.
禪林敎海滿華道場은 서산대사 창허당 유정이 저술한 <선가귀감>에서 말한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에서 연유한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숲과 바다같이 자리잡은 사찰 이라는 뜻
일주문은 한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문이 아니라 한일자선상에 기둥이 놓여진 문이다.
속계에서 수미산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인 일주문은 세속의 잡다한 번뇌를 떨치고 一心으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성을 가진다.
* 부도밭
일주문을 지나면 곧 부도밭을 만난다. 다른 절과는 달리 나지막한 담장을 두르고 문도 있다.
담장 안에는 55기의 부도와 14기의 탑비가 여러 줄로 도열해 있다.
이들 부도에는 조형미와 세련미는 없으나 종형이나 팔각원당형 등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부도를 감상할 수 있다.
▲ 맨 뒷줄에 자리한 '淸虛堂' 서산대사의 부도는
부도밭의 다른 부도들과는 달리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서산대사(1520 중종15~1604 선조37)의 속명은 최여신, 호는 청허, 법명은 휴정이다.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묘향산에서 살아 사람들은 그를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임진왜란 후 선조 37년(1604)에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한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형스님에게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해남 대륜사에 두라 부탁을 했는데,
불가에서 가사와 발우를 전하는 것은 자신의 법을 전하는 뜻이 된다.
외진 대둔사를 택한 이유는 '세 가지 재앙이 들지 않는 곳'이요,(三災 不入之處)
'만세토록 허물어지지 않는 땅'이며(萬年不破之地), 종통이 돌아갈 곳'(宗統所歸之處)이기 때문.
서산대사는 유언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을 꺼내서 그 뒷면에 마지막 법어를 적었다.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붓을 놓은 대사는 결가부좌한 채로 입멸하였다. 그의 나이 85세, 법랍 67년이었다.
* 서산대사 부도
서산대사 부도에는 '청허당'이란 탑명이 음각되어 있다.
팔각원당형의 양식을 구비한 석조부도로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고
전체 높이는 2.7m이다. 인근에는 1647년(인조 25)에 세워진 서산대사의 탑비가 있어,
부도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 서산대사의 부도는 양식상에서 몇 가지 특수한 점을 살필 수 있다.
첫째) 옥개석의 전각에 표현된 용두(龍頭)이다.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옥개석 전각에는
귀꽃이 배치되는 것이 통식이다. 그런데 이 부도에서는 1면에 다람쥐를 배치하고
나머지 7면에 용두를 배치하는 특이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전각에 용두가 배치되는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이같은 구도는 단순한 양식의 변화가 아니라
교리적인 배경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완전한 상륜부를 구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부도의 상륜부는 통식의 부도와는
다른 면을 보이고 있으나, 방형과 원형의 조화를 통해 안정감을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사실적인 용을 조각함으로써 다른 부도에서는 예를 찾을 수 없는 특이한 점을 드러내고 있다.
셋째)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옥개석에 표현된 기와골, 내림마루, 암,수막새기와, 겹처마 등의 목조건축 양식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같은 양식의 부도와 비교해 볼 때 조금도 손색이 없다.
▲ 거북과 연꽃
▲ 게와 모란꽃
▲ 조개와 국화꽃
넷째) 중대석 및 상대석에 표현된 각종 동물상의 표현을 들 수 있다.
중대석 네 면에는 화문을, 나머지 면에는 각각 동물을 양각했는데 사자를 표현한 것으로 짐작된다.
상대석에도 통식의 연화문과 함께 거북, 연꽃 ,게, 조개를 양각했는데, 이같은 조형은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사례이다. 특히 게와 조개 등으로 보이는 문양이 등장하는 것은
바다가 가깝다는 지역적 특수성이 조형물에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가 의발(衣鉢)을 전하고부터 대둔사의 사세는 크게 일어났다.
서산대사라면 흔히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서 활약한 것만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禪과 敎, 더 나아가서는 좌선, 진언, 염불, 간경 등 여러 경향으로 나뉘어 저마다 자기들의
수행만을 최고로 치던 당시 불교계에서 "선은 부처의 마음이며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라고 갈파하며
선과 교가 서로 다른 둘이 아님을 주장, 선교 양종을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분이다.
대둔사는 그의 법을 받아, 근세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와 13분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자리잡아 왔다.
* 초의선사 부도와 탑비
▲ 맥이 끊어져 가던 차(茶)문화를 일으켜 <동다송(東茶頌)> 같은 명저를 남긴
초의선사의 부도는 특별한 조각없이 단아하다
초의선사는 불문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그 속에 머물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사상을 설렵했다.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등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것만이 선이 아니며
일상생활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초의선사는 茶와 禪을 하나로 보아 '동다송'에서 '茶禪一味'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사상은 선 사상과 다선일미 사상으로 집약되는데, '다선일미 사상'이란
茶 안에 부처님의 진리와 명상의 기쁨이 녹아있다는 것이다.
탑신을 짊어지고 있는 거북을
이토록 간결하게 조각한 고수는 누구일까!
초의선사(1786~1866)는 전남 무안 삼향 출신으로 속성은 張씨였고 법명은 의순(意恂),
법호는 草衣다. 대둔사의 13대 종사의 한 사람인 대선사였고. 겨우 명맥만 유지되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 茶聖으로 불린다. 어릴 때 물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6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다.
당시 운흥사는 고려 때부터 이름난 '차산지'로 국가와 사원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다소마을이 있어
초의와 차의 인연은 이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운흥사에서 4년 동안 수행을 마치고 해남 대둔사로 가게 된다.
나주 운흥사는 대둔사의 말사로서 대둔사 고승의 출입이 잦았던 곳이다. 대둔사 10대 강사인
'완호 윤우'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草衣)'라는 법호를 얻었다.
대둔사가 처음 생긴 것은 언제일까? 신라 법흥왕 때(514) 아도화상이 창건했다, 또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국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나라 안에 절 500개를 짓는 것이 좋다고
상소할 때 대둔사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두 설이 있었으나 <대둔사지> 자료를 모아 검토한
혜장선사는 두 설을 모두 일축하고, 대둔사 창건 년대를 신라 말로 보았다.
지금 절 안에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응진전 앞 삼층석탑과 북미륵암 마애불, 북미륵암 삼층석탑이
모두 나말여초의 것임을 보더라도 대둔사는 나말여초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대둔사 사적비
부도밭을 지나면 대둔사 사적비, 만폭교(피안교) 중건비, 대웅보전 중수비 등
여러 종류의 비석이 무리지어 있다. 대둔사 사적비에 전해져 내려 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대둔사 사적비는 원래 해탈문 안에 있었는데 당시 잘못된 풍수설을 믿었던 힘센 세 분의 스님이
몸통과 받침돌과 지붕돌을 각각 나누어 들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는 것이다. 또한 사적비의 좌향을
마치 거북이가 사적비를 짊어지고 절 밖으로 나가는 형상으로 놓았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거북머리를 연동尹씨 종가로 향했다고 하는데, 이는 대둔사에서 힘센 장군이 태어나는 것을
염려한 윤고산이 이 사적비를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사적비의 좌향마저 연동쪽으로 향하게 하여
대둔사의 기세를 꺾기 위한 계략이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지방의 유교 양반가와 조선 불교의 종원 위치에 있는 대둔사의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당시 절의 주지였던 지산스님이 고재석스님에게 이 같은 전설을 확인한 후
사적비의 좌향을 대웅전 쪽으로 돌려놓았다고 한다.
* 해탈문(解脫門)
원교 이광사의 글씨
대둔사 중심곽은 절의 중문인 해탈문 언저리에서 시작된다. 문의 중앙 통로에서 바라보면
그 축이 북원 쪽에 맞추어졌음을 알 수 있다.
대둔사는 두륜산의 호법신장을 사천왕으로 삼기 때문에 해탈문에
사천왕상을 모시지 않고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를 모셨다.
흰 코끼리를 탄 보현동자는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향한 실천행의 의지, 즉
행원(行願)을 상징하는 보살이다
사자를 탄 문수동자는 부처님의 지혜를 대변하는, 즉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 대둔사의 가람배치
대둔사의 가람배치는 아주 뛰어난 마스터 플랜을 보여준다. 두륜산 골짝에서 흘러내린 물(금당천)을
경계로 절집 전체를 4구역으로 나누고는 크게 남원(南院)과 북원(北院)으로 갈라놓았다.
大雄寶殿을 중심으로 한 南院에는 法堂과 僧房이 있고, 千佛殿을 중심으로 한 北院에는 講院이 있으며
그 위로 표충사와 부속건물, 대광명전과 부속건물로 절집의 두께를 더하여갔다.
그리하여 낮은 돌담으로 둘러치고 그 사이사이 공간에는 해묵은 老木과 맑은 계곡 그리고 무염지가
자리잡게 하여 산사의 아늑함을 유지하면서도 대찰이 지니는 위용을 잃지 않았으니
그 공간의 경영이 자연을 거스름이 없으며 공간을 낭비한 것도 없다.
대둔사의 호방함과 안온함은 이렇게 이룩된 것이었다.
*북 원 (北院)
해탈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대둔사 가람이 펼쳐진다. 들어가면서 보아 맨 왼쪽,
심진교 건너에 있는 건물군이 북원이다. 어째 저쪽이 북쪽인가 하고 혼동이 일기도 하는데,
보통 절터들이 남쪽을 향하고 있는 데 비해 대둔사의 경우에는 들어가는 입구가 서쪽이다.
그러나 해탈문에서 절 안을 바라보면
중심축이 북원, 대웅전 쪽에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눈썹지붕'을 아시나요? 백설당(왼쪽 건물) 지붕을 보셔요
북원은 심진교-침계루-대웅보전이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르고, 백설당-청운각-대향각이
동서로 놓여 있어 법당 안마당이 협소한 느낌이 든다. 대웅보전 동편에는 범종각, 응진당, 삼신각이
배열되어 있고, 삼신각 앞에 3층 석탑이 있다. 서편에는 약간 뒤물림하여 배치한 명부전이 있다.
* 심진교(尋眞橋)
대둔사의 중심을 가로 질러 흐르는 금당천 위의 심진교(尋眞橋),
이 다리를 건너면 부처님이 계시는 대웅보전에 들어서게 된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진리를 찾아 건넌다'는 의미의 심진교다.
* 침계루(枕溪樓)
원교 이광사의 글씨
이름이 멋지다. 계곡을 베게 삼은 누각, 枕溪樓 !
북원일곽의 정문 역할을 하는 침계루는 심진교 지나 세워진 2층 누각이다.
▲ 침계루의 후면
보통 주불전 앞의 누각은 땅에서 반 층 높이로 된 마루인데 비해 침계루는 완전한 중층 누각으로
하층은 돌담과 판막으로 막은 광이고, 상층 전체가 강당인 건물이다.
현재 침계루의 상층에는 법고와 범종,목어,운판 등 사물(四物)이 봉안되어 있다.
때마침 스님이 법고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강하게 약하게, 자지러지다 느긋하게...지상의 뭇 축생을 위해 법고가 울었다.
법고法鼓는 글자 그대로 '법을 전하는 큰 북'이라는 뜻이다.
곧 불법의 진리로 중생의 마음을 울려 바른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큰북의 양면은 각각 암소와 수소의 가죽을 부착하여 만드는데
이는 음양의 조화, 화합의 소리를 상징한다.
소는 축생이기 때문에 이 북을 치는 것은 땅위로 기어다니는 모든 축생이 마음을 깨쳐
부처님께 나아가도록 인도하고자 함이다. 북채로 북을 두드릴 때
'마음 心'자를 그리면서 두드리는 것 또한 그런 뜻과 이어졌다 할 수 있다.
금당천에서 침계루와 백설당 사이로 오르는 돌계단
침계루의 지붕이 알뜰한 멋을 냈다.
지붕을 개와하면서 버리는 옛 가와들 중 쓸만한 것을 골라 새 기와 중간에 다시 얹었다.
그 많은 낡은 기와들 중에서 일일이 재활용품을 골라낸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계획하고 실천한 분에게 함찬 박수를 보낸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대흥사에는 서예인들의 발길이 잦다. 산세가 아름다운 것도 있지만
서예인들의 큰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원교 이광사의 묵적을 만날 수 있어서다.
이 곳의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은 원교 이광사가 쓴 동국진체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현판은 이광사의 글씨도 글씨지만, 추사 김정희의 일화가 얽혀 있어 다시 한번 보게 된다.
현종 6년(1840) 제주도로 귀양 가던 길에 초의선사를 만나러 대흥사에 들렸던 김정희는
이광사 글씨의 '촌스러움'을 타박하며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내라고 했다. 그로부터 8년 뒤 1848년 12월,
김정희는 63세의 노령으로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가다가 다시 대흥사에 들렸다. 이때 햇수로 9년에 걸친
춥고 서글픈 귀양살이 속에서 인생관이 바뀐 추사는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찾아 걸도록 했다고 한다.
추사 인생의 반전(反轉)은 그렇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법도를 넘어선 개성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그는 외로운 귀양살이 9년에 체득한 것이다.추사 김정희, 그는 분명 영광의 북경이 아니라
아픔의 제주도로 갔기에 오늘의 추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웅보전은 고종 광무 3년(1899)에 불이 나서 다 타버린 후 새로 지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당당한 팔작 다포집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가 있다.
대들보 위를 넘어서 뽑아낸 용머리 조각이 신령함을 더해주고
瑞鳥를 탄 동자들의 비천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기단 모서리에는 쇠고리를 입에 문 어벙한 표정의 돌짐승이 있다.
괘불을 고정시킬 때 쓰는 고리라고 한다.
계단 양쪽 소맷돌에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는 깐깐한 표정의 돌사자가 있다
소맷돌의 돌사자(사자상은 절을 수호하는 의미로 조각함)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이 사자상은 일제 때 대웅보전 축대를 다시 쌓으면서 조각했는데, 이 작업을 맡은 일본인 석공의 얼굴을
닮아서 주지스님이 크게 화를 내는 바람에 일본인 석공은 품삯도 못 받고 야반도주 했단다.
하단의 2단 궁창널을 치장한 빛바랜 '안상'과 '태극무늬'가 세월을 말해준다.
대웅전 외벽의 사천왕도이다. 사천왕이 잡고 있는 지물과 그들의 방향에 대하여
두 가지 설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그 답은 '아니오'란다. 경전의 도상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한 오류라고 바로잡기를 권하는데 통일된 의견이 쉬 나올 것 같지 않다.
아무튼 여기에 두 가지 설을 다 소개해 보겠다.
- 잘못된 사천왕의 지물-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칼을 쥐고 있고 /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여의주를 들고
서방-광목천왕(廣目天王)은 보탑을 들고 /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비파를 들고 있다
- 바르게 정리된 사천왕의 지물-
동방-지국천왕(持國天王)은 비파를 들고 있다 /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오른손에 칼을
서방-광목천왕(廣目天王)은 왼손에 여의주 또는 오른손에 용(뱀, 밧줄)을,
북방-다문천왕(多聞天王)은 왼손에 보탑 또는 오른손에 삼지창(당(幢기당)을 들고 있다.
海士 金聲根(1855~1919)의 글씨
대웅보전 뜰의 동서에는 승방인 세진당(洗塵堂)과 백설당(白雪堂)이 있다.
현재는 강당으로 쓰고 있는 백설당 지붕 밑에는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가면서 써 주고 간
무량수각 현판이 백설당 현판과 나란히 걸려 있다.
나는 백설당 앞에서 조선의 두 명필이 보여준 예술의 정수를 다시금 새겨보곤 한다.
원교의 글씨체는(대광보전, 침계루) 획이 가늘고 빳빳하여 화강암의 骨氣를 느끼게 하는데,
추사의 글씨는(무량수전)는 획이 살지고 윤기가 나는 상반된 미감을 보여준다.
미술 평론가 유홍준은 두 명필의 글씨를 두고 "쉽게 말해서 원교체는 손칼국수의 국숫발 같고,
추사체는 탕수육이나 란자완스를 연상케하는 그런 맛과 멋이 있는 것"이라 했다.
* 삼층석탑(三層石塔)
응진전 앞 삼층석탑(보물 제320호)은 높이 4.3m의 단아한 통일신라 때의 탑으로
대둔사에 남아 있는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에 속한다.
1967년 석탑을 해체 보수하던 중 삼층 기단에서 금동여래입상 1구가 나왔다
대흥사이던 사찰 이름이 대둔사로 되었다가 다시 대흥사로 되었건 말건
청운당 울타리의 능소화는 연년세세 곱게곱게 피어난다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1705~1777)
원교 이광사는 본관은 전주,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수북(壽北)이며 왕손으로서 정종의 10남 덕천군의 후손이다. 조부 이대성은 호조참판, 부친은 대사헌을 지낸 명문 출신이다. 당쟁으로 영조의 즉위와 함께 노론정권이 세워지자 소론세력인 원교의 부친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고 거기서 죽고 말았다. 역적의 후손으로 벼슬길이 막힌 원교는 재야에 묻혀 학문과 서예에 정진한다.
그러나 고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주벽서사건이 일어나 이 사건의 주인공인 윤지와 그의 아들인 윤광철은 능지처참되었으며 원교는 윤광철과 단지 친하다는 것만으로 하옥되었다. 이에 놀란 그의 부인은 3남매를 남기고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영조의 감형으로 원교는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떠난다. 자살로 목숨을 잃은 부인을 애도하면서 ‘도망’이란 시를 남긴다. 이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의 애 뜻한 정을 저승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가슴 아파하는 원교의 뜨거운 눈물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 도망(悼亡, 죽은 부인을 애도함)*
내가 비록 죽어 뼈가 재가 될지라도 /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내가 살아 백 번을 윤회한대도 / 이 한은 정녕 살아 있으리
천지가 뒤바뀌어 태초가 되고 /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연기가 되어도
이 한은 맺히고 더욱 굳어져 /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지리라
내 한이 이와 같으니 / 당신 한도 정녕 이러하리라
두 한이 오래토록 흩어지지 않으면 /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 있으리.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이어지는 18세기 초에는 한국 서화사에서 민족 특유의 자각이 싹트던 시기였다. 서예에는 동국진체가, 그림은 정선(1676~1759)으로부터 동국진경(東國眞景) 화풍이 전개된 때였다. 가장 조선색이 나는 민족의 진정한 글씨체인 동국진체는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1662~1723)와 서화가이며 옥동의 친구인 공재 윤두서(1668~1715)의 합작으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공재의 이질인 백하 윤순(1680~1741)에게 전수된 후에 원교가 이를 완성했다고 한다. 이 서체는 중국 서예와의 차별성을 확보하기 위해 민족 고유의 정서와 감정을 토대로 조선적인 자연스러운 조형성을 추구했다.
원교는 “글씨란 자연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는 서예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 획을 내려 그을 때도 삼과절필(三過折筆)이라 해서 세 번을 멈추었다가 써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글씨에 힘이 들어간다. 그의 글씨는 곡선의 형태를 띤다. 그는 자연물 중엔 직선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네, 글씨 또한 구불구불하고, 가다 멈추고 다시 이어져서 자연의 물상을 담은 글씨를 쓰고자 했다.
원교는 부령, 신지도 등에서 23년간의 유배형을 살면서 사랑하는 부인도 잃고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겠다는 자세로 우리의 고유서체인 동국진체를 완성하였다. 신지도에 귀양 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 사찰에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많이 있다.
첫댓글 두륜산 대흥사를 네 편으로 나누어 정리해 여기 두 번째 작품을 올립니다. 답사 가실 분들을 위하여 설명을 하다보니 너무 잔소리가 많아졌네요. 지루하더라도 끝까지 보시면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크고 아름답고 유서깊은 사찰이군요. 지나는 길에 한번 들려봐야겠습니다.
서울에서 가기는 먼 길이지요. 땅끝에 있는 미황사와 대흥사를 함께 보도록 1박 2일을 잡아보세요.
일부러라도 한번 대흥사 친견을 해야 할 것이네요. 이토록 많은 선현들의 일화가 숨겨진 귀한 장소를...이렇듯 상세히 소개해 주신 이민혜 싸부님께 절~~드림다. 참 노고가 많으셨어요~~~감솨, 땡큐, 땅케, 시에씨에, (또 뭐 읍남?) 아 아리가토 고자이마시타~
에궁~ 선생님 덕분에 각국 언어에 통달하겠어요. 감솨감솨합니다.
여혜당님 여행기를 볼 때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습니다. 60장에 가까운 사진을 정리하는 일도 힘들텐데 거기에 상세하고 유익한 정보까지 제공하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덕분에 편안하게 앉아 가서 본 것보다 더 속속들이 구경했습니다. 특히 서산대사부도가 압권입니다. 3편을 기대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건강이 좋지않으신데도 빼놓지 않고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흥사는 동아와 성천에서 몇 번 갔던 절이라 무엇을 보여줘야 되는지 대충 알기 때문에 4편으로 나누었어요. 사진을 배우며 다녔던 절집을 한군데 씩 정리해 보려구요. 우선은 느낌을 적지않고 설명 위주로 나가고 있습니다.